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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를 여러 나라의 선지자로 세웠노라!(렘 1:4-10; 행 9:1-19; 마 9:35-10:1)성령강림후 둘째주일(6월14일) 총회선교주일
최병학 목사(남부산용호교회) | 승인 2020.06.12 17:12

1. 총회선교주일

오늘은 교단이 지정한 총회선교주일입니다. 선교는 복음을 전하는 것이죠? 국내선교도 있지만, 국외선교도 있습니다. 지정학적으로 가장 가까운 일본이 국외 선교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일본과는 일제시대 때 강제징용으로 끌려간 피해자에게 일본 기업이 배상을 해야 한다고 우리 대법원이 판결을 내려, 일본의 경제 보복인 반도체부품 수술규제, 또 우리나라의 대응인 지소미아(GSOMIA), 곧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 파기결정으로 이어지는 등 악화일로(惡化一路)에 있습니다.

▲ NO 아베, NO JAPAN

따라서 이렇게 악화된 한일 관계를 풀 수 있는 것은, 강 대 강으로 맞붙는 정치가, 또 보복과 보복으로 이어지는 경제적 대응이 아니라, 민간 차원의 교류를 통한 소통입니다. 그리고 민간 차원에서 가장 중요한 소통은 종교적인 소통이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을 이룬 일본의 그리스도인들과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이 새로운 한일 관계를 만들어 나가야 할 것입니다. 우리 부산노회가 일본의 깨어있는 교단인 그리스도교교회(니키) 규슈노회와 선교협약을 맺으려고 소통중인데, 이러한 민간 간의 교류와 소통을 통해 한일 관계가 회복되고 복음을 통해 일본이 변화되기를 소망합니다.

지난주 말씀을 통해 우리는 숨이 곧 성령이라고 배웠습니다. 히브리어로 루아흐(ר֣וּחַ), 헬라어로는 프뉴마(πνεῦμα)인 성령은 움직이는 공기이자 바람, 혹은 하나님의 영을 의미합니다. 우리말 숨도 그렇지만, 루아흐나 프뉴마 모두 발음할 때 목이나 입에서 바람을 내뿜어 내는 소리입니다. 우리가 내쉬는 숨이 바로 성령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사실은 이러한 생명의 호흡인 성령은 우리를 핍박하는 이들까지도 감싸 안는다는 것이었습니다. 박해자와 원수에게도 숨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는 유대교 종교지도자들이나, 로마의 위정자들도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놀라운 사랑을 깨닫고, 생명의 숨, 곧 성령을 받기를 원하신다는 것이 지난주 말씀의 핵심이었습니다.

이것은 숨 못 쉬는 흑인뿐만 아니라, 또 가방 속에 갇힌 이 시대 수많은 어린이들뿐만 아니라, 숨을 못 쉬게 만드는 백인조차도, 또 불의한 우리 어른들조차도 구원하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사랑 때문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여기에 하나 더 추가한다면, 일본인들이겠죠? 그들에게도 하나님은 생명의 숨, 곧 성령을 주시고자 원하십니다.

따라서 오늘 세 본문 말씀은 이러한 성령을, 복음서에서는 열 두 제자에게, 그리고 구약 말씀에서는 예레미야에게, 마침내 사도행전에서는 예수 믿는 이들을 박해하는데 앞장 선 사울(나중에 바울)에게까지 주시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성령 받은 이들을 통해, 여러 나라와 여러 왕국을 뽑고 파괴하며 파멸하고 넘어뜨리며 건설하고 심는 놀라운 새 역사를 창조하시는 것입니다(렘 1:10). 특별히 선교주일을 맞아 이웃 일본에도 성령의 놀라운 역사가, 불의한 것은 넘어뜨리고 의로운 것은 건설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2. 열 두 제자를 부르사

▲ 열두 제자 파송

먼저 복음서 말씀을 볼까요? 10장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그의 열두 제자를 부르사,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시니라(마 10:10).” 마태복음 10장 말씀은 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선택하여 전도 사역지로 파송하신 내용입니다. 열두 제자의 명단이 나오고, 복음전파자의 임무와 자세로서 적대자들과 마찰을 피하고, 온유와 겸손으로 대할 것과 세상과 타협하거나 두려워하지 말라고 당부하십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9장 마지막 부분과 연결이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제자 파송의 이유는 바로 9장 마지막 부분에 나와 있겠죠? 말씀을 볼까요?

“예수께서 모든 도시와 마을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니, 이는 그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함이라.”(마 9:35-36)

무슨 말씀입니까? 무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그들에게 목자가 없어서 안타까워하시는 말씀입니다. 따라서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으니,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 주소서 하라 하시니라.”(마 9:37-38)

일꾼을 부르시는 것이죠? 그리고 그 일꾼에게 권능을 주시는 것입니다. 바로 성령을 주셔서 새로운 세상, 하나님의 나라를 만들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바로 예수님의 열두 제자입니다. 부름 받은 일꾼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렇게 예수님의 따라다닌 제자들을 일꾼으로 세우기도 하지만, 사도 바울과 같이 박해자였던 이를 일꾼으로 세운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사도행전의 말씀이 그렇죠?

3.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오늘 사도행전에 나오는 사울은 우리가 바울 사도로 알고 있는 인물입니다. 사울은 유대교를 열심히 믿는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눈에는 예수를 구세주로 믿는 그리스도인들이 이단으로 보였을 것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불의의 싹은 빨리 짤라 버려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말씀을 볼까요?

“사울이 주의 제자들에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대제사장에게 가서, 다메섹 여러 회당에 가져갈 공문을 청하니, 이는 만일 그 도(道, ὁδός)를 따르는 사람을 만나면 남녀를 막론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오려 함이라.”(행 9:1-2)

여기서 도(道)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을 말하죠? 헬라어로는 ‘호도스’라고 되어 있는데, 말 그대로 길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는 사람의 ‘생활방식’을 뜻합니다. 예수께서 가신 길을 따라간다는 뜻입니다. 아무튼 사울이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을 잡아들일 수 있는 정식 공문을 대제사장으로부터 받아, 다메섹으로 갈 때입니다.

“사울이 길을 가다가 다메섹에 가까이 이르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빛이 그를 둘러 비추는지라.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가 있어 이르시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하시거늘, 대답하되, 주여! 누구시니이까? 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너는 일어나 시내로 들어가라. 네가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 하시니”(행 9:3-6)

부활하신 예수께서 사울을 만난 것입니다. 그러나 이 빛은 사울만 보았습니다. 다음 말씀에 보니, “같이 가던 사람들은 소리만 듣고, 아무도 보지 못하여 말을 못하고 서 있더라(행 9:7).” 사울은 성령의 빛을 받아 이제 아무 것도 볼 수 없었습니다. 계속 말씀을 볼까요? “사울이 땅에서 일어나, 눈은 떴으나 아무 것도 보지 못하고, 사람의 손에 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가서, 사흘 동안 보지 못하고 먹지도 마시지도 아니하니라(행 9:8).”

▲ 다메섹에서 사울

같은 때에 또 다른 일이 있었습니다. 다메섹에 있는 아나니아라 하는 제자에게도 환상이 임한 것입니다. 말씀을 볼까요?

“그 때에 다메섹에 아나니아라 하는 제자가 있더니, 주께서 환상 중에 불러 이르시되, 아나니아야! 하시거늘, 대답하되,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니, 주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직가라 하는 거리로 가서 유다의 집에서 다소 사람 사울이라 하는 사람을 찾으라. 그가 기도하는 중이니라. 그가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들어와서 자기에게 안수하여 다시 보게 하는 것을 보았느니라 하시거늘”(행 9:10-12)

아나니아는 사울이 다메섹으로 오는 이유를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러 오는 사울이었기에 주님께서 환상으로 말씀하신 것이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아나니아는 이렇게 반문합니다.

“아나니아가 대답하되, 주여! 이 사람에 대하여 내가 여러 사람에게 듣사온즉, 그가 예루살렘에서 주의 성도에게 적지 않은 해를 끼쳤다 하더니, 여기서도 주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사람을 결박할 권한을 대제사장들에게서 받았나이다 하거늘”(행 9:12-14)

그러나 “주께서 이르시되,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행 9:15).”고 말씀하십니다. 박해자를 복음 전도자로 세우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입니다.

▲ 사울과 아나니아

4. 일본의 온(恩, 은혜)문화

앞서 오늘은 총회선교주일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특히 일본 선교에 대해서 말씀드렸는데, 선교를 위해서는 그 지역과 사람들의 특성을 알아야 합니다. 일본의 문화를 가장 잘 분석한 책이 있습니다. 미국의 문화인류학자인 루스 베네딕트의 『국화와 칼』 (을유문화사, 2008)입니다. 이 책에서 루스 베네딕트는 일본 문화의 특성을 제목처럼 ‘국화’와 ‘칼’이라는 두 가지 극단적인 상징으로 표현합니다.

▲ 일본은 어떤 나라인가

가령 일본인들은 아름다움을 사랑하고 예술가를 존경하며 국화 가꾸기에 신비한 능력을 지닌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칼을 숭배하고 무사에게 최고의 영예를 돌리는 민족이라는 것입니다. 일본인의 외면적인 행동의 묘사와, 그 배후에 있는 기본적인 사고방식을 국화와 칼로 분석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책 제 6장 ‘만분의 일의 은혜 갚음’에서 베네딕트는 이렇게 말합니다. “일본에는 온(恩, 은혜) 문화가 있다. 온을 입은 자는 반드시 그 온을 갚아야 하는 것이 인간의 도리라는 것이다.” 따라서 일본인은 온을 베푸는 것을 덕행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온을 갚는 것을 덕행이라고 봅니다.

따라서 친절을 받아 부끄러워 견딜 수 없는 민족, 면목이 없다고 말하는 민족이 일본인입니다. 곧 선행의 채무자가 되는 것이 괴로운 일이며, 동시에 이것은 일본의 미덕이 됩니다. 가령, 길에서 한 사람이 사고가 났을 때, 모인 군중들은 수수방관합니다. 이것은 그들이 자발성이 없어서가 아니라, 사고를 당한 사람에게 은혜를 입히는 행위가 되기 때문에 꺼려하는 것입니다. 이제까지 아무런 관계가 없었던 사람에게 호의를 베푸는 것과 받는 것 모두 마음이 편치 않다고 생각하는 것이 일본인입니다.

베네딕트는 이것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감사합니다라는 일본어 아리가토(ありがとう)는 ‘이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Oh, This is difficult things)’를 의미한다. 호의나 친절을 받은 것에 대해서 ‘나는 이제껏 베푼 것이 없는데, 상대방에게 신세를 져서 곤란하다’는 심정을 표현하는 것이다.”

놀랍죠? 사고방식이 우리 한국인과 달라도 너무 다릅니다. “죄송하다”, “고맙다”는 말, ‘스미마셍(すみません)’도 마찬가지입니다. 베네딕트는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스미마셍을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이것은 끝나지 않았습니다’라는 뜻이 된다. ‘당신의 은혜를 내가 받았고, 당신에게 은혜를 갚을 길이 없습니다. 이런 입장에 놓인 것을 유감스럽게 생각합니다’라는 의미인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일본인들에게 있어서 온은 반드시 윗사람으로부터 받는 것입니다. 아랫사람이 베푸는 호의는 온이 아닙니다. 오히려 아랫사람에게 호의를 입으면 그것을 불쾌하게 생각합니다. 베네딕트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온의 여러 용법을 모두 관통하는 의미는, 사람이 짊어질 수 있는 부담, 채무, 무거운 짐이다. 사람은 윗사람으로부터 온을 받는다. 윗사람이 아니거나, 적어도 자신과 동등하지 않은 사람으로부터 온을 받는 행위는 불쾌한 열등감을 준다. 일본인이 ‘나는 누구에게 온을 입었다’고 말하는 것은 ‘나는 누구에게 의무의 부담을 지고 있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그들은 채권자나 은혜를 베푼 사람을 온진(恩人, 은인)이라고 부른다.”

이러한 온 문화를 분석하며 「민중의 소리」 이완배 기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이 두 가지 있다. 첫째 감염병 사태를 맞아 우리가 아무리 인도적인 마음으로 일본을 돕는다 해도 그들은 그것을 고마워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상전이라고 생각하는 미국으로부터 도움을 받는다면 모를까. 아랫것이라고 생각하는 한국으로부터 도움을 받는다면 그들은 불쾌한 열등감을 느낄 뿐이다. 둘째, 윗사람이 온을 베풀면 아랫사람은 그것을 갚는 일에 목숨을 걸어야 한다.”

첫 번째 내용은 위에 잘 설명이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두 번째 내용에 관해 베네딕트의 말을 들어 볼까요?

“1945년 8월 14일 죽창(竹槍) 하나로 죽을 때까지 싸울 것을 맹세했던 일본인은 천황이 라디오로 일본의 항복을 선포하자 전쟁을 마쳤다. 한 외국인 기자가 서술한 바와 같이, 아침에는 소총을 겨누며 착륙했지만, 점심때는 총을 치워버렸고, 저녁때는 이미 장신구를 사러 외출할 정도였다. 일본인은 이제 평화의 길을 따름으로써 ‘천황의 마음을 편안케’해 드렸다. 즉 일본인은 비록 항복 명령이긴 했지만, 명령을 내린 것이 천황이었다고 말할 수 있는 권리를 획득했다. 패전에서도 최고의 법은 여전히 주(忠)였다. 전쟁과 군국주의였던 주(忠)의 내용이 평화로 변경되자 일본인은 그때까지와는 정반대로 외국인에게 협력하는 양상을 보였다. 주는 천황, 법률, 일본국에 대한 의무인 것이다.”

미국인으로 일본을 한 번도 방문한 적이 없는 루스의 일본에 대한 분석이 탁월합니다. 학문적으로 루스는 문화를 인성의 확대로 보았습니다. 그녀의 이러한 ‘문화와 인성’이라는 인류학의 개념은 미국 인류학의 가장 주도적인 한 영역을 개척하게 됩니다. 일본의 문화에는 일본인의 인성이, 한국의 문화에는 한국인의 인성이, 그리고 미국 문화에는 미국인들의 인성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일본 선교를 위해서는 천황이라는 우상을 제대로 이해하고, 그들이 그 우상에서 깨어 나와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만나도록 이끄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가 일본보다 경제나, 문화, 교육, 군사력에서 우위에 서서 그들에게 온(恩, 은혜)을 베풀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그들이 우리를 받아들입니다. 그래야만 박해자인 일본이 복음전도자로 바뀔 것입니다. 그 일을 감당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따라서 예레미야도 이렇게 변명합니다. “나는 아이라, 말 할 줄을 알지 못하나이다!”

5. 파멸하고 넘어뜨리며 건설하고 심게 하였느니라!

구약 본문말씀을 볼까요? 예레미야는 하나님으로부터 사명을 받았을 때, 이렇게 고백합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내가 너를 모태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배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성별하였고 너를 여러 나라의 선지자로 세웠노라 하시기로, 내가 이르되,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보소서. 나는 아이라 말할 줄을 알지 못하나이다 하니”(렘 1:4-6)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의 두려움을 아시고, 할 말을 가르쳐 주시겠다고 합니다. 말씀을 볼까요?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아이라 말하지 말고, 내가 너를 누구에게 보내든지 너는 가며 내가 네게 무엇을 명령하든지 너는 말할지니라. 너는 그들 때문에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너를 구원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시고, 여호와께서 그의 손을 내밀어 내 입에 대시며,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내 말을 네 입에 두었노라.”(렘 1:7-9)

▲ 예레미야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추수할 일꾼을 부르십니다. 열두 제자를 세우시고, 또 예레미야 같이 두려움에 떠는 이들에게도 용기를 주시어 하나님 나라의 사명을 감당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차이가 있습니다. 예레미야의 경우는 민족의 멸망을 예언하는 것이죠? 청년 시절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아나돗 출신의 예레미야는 40여 년간 완고한 유대인들에게 심판의 예언을 선포했습니다. 따라서 동족들로부터 박해와 멸시를 받았습니다.

자, 그렇다면, 이렇게 성령 받은 사람, 혹은 박해자였으나 주님을 만나 복음 전도자가 된 사람은 무엇을 해야 할까요? 그들의 사명은 무엇입니까? 이후의 사도행전 말씀이 그 사명은 고난인 것을 보여줍니다. 말씀을 볼까요?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고난을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 하시니(행 9:16)” 그렇습니다. 이제 사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의 박해자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때문에, 또 예수 그리스도라는 이름 때문에 고난을 받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사울의 고난의 여정, 그 시작을 오늘 사도행전 본문 마지막 구절은 잘 보여줍니다.

“아나니아가 떠나 그 집에 들어가서 그에게 안수하여 이르되, 형제 사울아! 주 곧 네가 오는 길에서 나타나셨던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 하니, 즉시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된지라. 일어나 세례를 받고, 음식을 먹으매 강건하여지니라. 사울이 다메섹에 있는 제자들과 함께 며칠 있을새”(행 9:17-19)

다메섹에서 사울은 이제 제자들과 함께 거하며 새롭게 눈을 뜹니다. 성령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일평생 복음전도자로 살았습니다. 그 사명은 고난의 길입니다. 때로는 우상을 파괴하고, 세상 사람들의 가치관을 뒤엎어버리는 혁명적인 사선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새로운 세상의 비전을 보여주는 희망의 선포입니다. 오늘 예레미야도 사명을 받았습니다.

“보라! 내가 오늘 너를 여러 나라와 여러 왕국 위에 세워 네가 그것들을 뽑고 파괴하며 파멸하고 넘어뜨리며 건설하고 심게 하였느니라 하시니라.”(렘 1:10)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잘못된 것을 뽑고 파괴하며 파멸하고 넘어뜨리십시오. 그리고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새로 건설하고 심으십시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여러 나라의 선지자로 세웠기 때문입니다. 그 사명의 길에 주님의 은혜가 함께하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최병학 목사(남부산용호교회)  hak-9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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