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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린뉴딜과 기본소득은 둘이 아니다민중신학자의 눈으로 세상 읽기 (20)
강원돈 교수(한신대 신학부/민중신학과 사회윤리) | 승인 2020.05.18 17:22

그린뉴딜과 기본소득은 앞으로 우리 사회의 담론을 이끌어가는 화두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두 가지로 꼽힐 것이다. 그린뉴딜의 핵심은 생태학적 정의이고, 기본소득의 알짬은 사회정의이다. 지난 ‘제19회 연재’에서 논증한 바와 같이, 생태학적 정의와 사회정의는 동전의 양면처럼 결합되어야 한다. 생태계의 안정성과 건강성을 파괴하지 않는 경제를 이끌어가는 원칙이 생태학적 정의라면, 사회정의는 누구에게나 인간의 존엄성과 위엄을 유지하며 살아가는 데 필요한 소득을 보장하는 사회를 구성하도록 이끄는 원칙이다.

생태학적 정의가 없다면 사회정의의 지속가능한 근거가 마련될 수 없고, 사회정의 없이는 생태학적 정의가 성립될 수 없다. 이러한 통찰을 갖고서 필자는 이 글에서 그린뉴딜과 기본소득이 같이 가야하고, 그것이 한국 사회와 경제를 운영하는 큰 틀을 새로 짜는 노선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밝히고자 한다.

마침내 정부 차원에서 ‘그린뉴딜’ 논의가 공식화되다

지난 5월 12일 국무회의에서 문재인 대통령은 환경부, 산업자원부, 중소기업벤처부, 국토교통부 등 4개 부처 장관에게 ‘그린뉴딜’에 관한 기획안을 제출할 것을 지시했다. 문 대통령이 취임 3주년 특별연설에서 ‘한국판 뉴딜’을 디지털 뉴딜로 협소하게 규정하여 사회적 뉴딜과 그린뉴딜을 놓치고 있다는 비난이 크게 고조된 상황에서 이를 수습하려는 입장을 취한 것이다. 필자 역시 지난 주 연재 “문 대통령 특별연설에 없는 두 가지 - 사회적 뉴딜과 그린뉴딜”에서 ‘한국판 뉴딜’ 구상이 빈약하고 생태학적 정의와 사회정의의 요구를 전혀 충족시키지 못했다고 강력하게 비판한 바 있다.

문 대통령은 그린뉴딜을 ‘한국판 뉴딜’에 ‘포함’시켜야 한다는 논의가 활발하다는 것을 의식하고, 그린뉴딜이 일자리 창출이라는 국내적 요구와 온실가스 감축이라는 국제적 요구에 부응한다고 판단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래서 세계 6위의 온실가스 배출국인 한국이 국제적으로 ‘기후 악당’ 국가로 꼽히는 것을 내버려둘 수 없는 현실에서 그린뉴딜이 일자리 창출 효과가 높다고 한다면, 이를 대규모 국책 사업으로 추진할 수 있는가를 검토해 보겠다는 뜻을 밝힌 것이다. 그린뉴딜을 ‘한국판 뉴딜’에 포함할 것인가는 4대 부처 기획 보고서가 나온 뒤에 결정될 것이라고 한다.

ⓒGetty Image

문 대통령이 뒤늦게나마 그린뉴딜을 정부의 공식적인 의제로 설정한 것은 매우 다행스러운 일이기는 하다. 문 대통령의 그린뉴딜 이해에서 방점이 찍히고 있는 곳은 저탄소경제 혹은 탄소경제 이후의 새로운 사회운영과 경제운영에 대한 큰 그림이라기보다는 대규모 일자리 창출이다.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 실업자와 구직 포기자가 크게 늘어난 상황에서 대통령이 단기간에 대규모 일자리를 창출하는 프로젝트에 큰 관심을 갖는 것을 탓할 수는 없다. ‘한국판 뉴딜’을 디지털 뉴딜로 졸속에 가까울 정도로 규정함으로써 큰 그림을 놓친 것도 그 때문이다. 그러나 그린뉴딜은 새로운 사회운영과 경제운영의 패러다임을 짜기 위해 중장기적으로 추진해야 할 과제이고, 일자리를 포함하여 사회적 재화를 어떻게 새롭게 배분할 것인가 하는 사회적 뉴딜과 맞물려야 한다. 둘 다 새로운 사회적 협약 없이는 추진될 수 없는 사안이다.

따는 ‘뉴딜’을 정부 재원을 투입하여 대규모 일자리를 창출하는 프로젝트 정도로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뉴딜이 새로운 사회협약을 의미한다는 이야기는 낯설게 느껴질 것이고, 그러한 사회적 협약을 체결하기 위해 사회적 공론을 모아나가야 한다는 주장은 얼토당토하지 않게 여겨질 것이다. 지금 와서 돌이켜 보면, ‘한국판 뉴딜’에 관한 한, 문 대통령은 청와대 정책실장과 기획재정부 장차관과 관료들의 조언에 귀를 기울였을 뿐, 환경부, 산업자원부, 중소기업벤처부, 국토교통부 등 주요 경제당국과 환경당국을 외면해 왔고, 고용노동부는 아예 존재감조차 없었던 것이 아닌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는 지경이다. 그러니 ‘한국판 뉴딜’에 관한 사회적 공론화는 문재인 정부가 전혀 염두에 두지 않은 사안이었다고 볼 수밖에 없다.

그러나 문재인 대통령이 그린뉴딜을 ‘한국판 뉴딜’에 포함할 것인가를 검토하기로 한 이상, 디지털 뉴딜 중심의 ‘한국판 뉴딜’은 원점에서 재검토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린뉴딜은 디지털 뉴딜의 한 부문으로 축소될 것이다. 국토교통부 김현미 장관이 ‘그린뉴딜’ 논의에 부서 단위의 참여를 요구했을 때, 문 대통령이 ‘스마트 시티, 도시행정의 스마트화 등’에 국토교통부가 참여할 여지가 있다고 답변한 것을 보면, 대통령은 여전히 디지털 뉴딜을 ‘한국판 뉴딜’의 주축으로 삼고, 거기에 그린뉴딜을 연결해 볼 수 있다는 발상을 내비친 것 같다. 아마 그러한 발상은 디지털 뉴딜과 그린뉴딜이 각기 다른 성격의 국가 과제임을 인식하고, 두 과제의 논리적 배치와 정책적 연관을 바로 보게 된다면 거두어질 것이다.

필자는 거대자본 중심의 디지털 인프라 구축과 사회간접자본의 스마트화에 방점을 찍은 ‘한국판 뉴딜’ 구상을 해체하고, 한국형 뉴딜을 새롭게 논의할 것을 제안한다. 한국형 뉴딜은 기후위기와 팬데믹 재앙과 사회적 양극화를 넘어서기 위해 우리나라의 사회운영과 경제운영의 새 틀을 짜는 것을 목표로 삼고, 새로운 사회협약에 바탕을 두어야 할 것이다. 지금은 팬데믹 재앙에 우두망찰해서는 안 되고, 시민사회와 사회세력이 나서서 우리 사회의 새 판을 짜기 위해 총력 투쟁에 나서야 할 때이다. 이 중요한 일을 어떻게 대통령과 내각에만 맡겨 놓을 수 있겠는가? 한국 민중은 한국 사회를 어떻게 재구성할 것인가, 이를 위해 사회적 재화를 어떻게 배분해야 할 것인가를 결정하기 위해 가장 본격적인 의미의 계급투쟁과 의견투쟁을 벌어야 한다. 대통령이 ‘그린뉴딜’을 말하고 내각이 ‘그린뉴딜’을 기획하면, 어떤 그린뉴딜이라도 괜찮은가? 사회적 뉴딜을 전제하지 않는 그린뉴딜이 제대로 구상되고 실행될 수 있겠는가?

그린 케인즈주의에 바탕을 둔 ‘그린뉴딜’은 잘못된 방향설정이다

요즈음 많은 사람들이 언급하는 ‘그린뉴딜’은 2007년 영국에서 처음 만들어진 개념이다. ‘그린뉴딜’이라는 개념을 창안한 콜린 하인즈(Colin Hines)가 주동이 되어 ‘그린뉴딜 그룹’을 결성했을 때만 해도, ‘그린뉴딜’은 경제 문제와 환경 문제를 해결하려는 케인즈주의적 재정정책을 가리켰다. 그것은 자본주의 경제의 운영 방식을 건드리지 않은 채 지속가능한 발전을 추구하는 그린 케인즈주의였다. 거기서는 케인즈주의 특유의 국가 엘리트 주도의 경제 기획과 재정기획, 에너지 효율 향상을 위한 기술 개발과 산업시설 현대화, 사회적 마찰을 최소화하는 탄소 중심 산업 분야의 구조조정 등이 서로 맞물려 있었다.

이러한 그린 케인즈주의는 2009년 유엔환경계획의 ‘글로벌 그린 뉴딜’의 기조를 이루었고, 특히 국가개입주의가 발달한 국가들이 주축을 이루는 유럽연합의 ‘그린 딜’ 기획의 밑바탕이 되었다. 최근에 유럽연합 차원의 ‘그린 딜’ 논의에서 주목되는 것은 그 구상을 뒷받침하는 재정 충당 방식에 관한 제안이다. 유럽중앙은행의 양적 완화 정책을 ‘그린화’하자는 이 제안의 골자는 에너지 전환, 전기자동차 생산, 에너지 효율 향상을 위한 산업시설 및 건물의 리모델링 등에 투자하는 기업의 채권을 유럽중앙은행이 무제한 매입하라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린 딜’은 거대자본과 금융자본이 결합해서 자본주의 경제의 새로운 시장을 여는 기획이 된다는 것이다.

그린 케인주주의에 바탕을 둔 ‘그린 딜’ 기획의 문제점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자본주의적 대량생산과 대량소비를 그대로 둔 채 미래 세대에게서 삶의 기회를 빼앗는 국가의 신용창출에 기대어 ‘그린뉴딜’이 기획되고 있다는 것이다. 스웨덴의 소녀 환경운동가 툰베리가 말하듯이,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또 다른 하나는 그러한 자본주의적 경제를 뒷받침할 정도의 탄소 대체 에너지를 개발하고 공급하는 것이 결코 쉽게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전기자동차의 배터리를 충전시키는 전기는 과연 어떤 대체에너지에서 온 것인가? 바이오디젤? 원자력 발전? 풍력발전? 태양광 발전? 그렇다면 그러한 대체에너지는 얼마나 생태 친화적인가? 이 두 가지 문제를 생각해 보면, 국가의 신용창출을 매개로 해서 자본주의와 기술주의를 결합시키고자 하는 그린 케인즈주의는 그린뉴딜의 바른 길이라고 보기 어렵다.

우리나라 국책 연구 기관인 KDI 국제정책대학원 유종일 원장의 ‘그린뉴딜’ 구상은 그린 케인주주의의 한 변형이기는 하지만, 유럽연합의 버전을 다소 초과하는 측면이 있다. 그는 ‘휴먼뉴딜,’ ‘그린뉴딜,’ ‘디지털 뉴딜’ 등 세 가지 뉴딜을 서로 유기적으로 결합시키는 ‘전환적 뉴딜’ 정책을 제안했다. 그는 ‘수축사회’에 접어든 한국사회가 에너지 전환, 저탄소경제 구축 등을 골자로 하는 그린뉴딜과 디지털 인프라 구축 등을 핵심으로 하는 디지털 뉴딜을 통하여 새로운 시장을 확장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고, 그러한 시장 확장은 인간 자본 개발, 소득분배 개선, 경제 민주화 등을 골자로 하는 ‘휴먼 뉴딜’과 함께 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바로 이 대목에서 유종일 원장이 ‘전환적 뉴딜’의 한 축으로 설정한 ‘그린뉴딜’은 유럽연합의 ‘그린 딜’을 초과하고 있다.

그러나 유종일 원장이 구상하는 ‘그린뉴딜’과 ‘디지털 뉴딜’ 역시 기술주의적 접근에 머물러 있고, 확장적 재정정책을 통하여 자본주의 경제의 수축을 극복하여야 한다는 케인주주의적 사고의 프레임에 붙잡혀 있다. 더구나 그가 말하는 경제민주화는 경쟁법상의 공정거래 개념에 가까워서 자본과 노동의 제도적인 권력 균형을 요구하는 경제민주주의와는 거리가 멀고, 소득분배 개선도 그 방법을 명시하지 않아 막연하다. 그런 점에서 그가 말하는 ‘휴먼뉴딜’이 사회정의의 원칙에 따르는 사회적 뉴딜의 요구에 미치지 못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사회적 뉴딜과 그린뉴딜은 소득분배 계획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그린뉴딜은 미래 세대가 향유해야 할 자원과 재원을 현재의 소비를 위해 끌어다 쓰는 자본주의와 그 도구인 기술주의를 생태학적 정의와 사회정의의 이름으로 통제하려는 새로운 문명 기획이어야 한다. 자본주의는 사람의 욕망을 충족시키고도 남는 잉여를 끊임없이 창출하고 그것을 자본가의 수중에 축적하는 독특한 경제체제이다. 이처럼 무한정 축적되고 팽창하는 자본을 그냥 내버려 둔 채, 사회정의와 생태학적 정의를 말할 수는 없다. 마르크스처럼 자본주의적 생산이 “모든 부의 원천인 지구와 노동자를 동시에 무덤에 쓸어 넣는다.”고 극언을 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사회적 가난을 확산시키는 자본의 축적과 팽창 기제가 생태계 위기를 가져오고 묵시록적 기후 파국을 불러들인다고 말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따라서 본격적인 의미의 그린뉴딜은 자본주의 경제의 대량생산과 대량소비 체제를 넘어서는 방식으로 설계되고, 그 핵심은 엄청난 규모로 축적되는 자본의 상당부분을 퍼내어 한편으로는 생태계 보전을 위해, 다른 한편으로는 인간의 존엄성과 위엄을 보장하는 생활을 위해 사용하도록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생태계로부터 에너지와 물질을 경제계에 끌어들여 인간의 욕망을 충족시키는 데 알맞은 형태로 변형시키는 생산에 자본을 투입하는 것을 획기적으로 줄이고, 생태계와 사람의 생명과 복지를 돌보기 위해 자본 투입을 획기적으로 증가시키자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자본주의적 경제의 산물인 잉여는 그 일부가 생태계 보전 영역으로 배분되고, 나머지 일부는 사람들의 복지 영역으로, 마지막 일부는 자본의 본래적인 관심사인 미래를 위한 투자 영역으로 흘러 들어갈 것이다.

앞에서 말한 것은 전혀 복잡할 것이 없는 이야기이다. 국민경제 계정을 놓고 설명한다면, 더 이해하기 쉽다. 국내총생산(GDP)은 자본비용과 노동비용과 국민저축의 합이다. 케인즈주의자들은 국민저축의 사회경제적 성격과 계급적 성격을 굳이 따지려 하지 않지만, 국민저축은 자본소득과 미래의 소비를 위한 가계저축으로 구성된다. 물론 전자가 후자보다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많다.

바로 이 대목에서 한번 생각해 보자. 국민저축, 특히 자본소득의 상당 부분을 우선 생태계 보전을 위한 비용으로 떼어놓게 한다. 한 마디로, 경제 활동이 생태계에 미치는 부정적인 영향을 제거하는 비용을 국가가 환경세로 징수한다는 뜻이다. 그 다음에, 자본소득의 나머지 부분을 국민경제 차원에서 생산과 소비의 거시균형을 이루도록 배분하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그것은 공적인 손이 생산수단과 토지와 금융자산으로부터 얻는 소득으로부터 세금을 징수하여 그 가운데 상당 부분을 가계의 몫으로 이전한다는 뜻이다. 그렇게 되면 가계에 돌아가는 몫은 국민계정에서 노동비용으로 산정되었던 것보다 훨씬 더 커진다.

이제 국민경제 계정에서 최종적으로 가계에 돌아간 몫을 먼저 각각의 가계를 구성하는 개개인에게 기본소득으로 분배하고, 그 다음에 그 나머지를 노동시장에 참여하는 사람들에게 각각 일한 만큼 그 대가를 시장임금으로 배분한다고 가정해 보자. 기본소득과 임금소득으로 배분하는 비율을 어떻게 정할 것인가는 사회적 협의에 맡긴다고 생각하기로 한다. 그렇게 되면, 시장에서 일자리를 찾아 노동을 하는 사람들은 기본소득에 시장소득을 합한 만큼의 소득을 얻게 될 것이고, 일자리를 갖지 않는 사람은 기본소득밖에는 얻지 못하지만 자기 자신과 공동체를 돌보는 생활 활동 시간을 누리며 시장이 공급하지 않는 재화와 서비스를 향유할 기회를 얻게 될 것이다.

물론 소득분배 모델 이외에도 기본소득의 재원은 다양한 방식으로 마련될 수 있다. 지대공유제의 원칙에 따라 지대소득을 모조리 징수하여 모든 국민에게 n분지 1로 나눌 수도 있고, 정보공유제에서 발생하는 이익을 환수하여 국민들에게 균분할 수도 있다. 상품 가격의 100%에 달하는 소비세를 징수하여 소비세 징수총액을 국민들에게 균분하는 것도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러나 소득분배 모델에 따라 기본소득의 재원을 마련하는 것이 가장 포괄적이고 본격적이다. 그것은 국내총생산을 미래를 위한 저축, 생태계의 몫, 자본비용, 임금소득, 기본소득 등 다섯 개의 큰 항목으로 알기 쉽게 나누고 그 비율을 사회적 합의와 정치적 합의를 통해 결정하는 방식이다.

그린뉴딜과 기본소득은 같은 동전의 양면처럼 결합되어야 한다

필자가 생각하는 소득분배 중심 모델에서 기본소득은 누구나 인간의 존엄성과 위엄을 유지할 수 있을 만큼 모든 사람에게 무조건 지급되어야 한다. 인간의 존엄성과 위엄을 지키는 데 필요한 사회적 재화를 누구에게나 보장하는 것이 사회정의의 원칙이기 때문이다. 필자는 앙엘리카 크렙스(Angelika Krebs)가 시도했듯이 휴머니즘의 관점에서 사회정의의 원칙을 정식화하는 것이 사회적 자유주의자 존 롤즈(John Rawls)나 기본소득 주창자인 필립 반 빠레이스(Philippe Van Parijs)가 가다듬었던 ‘최소 수혜자 최대 이익의 원칙’보다 더 알기 쉽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기본소득의 재원은 자본과 자산에서 얻는 소득에 대한 과세뿐만 아니라, 노동소득세를 통해서도 충당되기에 노동소득을 얻는 사람들은 자신의 소득을 강탈당하는 느낌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리를 따져 보면, 그렇게 생각할 일이 아니다. 오늘의 경제에서도 그렇지만, 4차 산업혁명이 본격화될 미래의 경제에서 일자리는 점점 더 적어질 것이고, 일자리를 얻어 임금을 받는 것 자체가 특권이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일자리가 지대를 창출하는 효과를 발휘한다. 이러한 지대 가운데 일부가 공적인 손에 의해 회수되어 일자리를 갖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배분됨으로써 그 사람들이 인간의 존엄성과 위엄을 지키며 살아갈 수 있도록 기여할 때에만, 비로소 사람들 사이에 사회적 평화와 연대가 싹틀 것이다.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국내총생산이 배분된다면, 우리 사회와 경제를 운영하는 프레임은 확실하게 바뀔 것이다. 생태계의 안정성과 건강성은 크게 향상되고, 경제성장의 속도는 늦어지고, 노동력의 상품화 압력은 약화되고, 이제까지 시장에서 보상받지 못했던 가계 노동이 사회적으로 인정되고, 여성들은 가부장제의 굴레로부터 손쉽게 벗어나고, 사람들은 좀 더 쾌적한 생활환경 속에서 느긋하게 살아가면서 서로를 존중하고 배려하는 공동체 생활을 발전시킬 것이다. 기후위기에 대응하기 위하여 사회적 합의와 정치적 결정을 통하여 생산과 소비를 급진적으로 축소시키는 내핍의 경제를 선택할 수도 있다. 사회적이고 생태학적인 경제민주주의가 작동하는 사회에서는 그러한 합의가 큰 마찰 없이 진행될 것이다. 엄청난 에너지와 물질을 투입하여 밀집공간을 확장하고, 기동성을 가속화하고, 자본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인간과 생태계를 들들 볶는 일은 옛 일이 될 것이다. 그러한 사회는 전기자동차의 대량 생산과 보급을 이상적으로 그리는 그린 케인주주의의 ‘그린뉴딜’ 사회와는 질적으로 다르다.

위에서 논증한 바와 같이, 필자는 기본소득과 그린뉴딜은 우리 사회와 경제를 재구성하는 두 축이라고 말하고 싶다. 그린뉴딜 없는 경제는 지속 가능하지 않고, 기본소득 없는 사회는 연대와 평화를 유지할 수 없다. 그린뉴딜과 기본소득은 함께 가야 한다. 생태학적 정의와 사회정의가 같은 동전의 양명처럼 결합될 때에만 사람과 생태계가 건강하고 안정적인 생명공동체를 이룰 수 있다. 그러한 생명공동체를 형성하기 위해 노동자들, 농민들, 페미니스트들, 생태주의자들, 예술가들, 종교인들을 위시하여 시민사회와 사회세력들이 모두 나서서 한국 사회와 경제를 운영하는 새로운 틀을 짜는 일에 총력을 집중해서 싸워나가야 한다. 지금이 바로 그 때이다!

강원돈 교수(한신대 신학부/민중신학과 사회윤리)  wdkang55@hs.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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