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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아이를 벗어나 스스로성령사건의 의미는?(민 11,16-17. 24-29; 엡 1,17-18; 2,10)
김상기 목사(백합교회) | 승인 2020.06.04 16:41

오늘은 성령강림절입니다. 하나님의 영의 활동은 구약에서 일찍부터 보도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일반적이지 않았고, 예언자들 같은 특정한 사람들과만 관련되어 있었습니다.

이 특별한 현상이 보편적이 된다면 어떻게 될까요? 좀 엉뚱한 질문으로 보이지만, 요엘 2,28-29는 이스라엘의 회복 후에 하나님께서 그의 영을 만민에게 부어주되 남종과 여종에게도 부어주실 것이라고 보도합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예언하거나 꿈을 꾸거나 환상을 볼 것입니다.

하지만 이게 ‘보편적인 성령사건’이 의도하는 것 전부일까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그 보다 훨씬 중요하고 본질적인 것이 있습니다. 요엘서는 이에 대해 말하지 않지만 이를 추론케 할 수 있는 사건이 있습니다. 민수기의 ‘성령사건’입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은 어려움에 부딪히거나 결핍을 느끼면 그때그때마다 하나님을 원망하고 모세와 하나님을 괴롭게 했습니다. 이번에는 만나에 물린 이스라엘이 고기를 달라며 각자 집앞에서 울어댑니다. 수십만 규모의 사람들이 우는 소리를 상상해보십시요.

귀를 틀어막아도 막을 수 없을 그 소리에 모세도 지친 듯 하나님께 자기 혼자서는 백성의 짐을 더이상 감당할 수 없다고 불평합니다. 차라리 죽게 해달라고 요청합니다. 하나님은 장로와 지도자가 될만한 사람들을 70명 데리고 오면 그에게서 ‘영’을 취하여 그들에게도 두어 그와 함께 짐을 지도록 하겠다고 하십니다.

그 사건이 있은 다음에 오늘 우리가 주목하고자 하는 사건이 일어납니다. 두 사람이 하나님 앞에 나아가지 않고 진에 남아 있었는데, 그들에게도 하나님의 영이 임하였습니다. 그들이 예언하는 광경을 보고 여호수아가 모세에게 이들을 말려야 한다고 재촉합니다.

그러나 모세는 그를 심한 말로 탓하면서 이스라엘 모두가 영을 받아 예언자가 되면 좋겠다고 강변합니다. 왜 그랬을까요? 백성 전체가 그와 같이 되기만 하면, 그는 지도자로서의 무거운 짐을 덜 수 있기 때문만은 아닐 겁니다.

그렇게만 되면, 백성은 모두 어린 아이같은 상태를 벗어나 주체적인 사람이 되고 광야생활의 고달픔을 스스로 이겨낼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영을 주시는 목적이 바로 여기에 있지 않을까요? 그것은 이적을 행하는 능력을 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주체적이고 성숙한 사람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그는 ‘영의 도움으로’ 스스로 사유하고 스스로 판단하고 스스로 행동하고 스스로 책임질 수 있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이를 위해 그를 믿는 모든 사람에게 그의 영을 보내십니다. 그리스도 이후 그 영은 특정한 사람들에게만 제한적으로 주어지지 않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주어질 하나님의 영은 우리를 미성숙 상태에서 성숙한 사람으로 바꿀 것입니다. 오늘의 두번째 본문인 에베소서 1,17-18; 2,10에서는 이를 위한 영의 활동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그에 따르면 하나님의 영이 하시는 일은 무엇보다도 마음의 눈을 밝혀 앎에 이르게 하는 것입니다. 앎의 대상은 하나님과 그가 하신 일입니다. 이미 예수를 믿고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에게 ‘바울’이 이렇게 말하는 것이 이상하게 들릴지 모릅니다.

하지만 위의 사건에서도 보았듯이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모르거나 경험하지 못해서 하나님을 원망했던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베푼 능력이 얼마나 큰 지도 줄곧 보아왔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겐 불평이나 원망이 그치지 않았고 그들은 위기를 언제나 그렇게 맞았습니다. 그들은 경험이 풍부했음에도 하나님을 앎에 이르지는 못했습니다.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에게 의지할 수 없었습니다.

지금 ‘바울’이 편지를 보내고 있는 에베소 교회도 비슷한 처지에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들은 영적 무지 상태에 있었고,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었습니다. 이때문에 ‘바울’은 영의 도움으로 그들의 마음의 눈이 밝혀지기를 간구합니다.

눈은 눈만 말하는 것이 아니라 감각기관을 대표하는 것으로서의 눈입니다. 우리가 감각할 수 없어서 우리 인식체계 안에 들어오지 않는 것은 우리에겐 존재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따라서 마음의 눈으로 볼 수 없다면, 볼 수 없는 그것은 우리 ‘마음’에 자리를 차지할 수 없습니다.

마음의 눈으로 보는 것은 경험의 경험 내지는 깨달음이라고 바꿔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의 영이 하시는 일입니다. 그 영을 가리켜 지혜의 영 또는 계시의 영이라고 하는 까닭도 거기에 있을 것입니다.

그와 같은 하나님의 영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알게 합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을 알게 합니다. 하나님을 믿으며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면 그 믿음이 얼마나 허망하겠습니까? 광야의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알 수 없었습니다. 그들의 마음은 여전히 이집트에 매여 있었고 그들의 영은 홍해를 건넜음에도 생존을 위협하는 환경에 압도되어 있었던 탓에 그들의 마음은 완고해지고 그들의 영은 마른 나무처럼 메말라 갔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영은 우리를 지배했던 그같은 마음을 마치 외과수술하듯 제거하시고 우리 속에 깨끗한 마음을 창조하심으로써 우리가 마음의 눈을 뜨고 하나님을 알 수 있게 하십니다. 그의 영으로 우리 안에 진실한 영을 ‘새로이 세우시기’ 때문에 우리는 그의 역사와 진리를 알 수 있습니다(시51,10-11; 겔 11,18-21; 36,25-28 비교). 이런 관점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재창조물’입니다.

그러나 이것으로 끝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그 앎과 함께 우리는 이제부터 하나님께서 법을 통해 마련하신 선한 일들 곧 사람 사랑하는 일들을 향할 것입니다. 이것은 오순절 성령 사건의 결과물인 초대교회에서 그 일들이 원형적으로 실현되었다는 것에서 확인해볼 수 있습니다(행 2,44-47). 성령강림절을 지키는 우리는 그 모습도 우리 상황에 맞게 보존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이해된 성령 사건의 핵심입니다. 성서에는 그 사건과 연관된 여러가지 이적들이 있지만, 그것들이 성령 사건의 목표도 아니고 대표도 아닙니다. 뿐만 아니라 그런 것들은 성령 사건의 보편성과 상충합니다.

하나님의 영은 우리를 성숙한 사람으로 재창조 하기 위해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우리는 그를 우리에게 보내신 하나님께 어떻게 응답할 수 있습니까? 우리의 일상에서 저 ‘선한 일들’을 하며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영으로 재창조된 피조물의 삶이며 성숙한 사람의 존재양식입니다. 성령을 따라 그렇게 사는 삶이 우리 삶의 현재 모습이 되기를 빕니다.

김상기 목사(백합교회)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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