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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찾는 삶과 기도”살며 묵상하며
하태혁 목사(단해감리교회) | 승인 2020.06.18 16:35
10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의인은 없다. 한 사람도 없다. 11 깨닫는 사람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사람도 없다. 12 모두가 곁길로 빠져서, 쓸모가 없게 되었다. 선한 일을 하는 사람은 없다. 한 사람도 없다.”(로마서 3:10~12/새번역)

너무 비관적인 말씀처럼 보입니다. 의인, 선한 일을 하는 사람이 어찌 한 사람도 없을까, 특히나 하나님을 찾는 사람이 왜 없는가, 반문이 고개를 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자신도 선하다고 보지 않으셨습니다. “어찌하여 너는 나를 선하다고 하느냐? 하나님 한 분 밖에는 선한 분이 없다.”(막10:18, 눅18:19/새번역) 수많은 선을 행한 자신도 선하지 않다? 선은 스스로 행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행하게 하셨다는 뜻은 아닐까요. 맞습니다. 자기 의지와 힘만으로 선을 행할 수 있는 의인은 근본적으로 불가능합니다.

“하나님을 찾는 사람이 없다.”는 말씀은 더욱 특별하게 다가오는 맥락이 있습니다. 교회 밖이 아니라 교회 안입니다. 하나님을 부르고 구하고 찾지만, 실은 하나님을 찾는 것이 아닐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통해 얻는 그 무엇인가 때문에 하나님을 찾는다면, 부정할 수 없는 진실입니다.

특이한 모임 이야기를 접한 적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모여서 노래하고 시나 글을 낭송하고 기도하고 묵상하며 서로를 축복합니다. 겉모습은 예배와 너무 닮았지만, 하나님은 없습니다. 찬양을 좋아하는 노래로 바꾸고, 성경은 시로, 기도는 명상이나 묵상으로 바꾼 것입니다. 하나님은 믿을 수 없고, 또는 믿고 싶지 않지만, 예배에서 접한 좋은 경험들은 그대로 유지하고 싶었던 모임입니다. 어쩌면 이 모임이 정직한 것일지 모르겠습니다. 하나님을 통해 받은 것들을 원했지, 하나님을 원한 게 아니라는 진심을 그대로 구현했으니까요.

순수하게 하나님만을 원하는 사랑, 인간 실존에서 너무 먼 이야기처럼 들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끌레르보의 버나드(Bernard of Clairvaux, 1090~1153)는 자기 사랑이 하나님 사랑으로 자라나고 익어가는 길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을 사랑함에 대하여(On the love of God)’에서 버나드는 사랑의 네 단계를 이야기합니다. 1단계는 자신을 위해 자신을 사랑하고, 2단계는 자신을 위해서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3단계는 하나님을 위해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마지막 4단계에서는 하나님을 위해 자신을 사랑합니다.

신형철은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에서 인간의 알몸을 보여줍니다. “인간은 무엇인가. 인간은 심장이다. 심장은 언제나 제 주인만을 위해 뛰고, 계속 뛰기 위해서만 뛴다. 타인의 슬픔에 대해서라면 인간은 자신이 자신에게 한계다.”(p.28) 근본적으로 자기중심적인 인간의 모습을 정나라하게 표현합니다. 그러나 버나드는 인간의 사랑이 하나님을 통해 자라난다고 봤습니다. 처음에는 자신만을 사랑하다가, 하나님을 만납니다. 하나님 주시는 은총과 사랑이 필요해서 자신을 위해서 사랑하게 되죠.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 주시는 것이 좋아서 즉, 자신을 위해서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이런 시작은 자연스럽습니다. 그러나 거기에 멈춰서 고착될 때, 썩어갑니다. 하나님 사랑을 알면 알수록 그 아름다움에 반해 하나님만을 위해 하나님을 사랑하게 됩니다. 그리고 결국 하나님이 사랑하는 자신과 이웃을 사랑하게 되죠. 그것도 하나님을 위해서 사랑하게 됩니다. 첫 단계에서 자신을 사랑한 이기적 집착과 전혀 다른 깊이를 지닙니다. 하나님을 위해 하나님의 사랑으로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다르면, 기도도 삶도 달라집니다. 자신을 위해 자신을 사랑할 때, 또는 자신을 위해 하나님을 사랑할 때, 기도는 자기 욕망에 뿌리를 둡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위해 하나님을 사랑할 때, 기도는 그 무엇보다 하나님을 청합니다. 하나님 주시는 그 무엇이 아니라 하나님 자체를 구합니다. 자신을 사랑할 때조차 하나님을 위해서 사랑합니다.

번영신학, 번영신앙에 대한 반성과 비판은 이미 넘쳐납니다. 그러나 비판만 가득할 뿐 비판에 합당한 결과는 가물어 보입니다. 번영신앙에 뿌리를 둔 기도는 하나님을 통제하는 형태의 기도에 끌려가기 쉽습니다. 그래서 능력 있는 기도는 자기 욕망을 더 많이 실현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 움직이는 기도입니다. 형식은 간청이지만, 내용은 하나님을 부리는 게 아닙니까. 번영신학에 대한 비판은 다른 기도를 필요로 합니다. 그것은 간청하고 요구하는 기도일 수 없습니다. 하나님 주시는 그 무엇이 아니라 하나님을 구하는 기도이자 하나님께 자신을 다 드리는 기도입니다. 하나님을 위해 하나님을 찾는 삶의 자연스러운 열매입니다. 이 열매가 일상의 텃밭에 씨앗으로 심길 때, 변화는 자연스럽습니다. 하나님을 위해 하나님을 구하는 기도가 삶에 뿌리내릴 때, 하나님 나라의 열매는 막을 수 없습니다.

ⓒ하태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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