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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성장”이라는 이데올로기가 은폐하고 있는 것지구 살림살이를 위한 녹색성장-녹색성장의 생명학적 토대 구축 시도 (2)
이기상 명예교수(한국외대 철학과) | 승인 2020.05.31 17:13

‘녹색성장’은 단순히 ‘저탄소 녹색성장’이라는 구체적 정책에 대한 줄임말에 불과한가? 문화체육관광부에서 나온 ‘녹색성장’에 대한 홍보책자인 『녹색부국으로 가는 길』(2008)을 보면 그렇지 않다는 것이 명백하게 드러난다(김일영 외, 2008). 우선 가장 눈에 띄는 강조는 이것이 21세기 새로운 문명을 위한 새로운 패러다임이라는 천명이다.

“녹색성장은 단순히 에너지 절약이나 신기술 개발의 차원을 넘어선다. 녹색성장은 생활양식 전반의 변화를 수반하는 새로운 패러다임이다.”(12) “녹색성장은 새로운 성장 패러다임을 제시한다.”(49) “녹색성장은 새로운 삶의 패러다임이다.”(50) “녹색성장은 새로운 국가 패러다임을 보여준다.”(51)

그 다음 녹색성장의 밑바탕에 흐르는 철학을 ‘창조적 실용주의’ 정신이라고 표방하고 있다.

“녹색성장은 환경[생태]근본주의와 성장[개발]지상주의 모두를 극복하려는 시도이다. ‘환경 대 성장’이라는 낡은 대립구도에서 벗어나 환경과 성장 사이에 선순환구조를 만들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이 ‘창조적 실용주의’ 정신이다.”(57)

마지막으로 녹색성장이 추구하는 이념과 가치를 생명존중, 평화, 사회통합, 인간다운 삶의 향유, 삶의 질 향상으로 내세우고 있다(76 이하).

녹색성장의 궁극적인 목표는 개인적인 차원에서는 삶의 질 향상, 사회적인 차원에서는 안정과 통합을 통한 사회발전이다.”(76) “녹색성장의 생명존중 이념과 평화사상은 다양한 사회집단이 공존할 수 있는 바탕이다. 특히 사회통합 및 국제적 연대를 강조하는 녹색성장은 다인종·다문화 시대 소수 집단의 인권 향상을 위한 규범적 기초로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녹색성장은 민족주의에서 세계주의로 이행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할 것이다.”(82) “녹색성장은 우리 삶의 방식 전체에 대한 반성적 성찰을 전제로 하는 일종의 신문명으로서 ‘그린 라이프’(Green Life) 시대를 예고한다. 인간다운 삶의 향유, 삶의 질 향상은 그린 라이프가 추구하는 기본적인 가치이다. 이는 양적으로 ‘나누는’ 삶에서 질적으로 ‘높아진’ 삶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기존의 사회복지 개념을 초월한다.”(83)

패러다임과 이념으로서의 “녹색성장”

21세기 새로운 문명의 서광 앞에 선 지구촌의 지식인들은 그에 걸맞는 [동서] 통합적인 새로운 패러다임을 찾으려고 혈안이 되어 있다. 서구 중심이고 인간 중심이고 이성 중심인 문화에서 생겨나온 근대의 패러다임인 “성장과 경쟁의 패러다임”을 대체할 탈근대의 패러다임을 찾느라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이러한 방향의 대표적인 저서의 하나가 제러미 리프킨의 『유러피안 드림. 아메리칸 드림의 몰락과 세계의 미래』(2005)이다(제러미 리프킨, 2005). 이런 시각에서 본다면 <녹색성장>은 신문명의 새로운 패러다임으로서 “코리안 드림”에 해당할 것이다.

그러면 21세기 녹색문명의 시대를 열어갈 새로운 패러다임의 이론적 기초는 무엇인가? 그 철학적 토대는 무엇인가? 앞에서 보았듯이 “창조적 실용주의”를 표방하고 있는데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명확하지가 않다. 다만 근대 북미의 정신적 바탕이 되었던 실용주의를 창조적으로 개조한 것이라면, 21세기 탈근대의 철학이 되기에는 매우 부족하다는 사실이다. 그 풍토에서 교육 받고 자라온 최고의 엘리트인 리프킨이 그런 철학의 몰락을 천명하고 나섰으니 말이다.

마지막으로 녹색성장이 내세우고 있는 이념과 가치들도 어떤 일관성 있는 철학에서 나온 것들이 아니라 듣기 좋은 이념과 가치들을 모아놓은 듯한 인상을 준다. 우선 분명한 것은 생명존중, 평화, 사회통합, 인간다운 삶의 향유, 삶의 질 향상 등과 같은 이념과 가치들은 ‘창조적 실용주의’에서 나올 수 없다는 점이다. 온갖 좋은 가치들을 나열해 놓았다 해서 그 정책이나 이념이 그것으로 정당화되거나 합리화되는 것은 아니다. 공감대와 설득력이 없는 목표나 이념의 제시는 말 그대로 또 하나의 이데올로기가 될 뿐이다.

“녹색성장은 환경과 경제성장이 상충된다는 고정관념에서 탈피하여 둘 사이의 시너지 효과를 극대화하려는 성장 방식이다. 경제성장이 환경을 훼손하기 보다는 개선하고, 환경 역시 성장을 방해하기 보다는 성장의 동력이 되는 선순환구조를 형성하려는 것이다.”(김일영 외, 2008: 56.)

이 한마디 말로 지난 백년 인류가 고심해온 경제성장과 자연보호의 문제가 해결되어버리는 것은 아니다. 여기서는 이 문제를 경제의 논리로 풀려고 시도하는데, 문제의 핵심은 자연에 대해서 경제적인 시각으로 접근해서는 근본적으로 문제가 해결될 수 없다는 점이다. 경제와 생태, 이 두 차원을 아우르는 더 높고 넓은 지평의 논리가 필요하다는 이야기다. 창조적 실용주의를 앞세워 그 둘을 실용적으로 통합시키는 것은 문제의 해결이 아니라 문제의 봉합이다.

녹색성장의 태생적 한계 ― 저개발국가들을 위한 발전지침

녹색성장이란 화두가 등장하게 된 배경과 맥락을 살펴보면 애초에 그것이 지향하고자 한 의도가 담겨 있다. <유엔 아·태 환경과 개발 장관회의>에서는 아·태지역 저개발 국가들이 경제성장의 필요성과 환경보전의 필요성을 어떻게 조화시키며 발전해나갈 것인가가 논의의 중심이었다. 이러한 협의 과정에서 아·태 지역 내 저개발국가들이 경제성장과정에서 환경의 질을 떨어뜨려온 소위 선진국들과는 달리 당면한 빈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경제성장을 추구하면서도 환경을 훼손하지 않는 상생방안을 모색하도록 권장하면서 ‘녹색성장’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게 되었다. 따라서 밑바탕에 깔린 의도는 환경적으로 지속가능한 경제성장을 추구하자는 취지이다. 이렇듯 원래 녹색성장이란 개념은 ‘지속가능한 발전’ 개념에 기초를 둔 개념이지만, 그 두 개념은 적용 대상이나 배경, 지향하는 목표에서 약간의 차이를 보인다(윤순진, 2009: 219∼266).

▲ 녹색성장의 한계와 이것이 은폐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살펴보아야 한다. ⓒGetty Image

2002년 요하네스버그에서 열린 지속가능발전에 관한 세계정상회의(WSSD)에서는 지속가능한 발전의 주요 요소로 “경제, 환경, 사회”라는 세 가지 얼개에 대해서는 합의를 이루었다. 다시 말해 경제성장과 환경보호, 사회정의의 세 차원을 두루 균형적으로 고려하는 것이 지속가능한 발전이라고 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녹색성장은 그 출현배경을 볼 때 빈곤과 기아라는 궁핍의 상황에 놓인 저개발국가들을 위한 개발로서, 이들 국가들이 일정 수준의 경제성장을 실현하되 그로 인해 파생되는 어쩔 수 없는 환경오염을 최소화하도록 유도하고 있다. 여기에서부터 녹색성장은 몇 가지 핵심 비판에 직면한다.

(1) 저개발국가를 위한 경제성장 지침이 경제규모 세계 12위권에 해당하는 한국을 위한 국가성장패러다임으로 적당한가?
(2) 제한된 통용성을 가진 녹색성장은 21세기 탈근대를 사는 지구인의 패러다임으로서는 부족하지 않는가?
(3) 녹색성장은 지속가능발전에서 발전의 중심축으로 제시한 사회형평성을 도외시함으로써 발전이 아닌 퇴보의 길을 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녹색” 성장 ― 색깔만 녹색

저탄소 녹색성장 법안에서는 ‘형평성’이란 단어가 단 한 번 나오고 있다. 그리고 거기에서 환경은 성장을 위한 기회로 인식되고 있다. 기후변화대응은 기후친화산업을 위한 신성장동력으로 키워갈 수 있는 새로운 환경이 된다. 기후변화와 에너지 위기는 그린[에너지]산업에 대한 투자를 통해 국제경쟁력을 확보하여 수출을 확대시킴으로써 성장을 도모할 수 있는 신성장동력으로서 활용될 수 있다. 이렇게 결국은 환경적 측면이 무시될 수 없는 여건 속에서 환경보호활동에 경제적 기회가 있기 때문에 환경보호에 관심을 갖고 있음이 드러난다.

개념의 폭으로 볼 때나 출현배경을 볼 때나, 어쨌든 녹색성장 개념은 지속가능발전 개념보다 좁은 하위 개념이다. 따라서 녹색성장 개념으로 지속가능발전 개념을 통합하려거나 녹색성장개념으로 지속가능한 발전 개념을 치환하려는 시도는 개념상 성립하기 힘들 뿐더러 개념의 대내외적 역사적 발전 과정을 놓고 볼 때 일종의 역사적 후퇴라 할 수 있다(윤순진, 2009: 236).

저탄소 녹색 경제 실현을 위한 해외의 동향을 보면 재생가능에너지 확대와 에너지 효율 향상, 그리고 조세제도의 개혁 등을 새로운 녹색 경제 실현을 위한 핵심요소로 보고 있다. 이런 식으로 접근해 갈 때 환경과 경제를 동시에 살리면서 고용을 늘리는 효과를 함께 실현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반 존스, 2008: 127 이하, 173 이하).

그런데 한국에서는 저탄소 녹색성장을 실현하는 데 녹색에너지기술이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선언에도 불구하고 재생에너지와 에너지 효율향상을 위한 기술개발과 시장확대가 예산 배정이나 정책이행에서 중심이 되지 않고 있다. 이는 원자력을 여전히 저탄소 녹색성장을 위한 중추로 파악하고 지원하는 데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그런데 과연 원자력이 ‘녹색’일 수 있는지는 좀 더 따져봐야 할 것이다.

그리고 저탄소 녹색성장을 실현한다는 목표로 제시된 다양한 정책과 계획이 저탄소와 녹색이란 가치가 실현될 수 없는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 결과, 성장지상주의의 외피를 녹색으로 치장하고 있다는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윤순진, 2009: 260/1).

현재 한국의 저탄소 녹색 성장 전략은 성장에 보다 큰 무게 중심이 있으며 녹색은 성장을 지속하기 위해 고려해야 할 요소이자 더 적극적으로는 성장을 견인하는 수단으로 인식되고 있다. 바로 이런 맥락에서 재생가능에너지는 성장의 지렛대로 조명되고 있으며 나아가 기후변화대응 또한 새로운 기후친화산업의 토양으로 인식된다. 고유가와 기후변화라는 이중위기에 대처하기 위해 생태적 효율을 높이고 에너지 집약도를 높인다는 목표를 제시하고 있지만 이는 여전히 자원소비와 온실기체 배출의 절대적 증가를 동반하는 것으로 여전히 성장의 생태적 한계에 대해 무관심한 접근이다. 또한 정부와 시장의 역할만 강조할 뿐 시민사회가 어떻게 이 문제에 결합할 수 있을지, 시민사회의 관심과 참여 속에서 어떻게 에너지체제의 변화를 이끌어갈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해법을 제시하지 않고 있다.

<삼성경제연구소>도 이점을 잘 인식하고 있다(삼성경제연구소, 2008: 1).

“향후 한국은 녹색산업을 신성장 전략산업으로 육성할 필요가 있다. … 정부와 기업은 환경문제를 규제나 의무로만 여기지 말고 성장산업이라는 적극적인 관점에서 녹색산업을 성장동력으로 발굴·육성할 필요가 있다. 정부는 먼저 법, 제도 등의 인프라를 정비한 다음 기술, 산업, 수출경쟁력을 세 축으로 하여 구체적인 녹색산업화 전략을 추진해야 한다. 기업은 자사의 역량을 최대한 활용해 녹색사업기회를 발굴하고, 친환경적 이미지 부각 등 녹색마케팅을 강화해야 할 것이다.”

불가능한 시도: 잘못된 조합

그런데 경제성장과 환경보호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으려는 시도는 애초부터 빗나간 기획이며 잘못된 조합이라고 강도 높게 비판하는 사람들도 있다. 예를 들어 스탠 콕스는 한국 발 녹색성장 선언을 매우 부정적으로 평가한다.

“전 지구적 경제혼란의 징후가 처음으로 나타났던 2008년 9월, 한국의 이명박 대통령도 녹색 거품 속으로 뛰어들었다. 그는 ‘저탄소, 녹색성장’을 이루기 위해 정부가 주도적으로 시행할 일련의 계획을 발표했다. 그 계획은 바이오연료, 태양전지, 연료전지, 원자력 에너지, ‘청정’ 석탄, ‘친환경’ 자동차, LED전구, 바이오신약, 소프트웨어, 디자인 등의 영역을 아우른다. 만일 그 계획이 성공한다면, 높아진 에너지 소비나 더 많은 탄소 배출로 이어진다는 제본스 패러독스(Jevons Paradox)를 입증하는 또 하나의 사례로 기록될 것이다. 사실상 이러한 시도는 구시대적이고 무모한 산업 확장을 녹색 페인트와 첨단 기술로 포장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스탠 콕스, 2009: 8/9.)

그는 전 지구적 경제가 경제적 부를 효과적으로 창출해왔긴 하지만, 동시에 환경을 황폐하게 만들고 생태계를 파괴하는 환경적 재앙을 야기하는 데서도 그에 버금가는 역량을 지니고 있음을 보여주었다고 지적한다. 그러면서 그는 자본주의의 대안을 찾아내지 못한다면 절대로 지구를 구할 수 없을 것임을 힘주어 말한다. 이윤과 더불어 사람과 자연의 복리도 고려하는, 이른바 ‘지속가능경영의 3대 축’의 균형발전을 추구하는 ‘녹색’ 자본가들의 노력은 영구작동기계를 만들려는 노력과 마찬가지로 실패할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그 세 가지 목적은 갈등을 빚을 수밖에 없는 관계인데, 그것들이 서로 갈등할 경우 결국은 궁극적인 목적, 즉 이윤이 당연히 우선권을 차지할 것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는 자본주의 체제의 놀라운 적응력이 자본주의를 무엇보다 더 위험한 존재로 만든다고 강조한다(스탠 콕스, 2009: 20).

스탠 콕스는 경제발전이 더 빨라질수록 유해한 폐기물이 쌓이는 속도도 더 빨라질 수밖에 없음에 주목한다. 대체로 지구에는 폐기물을 처리하는 별다른 과정이 없다. 자유 에너지를 활용해 이런저런 방법으로 폐기물을 처리하지 않는 한 파멸의 암초가 될 폐기물은 그 자리에 그대로 머물게 될 것이다. 그는 그것이 자원을 소모하고 노동을 투입하는 방식으로 돌아가는 경제를 위해 세정제를 사용하고, 그 다음 비싼 돈을 들여 호수와 강둑을 정상으로 복원하는 과정을 반복하는 악순환과 같다고 말한다(스탠 콕스, 2009: 75).

생존을 위한 절대적 결핍은 수량화될 수 있고 한정적인 반면 소비와 연관된 상대적 결핍은 무한하다. 왜냐하면 상대적 결핍은 충족될수록 거기에서 비롯된 추가적인 욕망이 생겨나기 때문이다. 허먼 댈리는 상대적 결핍과 절대적 부족이 어우러지는 오늘날의 현실에서 성장은 자살행위나 다름없을 뿐더러 지구상에 살아가는 빈곤한 사람들의 불행을 심화시킨다고 주장한다. 모두의 상대적 결핍을 만족시키도록 설계된 경제는 무한히 성장해야 하며 불평등을 영속시켜야 한다(스탠 콕스, 2009: 177).

결론적으로 스탠 콕스는 “성장하지 않는 [그리고 성장을 유발하는 부의 불균형한 축적을 배제한] 자본주의 경제를 유지하려는 것은 중력이 없는 태양계를 유지하려고 애쓰는 것과 같을 것”이라고 말한다(스탠 콕스, 2009: 269). 따라서 ‘녹색’과 ‘성장’은 결코 어울릴 수 없는 모순된 조합이다.

이기상 명예교수(한국외대 철학과)  saemom@cho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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