상단여백
HOME 말씀의 잔치 Junger Prediger
어느 한 무의식적 혐오주의자의 회개집단에 대한 혐오(요한복음 1:45-46)
이성훈 목사(명일한움교회) | 승인 2020.05.17 17:29
45 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 이르되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 46 나다나엘이 이르되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빌립이 이르되 와서 보라 하니라

코로나 이후 우리 삶의 많은 부분은 바뀌어 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최근 벌어진 몇몇 상황들을 보면, 코로나 이전이나 이후나 변함없이 벌어지고 있는 일들이 있습니다. 특정 집단에 대한 혐오를 표출하는 모습들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사건을 기념하는 절기이자, 5.18민주화 운동을 기념하는 주일에 우리는 누군가에 대한 혐오의 감정을 품고 있지는 않은지, 혐오하지 말아야 할 존재까지도 혐오하고 있지는 않은지 함께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촌동네 나사렛에서

요한복음에는 공관복음서에 나오지 않는 한 인물이 등장합니다. 바로 오늘 본문에 나타난 나다나엘입니다. 그가 누구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예수님께서는 그를 ‘속에 간사한 것이 없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 평가하셨습니다.

나다나엘의 존재도 요한복음의 특이한 점이기는 합니다만, 나다나엘이 처음 하는 말도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빌립은 자신의 지인인 나다나엘에게 나사렛에서 오신 예수님을 전합니다. 그때 나다나엘은 빌립에게 말합니다.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나다나엘의 이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정확한 의미를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분명 나사렛이라는 지역에 대해 폄훼하는 발언인 듯 하지만, 왜 나사렛을 좋지 않게 말하는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다만 우리는 여러 정황에 따라 그 의미를 추정해볼 따름입니다.

가장 단순하게 나사렛이 워낙 촌동네였기 때문에 이렇게 말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는 예수님께서 고향 나사렛에서 배척당하신 이야기가 나타납니다. 예수님께서 나사렛 회당에서 말씀을 전하시자 사람들은 이야기합니다. “이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고 어머니는 마리아이고, 형제는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가 아니냐?”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의 저자가 이야기를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면, 나사렛이 얼마나 작은 동네인지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얼굴만 보고도 그가 어느 집에 사는지, 부모의 이름이 무엇인지, 형제는 몇 명이 있고, 그 형제들의 이름이 무엇인지까지 다 알고 있을 정도로 작은 동네입니다.

▲ 나다나엘을 부르시는 예수 ⓒGetty Image

요한복음 21장에 보면 나다나엘은 가나 사람이라고 전하는데, 가나의 혼인잔치 사건으로 인해 저희에게도 친숙한 지명입니다. 가나는 나사렛에서 멀지 않은 동네입니다. 그렇기에 나다나엘은 나사렛이라는 동네가 얼마나 작고 보잘 것 없는 동네였는지 알아서 이렇게 말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렇게 본다면 나다나엘의 말은 ‘저렇게 작은 촌동네에서 선지자가 나올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 됩니다. 하지만 이런 결론은 바르지 않아 보입니다. 구약성경의 예언자들도 촌동네 출신이었거나, 도시 밖에서 온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따라서 단지 시골 출신이었다고 선지자의 자격을 줄 수 없다는 표현은 맞지 않아 보입니다.

전쟁과 민란의 지역에서

또 다른 이유를 생각해볼 수도 있습니다. 나사렛은 이스르엘 평원 근처에 위치해 있습니다. 이스르엘 평원은 구약성경에 자주 나타나는 지명이며 많은 전쟁이 벌어졌던 지역입니다. 구약성경에 이스르엘이라는 지명으로 불리지 않았다 하더라도, 몇몇 경우에 지역을 따라가 보면 이스르엘 주변인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최후의 전쟁, 아마겟돈의 무대도 바로 이곳입니다.

과거로부터 전쟁이 많이 일어났다는 사실은 그 지역이 전투를 벌이기에 좋은 지역임을 알게 합니다. 그래서인지, 예수님 시대에 일어났던 세 개의 큰 민란 중에서 히스기야의 아들(또는 손자)이라 칭하는 유다가 벌인 민란이 이 지역에서 일어났습니다. 정확하게는 나사렛 북부에 위치한 세포리스가 이들의 거점이었습니다.

세포리스는 헤롯대왕이 군사적 거점으로 만든 갈릴리의 수도였는데, 헤롯대왕 사후에 갈릴리의 수도는 디베랴로 바뀌게 됩니다. 디베랴는 티베리우스 황제를 위해 건축한 도시입니다.

세포리스에서 벌어진 민란은 시리아 총독 바루스에 의해 신속하게 진압되었는데, 이때 바루스에 의해 세포리스는 잿더미가 되었습니다. 만약 세포리스에서 벌어진 소요가 군사들에 의한 전쟁이었다면, 그 군사는 외부에서 유입된 사람들일 가능성도 있습니다. 하지만 민란은 다릅니다. 민란은 보통 그 지역 사람들이 모여서 발생하게 마련입니다.

그렇다면 세포리스에 모였던 민중들은 나사렛, 가나를 비롯한 이스르엘 평야 주변 지역의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로마군이 세포리스를 진압한 후에 주변 지역도 함께 정리하였을 가능성은 큽니다. 또 이 과정에서 수많은 약탈 행위가 벌어졌을 가능성도 큽니다. 간혹 예수님을 로마 병사의 사생아라고 말하는 과격한 학설을 접하실 수 있을텐데, 그 학설의 배경이 로마에 의한 세포리스 진압 사건입니다.

이런 배경에서 보았을 때, 나다나엘의 반응은 두 가지 측면에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만약 나다나엘이 민란에 반대하는 입장이었다면, 민란 따위나 일으키는 지역에서 어떻게 선한 사람이 나올 수 있냐는 질문이 될 것입니다. 반대로 그가 민란에 동정적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면, 아직 민란 진압의 상처가 아물지도 않은 황폐한 곳에서 어떻게 선지자가 나타날 수 있겠냐는 질문이 됩니다.

속한 집단으로 인해서

예수님에 대한 나다나엘의 평가는 예수님이 속한 집단, 지역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그가 어떤 평가를 내리고 있던 나사렛이라는 이름으로 인해 그는 예수님을 어떤 사람이라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직접 만난 나다나엘은 자신의 잘못을 바로 깨닫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향해 고백합니다.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 집단에 의한 평가가 아닌 예수님 개인을 만난 순간 그는 예수님에 대한 제대로 된 평가를 내릴 수 있었습니다.

최근 사회를 보면 많은 경우에 사람들을 개인으로 바라보지 않고, 집단으로 바라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남성과 여성이라는 집단을 나누고 남성에 의한 범죄가 일어나면 마치 남성 모두가 범죄자인 것처럼 대하는 상황도 있었습니다. 일부 남성들이 여성들을 향해 비판적으로 외쳤던 ‘나도 가해자입니다.’라는 문구가 이를 분명히 보여줍니다.

이를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라고 말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몇 가지의 상황만으로 개인을 어떠한 집단에 몰아넣고 당신은 그 집단에 속하는 특징을 지녔거나, 그 집단 사람들과 유사한 언행, 태도를 지녔기 때문에 당신은 잘못되었다고 말합니다.

이태원 클럽에서 일어났던 코로나 확진 사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사태로 인해 20대 전체가 잘못되었다고 말하거나 그곳이 게이 클럽이었기 때문에 게이는 전부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이들을 상당히 많이 보았습니다. 일부 기독교 언론과 교회들은 이때를 기다렸다는 듯이 게이들에 대한 비판적인 이야기를 쏟아내었습니다.

정의기억연대 자체에 대해 이용수 할머니가 지적한 내용은 어느새 친일과 반일의 프레임으로 바뀌어버렸고, 정의연을 비판하면 친일 세력이 되어버리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몇몇 국회의원이 지적한 대로 이런 방식이면 위안부 피해자이며 이를 알리기 위해 수많은 노력을 해오신 이용수 할머니 조차도 친일 세력이 되어버립니다.

사람들을 어떤 집단으로 분류하고 그 집단의 성향을 규정한 후에 그 사람을 판단하는 행태가 어제오늘의 일은 아닙니다. 우리나라는 너무 오랫동안 지역감정에 휘둘려 왔기 때문에 사람을 이렇게 대하는 경향이 더욱 큽니다. 경상도 사람은 이러 이러 하다거나 전라도 사람은 이러 이러 하다고 말합니다.

이번 총선 이후 경상도 지역에서 미래통합당이 대부분 국회의원이 된 상황을 보면서, 어떤 이들은 경상도는 여전히 글러 먹었다고 말합니다. 경상도 사람 전체가 미래통합당을 지지한 것은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전라도는 여전히 민주당만 찍는다고 말하지만, 전라도 사람 전체가 민주당에 투표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결과만을 가지고 그 집단의 성향을 규정하고, 그곳에 속한 사람들을 판단합니다.

몇 년 전부터 계속해서 나타나는 5.18 유공자에 대한 가짜뉴스들도 이러한 생각에 기반하고 있습니다. 전라도 사람은 빨갱이라는 과거 군사독재 정권의 거짓된 선동에 기인하여 여전히 전라도 사람들을 폄훼하고, 그렇기에 유공자와 그 자녀들도 잘못된 혜택을 누리고 있다고 말합니다.

이 땅의 민주화를 위해서 자신의 목숨을 걸었던 한 사람, 한 사람을 보지 않습니다. 국민의 생명을 지켜야 할 정부에 의해 오히려 소중한 이의 목숨을 빼앗긴 사람들과 그들의 가정을 보지 않습니다. 오직 자신들과 이념이 다른 집단으로 5.18 유공자들을 바라봅니다. 그렇기에 그들에게 주어지는 혜택은 세금 낭비라고 말하거나 공정을 해치는 일이라고 말합니다.

집단에 대한 분노와 혐오의 결과

성경에서 이러한 문제를 다루고 있는가를 생각해본다면, 사사기 20장에 나타난 레위인과 첩의 이야기에서 그 유사한 상황을 발견할 수 있다고 봅니다. 첩의 죽음에 분노한 레위인은 베냐민 지파를 제외한 이스라엘 11지파의 사람들을 모읍니다. 이들은 분노에 차서 베냐민 지파를 향해 칼을 듭니다.

물론 이들은 먼저 첩을 죽게 만든 불량배들만을 요구했지만, 알 수 없는 이유로 인해 베냐민 지파 사람들은 불량배들을 내놓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자신들의 터전에 이미 칼을 빼들고 찾아온 11지파를 보면서 협상의 여지가 없다고 느꼈을지도 모릅니다. 그 결과 이스라엘은 베냐민 지파를 몰살합니다.

이들은 그 후에야 자신들이 동족을 모두 죽였음을 깨닫습니다. 자신들의 행위로 인해 이스라엘에서 하나의 지파가 사라지게 되었음을 후회합니다. 그리고 전쟁 중 도망쳤던 베냐민 지파 남성들을 살려주고 이들이 가정을 이룰 수 있도록 돕기로 정합니다.

분명 잘못을 범하는 사람은 있습니다. 우리의 분노가 그 사람에게 쏟아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사람이 어떤 집단에 속해 있다고 해서, 그 사람을 어떤 집단으로 묶을 수 있다고 해서 그 전체 집단을 향해 분노하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분노하지 않더라도 그 집단을 혐오하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나다나엘이 예수님께서 나사렛 사람이라는 이유로 끝까지 만나려고 하지 않았다면, 그는 예수님이라는 개인의 존재는 만나지 못했을 것이고, 그 예수님을 통해 구원을 얻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또 이런 집단 혐오의 결과는 사사기에 나타난 바와 같이 허무와 슬픔, 고통만을 남긴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입니다. 개인에 대한 혐오도 우리에게는 용납되지 않았습니다. 잘못을 범한 사람이 있다면, 그 잘못을 깨닫게 하고 그가 회개할 수 있도록 길을 제시해야 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그렇게 행하도록 가르치셨습니다. 물론 끝까지 자신의 죄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 끝까지 죄 속에서 살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더이상 관여하지 말라는 가르침도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들에 대한 심판은 하나님께서 하실 것이기에 우리는 이들에게 신경쓰지 말라고 권면하였습니다.

그런 우리이기에 세상 속에서 어떤 집단이 우리의 생각에 반한다고 해서 혐오해서는 안 됩니다. 혐오의 감정 자체가 그리스도인에게 맞지 않는 감정입니다. 우리는 애정과 관심으로 상대방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간혹 어떤 이들은 잘못되었으니까 내가 기도해서 바른길로 가게 해야겠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계십니다. 그런데 이런 생각의 전제가 잘못되었습니다. 대부분의 경우 그 사람은 나와 다를 뿐이지 잘못되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런 순간에 어떤 생각이 맞는지 하나님께 기도로 간구해 본 일이 있습니까? 그저 그 사람이 바뀌게 해달라고만 간구하지 않았습니까?

일반적인 삶에서 나타나는 혐오의 감정도 품어서는 안 되는 우리인데, 하물며 어떤 집단이 자신들의 이익을 누리기 위해 반대 집단을 형성해나가고, 그들을 혐오하도록 이끄는 소리에 우리가 귀를 기울이고 이끌려가서는 안 됩니다. 지금 수많은 유튜브 채널에서 울려퍼지는 소리는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어떤 이들을 집단으로 묶고, 그들을 혐오하도록 이끄는 소리가 많이 보입니다.

혐오가 아니라 관심과 애정으로 상대방을 바라보게 되시길 바랍니다. 어떤 특정 집단으로 상대방을 묶어서 판단하는 잘못을 범하지 마시고, 그 사람 자체를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한 사람, 한 사람, 온전한 그 한 사람이 보이게 될 줄 믿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주신 은혜가 그에게 전해질 줄 믿습니다.

혐오를 버리고, 성급한 집단화를 버리고 온전히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사람들 바라보는 여러분 되시길 바라고, 그런 여러분으로 인해 이 땅에 만연한 혐오가 변하여 사랑이 될 줄 믿습니다.

이성훈 목사(명일한움교회)  joey8100@naver.com

<저작권자 © 에큐메니안,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성훈 목사(명일한움교회)의 다른기사 보기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여백
신문사소개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서울시 종로구 김상옥로 30, 402호  |  제호 : 에큐메니안
대표전화 : 070-4252-0176  |  팩스 : 0303-3442-0176  |  등록번호 : 서울 자 00392  |  등록일 : 2012.10.22
발행인 : 윤인중  |  편집인 : 이정훈  |  청소년보호책임자 : 윤인중  |  E-mail : webmaster@ecumenian.com
Copyright © 2020 에큐메니안. All rights reserved.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