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말씀의 잔치 Junger Prediger
답을 알고 있다고 믿는 당신에게이 사람이 죄인인 줄 아노라(요한복음 9:24-25)
이성훈 목사(명일한움교회) | 승인 2020.06.07 16:37
24 이에 그들이 맹인이었던 사람을 두 번째 불러 이르되 너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우리는 이 사람이 죄인인 줄 아노라 25 대답하되 그가 죄인인지 내가 알지 못하나 한 가지 아는 것은 내가 맹인으로 있다가 지금 보는 그것이니이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실로암 사건, 태어날 때부터 맹인이었던 사람을 예수님께서 고쳐주신 사건이 있습니다. ‘실로암’이라는 찬양곡으로 인해 전체적인 내용보다는 실로암이 더욱 유명해지긴 했지만, 이 본문에 나타난 사건은 죄의 대물림과 죄로 인해 걸리는 질병에 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 죄를 대하는 우리의 태도까지도 이야기합니다.

유명한 말씀이지만 짧게 살펴보고 지나가도록 하겠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길을 가던 중에 날 때부터 맹인인 사람을 보게 됩니다. 그때 제자들은 예수님께 그가 맹인인 이유가 누구의 죄 때문인지를 여쭙니다. 부모의 죄에 대가로 맹인이 된 것인지, 그의 죄로 인해 맹인인 것인지를 여쭈어봅니다.

혹시 이런 질문을 할 수도 있습니다. ‘날 때부터 맹인이었는데, 이 사람이 언제 죄를 범했길래 이 사람의 죄 때문이라고 말할까?’ 당시 유대인들은 어머니의 태중에서도 죄를 범할 수 있다고 여겼다고 합니다. 일부 랍비들은 야곱과 에서가 리브가의 뱃속에서 다툰 일 역시도 죄로 여겼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향해 그가 맹인인 이유는 부모나 자신의 죄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서 예수님께서 세상에 계신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시라는 이야기도 덧붙이십니다. 덧붙여진 말씀을 생각하면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 일회적 치유 이벤트가 아님은 분명해 보입니다. 하지만 그 일이 무엇인지는 불분명해 보입니다.

그 후 예수님께서는 치유의 행위를 하십니다. 우리가 잘 아는 침을 뱉어 진흙을 이기신 다음 그의 눈에 바르시고 이를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고 하십니다. 실로암은 본문 7절에도 나타나 있지만, ‘보내다’라는 뜻의 히브리어 ‘샬라흐’에서 유래된 표현으로 보입니다.

맹인을 실로암으로 보내신 예수님께서는 그로부터 떠나신 것으로 보입니다. 시력을 회복한 맹인을 본 이웃들은 그를 치료한 사람을 찾지만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보게 되었고 죄가 사라졌음을 확인받기 위해 바리새인들을 찾아갑니다. 여기까지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실로암 사건의 내용입니다.

유대인들과의 대화

이후의 이야기, 요한복음 9장 13-34절은 마치 우리나라 마당놀이와 같이 우스꽝스러운 이야기들로 가득차 있습니다. 사실 실로암 사건은 12절에서 끝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13-34절에 나타난 맹인이었던 사람과 유대인들의 대화는 죄를 대하는 당시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35절 이후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새로운 깨달음을 줍니다.

맹인이었던 사람은 자신이 치료되었음을 보이기 위해 바리새인들 앞에 섰습니다. 마침 이날은 안식일이었는데, 바리새인들은 안식일에 치료행위를 하는 일이 죄이기 때문에 치료행위를 한 사람은 죄인이라는 쪽과 죄인이 이런 이적을 행할 수 없다는 쪽으로 갈려 논쟁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논쟁 끝에 이들은 논리적 추론을 거쳐 하나의 결론에 도달합니다. 안식일에 치료행위를 한 사람은 죄인이다. 죄인은 이런 이적을 행할 수 없다. 즉 치유된 사람은 원래 맹인이 아니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래서 이들은 맹인이었던 사람의 부모를 불러 확인합니다.

맹인이었던 사람의 부모는 바리새인들 앞에서 아들은 날 때부터 맹인이었는데, 자신들은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모른다고 말합니다. 22절에 나타난 이야기, ‘이미 유대인들이 누구든지 예수를 그리스도로 시인하는 자는 출교하기로 결의하였다’라는 말은 예수님 당시의 상황보다는 예수님 승천 이후 초대교회의 상황을 반영한 것으로 보입니다.

부모의 확인을 받은 이들은 다시 맹인이었던 사람을 소환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너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우리는 이 사람이 죄인인 줄 아노라.” 너를 고쳐주신 분은 하나님이시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에 의한 이적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였기 때문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말합니다.

고침 받은 사람이 원래 맹인이 아니었을 가능성이 그 부모에 의해서 사라지자 바리새인들을 비롯한 유대인들은 이 이적은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라는 결론을 내립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이 사람을 치유한 것은 아니라는 결론이기도 합니다. 이들이 이런 결론을 내리게 된 데에는 딱 한 가지의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 사람이 죄인인 줄 아노라.”

이들은 예수님을 이미 죄인으로 규정하였습니다. 그렇기에 어떤 방식으로 생각하더라도 예수님에 의한 치유 이적은 불가능했습니다. 자신들이 납득할 수 있는 방법인 원래 맹인이 아니었다는 가설도 세워보았지만, 이 가설의 잘못은 드러났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된 기적이라는 결론으로 나아갑니다.

맹인이었던 사람은 자신에게 꼬치꼬치 캐묻는 유대인들을 향해 말합니다. “당신들은 왜 그분에 대해 이렇게 자세하게 묻습니까? 당신들도 그분의 제자가 되고 싶은 겁니까?” 이 말에 유대인들, 바리새인들은 흥분하며 대답합니다. 우리는 모세의 제자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신 줄은 우리가 알지만, 예수님은 어떤 사람인지 모른다고 말합니다.

눈을 뜬 사람은 이들을 향해 말합니다. 난 지금까지 날 때부터 맹인이었던 사람이 고침받았다는 이야기를 듣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은 죄인이 아니라 경건한 사람과 함께 하시는데, 이런 하나님의 기적을 일으켰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사람이지 않겠습니까?

이 말에 바리새인들은 또다시 분개하여 대답합니다. “어디서 날 때부터 맹인인, 태어날 때부터 죄인인 녀석이 우리를 가르치려 하냐! 우리는 죄인으로 태어난 너와는 다른 존재이기에 우리가 하는 말이 다 맞는 말이다.”

결론이 정해진 논쟁

‘답정너’라는 말이 있습니다. ‘답은 정해져 있으니까 너는 그 답을 대답만 하면 된다.’는 의미입니다. 가장 단순한 예가 연인들 사이에서 “나 사랑해?”라는 질문일 것입니다. 이 질문의 대답은 당연히 “사랑해”입니다. 영어의 경우, 연인들의 관계에 따라 ‘like’와 ‘love’를 구분해서 사용하기에 “Do you love me?”의 의미가 우리와는 조금 다르긴 합니다만, 적어도 우리나라에서는 정해진 답이 있습니다.

지금 바리새인들은 맹인이었던 사람에게 ‘답정너’의 질문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라는 사람이 죄인이라고 판단했다. 너는 그가 죄인이라고 대답하면 된다.’ 바리새인들의 판단은 율법과 규례에 따른 안식일 법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 치유를 받은 사람은 율법 이전에 놓여있는 하나님의 원칙으로 반박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인을 통해 이적을 행하시는가? 하나님께서는 죄인과 함께 하시는가를 질문합니다. 하나님께서 오직 의인과 함께하시며 그에게 능력을 주신다면, 나를 고친 사람이야말로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 의인이 아니냐고 묻습니다.

바리새인과 맹인이었던 사람의 대화 속에서 나타나는 논쟁은 유대인에게 있어서 중요한 논쟁일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과 율법 이전에 놓여있는 하나님의 원칙이 서로 충돌할 경우 자신들은 어떤 법칙을 따라야 할지에 대한 논쟁입니다.

이런 중요한 논쟁이 마당놀이와 같이 해학과 풍자가 넘치는 우스개가 되어버린 이유는 바리새인들이 이미 정답은 ‘우리가 가진 율법과 전통이다’라는 결론을 내려놓은 상태에서 논쟁에 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날 때부터 맹인이었던 사람은 바리새인들에 비하면 아무 지식도 없는 사람입니다. 어쩌면 그는 저잣거리의 그 누구보다도 지식이 없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와 바리새인들의 대화를 보면서 바리새인들이 틀렸음을 알게 됩니다. 그렇기에 이 논쟁은 우스개가 됩니다.

이와 동시에 요한복음은 바리새인들의 태도를 통해 죄의 문제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맹인이 맹인인 이유는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나타내기 위함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에 죄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이야기를 하십니다. 하지만 바리새인들은 계속해서 ‘죄’에만 집중합니다.

‘안식일 법을 어긴 예수는 죄인이다’, 여기에만 집착합니다. 그렇기에 그들의 판단력은 흐려집니다. 이들의 판단력이 얼마나 흐려졌으면 자신들이 뻔히 다 아는, 날 때부터 맹인이었던 사람이 원래는 맹인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는 가설을 세웠겠습니까?

그들의 마지막 대답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들이 예수님을 인정하지 않았다고 해도, 맹인이 눈을 뜨게 된 일은 하나님의 기적이라고 인정했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자신들 앞에서 올바른 이야기를 하는 그,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한 그에게 ‘죄 가운데서 난 자’라고 말하며 그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지 않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한 가지를 생각해야만 합니다. 만약 예수님과 요한복음이 바리새인들에 대해 비판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다면, 어떤 점을 비판하고 있는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들이 주장하는 ‘율법’ 자체를 비판하는가? 아니면 율법만을 중시하며 답정너 식의 태도를 취하는데다 어떤 집단을 죄인으로 규정하고 그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지 않는 그들의 ‘태도’를 비판하는가? 저는 당연히 후자라고 생각합니다.

요한복음에 나타난 바리새인들의 태도는 지금 우리 사회에서도 아주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가장 좋은 예는 TV 토론회일 것입니다. 양쪽에 마주 앉은 패널들은 결코 자신의 의견을 굽히지 않습니다. 때로 논리도 없고 근거가 없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지만 토론에 나오기 전에 자신이 가진 생각을 결코 버리지 않고 이를 주장합니다.

세상 속에서 이런 모습을 보는 것은 차라리 나을지도 모릅니다. 목사라는 직분을 가지고 말씀을 읽어나갈 때마다 가장 안타까운 경우가,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모습과 복음서에 나타난 바리새인들의 모습이 겹쳐 보일 때입니다. 그리고 이런 일은 너무도 자주 마주하게 됩니다.

많은 성도님도 자신이 옳다고 여기는 생각에만 빠져 다른 이들의 이야기를 듣지 않는 경우가 너무 많이 있습니다. 심지어 자신과 다른 생각을 가진 이들을 ‘잘못된 사람’으로 규정하고 상대방이 잘못되었다고 몰아가기도 합니다. 이는 요한복음에 나타난 바리새인들의 모습입니다. 빛이신 예수님을 만난 사람의 태도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35-41절을 통해 말씀하십니다. 이 빛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은 차라리 맹인인 편이 좋다고 말씀하십니다. 앞을 볼 수 있는데도 앞에 계신 예수님을 보지 못하고 자신들의 아집에만 빠져 세상을 판단하려는 사람은 여전히 죄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바리새인의 태도를 따라가지 않는 성도님들 되시길 바랍니다. 참된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볼 수 있는 성도님들 되시길 바랍니다. ‘내가 다 안다’라는 생각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뜻과 그리스도의 길을 먼저 구하시는 성도님들 되시길 바랍니다.

여러분들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빛을 바라보며 살아가시는 그곳에서 누군가를 죄인, 잘못된 인간으로 낙인찍고 몰아가며 세상을 분열시키고 다툼을 야기하는 일들이 사라지게 될 줄 믿습니다. 그리고 그런 것들이 사라진 이 땅이 천국이 되어갈 줄 믿습니다.

이성훈 목사(명일한움교회)  joey8100@naver.com

<저작권자 © 에큐메니안,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성훈 목사(명일한움교회)의 다른기사 보기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여백
신문사소개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서울시 종로구 김상옥로 30, 402호  |  제호 : 에큐메니안
대표전화 : 070-4252-0176  |  팩스 : 0303-3442-0176  |  등록번호 : 서울 자 00392  |  등록일 : 2012.10.22
발행인 : 윤인중  |  편집인 : 이정훈  |  청소년보호책임자 : 윤인중  |  E-mail : webmaster@ecumenian.com
Copyright © 2020 에큐메니안. All rights reserved.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