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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은 곳을 향하여(處衆人之所惡,故幾於道)누군가의 친구로 산다는 것
홍인식 목사(순천중앙교회) | 승인 2020.06.09 17:04

천사의 정원

저는 2014년 2월 한국의 신학생 12명과 함께 2주일 동안 해방신학 수학여행을 인도했습니다. 브라질과 아르헨티나의 해방신학의 목회 현장을 방문하여 학자들과 그리고 목회자들과 만나 해방신학에 대한 현장 공부를 하는 기획 프로그램이었습니다.

그 여행 중에 우리 일행은 브라질 상파울루에서 차로 남쪽으로 약 두 시간 정도를 달려 도착하는 자르징 안젤라(Jardin do angela 천사의 정원)시를 방문합니다. 그곳에 마르티르(순교자) 교회를 방문하고자 하는 목적이었습니다. 이 공동체 교회는 1960년대 말부터 성직자들이 아무도 돌보지 않는 빈민촌으로 들어가 설립해 해방신학의 실천 현장이 된 기초공동체 중 하나입니다.

이 공동체는 지금도 8000여개의 천막이 있는 빈민촌에서 60여만 명이 모여 사는 이 도시에서 가난한 사람들의 마음의 고향과 어머니 같은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공동체 책임자는 자이메 크로우(Jaime Crowe) 신부입니다. 철저한 보수적 신앙을 고수하는 아일랜드의 가톨릭 집안에서 태어나 사제가 된 그는 1969년 브라질에 도착합니다.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군사독재와 빈곤이었습니다. 그는 군사독재의 탄압에 의해 죽어가고, 굶주리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그래도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십니다.’라고 말하기 어려웠습니다.

당시 브라질의 시대 상황은 어두웠지만 교회는 고난 받는 자들과 함께할 연민과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초대 브라질주교회의 의장으로 제2차 바티칸공의회를 주도한 브라질 빈곤층의 대부 엘데르 카마라 주교가 있었고, 독재정권에 저항하며 빈자와 피억압자들을 지켰기에 ‘희망의 추기경’으로 불린 상파울루대교구장 에바리스투 아릉스 추기경 등이 그들이었습니다.

이곳에서 목회를 시작한 자이메(Jaime) 신부는 “교회가 기초공동체·인권·노동·빈민 사목 4가지를 우선 선택하도록 한 아릉스 추기경의 뜻에 동참해 이곳에 왔다.”고 했다. 당시 이 지역은 연간 10만 명당 120명이 살해돼 전 세계에서 살인율이 1위인 지역이었습니다.

자이매 신부는 이렇게 말합니다. “경찰서 하나 없는 이곳에서 경찰이 하는 거라곤 말썽이 생기면 총을 들고 와 사람들을 쏴 죽이고 가버리는 것이 다였죠. 인구 60만 명의 도시에 병원 하나가 없어 응급조치만 하면 살 수 있는 환자들도 쉽게 죽어갔어요.”

가난·폭력·마약·살인으로 점철된 지역이었습니다. 또한 미국을 등에 업은 군부독재의 탄압은 갈수록 거세졌다.  1964~78년 엘살바도르 오스카르 로메로 대주교 등 성직자 72명이 암살당합니다. 노조 지도자였던 자이메(Jaime) 신부의 절친한 친구도 암살당했습니다.

그 뿐만 아니었습니다. 카톨릭 교회 내부의 탄압도 날로 심각해져 갔습니다. 1978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등장한 뒤 교황청마저 해방신학을 공산주의로 매도하며 탄압에 나섰습니다. 요한바오로2세는 남미의 교구 분할 등을 통해 해방신학을 와해시켜갔다. 정말 그 시절은 기도 없이 버티기 어려운 때였습니다.

그러나 자이메(Jaime) 신부는 이 빈민촌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는 가톨릭을 넘어 루터회, 감리교, 침례교, 오순절, 장로교 등 개신교 교회들과 손잡고 지역문제를 해결했습니다. 이 지역에서만 기초공동체가 16개로 늘었고, 공동체에선 성서를 함께 읽고 재봉과 제빵, 미용 등 기술을 가르치고 심리치료를 해갔습니다.

이 예배당 벽엔 아마존 열대림에서 노예노동과 인권침해, 환경 훼손 등에 저항하다 암살당한 도로시 스탱 수녀와 로메로 대주교를 비롯한 순교자의 사진들이 걸려 있습니다.

“이제 살인율은 10만 명당 25명으로 낮아졌어요. 2008년엔 250병상 규모의 시립병원이 세워졌지요.”라고 말을 하는 자이메(Jaime) 신부의 주름진 얼굴에 옅은 햇살이 비치고 있었습니다. 느리지만 가느다란 희망을 그와 빈민들이 함께 만들어가고 있는 장면을 볼 수 있었습니다.

자이메(Jaime) 신부는 누구도 가기 싫어하는 그곳으로 가서 오늘 그 자리에서 하나님나라 건설을 향한 희망의 씨앗을 키우고 있습니다.

▲ 자이메 크로우(Jaime Crowe) 신부

혐오 세상

사회 비평가 박권일은 마르크스의 공산당 선언의 첫 문장을 패러디해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하나의 유령이 한국을 떠돌고 있다. 혐오라는 유령”그는 우리 한국 사회에서 헤아릴 수 없는 많은 것들이 혐오의 대상이 되었다고 지적합니다.

사람들은 “전라도 출신이라서, 이주 노동자라서, 동성애자라서, 운동권이라서, 여성이라서 가난해서 노동자라서 피부색깔이 짙다고 해서” 등등의 갖가지 이유로 혐오당하고 있습니다.(혐오주의, 알마출판사, 2016)

혐오는 참 무서운 감정입니다. 이 감정에 휘둘리게 되면 “눈에 뵈는 것이 없어집니다.” 상대방은 오직 타도의 대상일 뿐입니다. 혐오주의에 빠진 백인들의 눈에는 흑인들은 없어져야 할 대상이며 흑인은 모든 사회혼란의 원인입니다. 혐오에 빠진 선주민들의 눈에 이주민들은 추방시켜야 할 존재입니다. 이주민과 난민들이 높아져 가는 실업율과 범죄증가의 원인입니다.

혐오의 감정은 우리의 이성적인 판단력을 마비시킬 뿐만 아니라 편협한 지식만을 습득하게 만들어서 자신이 가지고 있는 혐오감정을 증폭시키기도 합니다.혐오의 감정은 우리를 무감각한 존재로 만들어 갑니다.

혐오로 인하여 고통 받는 대상의 아픔과 상처, 이들의 쓰러짐과 죽음은 그들의 관심대상이 아닙니다. 이렇게 혐오의 감정은 우리 사회를 어둡게 만드는 어둔 구름입니다. 그런데 왜 혐오감정이 우리 가운데 성행하고 있는 것일까요?

그런데 조금 더 혐오의 감정에 대한 연구를 심화해 보면서 관찰하면 우리는 혐오는 원인이 아니라 어떤 원인에 의한 증상이라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혐오는 원인이 아니라 오히려 결과라는 것입니다.

여러 측면에서 그 원인을 진단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심리학자들은 혐오의 감정은 충실한 자기정채성의 결여에서 온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다시 말하면 자기가 누구인가에 대하여 확신이 없는 사람들이 다른 사람을 향하여 혐오를 드러내곤 한다는 것입니다.

정치적으로 자신의 입장을 강화하고 권력을 잡기 위해서 혐오의 대상을 만들어 내기도 합니다. 히틀러의 유대인 혐오주의 같은 것이 그것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요즘 한국 사회에서도 정치적으로 이러한 혐오현상을 부추기는 세력들이 있고 그것도 기독교내에서도 성행하는 현상을 우리는 목도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 혐오라는 중상 뒤에 자리 잡고 있는 원인은 무엇이겠습니까? 특히 믿는 사람으로서 우리는 혐오하는 증상을 지속적으로 확대 재생산하는 종교적-신학적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을 오늘 우리들에게 주어진 성경말씀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이웃에 대한 잘못된 개념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을 것입니다. 이웃이 누구인가 다시 말하면 우리의 친구가 누구인가라는 개념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친구는 누구인가?

오늘 우리의 본문인 누가복음에는 예수님의 친구들에 대하여 소개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친구는 누구입니까?

친구(親舊)는 가까이 지내는 사람으로서 오랜 세월 동안 정을 맺어오고 친분을 유지하는 사람들입니다. 피가 한 방울도 섞이지 않았지만 함께 생활하면서 친해져 사실상 반쯤 가족인 인간관계를 친구라고 하기도 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오랫동안 같이 지내면서 먹고 마시며 함께 지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친구를 사귈 때 주로 같은 부류의 사람들과 친분 관계를 맺게 됩니다. 끼리끼리 모인다는 말로 표현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늘 우리는 가까이 지내는 사람들, 그리고 우리들과 비슷한 사람들끼리 친분을 맺고 사귐을 갖습니다. 그러나 그 반면에 우리와 생각이 다르고 문화도 다르고 행동거지가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는 경계심을 갖습니다. 그리고 그 경계심이 발전하고 강화되면 혐오의 감정으로까지 발전하게 됩니다.

나와 다른 사람들은 나의 친구가 아니고 또 될 수도 없기 때문에 우리는 그들을  무시하거나 관심을 갖지 않습니다. 그들에 대하여 알고자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나와 다른 사람들을 향한 혐오현상이 발생하게 될 때 우리들은 쉽게 그 감정의 물결에 동조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나의 친구가 아니고 내가 아는 사람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사시던 당시의 유대 사회도 상당한 혐오의 사회였습니다. 당시 혐오의 대상은 주로 가난한 계층들을 향한 것이었습니다.

당시 사회의 혐오대상은 첫째는 과부와 고아와 나그네였습니다. 둘째는 병자와 장애인들이었습니다. 셋째는 사마리아 사람들이었습니다. 넷째는 율법을 범하고 있는 가난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다섯째는 이방인이었습니다. 여섯째는 여자들이었습니다. 일곱째 세리, 세금징수자들과 같은 민족의 반역자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주류 사회로부터 철저히 외면을 당했고 관심 밖의 존재들로 살아가는 존재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인간으로 존중받지 못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종교지도자들은 이들과 결코 친구가 아니었습니다.

작년 개봉한 영화 ‘기생충’에서 박 사장이 냄새에 대하여 언급하는 대사가 나옵니다. 기택 가족이 박 사장에 들어가 말투와 옷차림 등을 겉으로 보이는 것을 숨길 수 있어도 박 사장 가족에게 숨길 수 없는 것. 바로 보이지 않는 냄새였습니다.

박 사장은 냄새를 통하여 기택 가족을 비롯한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혐오를 표현합니다. 박 사장에게 냄새나는 가난한 사람들은 인간의 존엄성이 없는 것처럼 생각되는 존재들이었습니다.

영화 끝 무렵에 박 사장은 또 한 번 냄새를 참지 못하겠다는 제스처를 취하게 되고 결국 혐오의 대상이었던 가난한 기택은 박 사장을 살해하기에 이릅니다. 박 사장에게 기택은 결코 친구가 될 수 없었습니다. 기택은 박 사장에게는 혐오의 대상이었을 분입니다. 그리고 결국에는 박 사장에게 불행을 가져다주었습니다.

우리 모두에게 친구는 나하고 가깝고 비슷한 사람들입니다.

예수의 친구

그러면 예수님의 친구는 누구이겠습니까? 예수님은 누굴ㄹ 친구 삼아 이 땅위에서 살아오셨을까요? 오늘의 본문은 예수님이 갖고 계셨던 친구의 개념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어느 날 예수님은 길을 가시다가 레위라는 이름을 가진 세금 징수자 한 사람을 만납니다. 그리고 그를 제자로 부릅니다. 이에 감격한 레위는 예수님을 자신의 집으로 초대해서 음식을 대접합니다. 그런데 레위의 친구들이 다른 세금 징수자들도 자리를 함께 했습니다.

그 외 다른 사람들도 함께 했습니다.  성경에 기록은 없지만 아마도 당시 주류사회가 그리 달갑게 여기지 않는 인물들이었음에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이 장면을 본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 선생들, 즉 당시의 상류층 사람들이 이를 비판합니다. “왜 예수는 역겨운 사람들과 자리를 함께 하느냐?“ 하는 문제를 제기합니다.  친구가 되어서는 안 될 사람들(죄인들)과 어울리는 예수를 비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비판 앞에 예수님은 답변하십니다. “건강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사람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서 회개시키러 왔다.” 이런 답변을 통하여 예수님은 자신이 소위 바리새인들이 혐오하고 있는 죄인들의 친구임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입장은 분명합니다. 예수님에게 친구가 될 수 없는 사람은 없다는 것입니다. 아니 오히려 그 분에게는 사회가 싫어하고 혐오하는 사람들이 그의 친구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들이 좋아하는 사람들보다 모든 사람들이 싫어하고 혐오하는 사람들 그래서 이 사회에서 외롭고 힘든 사람들의 친구가 되기 위해서 이 땅으로 오셨다는 것입니다.

빌립보서는 이 같은 예수님의 생각을 더욱 뚜렷하게 밝혀주고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모습을 지니셨으나, 하나님과 동등함을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서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과 같이 되셨습니다.(빌리보서 2:6~7)

예수님은 하나님이셨지만 그보다 훨씬 못한 존재인 인간과 친구가 되기 위해서 인간의 몸을 입으셨다는 것입니다. 신이 신의 입장에서 바라보면 혐오의 대상이기 쉬운 인간이 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모든 신들이 싫어하고 혐오하는 한계가 뚜렷한 인간존재가 되기 위해서 스스로 신의 자리를 벗어 던지는 신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런 면에서 바울은 예수님을 죄인의 친구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좋아하는 사람들과 어울리기를 선호합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사람들이 싫어하고 혐오하는 사람들을 만나거나 친구가 되거나 혹은 혐오스러운 장소를 찾아가기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모습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것을 넘어서십니다. 일반 사람들이 가기 싫어하는 곳으로 가십니다. 이런 면에서 예수님은 친구의 범위를 확대하십니다. 그에게 있어서 친구는 그와 가까운 사람들만이 아닙니다. 그에게 있어서 친구는 자신과 취미가 같고 경제적 수준이 비슷한 사람들만이 아닙니다. 예수님에게 있어서 친구는 친밀성, 경제적 문화적 그리고 학문적 수준이 같아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에게는 누구나가 친구가 될 수 있습니다. 아니 그 분은 오히려 이 사회가 소외시키고 외면하고 관심을 두지 않고 혐오함으로서 어느 누구의 친구도 될 수 없고 친구도 없는 사람들의 친구가 되십니다.

더러운 곳에 처하다

도덕경은 물의 특징 중의 하나를 이렇게 표현 합니다.

처중인지소오, 고기도야(處衆人之所惡,故幾於道)
물은 대중들이 싫어하고 증오하는 곳에도 처하고 흐릅니다.
그래서 물처럼 사는 것은 도(道)와 가까워지는 것입니다.

물은 무엇과 함께 섞이는 것을 자신이 선택하지 않습니다. 그냥 그렇게 흘러갈 뿐입니다. 가는 곳에 깨끗한 물고기들이 살고 있으면 그곳에서도 흘러갑니다. 흘러가는 길에 더러운 오물들이 가득하더라도 물은 마다하지 않고 흘러갑니다. 그리고 오물이 가득한 곳을 결국에는 깨끗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정화작용을 합니다.

물은 사람들이 싫어하는 낮고 천하고 더러운 곳에 머물려 다른 존재들에게 수분을 공급합니다. 그리고 그 존재들로 하여금 생명을 이어가게 만들고 또한 새로운 싹을 틔우게 만듭니다. 노자는 이러한 물의 모습이 도를 깨달은 사람이 마땅히 보여야 할 삶의 태도라고 말합니다.

성경에서도 물은 이런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내가 너희에게 맑은 물을 뿌려서 너희를 정결하게 하며, 너희의 온갖 더러움과 너희가 우상들을 섬긴 모든 더러움을 깨끗하게 씻어 주며, 너희에게 새로운 마음을 주고 너희 속에 새로운 영을 넣어 주며, 너희 몸에서 돌같이 굳은 마음을 없애고 살갗처럼 부드러운 마음을 주며, 너희 속에 내 영을 두어, 너희가 나의 모든 율례대로 행동하게 하겠다. 그러면 너희가 내 모든 규례를 지키고 실천할 것이다.”(겔 36:25~27)

물은 우리의 더러운 곳에 머물면서 우리를 정화시켜 줍니다. 물세례의 의미도 바로 이런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말의 “냉수 마시고 속 차린다.”의 의미도 매한가지 일 것입니다. 이 말은 찬 물마시고 정신이 번쩍 나서 개과천선한다는 의미보다는 물로 인하여 내 안의 더러운 마음이 씻어져 새로운 마음이 솟아난다는 의미가 더 강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유의할 부분이 있습니다. 그것은 물이 우리의 더러움을 씨ᅟᅡᆺ겨내기 위하여 그 자신이 더러워진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성육신을 이해하는 데 중요합니다. 물이 더러운 것을 씻어 준다는 의미는 다른 것의 더러움을 대신 떠맡는다는 의미입니다.

물에다 더러운 걸레를 빨 때 물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습니다. 다만 담담하게 걸레의 더러움을 대신 떠맡고 걸레를 깨끗하게 해 줍니다. 세상허물을 대신 짊어지고 가는 예수님의 모습이 이 같은 물의 모습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요한은 자기 앞을 지나가는 예수님을 보고 이렇게 말합니다. “보시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입니다.”(요한 1:29)

예수살기는 이것입니다. 사람들이 더럽다고 혐오하고 멀리하는 그 곳의 존재들을 오히려 사랑하고 이해하고 관용하고 품어주는 것이 예수 살기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 교회와 믿는 이들은 어떤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까?

일반적으로 사회에서는 개신교는 여성, 노인, 난민, 다문화가정, 성소수자, 장애인, 노숙자, 빈민, 노동자 등에 대하여 혐오적 태도를 보이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지난 주 발표된 2020년 기독교윤리실천운동의 교회신뢰도 조사의 결과를 보면 무엇이 우리의 문제인가를 보게 됩니다.

한국교회 전반에 대한 신뢰도는 31.8%, 불신은 63.9%로 나왔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30대는 전체 73.5%, 40대는 74.7%가 한국교회를 신뢰하지 않는다고 응답했다는 사실입니다. 60대 이상에서만 한국교회를 신뢰한다는 응답(48.9%)이 신뢰하지 않는다는 응답(42.3%)보다 높게 나타났습니다.

'한국교회는 교회 밖 세상과 잘 소통하고 있느냐'는 질문에는 2017년 조사보다 4.1% 하락한 34.6%가 그렇다고 동의했습니다. '한국교회가 사회문제 해결이나 사회 통합에 기여하고 있느냐'는 질문에도 64.7%가 그렇지 않다고 답했습니다.

그러면서 이번 여론 조사에 사람들은 교회의 배타성 극복이 큰 과제임을 분명히 해습니다. 이번 조사에서 개신교인이 개선해야 할 점으로 '타인에 대한 배려 부족'(26.6%), '배타성'(22.7%) 비율이 높게 나왔습니다.

교회가 사회봉사 활동을 가장 많이 하는데도 기독교인은 배타적이라는 이미지가 형성된 데 대해, 정연승 교수는 "사회와의 소통 부족과 분열된 모습에 원인이 있다고 생각한다. 지금 시대에는 물질적 지원보다 사회적 약자를 위한 공감과 타인의 입장을 이해하고 배려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이 조사에서도 드러났듯이 우리 믿는 이들이 다른 사람을 품어주는 능력이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예수살기는 물처럼 “대중들이 싫어하고 증오하는 곳에도 처하고 흘러야 합니다.”혐오를 조장하고 발흥하는 종교가 아니라 오히려 그 곳에 처하면서 그 허물을 대신 짊어지고 조용히 살아가는 물 같은 모습을 보여야 합니다. 전도가 무엇입니까? 예수님처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처럼 살아감으로서 전도가 이루어지는 것 아니겠습니까?

물처럼 살다 간 사람들

기독교는 물처럼 남이 싫어하는 곳, 혐오하는 곳을 마다하지 않고 찾아가서 그 허물을 대신 짊어지고 아무런 말없이 살아갔던 신앙의 위대한 인물들로 인해서 지금까지 이 땅위에서 생명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그런 삶을 지향해야 합니다. 더러운 것을 피하고 증오하고 혐오하는 자세에서 벗어나서 상대방에 대하여 보다 더 알아가고 이해하려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그런 삶을 자세를 가짐으로서 우리는 보다 더 사랑이 많은 사람이 되어 갈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 세상은 기독교에 진리가 있음을 보게 되고 알게 될 것입니다.

물은 대중들이 싫어하고 증오하는 곳에도 처하고 흐릅니다. 그래서 물처럼 사는 것은 진리(眞理)와 가까워지는 것입니다.

아시아의 위대한 스승 한 분에게 물었습니다. “선생님, 나에게 어떤 종교가 제일 좋은 종교입니까?” 스승이 말합니다. “당신을 매 순간 더 좋은 사람으로 만들어가는 종교가 제일 훌륭한 종교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당신을 보다 더 자비로운 사람으로, 보다 더 섬세한 사람으로, 보다 더 자유로운 사람, 보다 더 사랑의 사람, 보다 더 인간적인 사람, 보다 더 책임있는 사람으로 만들어 가는 종교입니다. 이런 사람으로 당신을 만들어가는 종교가 바로 당신에게 가장 좋은 종교입니다.”

오늘 여러분의 신앙은 여러분을 어떤 사람으로 만들어 가고 있습니까?

처중인지소오, 고기도야(處衆人之所惡,故幾於道 물은 대중들이 싫어하고 증오하는 곳에도 처하고 흐릅니다. 그래서 진리입니다.)의 삶을 살았던 예수님을 닮아가고 그 마음을 우리의 삶에 담고 그를 따라가면서 결국 예수님을 살아가는 우리들이 되어야겠습니다.

더디게 흐르더라도, 우리

- 정인영

너와 나, 한 줄기 이루어
너와 나, 두 갈래로 흐르다가
다시 넉넉한 품으로 모이는
물의 생애를 보라

울퉁불퉁 자갈길도
구석지고 외진 곳도
따지지 않고 찾아가
부드러운 손길 되어 흐른다

아주 작은 물줄기라도
흐린 물 맑게 하는
꾸준한 진실 닮아

우리,
힘을 자랑하지 않고
사랑의 힘을 지니게 하소서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절벽에서
수평선 보이지 않는 바다까지
너니 나니 없이 동행하는 물처럼
서로 각진 마음 내려놓고
흐르는 삶 되게 하소서

홍인식 목사(순천중앙교회)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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