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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과 생태계를 위한 메타노이아인류문명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위해
김명수 명예교수(경성대학교 신학과) | 승인 2020.06.15 16:38
그 때부터 예수께서는 “회개하여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하고 선포하기 시작하였다.(마태 4:17)
From that time on, Jesus began to preach  and say "Repent, for the kingdom of heaven is at hand.(Matthew 4:17)

(1)

얼마 전 TV 채널을 돌리다 우연히 영화 한 편을 보게 되었다. 제목이 컨테이젼(contagion)인데 ‘전염병’을 뜻한다. 인류의 종말은, 전쟁이나 천재지변을 통해서가 아니라, 바이러스 세균의 전염병에 의해서 맞게 된다는 것이 기본 줄거리였다. 마치 오늘날 지구촌의 재앙을 가져온 코로나19 팬데믹 현상을 예견이라도 한 것 같아 충격적이었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 인상적이었다. 지구화, 도시화, 삼림벌목, 지구온난화 등 인간들이 자연에 가한 무차별 폭격으로 인해, 지금까지 자기세계에 머물러 있던 바이러스 미생물들이 활동영역을 바깥으로 넓히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바이러스가 숙주로 삼고 있는 박쥐들이 깊은 삼림 속 동굴에서 서식하다가 인간의 무분별 벌목으로 서식지를 잃게 되자, 인근마을에 내려와 돼지사육장에 둥지를 튼다. 바이러스가 득실거리는 박쥐의 배설물을 돼지들이 먹고, 그 돼지들이 도살되어 시장에 판매된다. 바이러스세균은 박쥐 - 돼지 - 사람에게로 숙주를 차례로 옮겨가면서 끊임없이 자기를 증식해 간다.

인간의 무한한 욕망을 무한히 긍정하고, 대량생산과 대량소비를 부추기며, 욕망충족을 미덕으로 삼았던 문명은 일찍이 인류역사에서 단 한 번도 찾아볼 수 없었다. 내가 알기로는 현대자본주의 문명이 유일하다. 인간은 눈을 밖으로 돌려 자연을 끊임없이 파괴하고 변용(transfiguration)시켜 자기소유화(自己所有化)함으로써, 욕망을 충족시킬 수 있다고 선전하였다. 현대자본주의 이러한 외향적 소유의 성향은 구조적으로 지구생태계 파괴를 가져올 수밖에 없었다. 왜 그런가? 자연이라는 소재는 유한하기 때문이다. 이제는 지구의 묵시적 종말이 종교인들이 아니라, 생태과학자들에 의해 공공연하게 거론되고 있는 시대가 되었다.

포스트코로나 시대(the era of post corona)에 접어들면서, 현대문명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자본주의에 대한 근원적인 성찰이 요청되고 있다. 오늘날 인류가 경험하고 있는 현대자본주의의 결과는 무엇인가? 과잉생산, 과잉소비, 과잉쓰레기, 빈부양극화, 지구온난화, 미세먼지, 대기온도상승, 코로나바이러스 팬더믹 등이다.

나는 평생 자전거를 탄다. 2018년도 가을에는 서울역에서 동경역까지 2300km를 자전거로 달렸다. 한 달 정도 걸렸다. 마지막 코스인 후지산 밑 하꼬네 언덕의 내리막길을 빗길에 달리다가 사고가 났다. 동경역까지 70km를 앞둔 장소였다. 일본시립병원에서 한 달 동안 입원치료를 받은 후 귀국하였다. 자전거는 페달을 밟아 두 바퀴를 끊임없이 굴려야 앞으로 나아간다. 그렇지 않으면 쓰러지고 만다. 나는 현대 자본주의 생리도 이와 같다고 생각한다. 대량생산과 대량소비라는 두 바퀴를 끊임없이 굴려야 돌아간다. 바퀴가 멈추면 어찌되나? 자본주의는 붕괴되고 말 것이다.

(2)

이제 인류는 종전의 자본주의문명에 길들여져 있던 생활방식으로 되 돌이킬 수 없다. 종전의 상태로 돌아가자는 것(business as usual)은 모두가 죽는 길을 선택하자는 것과 같다. 포스트코로나 시대를 맞이하여 이제 인류는 자명하다고 여겨왔던 한 생각이 과연 진리인가를 의심해보고, 이를 생각을 바꾸어야 한다. 가던 길을 일단 멈추고, 돌아온 길을 돌이켜 보아야 한다. 일체의 가치에 대해 판단을 중지하고(epoche), 우리가 살아왔던 길이 과연 바람직한 길이었는가를 냉철하게 반성해보아야 한다. 지금까지 인류가 한 번도 발을 들여놓지 못했던 새로운 길을 찾아나서야 한다.

위기는 기회이기도 한다. 코로나19 팬데믹의 위기는 우리에게 새로운 인류문명을 창출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개인이나 특권층만을 위한 강자존(强者存)의 현대 자본주의 문명은 더 이상 미래 문명의 대안(alternative)이 될 수 없다. 기업의 이윤가치보다 사람의 생명가치를, 그리고 성장보다는 분배정의를 우선시하는 돌봄의 경제정책으로 방향을 틀어야 한다. 인간의 생명과 복리후생, 협동과 조화, 자아실현을 우선시하고, 모두가 더불어 살아가는 ‘살림 경제’ 시스템 구축에로 인류문명의 방향을 틀어야 한다.

자본주의를 유지하기 위해 지구 온 생명을 포기하는 것보다, 오히려 지구 온 생명을 살리기 위해 자본주의를 생명 우선의 경제모델로 바꾸어가야 할 것이다. 현대 자본주의는 인간과 자연을 이윤극대화의 도구로 삼아 인간소외를 초래했다. 불평등과 실업, 빈부 양극화사회를 구조화했다. 무한경쟁, 자연생태계에 대한 무차별 폭력행사는 존재터전을 흔들어놓고 있다. 이제는 인간과 인간, 인간과 사회, 인간과 자연이 화해, 상생, 공존, 협동하는 새로운 문명모델을 모색할 시대가 되었다. 이를 위해서는 사회제도 혁명과 인간의식 혁명 그리고 가치혁명과 생활혁명이 동시에 추진되어야 할 것이다.

(3)

세례자 요한이 유다 광야에 등장하여 메타노이아를 외쳤다. 요한이 로마의 꼭두각시 정권인 헤롯 왕조에 의해 체포되어 마케루스 성채(城砦)의 지하감옥에 감금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예수는 갈릴리에 등장하였다. 그는 요한의 메타노이아 운동을 계승하여 바실레이아 운동을 펼친다. 세례자 요한과 예수가 공생애를 시작하면서 이구동성으로 외친 첫 설교말씀이 메타노이아이다. “회개하여라. 천국이 닥쳐왔다(μετανοεῖτε· ἤγγικεν γὰρ ἡ βασιλεία τῶν οὐρανῶν[metanoeite enggiken gar he basileia ton ouranon]).”(마태3:2; 4:17)

예수가 살던 시대는 어떠했나? 로마제국의 노예제 사회였다. 로마는 강력한 군대를 동원하여 끊임없이 주변국들을 침략하여 전쟁노예들을 대량생산하였고, 그들을 억압하고 착취함으로써 거대한 제국을 유지해나갈 수 있었다. 로마는 각 도시마다 노예시장을 개설하고, 공공연하게 노예들을 사고 팔았다. 복음서에서 자주 등장하는 주인과 종들의 이야기에서 우리는 당대 로마 식민지 유다 사회 노예제도의 한 단면을 읽을 수 있다.

유다 사회는 어떠했나? 유대인들은 이른바 하나님으로부터 율법을 하사받은 민족이라는 선민의식이 강했다. 안식일 법을 포함하여 613개의 율법조항을 만들어, 일상생활에서 그것들을 지키려고 하였다. 율법 준수 여하를 기준으로 하여 죄인과 의인으로 사회를 규정하였다. 유다사회는 율법을 지키지 못하는 암하아레츠(죄인들)을 인간으로 취급하지도 않았다. 예수시대의 유다사회는 율법주의, 가부장주의, 성차별주의, 인종차별주의에 의해서 유지되었다.

이와 같은 이중적인 억압시스템과 사회적 모순으로 인하여 민중은 지배계급의 수탈 대상이었다. 그들은 가난과 빈곤과 질병 속에서 벌레처럼 살 수밖에 없었다. 빈부 양극화된 시대에 민중은 사회에서 기댈 곳 하나 없이 유리방황하여 걸식으로 목숨을 연명하던 시대였다.

이러한 시대에 예수와 요한이 등장한 것이다. 그들은 인간이 무엇이고, 바람직한 세상을 세우기 위하여 인간이 가야할 길을 선포했다. “회개하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메타노에이테! 엥기켄 헤 바실레이아 톤 우라논).”하늘 아버지가 통치하는 바실레이아(basileia)가 임박했다는 선언 배후에는, 예수의 종말적 시대의식이 반영돼있다. 로마황제, 헤롯왕가와 예루살렘성전세력이 지배하던 억압의 시대(이를 사탄이 지배하는 시대로 규정한다)는 지나갔고, 하늘 아버지께서 직접 통치하시는 새로운 세상 바실레이아가 동터오고 있음을 예수는 본 것이다.

바실레이아는 다른 게 아니다. 하늘 아버지 뜻이 이루어진 세상이다. 피압박 민중도 하늘아버지의 자녀로써 인간의 존엄성을 인정받고 사람답게 사는 세상이다. 빈부 양극화를 넘어  모두를 이롭게 하는 홍익인간세상 건설이 예수와 요한이 꿈꾸었던 바실레이아이다. 바실레이아 꿈을 이루기 위해, 세례자 요한과 예수는 민중과 동고동락하며 살신성인(殺身成仁)의 삶을 살았던 것이다.

새로운 세상, 곧 바실레이아를 건설하기 위해 인간은 어떠한 자세를 취해야 하나? 수동적 자세로 기다리기만 하면 되나? 아니다. 메타노이아(metanoia) 하라고 한다. ‘메타(meta)’는 ‘바꾸는 것,’ ‘달리 보는 것,’ ‘의심해보는 것’을 뜻한다. 종전의 시각을 바꾸는 것을 의미한다. 노에시스(noesis)는 ‘한 생각’ 또는 ‘의식의 지향성’을 뜻한다.

따라서 메타노이아는 ‘한 생각 바꾸기,’ 곧 ‘의식혁명’을 뜻한다. 지금까지 아무 의심 없이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던 기존의 관념, 사상, 가치들에 대하여 크게 의심해보는 것이메타노이아이다. 기존의 에고 중심적인 사고, 행동, 말, 생활 스타일을 바꾸는 것이다. 사익(私益)의 삶에서 공익(公益)을 대변하는 삶에로, 그리고 나를 이롭게 하던 삶에서 모두를 이롭게 하는 삶에로의 가치전환이다. 이기주의적 삶에서 자리이타적인 삶에로의 회향(回向)이 예수가 말한 메타노이아의 기본성격이다. 의식혁명 없이 사회혁명 없고, 그 반대도 진리이다. 인간혁명과 사회혁명의 통일! 그리고 의식혁명과 제도혁명의 통일! 이게 메타노이아의 지향점이다.

하늘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진 바실레이아를 건설하는 일은 그리 어려운 게 아니다. 기존의 한 생각을 바꾸기만 하면 된다. 가던 길을 일단 멈추고(epoche), 점검해보고 의심해보는 것이 메타노이아이다.

고려시대 백운선사의 게송(偈頌) 중에 “대의대오(大疑大悟) 소의소오(小疑小悟) 불의불오(不疑不悟)”가 있다. “크게 의심하면 크게 깨닫고, 작게 의심하면 작게 깨달으며, 의심이 없으면 아예 깨닫지 못한다.”는 말이다.

지금까지 현대자본주의 체제 하에서 내가 걸어온 길, 한국사회가 걸어온 길, 세계가 걸어온 길이 과연 바람직한 방향이었나? 보편적인 가치를 지닌 것이었나? 포스트코로나 시대에 접어들면서, 우리는 지난 세기에 자명한 것으로 받아들였던 가치들인 지구화, 도시화, 산업화, 경제성장, 사회양극화, 신자유주의 시장경제시스템에 대해서, 크게 의심해보아야 할 시점이다. 이는 지금까지 인류가 가 보지 못했던 세상, 모두가 사람으로서의 존엄성을 인정받고,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새로운 미래문명을 창출하기 위해 필수적으로 요청된다.

(4)

크게 의심해 보아야 큰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大疑之下 必有大悟)는 백운선사의 화두는, 한 생각 바꾸고 의식을 개조해야 사람 사는 세상인 하늘나라를 맞이할 수 있다고 선언한 예수의 첫 설교와 상통한다. 복음서에서 만나게 되는 예수의 삶, 말씀, 꿈은, 모두 메타노이아를 전제하고 있다. 메타노이아 없이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의식혁명, 제도혁명, 가치혁명, 생활혁명 없이 사람 사는 세상을 세울 수 없다. 예수는 단호하게 말한다. “나에게 ‘주여, 주여!’ 부르짖는다고 해서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라야 들어간다.”(마태7:21Q)

하늘 아버지의 뜻을 지상에서 가장 온전하게 실행하신 분이 예수이다. 예수를 믿고 따르는 크리스천이라고 스스로 자부한다면, 평생 가슴에 품고 살아야 할 화두가 있다. 과연 예수가 무슨 일을 했고, 무슨 말을 했으며, 그가 실천했던 하늘 아버지 뜻이 무엇인가? 이 세 가지 화두(話頭)를 신앙생활의 반면교사로 삼고, 늘 자기를 비추어보는 거울로 삼아야 할 것이다.

예수가 실천하고자 했던 하늘 아버지 뜻은 무엇인가? 인간 모두가 존엄성을 인정받고, 사람답게 사는 길이다. 모두에게 이로운 보편적 진리이다. 내가 보기엔 큐Q 예수가 전해주는 황금률(Golden Rule)에서 하늘 아버지 뜻이 가장 온전하게 드러나 있다. 황금률은 원수사랑계명의 맥락에서 언급된다.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Do to others as you would have them do to you).”(루가6:31Q)

어느 날 자공이 공자에게 물었다. “평생 동안 마음에 새겨두고 살아야 할 한마디 말씀이 있다면 그것이 무엇인지요?” 공자가 답했다. “그것은 서(恕)이다. 자기가 싫어하는 일을 남에게 하지 말라 (己所不欲勿施於人).”<논어, 위령공편> 서(恕)는 입장을 바꿔놓고 상대방의 입장에서 역지사지로 생각하는 마음이다.

예수가 황금률의 적극적인 측면인 사랑을 강조하고 있다면, 공자는 소극적인 측면인 정의를 강조하고 있다. 사랑과 정의는 황금률의 양 날개이다. 황금률이야말로 창조세계를 관통하는 보편적인 지혜의 말씀이며, 모두를 이롭게 하는 홍익인간의 길이다.

오늘날 인류는 코로나바이러스 팬데믹으로 전무후무한 재앙에 직면해 있다. 나는 종교인의 한 사람으로써 그 원인을 인간관계의 으뜸윤리인 황금률의 부재(不在)에서 찾는다. 앞으로 인류가 살 길은 어디에서 찾아야 하는가? 황금률의 생활화와 사회화를 통해서다. 개인, 공동체, 사회, 지구생태계에서 지금까지 인류가 가 보지 못했던 황금률문명을 새롭게 창조하는  것이, 포스트코로나 시대에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지상과제일 것이다.

김명수 명예교수(경성대학교 신학과)  kmsi1204@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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