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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 왜 기름 부음을 받으셨는가그리스도의 삼중직무 (1)
최영 소장(기독교장로회 목회와신학연구소) | 승인 2020.06.20 17:47

칼빈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의 신비를 논하고, 이어 중보자에 의해 성취된 사역을 설명합니다. 그리스도가 누구인가 하는 것은 그의 사역을 통해서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그는 이 문제를 다룬 『기독교강요』 제2권 제15장의 제목을 다음과 같이 붙였습니다.

「성부께서 그리스도를 보내신 목적과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가져다 주 신 것을 알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그의 예언자와 왕과 제사장으로서의 세 가지 직무를 보아야 한다」(II.xv.1).

그리스도의 삼중직

이것은 전통적으로 그리스도의 삼중직론(Munus Triplex)으로 알려진 교리입니다.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하여 예언자와 왕과 제사장의 세 가지 직무를 수행하십니다. 그러나 왜 이 세 가지 직무입니까? 목자나 종 같은 직무는 왜 아닙니까? 그것은 “그리스도” 칭호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 José Ferraz de Almeida Júnior, 「The Baptism of Christ」(1895) ⓒWikipedia

그리스도는 “기름 부음을 받은 자”를 의미하는 히브리어 메시아를 헬라어로 번역한 말입니다. 구약성경에 의하면 메시아는 관습적으로 기름 부음을 받았던 제사장, 예언자를 나타내고 무엇보다도 왕과 같은 높은 신분에 있는 자를 지시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는 영원한 다윗 왕국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에서 특별한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나는 내가 택한 자와 언약을 맺으며 내 종 다윗에게 맹세하기를 ‘내가 네 자손을 영원히 견고히 하며 네 왕위를 대대에 세우리라’ 하셨다”(시89:3이하).

그런데 이스라엘이 주변 강대국들에 의해서 정치적으로 억압받기 시작하면서부터 차츰 메시아는 이스라엘의 종말론적 희망을 지고 가는 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정치적이며 구원론적인 차원, 즉 원수들에 대한 이스라엘의 승리와 예루살렘의 영광에 대한 기대는 메시아 기대와 밀접하게 연결되었습니다. 고대 교회가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불렀다면, 약속된 왕이 바로 나사렛 예수라는 사실을 주장한 셈입니다.

그런데 신약성경에는 예수께서 옛날의 왕, 제사장, 예언자들과 같이 기름 부음을 받으셨다는 기사가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의 증언에 의하면, 그는 탁월하게 성령에 의한 기름 부음을 받으셨습니다(마 3:16; 눅4:18, 요일2:20, 27, 참고). 이 거룩한 기름 부음의 상징은 그리스도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에 눈에 보이게 나타났습니다.

바로 뒤에서 확인하겠지만, 성경에 나타난 성령에 대한 여러 칭호들 가운데는 “기름”과 “기름부음”이란 명칭이 있습니다(III.i.3). 세례 요한은 성령이 비둘기 같이 하늘로부터 내려와 그의 위에 머무는 것을 보고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알았다고 증언합니다(요1:32-34; 눅3:22). 따라서 칼빈은 예수께서 받으신 성령에 의한 기름 부음은 다른 모든 기름 부음의 진리이자 본질이라고 말합니다.(1)

칼빈은 우선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은혜의 사자와 증인이라는 의미에서 예언자라고 말합니다. 하늘로부터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마17:5, 마3:17)는 말씀이 울려 퍼집니다. 바울은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지혜로서 주어졌다고 말하며(고전1:30), 다른 곳에서는 “그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느니라”(골2:3)고 말합니다.

칼빈은 바울의 이 말이 “그리스도 이외에는 알 가치가 있는 것이 없으며,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신지를 믿음으로 깨달은 사람은 하늘 은혜의 무한한 전체를 깨달았다는 뜻”(고전2:2. 참고)이라고 해석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가 예언자 라고 말할 때, 이것은 그가 모든 예언과 계시의 종언을 알리는, 이 세상에 하나님의 뜻을 완전히 알리시는 아버지 하나님의 최고의 사자와 사절이 되셨기 때문입니다(히1:2).

그러나 칼빈에 의하면 그리스도가 기름 부음을 받으신 것은 그 자신이 가르치는 직무를 다하기 위해서뿐만 아니라, 그의 몸 전체가, 다시 말해서 그에게 속한 자들이 복음을 계속 전파하는 일에 성령의 권능이 드러나게 하려고 받으신 것이라고 말합니다(II.xv.2). 그러나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다 말해졌고, 우리는단지 그것을 반복할 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언자 직무에 참여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선포하는 것을 말합니다.(2)

그리스도의 기름 부음 받음이 그리스도인들에게 주는 유익

그리스도와 그에게 속한 자들의 관계에 대해서는, 그의 두 번째 『제네바 신앙문답서』 §40, §41, §45에서 잘 해명되고 있습니다. §40은 그리스도께서 기름 부음을 받은 일에서 “당신은 무슨 유익을 얻는가?”를 질문하고, 그 물음에 “모든 것은 우리의 유익을 위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이러한 모든 선물을 받은 까닭은, 그가 그것들을 우리와 함께 나누기 위해서이고, 그의 충만한 가운데서 우리가 모든 것을 받도록 하기 위함이다(요1:16)”라고 답합니다.

§41은 이 대답에 대한 부연설명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성령을 그 모든 은혜와 함께 충만하게 받으셨다. 그것은 우리에게 하나님이 적당하다고 인정하시는 양과 몫에 따라, 각자에게 나눠주시기 위함이다(엡4:7). 이렇게하여 우리는 마치 샘에서 물을 마시듯이 그에게서 우리의 영적 보물을 얻는 것이다.” §45는 그리스도 칭호에 대한 결론적인 설명입니다. “따라서 당신이 결론짓는 것은 결국 이 그리스도라는 칭호는 하나님이 신도들에게 자기의 열매와 덕을 주시기 위하여 아들에게 주신 세 가지 직무를 포함하고 있다는 말인가?”라고 질문하고, “그렇다”라고 답합니다.(3)

그러므로 여기서 문제되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그 자신이 아니라 우리를 위해 행하신 사역입니다. 우리를 하나님의 은혜의 참여자들이 되게 하기 위해서, 하나의 샘이 되기 위해서, 그의 사역의 열매를 우리에게 나눠주시기 위해서 그 직무들을 수행하시는 것입니다.

그가 풍부하게 되신 것은 자기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의 풍성한 것을 주리고 목마른 자들에게 부어 주시기 위해서다.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성 령을 한량없이 주셨다고 하며(요3:34), 이는 우리가 모두 그의 충만한 데서 은혜 위에 은혜를 받게 하려는 것이라고 한다(요1:16). 이 원천에서 바울이 말하는 풍성한 은혜가 흘러나온다. “우리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를 주셨나니”(엡4:7)(II.xv.5).

왕으로서의 그리스도

이어서 칼빈은 그리스도의 왕의 직무를 논합니다. 칼빈은 우선 그리스도의 왕권의 “영적 성격”을 강조합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왕권의 “이 영적 성격에서 우리를 위한 그 효력과 혜택뿐 아니라, 그 모든 힘과 영원성”을 추론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II.xv.3). 다윗 왕국이 영원하리라는 약속들은 주전 6세기에 바빌론에 의해 그 나라가 멸망 할 때 명백히 실패로 끝났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은 실패할 수가 없습니다.

▲ 「Christ as King」Stained-glass ⓒGetty Image

그러므로 다윗에게 하신 이 약속들은 다윗이 예표 역할을 한 진정한 왕국을 내다본 것으로 해석해야 합니다. “내가 나의 거룩함으로 한 번 맹세하였은즉 다윗에게 거짓말을 하지 아니할 것이라 그의 후손이 장구하고 그의 왕위는 해 같이 내 앞에 항상 있으며 또 궁창의 확실한 증인인 달같이 영원히 견고하게 되리라”(시89:35- 37). 칼빈은 이 말씀이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의 손에 의해서 “자기의 교회의 영원한 보호자와 수호자”가 되시겠다고 확실히 약속하신 것으로 이해합니다. 그리고 이 예언은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히 성취되었습니다(II.xv.3).

따라서 칼빈은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교회의 영원한 보호자와 수호자가 되시기 때문에, “교회는 격렬한 동요로 끊임없이 고통하며 무섭고 비참한 폭풍들이 무수한 재난을 위협하는 가운데서도, 여전히 안전하다”고 말합니다(II.xv.3). 이것은 마태복음 14장 24-32절을 주석하며 “교회는 동요하지만, 침몰하지는 않는다”(Fluctuat nec mergitur)고 말했던 루터의 생각과 일치합니다.(4) 그리고 칼빈은 이 생각을 우리 각 사람에게도 적용시켜 영원한 왕이신 그리스도가 우리를 이 땅에서, 그리고 영원토록 지켜주신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칼빈은 그리스도의 왕권이 영적이라는 것을 깨달을 때, 우리는 그 힘과 효력을 진정으로 실감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평생 십자가를 지고 싸워야 하는 고달픈 삶을 살아가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이 지상 생활의 저 편에서 하늘 임금의 통치의 혜택을 즐기리라는 확신이 없다면, 우리가 그 통치하에 지금 소집되는 것이 우리에게 무슨 이익이 있겠는가?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약속받은 행복은 외면 적인 이익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예컨대, 즐겁고 평화로운 생활, 많은 재산, 아무 해도 받지 않는 안전한 처지, 육신이 보통 동경하는 풍부한 오락 – 이런 것이 아니고, 우리의 행복은 천상 생활에 있다(II.xv.4).

그러나 그리스도의 왕권이 영적인 성격을 갖고 있다고 할 때, 그것은 지상에서의 우리의 삶에는 전혀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어떤 정신적인 것이나 타계적인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 왕권은 영적인 것이기 때문에 썩고 부패할 수밖에 없는 지상적이고 육적인 것과 달리 언제 어디서든 우리와 함께 하시며, 성령의 능력 안에서 악마와 세상과 각종 장애물을 상대로 한 싸움에서 항상 이기게 하시고 결국 우리를 높이 들어 올려서 영생에까지 이르게 하시는 왕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불행과 기한(飢寒)과 멸시와 비난과 그밖의 괴로움이 있는 이 세상을 참고 지나가야 한다. 그리고 다만 한 가지 일로 만족하자. 우리 왕께서는 결코 우리를 궁핍하게 버려두시지 않고 필요한 것을 주실 것이며, 드디어 우리는 싸움을 끝내고 부르심을 받아 개선할 것이다. 그리스도의 지배는 자기가 아버지에게서 받으신 것을 모두 우리와 나누시는데 그 특색이 있다. 지금 그는 우리를 자기의 권능으로 무장하시며 자기의 웅 대한 아름다움으로 장식하시며 자기의 부요하심으로 풍부하게 만드신다. 그러면 이런 혜택들은 우리가 자랑할 풍부한 이유가 되며, 악마와 죄와 죽음을 상대로 아무 두려움 없이 싸울 확신을 준다(II.xv.4).

특히 칼빈은 신자들이 ‘그리스도인’이라 불리는 이유를 그리스도의 왕직과 관련하여 해명합니다. 이것은 성경이 성령과 그의 은사를 “기름 부음”(요일 2:20, 27)이라고 부르는 것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성령은 그리스도를 그의 거처로 택하시고, 그를 통하여 우리에게 필요한 하늘 보화를 풍성하게 흐르게 하셨습니다. 우리가 활력을 얻는 방법은 이 길밖에 없으며, 무엇보다 하늘 생명에 관해서는, 성령께서 주시지 않는다면, 우리 안에는 그 생명력을 찾을 길이 없습니다. 이렇게 신자들은 성령의 능력에 의해서 왕의 힘을 받아 불굴의 자세를 견지할 수 있으며, 왕의 영적 보화를 누릴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칼빈은 그들을 그리스도인이라 부르는 것이 정당하다고 말합니다 (II.xv.5).

제사장으로서의 그리스도

마지막으로 칼빈은 그리스도의 제사장직에 대해 말합니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대신하여 하나님께 희생제물을 바쳤다는 점에서 제사장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그 말이 지닌 두 가지 의미에서 유일무이한 제사장입니다. 첫째, 그는 자신을 제물로 바쳤던 유일한 제사장입니다. 둘째, 십자가상에서 그의 희생은 옛 계약의 모든 희생 제사들을 종결짓는 궁극적인 제물, 결코 더 이상 반복될 수 없는 희생제물이라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이것은 칼빈이 대부분의 다른 개혁자들 과 함께 가톨릭의 미사를 용납할 수 없는 우상숭배로 배격한 이유를 설명합니다. 교황주의자들은 그리스도의 제사장직에 만족하지 않고 감히 그를 새로이 제물로 바치노라고 조작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매일 이 짓을 시도하며, 미사를 그리스도를 희생 제물로 바치는 것으로 간주합니다(II.xv.6).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하나님과 화해시키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이 위대한 직무의 동료로 삼으려는 중요한 의도가 있습니다 (계1:6). 우리 자신은 부정하지만, 그리스도 안에서는 제사장이기 때 문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 서 있을 수 있게 되었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 순종하고, 기도와 찬양을 드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II.xv.6). 그리스도가 왕이기 때문에, 우리가 어느 것에 대하여 싸우고 고난을 견딜 수 있는 것과 같이, 그렇게 그리스도가 제사장이기 때문에 우리는 감히 하나님 앞에 서 있을 수 있고, 그에게 우리 의 모든 것을 바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자신들로서는 불가능한, 용납될 수 있는 자들이 되었습니다.

▲ 「Icon of "Christ the Great High Priest", vested as a bishop, on a bishop's cathedra, blessing as a priest」 ⓒWikipedia

미주

(미주 1) 칼 바르트, 『칼 바르트가 읽은 주의기도/사도신조』, 130.
(미주 2) Ibid., 139.
(미주 3) Ibid., 132-33.
(미주 4) K. Barth, Church Dogmatics IV/2, 672, 675, 676에서 재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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