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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세하게 들리는 소리코로나바이러스는 재앙이 아니고 예언자다
이이소 | 승인 2020.05.30 16:53

지난 2월부터 코로나바이러스19와 계속 대화를 나누고 있다. 인간의 탐욕과 오만, 자본과 국가의 폭력과 경쟁이 만든 재앙인가? 창조질서를 파괴한 인간의 탐욕과 죄악에 대한 신의 심판인가? 하는 질문을 던지면서 계속 묵상하며 분투하였다.

코로나의 출현에는 전자의 영향이 결정적이고 코로나가 가져온 인간사회의 위축, 실업과 고통에는 후자의 속성이 아주 강하여서 어느 한 쪽이라고 딱히 결정을 내릴 수가 없다. 일각에서는 코로나 창궐에 대하여 인류를 멸종시키려는 음모로 배후에 중국의 어느 연구소와 세계적인 거부가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일고의 가치가 없으므로 거론하지 않는다.

만약에 인간이 내린 재앙이라고 생각하면 국제사회에서 책임 규명을 해야 하는데 상식적으로 생각을 해도 그 대부분의 책임은 소위 G7 국가들에게 있기 때문에 그들에게 책임을 물으며 배상을 요청해야 한다. 무엇보다 G7국가의 우산 속에 있는 다국적기업들에게 막중한 책임을 물어야 한다. 또한 후발로 G20에 속하게 된 나라들과 기업체들 또한 책임이 없다고 말할 수 없다.

그러나 지금까지 어느 누구도 강대국 책임을 논하며 책임을 추궁하는 자는 없다. 모두들 두루뭉술하게 지구 온난화, 생태 파괴와 환경오염이 원인이라고 말하며 보편 인류의 책임으로 떠넘기고 있다. 지난 500년 동안 남미와 아시아, 아프리카를 총칼로 정복하며 물질문명, 강자문명, 파괴문명을 전 지구에 이식한 서구 문명이 재앙의 중심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코로나 담론에는 21세기 이야기만 나온다.

만약에 신의 심판으로 인정하게 되면 무엇보다도 먼저 하나님 말씀과 법도를 벗어난 인간의 교만과 죄악, 폭력과 불의에 대하여 참회를 해야 한다. 인류가 죄악으로부터 돌아서야만 문제가 해결 된다. 그러나 지금까지 살펴본 바로는 특정 종교인을 제하고는 그 어떤 정치인, 경영인, 전문가, 지식인도 코로나19를 신의 심판으로 인식하지 않고 있으며 어떤 담론도 인류의 삶과 존재방식에 대하여 철저한 회개와 성찰을 요구하지 않는다.

요란하게 문명사적인 변화가 올 것이라고 말하지만 아무도 과감한 개혁과 변화를 원하지 않는다. 아무도 죄와 책임을 묻지 않는다. 그저 빨리 극복해서 속히 과거로 돌아가려는 전문가 집단의 진단과 제언, 권좌를 지키려는 정치인들의 번쩍거리는 아이디어와 정책이 몰려나오고 있다.

코로나 대유행 속의 선교사의 의미

두 개의 시각을 오가면서 막막함에서 오는 분노와 무력감으로 한없이 부대꼈다. 하나님의 이름과 진리에 무지하고 냉담한 세상에서 선교사로서 계속 활동할 수 있는가? 종교 간의 화해와 공존을 지향하는 세계 흐름 속에서 선교사의 의미와 역할은 무엇인가?

아무리 소명으로 선교사직을 계속 수행하려 해도 나라들이 문을 닫으면 갈 수가 없는데 개인의 힘으로 어떻게 비자 문제를 돌파해야 하는가? 각 나라들이 문을 열어 개방하여도 실물경기가 회복되지 않아서 후원이 단절될 경우 어떻게 사명을 수행해야 하는가? 입국해서 들어갔을 경우, 코로나 이전과 같은 신학으로 선교를 계속 수행할 수 있겠는가?

코로나 이전과 동일한 선교전략과 방법으로 일할 수가 있겠는가? 코로나 이후 코로나재발 방지를 위한 신학과 목회에로의 전환은 가능한가? 코로나 극복을 위해 지금 당장에 교회와 신학이 무슨 일을 해야 하는가? 코로나 극복을 일체를 정치와 정책에 맡기고 권력에 떠밀리는 소극적인 목회를 언제까지 계속할 것인가? 등등의 코로나 시대에 교회와 선교사 존재 의미를 재확인하며 진통을 겪어야 했다. 

코로나가 아니었으면 벌써 여러 차례 현장에 다녀왔을 터인데 코로나로 인하여 선교지 방문 일정과 행사를 연거푸 취소하게 되어 마음이 불편하고 무거워졌다. 2월 초 중국행 비행기 일정이 취소되어 4월로 연기하였다. 결항소식이 떠서 6월 초로 바꾸었다. 6월에도 결항한다는 소식이 이태원사태 며칠 후에 날라 왔다. 얼핏 두려움이 스치며 앞으로 더 이상 선교사 직을 수행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티켓을 취소할 것인가? 다시 연기할 것인가를 고민한 끝에 한 번 더 미루어 보기로 결정하였다. 8월말 정도에는 코로나바이러스19 문제가 대충 진정될 것이라 추측하며 출발일을 8월 말로 조정하였다. 그러나 항공사의 답변은 “그 때도 취항여부가 불확실하니 티켓을 취소하라”는 것이었다.

각 나라들의 공항 폐쇄로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2020년 선교현장 방문과 희망했던 일들을 다 내려놓았다. 그 후 네팔과 인도 쪽의 비행기도 10월까지는 취항하지 않을 것이라는 소식이 들려왔다. 오랫동안 기다렸던 인도 방문을 연내에 할 수 없게 된다는 사실에 우울해졌고 거듭 길이 막히는데 대한 분노와 무력감으로 진이 빠졌다.

새로운 현장을 방문하고자 했던 네팔, 미얀마 그리고 파라과이를 비롯한 남미 방문계획을 어쩔 수 없이 내려놓으면서 하나님께 거세게 항의하며 코로나의 의미를 물었다. 코로나가 무엇이냐고? 왜 하필 지금 왔냐고? 인간이 만든 재앙이냐고? 당신의 심판이냐고? 당신의 심판이면 소돔과 고모라처럼 세상 사람들 모두가 한 눈에 심판이라고 인정할 수 있도록 강력하고 신속하게 일제히 벌을 내려서 당신의 존재를 온 세상에 알리시라고 아뢰었다.

반성없는 무성한 말들의 잔치

지난 5개월 동안 코로나바이러스19는 국내외 많은 정치인, 과학자, 경제학자, 사상가를 비롯하여 많은 지식인들과 활동가들의 화두가 되었다. 코로나 담론은 코로나 출현의 원인, 각국 나라들의 방역과 K방역의 성공, 백신과 치료제 개발, 재난지원금, 실업 해결과 경기 부양책 등을 담았다. 모든 담론이 코로나출현은 화석에너지 사용으로 인한 지구 온난화, 무분별한 자연개발과 생태파괴가 불러온 종의 소멸, 화학 물질 등등으로 인한 환경오염으로 분석하였다.

그러나 누구도 코로나를 불러온 인간의 탐욕, 특별히 다국적 기업과 강대국의 폭력에 가까운 탐욕과 착취, 피비린내 나는 경쟁을 심도 있게 고발하지 않는다. 자연 생태와 환경 파괴는 무한 탐욕을 지향하는 대량 생산과 대량 소비의 결과물인데 삶이 소비가 되어버린 인간의 생존방식에 눈 감아버린다. 이렇게 눈 감아버리면 제2, 제3의 코로나 사태는 언제든지 재발할 수 있음에도 모든 담론이 눈앞의 현상만 말할 뿐이었다.

코로나 이후 인간을 신인류라고 말하지만 삶은 습관의 반복이고 저마다 가치관의 발로이다. 이 때문에 과거와 결별함이 없이 새로워질 수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아무도 썩고 병든 사람들의 정신의 개혁과 변화, 잘못된 삶에 대한 반성은 말하지 않았다. 신인류의 담론은 변화가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담론에 불과하였다.

“사회적 거리두기”를 하면서 신이 났다. 한국의 방역의 신속성과 의료진의 헌신성, 과학적인 관리와 치열한 위치 추적, 협조하는 시민들과 생명을 구하려는 정부의 의지 등을 알리는 기사에 기립박수를 보냈다. 이와 함께 일본과 미국의 방역 실패를 고소하게 생각하며 한국 국민으로서 자부심과 긍지를 가지기도 하였다.

백신과 치료제 개발에 국제적인 공조가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치료제는 전 세계인에게 무상으로 공급되어야 한다는 글에 감동을 받기도 하였다. 한 편으로 코로나 변종이 최소한 3천 개에서 6천 개가 넘기 때문에 백신과 치료제가 의미가 없다는 말에 코로나와 함께 사는 삶에 대한 생각을 하였다.

코로나19가 보여준 세계의 민낯

재난지원금과 경기 부양책이 나오면 말이 많아진다. 코로나를 퇴치하고, 경기부양을 위해 천문학적인 지원금을 쏟아 부어야 한다고 주장이 빗발친다. 코로나 이전의 물질만능 시대와 결별하고 미래 새 시대로 들어가기 위한 학습비용으로 생각하면 지원금을 적재적소에 신속하게 쏟아 부어야 한다.

그러나 미래의 돈을 차입해서 현재의 재난과 경기 침체를 극복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시작하기 전에 한국판 뉴딜, 그린 뉴딜의 목적과 방향, 방법과 대상을 분명히 해야 한다. 선명하게 만들어야 한다. 정의, 평화, 생명, 사랑의 바탕 위에 공생공존과 화해와 통합을 위한 새 시대를 건축해야 한다.

디지털인프라구축, 비대면 산업육성, 국가기반산업 스마트화 그리고 저탄소, 친환경, 자원절약을 모토로 하는 녹색성장 전략은 성공하면 역사에 길이 남을 것이다. 하지만 실패할 경우 책임자는 없을 것이고 빚이 고스란히 미래세대의 짐이 되며 계층 간의 골을 더 심화시킬 것이다. 그리고 그린 뉴딜정책이 중산층 지식인들, 전문가들, 자기집단의 한 몫 나누기를 위한 정책으로 둔갑해버리면 아무리 성공해도 성공한 것이 아니다.

가장 좋은 정책은 가난한 사람들이 자존감을 가지고 살 수 있도록 취업의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다. 루스벨트 대통령의 뉴딜정책이 성공한 것은 가난한 자들을 구호하며 330만 명을 실업상태에서 고용한 때문이었다. 똑같을 수는 없지만 한국 정부도 이를 생각해야 한다.

한국에 돌아와서 자주 들은 말은 “나라 돈은 눈 먼 돈이기 때문에 먼저 먹는 사람이 임자다.”와 “같이 가난해도 줄이 있으면 차상위계층이 되고 줄이 없으면 안 된다.” 라는 말이었다. 이는 정부의 복지예산이 정치적으로 잘못 사용되고 있다는 풍자다. 국민 세금이 너무 허술하게 다루어지며 목적을 벗어나 대상이 아닌 자에게 지급된다는 뜻이다.

예산이 목적을 벗어나서 경제 정의와 평등에 반하여 쓰여 지게 되면 아무리 좋은 계획도 부정과 비리로 실패하기 쉽다. 그러므로 정부는 “기회는 균등하게 과정은 공정하게” 라는 말을 실천할 의지와 신념이 확고하며 단호해야 한다. 팔이 안으로 굽는 패거리 문화에 젖어 있는 기득권자들은 원칙을 다른 집단에게는 적용하되 자신들의 집단에게는 관용적이어서 개혁을 망치는 변수로 작용할 수 있다.

코로나와 싸워 이기고 경제회복을 시켜서 국민들을 흥청대며 풍요로운 과거로 돌려보낼 생각으로 경기 부양 정책을 급하게 서둘러서 실시하지 않길 바란다. 부양책의 키워드는 가난한 사람들의 완전한 취업 또는 생계 확보와 공정한 세금, 에너지와 공존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코로나바이러스19가 사스나 메르스에 비하여 강하며 전파력 또한 강력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지구 차원의 핫이슈로 등장하게 된 것은 코로나에 대한 사람들의 과잉 불안과 무지한 대응에서 시작되었다. 백신도 없고 치료제가 없는 상황에서 무증상 감염자들로 인한 전파가 사람들의 불안심리를 자극하였고 그것이 각국에서 “사회적 거리 두기”와 “국가적 봉쇄 정책”으로 구체화되면서 상상을 초월하는 일파만파의 대량의 실업과 경기침체로 나타났다.

한국의 사회적 거리두기는 방역을 성공으로 이끌었지만 1일 노동자, 은행 대출로 사업을 시작한 중소기업체와 소상공인들, 대출로 주택과 차량을 구입한 사람들을 실업과 휴업, 파산으로 내몰았다. “봉쇄 조치”는 인도 같은 경우, 하루아침에 1억 2천만 명을 실업자로 만들었다. 미국의 경우 대공황 이후 최악으로 실제 실업자가 2,700만 명이 나왔다. 영국의 경우 4월 실업수당 신청자가 209만 7천 명으로 1970년 대 초 이후 최대를 기록하였다.

국제 노동기구는 연말에 세계적으로 2억 명의 실업자가 추가 발생할 것으로 예상했다. 유엔세계식량계획은 연말 즈음에 2억 7천만 명이 추가로 극심한 기아상태에 빠질 것으로 전망하였다. 뿐만 아니라 방역에 실패한 미국 정부가 출구전략으로 중국을 집중공격하며 편 가르기를 하고 있어서 무역전쟁과 신 냉전이 시작되었다. 

코로나19가 흔들어 놓은 본질들

기존의 질서와 체제를 불과 몇 달 사이에 뒤흔들어 버린 코로나의 슈퍼파워에 경악을 금할 길이 없다. 과연 코로나가 인간사회의 기저를 흔들었는가? 대답은 “아니다”이다.

생각해 보자. 코로나가 아무리 막강해도 직접적으로 인간에게 줄 수 있는 것은 두 가지 뿐이다. 고통과 죽음이다. 감염되면 익히 알려진 대로 고통을 겪는다. 그러나 코로나가 강해도 고통을 이기고 살아나는 사람들이 훨씬 더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코로나 방역을 위해 실시한 몇 달의 봉쇄 조치로 세계가 대량 실업에 직면하였다. 이는 코로나가 강한 것이 아니라 그 만큼 인간사회 구조와 체제, 개인과 사회의 경제네트워크가 허약하다는 반증이다.

자본과 기술에 의하여 노동이 소외되었으며, 재벌 85명이 소유하고 있는 재산이 지구촌 35억 명의 사람들이 가진 재산과 맞먹을 정도로 부가 편중되어서이다. 주식 자본주의, 군사패권 자본주의, 세계은행과 국제통화기금이 주도한 강대국 중심의 신자유주의 자본주의 체제가 만든 극도의 불평등한 경제구조가 세계화되어 각국의 경제가 다국적기업에 편중, 집중, 독점되었기 때문이다. 과거에는 국지전이나 지도자의 부패와 정책의 실패로 실업과 경기침체가 지엽적으로, 부분적으로 일어났으므로 지금처럼 지구촌 전체가 한꺼번에 실업대란에 빠지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봉쇄 조치를 실시한 모든 나라에서 거의 동시에 대량 실업이 발생하여 빈익빈, 부익부의 실체, 나쁜 경제의 증상을 있는 그대로 드러냈다. 세기 말부터 중병으로 드러누운 세계 경제가 스피드, 인터넷, 인공지능, 주식거래, 여행업, 보험업, 스포츠산업, 섹스산업, 스크린산업, 향락산업 등등의 산소 호흡기를 끼고 가까스로 가동되어 왔다. 하지만 코로나19로 인한 사회적 거리두기와 봉쇄 조치로 말미암아 산소 호흡기 효과가 일시적으로 중단됨으로 대공황에 노출된 것이다.

코로나19가 깨닫게 해준 사실들

이쯤에 코로나를 보는 나의 시각을 정리되었다. 세상에서 그 어떤 세계적 수준의 전문가와 학자, 언론이나 대학교육도 해낼 수 없었던 몇 가지 일을 겨우 몇 달 만에 해냈기 때문이다.

첫째는 코로나는 사람들로 하여금 자연 파괴가 곧 바로 사람 생명의 위협이요, 죽음에 이르는 길이라는 사실을 자기의 문제로 자각하게 만들었다. 지구가 인간의 재산으로서 자원이 아니라 생명공동체라는 것이다. 그 동안 사람들이 생태 파괴, 환경오염, 기후변화가 먼 나라 이야기처럼 학자들이나 활동가의 담론으로 들었을 뿐인데, 코로나 팬데믹으로 비로소 지구 생명이 자연의 안전과 자신들의 생활과 직결되어 있음을 실감한 것이다. 자연 보호의 문제가 자신들의 생명과 안전의 문제임을 깨달은 것이다. 코로나는 실로 우리에게 잊고 있었던 하나님의 창조와 온 우주만물의 안식과 평화를 지향하는 안식년법과 희년법을 상기시켜 주었다.

둘째는 코로나는 사람들로 하여금 생명의 안전을 위해 국제적인 공조와 협력의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만들었다. 초기에는 각 나라들이 자기 나라만 잘 지키면 안전할 것으로 생각하였으나 불과 몇 달 사이에 코로나가 빠른 속도로 오대양 6대주에 모습을 드러내자 공동으로 방역하며 극복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이다. 코로나로 말미암아 세계는 이념의 논리, 경제 우선 논리, 힘의 논리를 넘어서서 협력과 공조로 나가지 않으면 21세기가 끝나기 전에 인류가 지구상에서 사라질 수 있으며, 살아남는다 해도 삶의 질이 형편없이 낮아질 것이라는 대위기의 전망을  비로소 공유하게 된 것이다. 코로나는 우리가 생명의 보호와 안전을 위해 서로 협력하여 함께 번성하는 것이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이며 섭리임을 알게 해주었다.

셋째는 코로나는 사람이 개인이면서 사회적, 경제적 유기체라는 것을 한 눈으로 파악하게 만들었다. 사람이 유기체이므로 자본주의의 병폐인 경제적 불평등이 그 당사자들만의 빈곤이 아니라 사회 전체의 빈곤이 되는 것이다. 코로나는 도시화, 3,4차 산업화시대에서 사람들의 빈곤과 실직이 그 사람들의 개인적 불행만이 아니고, 나라 경제 침체와 파탄의 원인이 되며 전 세계에 대공황이라는 나비효과를 발휘하게 된다는 것을 우리가 함께 학습하게 해주었다. 코로나는 인간이 피조 된 생명으로 원자화 된 개인 물질, 우주에 던져진 고아 같은 개인이 아니며 개인으로서 전체이며, 전체로서 개인적인 존재로 함께 살며 함께 구원받아야 생명의 유기체임을 상기시켜 주었다.  

넷째, 코로나는 사람들이 “삶에서 무엇이 더 중요한 것인가?”를 생각하며 본질에 대한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인생살이에 실제로 필요하고 중요한 우선순위에 대한 개념을 정리할 수 있는 기회를 준 것이다. 사람들이 사회적 거리두기를 하면서 개발과 성장보다 자연 환경이, 돈 보다 건강이, 경쟁보다 협력이, 수단보다 목적이, 개발보다 보존이, 사유보다 공유가, 신속보다 안전과 생명이, 독점보다 공동의 참여가, 물질보다 인간의 존엄이, 독존보다 공존이 우선적임을 생각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1차, 2차 산업이 없는 3,4차 산업은 기초적인 안전망이 없는 부실한 나라를 만든다는 것을 유럽과 미국을 통해서 배우게 되었다. 인류가 개인 중심, 물질 중심, 편리와 향락 중심, 성공과 출세 중심의 교육과 가치관의 문제점을 국가적, 인류적 차원에서 반성을 할 수 있는 위대한 시간을 함께 가진 것이다. 코로나는 생명이 목적이지 ‘수단과 도구가 아니다’ 는 성서의 진리, 생명 존엄의 진리를 다시금 숙고하게 해주었다.

다섯째, 코로나는 한국인들의 미국에 대한 의식의 변화를 촉진시켰다. 지금까지 한국인의 의식 속에서 미국은 절대선이었고 정의와 평화의 사자였으며 영원한 우방이며 보호자였다. 그러나 미국의 코로나 방역 실패와 국제적인 방역공조를 무시하는 독선과 횡포, 코로나 음모론 제기와 무역 분쟁으로 신 냉전의 기류를 만드는 미국의 진면목을 접하게 된 것이다.

코로나는 형편없는 방역과 부실한 의료보험, 걷잡을 수 없는 실업과 경기침체 그리고 국민의 생명보다 자신들의 정권유지에 급급해하는 정치지도자들의 독선과 교만의 실체, 미국의 민낯을 그대로 보여주었다. 이를 통해 한국인들의 미국 환상을 깨주었다. 코로나는 선악과를 따먹은 인간은 결코 구원자가 될 수 없으며, 성서에 나오는 거대한 힘으로 세상을 지배하려는 영웅과 그 시스템인 바벨탑이 언제나 무너졌음을 다시 보게 해주었다.

코로나19가 하나님의 심판이라면

코로나가 인간의 탐욕과 죄악, 무절제와 교만에서 비롯되었고 하나님의 심판적인 부분이 있음은 사실이다. 그러나 코로나는 인간이 비싼 대가를 치루고 깨닫고 있는 것들이 성서의 진리임을 말해 주고 있다. 코로나로 인하여 드러난 실상이 죄악의 결과물이고 깨달음이 선지자의 예언을 닮았다.

코로나가 자신도 모르게 우직한 예언자가 되는 순간이다. 예언자는 왕과 귀족, 종교 지도자와 백성들, 이웃 나라들의 죄악상을 일일이 열거한다. 폭력과 살인, 부정과 부패, 성적 타락과 우상 숭배, 탐욕과 약탈, 사기와 위선, 억압와 빈민학대, 고아와 과부의 인권 유린 등을 열거하며 회개를 요청한다. 전환을 요구한다. 변화를 촉구한다.

맘몬의 가치관을 버리고 생명의 하나님께로 돌아오라고 한다. 자기숭배, 우상숭배, 영웅숭배를 떠나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라고 한다. 회개하고 돌아오면, 변화하면, 전환하면 살 것이요, 변화와 회개를 거부하면 망할 것이라고 한다. 코로나가 우리에게 준 깨달음은 이런 의미에서 예언이 된다. 사람들을 파멸에서 구하려는 하나님의 메시지이며 하나님의 희망이며 인류에게 비는 하나님의 기도이다.

우리는 과감하게 코로나가 드러낸 인간의 거짓, 허위, 허영, 위선의 껍데기를 벗어 버려야 한다. 쓰레기 자본주의의 노예로 사는 일을 멈추어야 한다. 고급 소비를 위해서 존재하는 소비지상주의에서 벗어나야한다. 마음껏 먹고 마시며 즐기라는 나쁜 자본주의 유혹에서 벗어나야 한다.

수단과 방법을 다해서 승자가 되면 모든 것이 정당화되고 합리화 된다는 자본주의 속임수를  단호히 물리쳐야 한다. 대량생산을 위해 대량소비를 조작하는 선전에 더 이상 속아서는 안 된다. 절제와 근거절약으로 지구 자원을 절약해야 한다.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마귀가 또 그를 데리고 지극히 높은 산으로 가서 천하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 이르되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 이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사탄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을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코로나는 주님처럼 인간이 제국의 폭력과 물질의 노예상태를 벗어나서 존엄한 인간으로 살도록 인류를 새로운 세계로 초대하고 있다. 창조의 목적인 정의에 기초한 사랑과 평화의 나라, 공생과 공존의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있도록 우리의 눈을 열어주고 있다. 코로나가 끔찍한 고통과 죽음과 함께 온 것은 인간의 탐욕과 착취가 만든 우주적인 참상, 지구 파멸의 전조, 세계의 질서 붕괴, 극단적인 경제적 불평등과 기아에 시달리는 하나님 없는 세계, 경제 영웅들의 폭력에 시달리는 고아가 된 지구를 드라마틱하게 보여주며 새로운 결단을 촉구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코로나19가 던지는 메시지가 무엇인지 들어보자

대부분의 사람들이 속히 백신과 치료제가 나와서 코로나 이전으로 돌아가길 원하고 있지만 우리는 그 옛날 다시 돌아갈 수가 없다. 아무리 그 치료제가 나와도 새로운 종의 바이러스가 이어서 출현할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경제개발과 성장을 위한 지속적인 지구 파괴는 인류의 파멸이 될 것이라는 사실을 피부로 체험하였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제 옛 문명, 옛 생활로 돌아가는 것을 숙고하고 자본주의 사회의 핵폭탄인 “에너지와 세금”의 문제를 지혜롭게 풀어가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공존”를 코로나 이후시대의 키워드로 말하였다. 나라와 민족을 넘어 선 인류의 공존은 기본이다. 자연과의 공존, 미생물, 무생물과의 공존 뿐 아니라 과거, 미래와 함께 공존을 도모해야 한다. 진실로 그렇게 하기를 바랄진대 생태계의 회복을 위해 공존이 주는 불편과 부담을 기꺼이 견뎌내야 한다. 하나님께서 창조의 하루를 마치실 때마다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하신 상태에로의 회복을 기대한다.

코로나 19의 메시지를 겸손히 경청하면서 미래를 응시한다. 크리스천으로 살아가려면, 복음진리로 세상을 섬기려면 교회와 신학은 각고의 노력으로 거듭나야 한다. 우상과 인간의 관습과 나쁜 조직을 제거해야 한다. 그동안 성공한 목회와 기복 신학으로 한국교회를 물질과 우상의 전으로 만든 과오와 죄악을 참회해야 한다.

목회라는 이름의 탐욕으로 추구한 대형화, 집중화, 도시화, 상업화를 신속하게 정리하고 ‘만민의 기도하는 집’ 으로 탈바꿈해야 한다. 교회와 목회의 양극화와 대립을 극복해내야 한다. 촛불 교회와 태극기 교회로 분열되어 서로 불신하며 정죄하는 교만과 독선을 참회해야 한다. 틈새를 노리는 이단과 사탄들 방역에 철저해야 한다. 교회와 지역사회 안에 있는 짓밟히고 무너진 작은 지체들의 존엄을 회복시켜야 한다.

결국 코로나19는 피조물의 신음소리를 들으며 함께 아파하며 치유하며 생활 속에서, 삶이 그대로 메시지가 되는 존재론적인 목회, 인카네이션 목회, 십자가 목회로 진리를 살아 내라고 요구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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