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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을 물들이는 기도”살며 묵상하며
하태혁 목사(단해감리교회) | 승인 2020.06.01 13:54
1 주님, 주님께서 나를 샅샅이 살펴보셨으니, 나를 환히 알고 계십니다. 2 내가 앉아 있거나 서 있거나 주님께서는 다 아십니다. 멀리서도 내 생각을 다 알고 계십니다. 3 내가 길을 가거나 누워 있거나, 주님께서는 다 살피고 계시니, 내 모든 행실을 다 알고 계십니다. 4 내가 혀를 놀려 아무 말 하지 않아도 주님께서는 내가 하려는 말을 이미 다 알고 계십니다. 5 주님께서 나의 앞뒤를 두루 감싸 주시고, 내게 주님의 손을 얹어 주셨습니다. 6 이 깨달음이 내게는 너무 놀랍고 너무 높아서, 내가 감히 측량할 수조차 없습니다. 7 내가 주님의 영을 피해서 어디로 가며, 주님의 얼굴을 피해서 어디로 도망치겠습니까? 8 내가 하늘로 올라가더라도 주님께서는 거기에 계시고, 스올에다 자리를 펴더라도 주님은 거기에도 계십니다. 9 내가 저 동녘 너머로 날아가거나, 바다 끝 서쪽으로 가서 거기에 머무를지라도, 10 거기에서도 주님의 손이 나를 인도하여 주시고, 주님의 오른손이 나를 힘 있게 붙들어 주십니다. 11 내가 말하기를 "아, 어둠이 와락 나에게 달려들어서, 나를 비추던 빛이 밤처럼 되어라" 해도, 12 주님 앞에서는 어둠도 어둠이 아니며, 밤도 대낮처럼 밝으니, 주님 앞에서는 어둠과 빛이 다 같습니다.(시편 139:1~12/새번역)

‘슬럼프는 마음의 꾀병이다.’ 고개가 끄덕여지던 이 글귀가 떠오를 때가 있습니다. 이제 더는 정말 못하겠다 싶은 그런 순간들입니다. 그러나 이미 지칠 대로 지친 마음은 귀를 닫고 고개를 돌려버립니다. 그나마 남아있는 힘을 거부하는 쪽으로만 모읍니다.

말이, 깨달음이 힘을 못 쓰는 그런 순간 주님께 말씀드립니다.  “정말 더는 못하겠습니다.” 그러면 대답이 들려옵니다. “그래 많이 힘들었지. 이제 내가 할테니, 너는 그만 해도 된다.” 못한다고, 하기 싫다고, 하지 않겠다고 드린 하소연인데, 그냥 계속하게 됩니다. 대신 힘을 빼고, 주님께서 이끄시는 대로, 주시는 대로 따라갑니다.

억지로 애쓰지 않고 이끄시는 대로 흐르면 꾀병이 드러납니다. 정말 더는 못할 것이라던 현실 속에서 한참을 더 해나가니까요. 동시에 함께 계신 주님이 선명해지죠. 하늘에서뿐 아니라 스올에서도 하나님의 손이 힘 있게 붙들어 주시는구나! 말씀 그대로에 고개를 끄덕입니다. 기운을 차리면 언제 그랬냐는 듯 잊는다는 점이 문제입니다. 다시 하나님께서 곁에는 계시지 않은 것처럼 살아가곤 합니다.

▲ 대전역 주변 골목 풍경 ⓒ하태혁

상상력을 적극적으로 사용하는 묵상과 기도를 경험하면, 이를 더욱 절감합니다. 영혼의 방을 상상해서 그 안에서 예수님과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 기도를 해봅니다. 혹은 시편 말씀 그대로 온통 어디서든 함께 계신 주님을 그려보며 그 사랑의 시선 앞에 앉아 있기도 합니다. 그러면 주님의 임재가 선연해집니다. 자신을 찾아주셨다는 것만으로 가슴이 뭉클해지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끌썽입니다. 그저 시선을 마주하고 있다는 것만으로 안식을 맛봅니다.

복음서의 장면 속으로 뛰어들기도 합니다. 눈이 보지 않던 사람이 눈을 뜨게 될 때, 어둠이 서서히 밝아오는 모습을 그려봅니다. 눈앞이 조금씩 밝아오는데, 한 남자가 글썽이는 미소로 맞아줍니다. 기쁨어린 눈물로 맞아주시는 주님을 처음 만납니다. 기도를 마치고 눈을 뜨면서 깨닫습니다. 늘 함께 계신다고 믿었지만, ‘이렇게 실감하며 살았던가. 함께 계신다는 죽은 말뿐이었구나!’

말을 더 많이 하고 더 간절할수록 좋을 것이라는 착각에서 벗어나면서, 비우고 줄이는 기도로 향해왔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앎도 인간의 한계 안에 갇힌 또 하나의 틀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위해 하나님을 버리게 하소서.” 엑카르트의 기도처럼 그래서 그마저 내려놓고 신비 앞에 무릎 꿇는 방향으로 향해왔습니다. 그러다가 어느새 이런 부정신학 쪽으로만 치우쳤음을 깨닫습니다. 하나님 주신 상상력을 활용하는 긍정신학의 필요성을 맛봅니다. 긍정과 부정의 양날개로 주님을 향해야겠습니다.

물론 상상력을 사용하는 기도가 너무 자의적으로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포기하면 말씀과 성령의 이끄심 안에서 마음껏 날아오를 수 있는 날개를 꺾어 버리고 맙니다. 게다가 우리는 이미 상상력을 마음대로 사용하며 살아가지 않습니까. 함께 계신 하나님은 상상하지 않고, 긍정의 힘을 떠받들며 성공과 부에만 사용하지 않았습니까. 말씀이 그려주는 영적 실재는 그려보지 않고.

너무 놀라워 측량할 수 없는 신비, 하나님께서 자신의 앞과 뒤, 안과 밖에 함께 계신 신비를 그리고 또 그려봅니다. 그 신비가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면, 장애물이 무엇인지 주님과 대화를 나눕니다. 하나님에 대한 자신의 이미지가 너무 가부장적이고 권위적 심판자로 왜곡된 것은 아닌지. 드디어 하나님 임재 그윽한 신비가 그려지고 실감된다면, 그 안에서 머물고 쉽니다. 기도를 마치고 눈을 뜬 후, 현실 속에서도 그 여운과 향기를 느낍니다. 환상이 아닌 하나님 현존의 실재가 일상을 물들입니다.

하태혁 목사(단해감리교회)  devi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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