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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괘(乾卦)로 본 예수 소전(小傳)(상)역과 성서의 해석학적 해후(2)
이호재 원장(자하원) | 승인 2020.06.09 17:21

성서와 역을 맥락적으로 해석한다는 것은 독자들에게 상당히 생소하게 와 닿을 수도 있다. 대중에게 역은 점술서라는 편견과 성서와 같은 신성한 문서와 비교한다는 것 자체가 그리스도교인에게는 불경스러운 일로 여겨질 수도 있다. 그러나 동아시아 지성인에게 역은 지혜서이자 우주철학서로 성서와 비견되는 위상을 가지고 있다.

당연히 다원적 종교전통에서 살았던 한국의 해석학적 전통은 ‘종교와 종교의 만남’, 종교간 텍스트의 대화’에 상당히 익숙한 종교 문화에서 형성된 것은 역사적 사실이다. 더구나 그리스도교만 하더라도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종교간 대화에 문을 열었고, 천주교, 개신교 등 한국의 7대 종단이 가입한 한국종교인평화회의(KCRP)에서도 종교간 대화와 화합은 주요한 종교사업으로 추진 중이다. 이런 측면에서 변찬린이 성서와 역을 대화시키려는 지향점은 종교 간 대화의 지평을 확대하고 확산시킨 선구자적 작업이다.

앞 회에서 우리는 요한계시록 4장 3절에 “보좌에 앉으신 이”가 ‘벽옥과 홍보석’이라는 색채의 상징과 우주의 생성 근원이라는 ‘태극’이라 하여 ‘하나님=태극’이라고 논증하였다. 그럼 성서의 주인공인 예수는 역에서 어떻게 표상이 되고 있을까? 예수는 주역의 대표괘인 건위천(乾爲天)이다.

▲ 태극과 건위천

이번에 소개하는 글은 변찬린이 1985년 2월 22일 『요한계시록 신해』를 탈고하고, 심신이 탈진한 상태에서 죽기 3개월 전에 어느 종교 잡지에 실은 글로 알려져 있다. 독자들은 이 글을 읽을 때 35년 전 ‘목구멍으로 물 한 방울 못 마시는’ 극한의 육신의 고통 속에서도 자신의 종교적 지향점의 하나였던 역사시대와 영성시대의 가교 역할과 동서양의 사유체계를 회통하고자 했던 한 구도자가 절체절명의 순간에 남긴 마지막 글이라는 점을 염두에 두고 읽기 바란다. 글이 정갈하지 않고 문맥이 부드럽지 못한 것은 이런 정황을 반영하고 있지만 원문과 동일하게 보존하여 학술적 기록으로 남긴다.

『乾卦로 본 예수 小傳』의 전문을 2회에 나누어 싣는다.

乾卦(건괘)로 본 예수 小傳(소전)(상)(1)

머리말

주역이라 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신수점이나 치는 미신으로 오해하고 있다. 미아리 고개에 가면 주역 점을 치는 점장이 집들이 성업을 하고 있다. ‘무슨 도사’, 무슨 영통인으로 자칭하며 주역 점을 치는 그들도 역의 심원한 진리는 조금도 모르고 부질없이 육효(六爻)만 뽑는 장난을 치고 있을 뿐이다.

주역은 인류 최고의 지혜서요 최고로 난해한 문서이기 때문에 이것을 해독하지 못한 소인배들이 점을 치는 문서로 타락시켰던 것이다. 기독교인들은 성경과 주역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생각하고 있다. 더구나 자기들이 소속한 교파의 틀에 굳어지고 교리의 노예로 전락한 심령일수록 다른 종교의 경전을 이단시하는 독선적 사고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성경은 하나님이 인류를 위해 계시하신 문서이기 때문에 다른 종교의 경전과도 깊은 관계가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성경도 제대로 해석할 줄 모르는 기독교 목회자들은 유교, 불교, 도교, 힌두교 경전에는 너무나 무지함을 솔직히 자인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돌아갈 때 초교파나 초종교운동은 열매를 거둘 것이다.

지금 서구의 과학자들은 역경의 비밀을 해독하기 위해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현대 물리학중 양자물리학을 파고드는 학자일수록 주역을 공부하고 있는 사실을 우리들은 깊이 인식해야 한다. 성경과 역경은 무관한 문서가 아니다. 우리는 성경적 입장에서 역경을 이해할 때 온유한 눈길로 다른 종교의 사람들을 대면할 수 있고 대화의 통로가 열릴 것이다.

주역에는 64괘가 나온다. 그러나 근본은 건괘(乾卦)와 곤괘(坤卦)가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건곤 이괘(二卦)만 정독하면 역경에 바르게 입문한 것이 된다. 창세기 1장 27절에 보면 하나님은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였다고 했다. 주역에서는 이것을 건도성남(乾道成男) 곤도성녀(坤道成女)로 표명하고 있다. 최초로 창조된 남자와 여자는 아담과 하와였다. 아담은 건도성남한 인격이었고, 하와는 곤도성녀한 인격이었는데 이들은 타락했다.

▲ 유품의 신문기사의 헤드라인 기사

때문에 첫 아담 대신 <마지막 아담>으로 오신 분이 예수였다. 아담이 타락 이후 지구상의 유일한 사람은 아담으로 오신 예수였다. 그러므로 주역의 자리에서 보면 예수는 <건괘=건위천(乾爲天)>에 해당하는 존재였다. 때문에 건위천에 육효를 풀어보면 사복음에 기록된 예수의 생애가 기록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건괘를 육효의 부호로 풀이하면 다음과 같다.

▲ 건위천(乾爲天)

그런데 건괘에 육효를 풀이할 때 용(龍)이라는 술어를 사용한다. 기독교에서는 용은 마귀의 상징으로 사용하지만 역에서 사용하는 용의 개념은 서양인들이 생각하는 <드라곤>이라는 악마의 개념과는 전혀 다르게 사용된다는 점을 먼저 이해해야 한다. 주역에서 비유로 사용하는 용은 악마가 아니라 만물을 생성 변화시키는 능력있는 존재를 상징하므로 성인이나 성왕을 뜻하고 있다.

그럼 이제부터 건위천에 나타나는 육효를 풀어 예수의 소전을 구성해 보자.

1. 잠룡이신 예수

주역을 보면 건위천의 첫 효를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초구(初九) 잠룡물룡(潛龍勿用) 상왈(象曰) 잠룡물룡(潛龍勿用) 양재하야(陽在下也). 〈잠복한 용 함부로 날뛰지 않고 오직 힘을 기르면서 때를 기다린다. 양의 힘이 충만한 용이지만 지금은 아직 아래의 위치에 있는 것이다〉 이 초구(初九)에 나타난 잠룡으로 예수의 생애를 풀어보자. 사복음을 사경해 보면 30세가 될 때까지 예수의 생애는 기록되지 않고 있다. 누가복음을 보면 예수가 복음을 가르치기 시작한 때를 30세로 잡고 있다(눅 3:23).

그럼 예수가 3-30세가 되기까지 무엇을 하였을까? 보병궁 복음을 쓴 리바이 도링이나 인도의 구루인 라즈니쉬는 예수가 30세가 되기까지 인도와 티베트등을 순례하면서 불교나 힌두교 성자들에게서 명상법을 배우고, 불교나 힌두교, 자아나교의 진리를 전수 받았다고 제멋대로 기록하고 있다. 예수는 30세가 되도록 인도나 티베트에서 수도한 것이 아니라 그는 나사렛 한촌(寒村)에서 목수 요셉의 가업을 도우면서 무사자통(無師自通)의 수도 생활을 남몰래 했다.

그는 하나님이 독생자였으나, 아직도 민중 속에 깊이 숨어서 나타나지 않은 잠룡이었다. 30세가 되도록 예수는 나사렛 한촌에서 목수 일을 하면서 가난하고 병들고 억눌림을 받고 소외당한 민중들과 생활을 같이하면서 그들의 황무(荒蕪)한 마음에 복음의 씨앗을 뿌릴 날을 기다리면서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예수는 가난한 이웃과 함께하면서 인간들이 경험하는 가난의 의미를 깨달았고 병든 자들과 함께하면서 병든 자들의 고통이 어떤 것인지를 친히 목격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그는 눌림받는 자들과 슬픔을 함께하였고 민중의 가슴속에 뿌려질 생명의 복음이 무엇인지를 깊이 체험하기 위해 잠룡처럼 민중 속에 숨어 30년이란 세월을 기다리고 있었다. 예수를 가르친 스승은 아무도 없다. 예수는 생이지지(生而知之)로 무사자통한 분이었다. 그는 이미 12세 때 예루살렘 성전에서 랍비들과 진리를 토론할 정도로 개심(開心)한 소년 예수였다(눅 2:41-50).

나사렛은 역사의 사각지대로서 유대인들도 나사렛 사람이라면 경멸하는 버림받은 고장이었다. 온갖 병자, 가난한 자, 불량자, 거지, 열혈당원과 혁명가들 그리고 억눌림을 당한 자들이 우굴거리던 고장이었다. 유대교의 랍비들은 갈릴리나 나사렛 사람이라면 비웃었고 로마의 당국자들도 그들을 경원시하고 있었다. 이런 버림받은 역사의 사각지대, 버림받은 민중 속에서 예수는 인간성의 온갖 죄악을 깊이 통찰했고 버림받은 인간들을 구원하기 위한 십자가의 길을 명상하면서 남몰래 기도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는 잠룡처럼 숨어있는 예수의 존재를 아무도 몰랐고 목수의 아들로 평범하게 대해 줄 뿐이었다.

복음을 전파하기 위한 준비 기간으로 잠룡처럼 숨어있는 기간이기 때문에 사복음서에는 30세까지 예수의 생애가 기록되지 않고 있다. 또 성인들은 30세 이전에 나타난 예가 없다. 모세도 40세 때 이스라엘 백성 앞에 나타나지 않았던가. 공자는 삼십이립(三十而立)이라 했다. 30세가 되어야 뜻을 세어 설 수가 있음을 의미한다. 29세에 출가한 부처도 35세에 성도(成道)했다. 진리를 찾는 도정(道程)이 이러하거늘 오늘날 목회자 중에는 20대에 유명해지려고 발버둥 치는 자들이 많으니 한심한 현상이 아닐 수 없다.

예수는 30세까지 잠룡처럼 민중 속에서 가난을 경험하고 그들과 아픔을 같이했기 때문에 예숙 전한 복음은 관념적인 유희의 말씀이 없고 사변적인 논리의 말씀이 아닌 민중의 심금을 울리는 살아있는 생명의 말씀이었다. 산상수훈의 마지막 구절을 보면 “이는 그 가르치는 것이 권세 있는 자와 같고 저희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마 7:29) 예수의 말씀은 직업종교인인 서기관들과 랍비들과 설교하고는 차원이 다르고 질이 다른 살아있는 말씀이었다.

2. 현룡(見龍)이신 예수

건위천의 두 번째 효는 다음과 같다. 구이(九二) 현룡재전(見龍在田) 아견대인(利見大人) 현룡재전(見龍在田) 덕시보야(德施普也) (밭에 나타난 용 대인을 봄이 이하다. 그 덕의 영향이 널리 퍼진다)

30세까지 민중 속에 숨어 제일 낮은 자리에서 남몰래 때를 기다리던 예수가 세례요한이 세례를 주는 요단강에 나타나서 성령을 받고 복음의 길로 나서서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한다. 주역에서는 이것을 현룡(見龍)이라 한다. 현룡재전(見龍在田)- 나타난 용이 밭에 있다. 이 밭은 곡식을 농사하는 땅이 아니라 복음의 씨를 뿌릴 인간들의 마음 밭을 뜻한다. 때문에 현룡재전(見龍在田)이다.

예수는 인간들의 굳어진 석심(石心)과 가시가 무성한 황심(荒心)을 개조하여 옥토를 만들어 복음의 씨를 뿌리기 위해 오셨던 것이다. 예수뿐만 아니라 모든 성인들의 사명도 인간심령을 개조하여 이 땅에 죄악과 불의가 없는 새 시대를 열기 위함이었다.

이사야 선지는 일찍이 예수의 사명을 다음과 같이 예언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복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에게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하심이라.”(사 61:1-2)

이사야 예언처럼 예수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고 눌린 자와 포로된 자들에게 자유를 주었고 눈먼 자를 고쳐주었던 것이다. 예수는 현룡(見龍)이 되기 위해 요단강에서 세례받고 비둘기 같이 임하는 성령을 받고 복음을 가르치기 위해 인간들의 마음밭에 나타났던 것이다. 그러므로 현룡(見龍)이 심전(心田)위에 나타날 때 대인(大人)을 보면 이(利)함이 있게 된다. 대인은 곧 예수를 뜻한다. 예수를 쳐다보는 사람은 다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이견대인(利見大人)’이라했다.

그러나 구약적인 유대교에 고착된 바리새교인 사두개교인들은 예수를 바라보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의 마음 밭은 황무지가 되어 버림받았다. 예수는 복음을 증거하면서 그의 덕을 모든 죄인들에게 베풀었다. 그리므로 눈먼 소경이 개안하고 문둥병자가 청정해지고 앉은뱅이가 일어나고 벙어리가 말하고 심지어 죽은 자까지 일어났던 것이다. 예수의 공생애는 3년이라는 짧은 기간이었지만 그는 하늘에서 주신 사명을 완수했다.

요단강에서 세례받고 성령강림을 경험한 후 예수는 인간의 마음에 나타난 현룡(見龍)이 되어 구약의 황무지를 갈아엎고 옥토를 만들기 위한 복음 파종의 농부가 되어 마을마다 찾아다녔다(눈 4:43-44)

3. 종일건건(終日乾乾)하신 예수

건위천의 세 번째 효는 다음과 같다. 구삼(九三) 종일건건(終日乾乾) 석척약(夕惕若) 려무구(厲無咎) 상왈(象曰) 종일건건(終日乾乾) 반복도야(反復道也) (낮에는 온종일 쉼이 없이 일하고 저녁에 삼가고 조심하면 위태한 일이 있을지라도 허물은 없을 것이다)

요단강에서 성령강림을 체험하고 광야에 나가서 마귀의 삼대시험을 이긴 후 예수는 복음전파에 나서서 이스라엘 동리를 돌아다녔다. 예수는 하루도 쉬지 않고 이 마을 저 동네로 다니면서 복음을 전하고 병든 자를 고쳐주고 가난한 자를 위로하고 눌린 자를 자유케 했다. 낮에는 쉬임없이 일하다 저녁이 되면 그는 한적한 곳에 혼자 가서 하나님께 기도하는 생활을 했다(눅 5:16, 마 14:23 참조) 왜 예수는 종일 乾乾히 일하다가 저녁이 되면 혼자 한적한 곳에서 밤새 기도했는가? 그는 낮에는 각종 병자를 고치기 위해 영력을 다 사용했다.

그러므로 다시 하나님께 기도하여 영력을 충전시키고 능력을 얻기 위해 밤새 기도했고 또 낮에 행한 일에 대해 반성하고 조심하기 위해 한적한 곳에 가서 명상에 잠기곤 했다. 예수의 3년 공생애는 항상 바리새인들의 감시를 받는 위기의 생애였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는 그들에게 책잡히지 않고 허물이 없는 청정한 생활을 하면서 항상 자신을 자성하고 채찍질하는 생애를 보내야 했다. 히브리 가자는 예수의 3년 공생애를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느니라(히 5:7).

예수는 밤으로 하나님께 통곡과 눈물로 간구하고 낮에는 복음을 증거하고 병든 자를 고쳐주었으니 어찌 그에게 허물이 있을 수 있겠는가. 바리새인들의 살기 때문에 예수는 위험한 생애를 살았지만 결코 흠이나 점이나 티가 있을 수 없었다. 3년이라는 짧은 공생애를 보내면서 예수는 수도와 복귀의 생활을 반복했다. 수도라 함은 밤에 조용한 곳에 나가 하나님께 기도하고 영력을 충전하고 명상으로 자기를 반성하는 생활을 뜻하고 복귀라 함은 낮이면 민중과 함께 아픔을 같이하며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풀고 병든 자를 고쳐주고 천국복음을 증거하는 것을 뜻한다.

우리들은 예수를 오해할 때가 많다. 그가 하나님의 독생자로 이 세상에 오셨으니 기도도 하지 않고 수도도 하지 않고 명상도 하지 않고도 능력을 행하며 이적을 행하며 천국복음을 증거했다고 생각하기 쉽다. 예수는 낮에는 쉬지 않고 복음을 전하고 한적한 곳에 물러가 밤이 새도록 기도하고 명상하고 능력을 충전한 다음 새 아침이 오면 새로운 활력을 가지고 민중 앞에 나타나 그들과 아픔을 같이하고 위로했던 것이다.

다음 호는 『건괘(乾卦)로 본 예수 소전(小傳)(하)』를 게재한다.

미주

(미주 1) 이 글은 한때 제자였던 김진희(1927-2016)의 유품에서 전문을 발굴하여 「에큐메니안」에 재공개함으로써 학술 공공재로 활용한다. 玄黎民(변찬린의 필명),  『乾卦로 본 예수 小傳』, 「종교신문」, 1990.12.12, 6면.

이호재 원장(자하원)  injicheo@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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