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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 예배가 되는 길”살며 묵상하며
하태혁 목사(단해감리교회) | 승인 2020.06.15 16:35
9 그 사람은 곧 나아서, 자리를 걷어 가지고 걸어갔다. 그 날은 안식일이었다. 10 그래서 유대 사람들은 병이 나은 사람에게 말하였다. “오늘은 안식일이니, 자리를 들고 가는 것은 옳지 않소.” 11.그 사람이 대답하였다. “나를 낫게 해주신 분이 나더러, '네 자리를 걷어 가지고 걸어가거라' 하셨소.” 12.유대 사람들이 물었다. “그대에게 자리를 걷어 가지고 걸어가라고 말한 사람이 누구요?” 13 그런데 병 나은 사람은, 자기를 고쳐 주신 분이 누구인지를 알지 못하였다. 거기에는 사람들이 많이 붐비었고, 예수께서는 그 곳을 빠져나가셨기 때문이다. 14 그 뒤에 예수께서 성전에서 그 사람을 만나서 말씀하셨다. “보아라. 네가 말끔히 나았다. 다시는 죄를 짓지 말아라. 그리하여 더 나쁜 일이 너에게 생기지 않도록 하여라.” 15 그 사람은 가서, 자기를 낫게 하여 주신 분이 예수라고 유대 사람들에게 말하였다. 16 그 일로 유대 사람들은, 예수께서 안식일에 그러한 일을 하신다고 해서, 그를 박해하였다. 17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한다.” 18 유대 사람들은 이 말씀 때문에 더욱더 예수를 죽이려고 하였다. 그것은, 예수께서 안식일을 범하셨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 아버지라고 불러서,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한 위치에 놓으셨기 때문이다. 19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아들은 아버지께서 하시는 것을 보는 대로 따라 할 뿐이요, 아무것도 마음대로 할 수 없다.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은 무엇이든지, 아들도 그대로 한다.”(요한복음 5:9~19/새번역)

비가 내리는 날이면, 비설거지를 합니다. 처마의 물받이, 홈통에 막힌 곳이 없는지 살펴보며 뚫어줍니다. 막힌 곳을 뚫어주지 않으면, 고인물을 아무리 퍼내도 헛일이기 때문입니다. 이 단순한 지혜는 삶의 다양한 차원에 적용됩니다. 코로나 팬데믹, 좋아지는 것 같다가 다시 불안해집니다.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계속 되돌아올 것입니다. 백신이 개발된다고 다 해결될까요? 원하는 무엇이든 다 이루려는 현대문명의 욕망! 그 바벨탑을 허물지 않고는 소용이 없습니다. 제2, 제3의 팬데믹이 다가올 것입니다. 자연과 이웃을 향한 사랑의 물길을 막는 장애물을 치우지 않고는 끝날 리 없습니다.

신앙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삶과 예배가 분리된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악순환은 계속될 것입니다. 예배 안에만 맺힌 사랑과 은총이 썩어 버릴 것입니다. 온라인 예배냐, 오프라인 예배냐의 차원에 멈춰서는 안 됩니다. 오프라인 예배를 지속하기 어려운 현실은 예배의 본질을 흔들어 깨우고 있습니다. 공간에 갇히지 않는 예배, 목사에게 묶이지 않는 예배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일상이, 삶이 예배가 되는 가능성을 물어오고 있습니다.

38년 된 병자가 자리를 들고 일어나 걸어간 사건이 안식일이었다는 점이 의미심장합니다. 일하지 말고 가만히 있어야 하는 안식일에 오히려 일어나 걸어가게 하셨습니다. 기적이 일어나기만 기다리지 않게 하셨습니다. 자신만 그 기적을 독차지하지 않으셨습니다. 보란 듯이 삶을 변혁시키셨습니다. 아니 스스로 다른 삶을 향해 나아가게 도와주셨습니다. 코로나가 끝나 교회에 가서 예배할 때만 기다리지 말고, 일어나서 삶이 예배가 되게 하라는 부르심으로 다가옵니다. 온라인이냐, 오프라인이냐 고민만 하지 말고 지금 자신이 선 자리에서 영과 진리로 예배하라는 부르심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말씀에서는 논란이 소용돌이칩니다. 유대인들이 비난합니다. “10 유대인들이 병 나은 사람에게 이르되 안식일인데 네가 자리를 들고 가는 것이 옳지 않다.” 그들에게 38년 된 병이 나은 기쁨의 자리는 없습니다. 일어나서 자리를 들고 간 것만 문제입니다. 병을 낫게 한 예수님을 박해할 뿐입니다.

하나님을 너무나 사랑해서 하나님을 본받으신 결과입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라고 부르심은 권세를 얻고자 함이 아닙니다. 하나님처럼 낮추고 하나님처럼 사랑하려 하심입니다. 그래서 안식일에 일하시는 하나님을 따라 일하셨건만 죽이려 합니다. 사람을 위해 있는 안식일에 사람을 도우시는 게 죄로 보입니다.

ⓒGetty Image

오늘날도 십자가를 지고 속죄와 구속의 삶을 사는 것은 예수님만의 몫이라고 고집하지 않는지. 예수님이시니까 하신 것이지, 우리가 감히 어떻게 하느냐며 물러나지 않습니까. 예수님이 길이시면, 그 진리의 길을 따라 생명을 누리라는 부르심입니다.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라는 초대입니다. 예수님께서 길이시고 모범이시라면, 결국 어떻게 하면 예수님처럼 살아갈 수 있을까가 중요해집니다. 어떻게 안식일 율법에 갇히지 않으셨을까? 어떻게 삶 자체가 예배가 될 수 있었을까? 19절에서 대답해주십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들이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

율법에 갇히지 않으신 이유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이냐 그리심산이냐에 묶이지 않으신 이유입니다. 언제 어디서든 함께 계신 하나님께 영과 진리로 예배하실 수 있었던 이유입니다.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것을 보고 그와 같이 따르신 것입니다. 하나님 뜻이 아니면 아무것도 스스로 하지 않으신 것입니다. 율법이 뭐라고 하든, 종교전통이 뭐라고 하든 오롯이 하나님만을 따릅니다. 이것이 바로 삶이 예배가 되는 지름길입니다.

‘삶이 예배가 되어야 한다. 일을 통해 기도한다.’ 멋진 가르침이고 중요한 통찰입니다. 그러나 현실은 어떻습니까? 일을 통해 기도한다며, 기도만 멈추지는 않습니까? 삶이 예배라며 예배만 멈추고 삶은 자기 욕망과 편견대로 살지 않습니까? 어떻게 하면 삶이 예배가 되는지를 분명히 깨달아야 하는 이유입니다. 다양한 방식이 가능하겠지만, 최소한 예수님 보여주신 모범은 분명합니다.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주님께서는 스스로 하지 않지 않으실 뿐만 아니라 그럴 수도 없다고 하십니다. 우린 무엇인가를 자기 힘을 한다고 착각하곤 합니다. 그러나 생각과 뜻과 의지, 주어진 상황… 그 모든 것은 통제가능한 것이 아닙니다. 실은 너무나 많은 것들이 선물처럼 주어집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주시는 선물이 무엇인지 알아보고 그것을 따라가십니다. 매순간 어디서든 함께 계신 하나님의 임재에 깨어 계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분별해서 그대로 행하십니다. 이렇게 살아갈 때, 어찌 삶과 예배가, 기도와 활동이 나뉠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그게 가능할까?” 너무 어려워 보이고 부담스러워 보일 수 있습니다. 차라리 율법 몇 가지를 지키는 더 쉬워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하면 다릅니다. 하나님께서 얼마나 자신을 사랑하신 것인지 그 깊이를 체감한다면 어떻겠습니까? 그 놀라운 사랑으로 자신과 함께 계심을 느낀다면, 어떻겠습니까? 그렇다면, 의무일 수가 없습니다. 모든 일을 하나님 뜻대로 행하는 삶을 사모하게 됩니다. 너무나 하고 싶은 사랑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어떻게 예수님처럼 하나님과 하나가 될 수 있느냐고, 심지어 불경스럽게 여긴다면, 사랑은 이렇게 반문할 것입니다. “어떻게 사랑하는 데 등지고 살아갈 수 있느냐?”고.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시며 하나된 삶을 사셨을 때, 신성모독이라고 정죄했습니다. 그러나 신앙인이 하나님의 자녀라면, 그 사랑을 맛보아 안다면, 하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처럼 살아가지 않는 게 오히려 이상하지 않을까요? 이것은 율법처럼 완벽하게 해내느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잘하고 못하고의 문제가 아닙니다. 사랑하는 마음이 당연히 자연스럽게 열망하는 삶의 방향일 뿐입니다.

병아리 감별사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부화가 되고 암수를 나눌 때, 그 차이는 설명해서 배울 수가 없답니다. 그냥 옆에서 보면서 끊임없이 따라하는 수밖에 없다고 합니다. 그러다보면, 몸이 알게 된다고 합니다. 설명할 수는 없는데, 암수를 구별하게 되는 것입니다. 수많은 달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보지도 않고 손으로 집는데, 정확히 필요한 무게나 개수만큼만 잡습니다. 무수한 반복을 통해 몸이 알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도 그렇지 않을까요? 매순간 함께 계신 하나님을 느끼며, 모든 일을 하나님 뜻대로 행하는 삶도, 처음에는 어떻게 하는 것인지 잘 모르겠고, 실수가 많습니다. 함께 계신 게 잘 느껴지지 않고, 하나님 뜻이 무엇인지 헷갈리기 쉽습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마음 때문에 늘 관심을 기울이고 반복하고 또 반복하면, 몸이 익실 것입니다. 게다가 그런 경지에 이르느냐 못 이르냐가 중요한 게 아닙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그 사랑을 누리며 사느냐 아니냐 입니다. 세상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신비한 사랑을 맛보며 일상을 사느냐 못사느냐의 문제입니다.

그 사랑을 누리며 살다보면, 자신도 모르게 주님의 고백이 자기 고백이 될 것입니다. “아들이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합니다.” 그래서 은총이고 선물입니다. 자신이 한 일이 아니라 하나님 해주셨다고 고백할 수밖에 없습니다.

막힌 물길이 뚫려 시원하게 흐를 때, 썩지 않고 넘치지 않고 무너지지 않습니다. 예배와 삶도, 기도와 활동도 그렇습니다. 성과 속, 예배와 삶이 단절될 때, 예배도 삶도 썩을 수밖에 없습니다. 성과 속, 예배와 삶을 가로막은 찌꺼기가 뚫려 소통될 때, 신앙도 삶도 썩지 않고 살아납니다.

하태혁 목사(단해감리교회)  devi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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