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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거기에 계시지 않았다한 성전 안에서(에스겔 8:5-6)
이성훈 목사(명일한움교회) | 승인 2020.06.21 16:48
5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제 너는 눈을 들어 북쪽을 바라보라 하시기로 내가 눈을 들어 북쪽을 바라보니 제단문 어귀 북쪽에 그 질투의 우상이 있더라 6 그가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스라엘 족속이 행하는 일을 보느냐 그들이 여기에서 크게 가증한 일을 행하여 나로 내 성소를 멀리 떠나게 하느니라 너는 다시 다른 큰 가증한 일을 보리라 하시더라

오늘은 에스겔의 말씀을 함께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에스겔에 나타난 말씀과 함께 당시의 정치적 상황을 생각해보려고 하기 때문에 약간은 신학적인 이야기가 될 수도 있지만,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에스겔이 함께 있는 포로들을 향해서 왜 이스라엘 성전에 대한 심판을 선포했는지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에스겔에 대한 연구는 상당히 보수적인 관점에서 진행되어 왔습니다. 예를 들어, 오늘 저희가 보고있는 본문은 에스겔이 하나님께 이끌려 예루살렘 성전으로 날아가게 되었고, 그곳에서 본 환상을 전달하고 있습니다.

이때 에스겔은 하나님께 머리채를 잡힌 채 예루살렘으로 날아가게 되는데, 요즘 같은 인식으로 이는 이해할 수 없고 말도 안 되는 이야기입니다. 그렇기에 환상이라는 형식을 빌려서 어떠한 의미를 전달하고 있다고 해석하게 됩니다.

하지만 상당히 최근까지 에스겔이 머리채를 잡혀 예루살렘으로 날아갔다는 이야기는 사실 자체로 받아들여져 왔습니다. 이보다 조금 진보적인 견해가 환상으로 본 내용은 예루살렘의 현실을 반영하지만, 예루살렘으로 날아간 부분은 환상의 일부일 뿐, 사실이 아니라는 해석입니다.

많은 학자는 에스겔이 본 예루살렘의 모습이 실제 예루살렘의 모습을 반영하고 있다고 여겨왔습니다. 예루살렘에는 수많은 우상이 세워져 있었고, 이스라엘에 남은 사람들은 하나님이 아닌 우상을 숭배하고 있었다고 여겼습니다. 하지만 예레미야를 통해 볼 수 있는 이스라엘의 모습은 이와는 조금 다릅니다. 총독 그달리야를 비롯한 이스라엘에 남은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서 바로 서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습니다.

예레미야에 나타난 이스라엘의 상황과 에스겔의 환상이 보여주는 이스라엘의 상황에 차이가 엿보이기 때문에 저는 에스겔이 당시 환상을 통해 당시 이스라엘의 실제 모습을 보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에스겔이 환상이라는 수사법을 통해 어떤 의미를 전달한다고 봅니다.

예루살렘 성전 환상

오늘 저희는 에스겔 8장에 나타난 예루살렘 성전의 모습만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그 내용을 짧게 살펴보면 이렇습니다.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가 있던 에스겔에게 하나님의 영이 내립니다. 하나님의 영은 에스겔의 머리채를 잡고 하늘로 날아갑니다.

에스겔이 도착한 곳은 예루살렘 성전 북문이었습니다. 에스겔은 3절에서 그곳이 ‘질투의 우상’이 있는 자리라고 말합니다. 여기에서 질투의 우상은 아세라 신상을 의미합니다.

과거 므낫세가 세웠던 아세라 상은 요시야의 종교개혁 때에 파괴되었습니다. 요시야 사후에 아세라 상이 다시 세워졌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열왕기하와 역대하는 이후의 왕들이 하나님 앞에서 악을 행했다고 진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열왕기하에는 악을 행했다는 표현은 있지만 우상에 관한 내용은 없습니다. 하지만 역대하에는 시드기야가 이방의 모든 가증한 일에 따라 성전을 더럽혔다는 표현이 나타납니다. 따라서 에스겔이 아세라 상이 세워져 있던 자리라고 표현하는 점이 성경 안에서 충돌되지는 않습니다. 물론 신학적인 고찰을 해본다면 더 논의해봐야 할 문제이긴 합니다.

▲ 에스겔이 본 환상은 성전에서 행해지고 있던 각종 우상숭배였다. ⓒGetty Image

에스겔에 나오는 북문과 제단문은 성전 모형을 살펴보았을 때, 동일한 문으로 보입니다. 그곳에서 아세라 상을 본 에스겔은 하나님에 의해 뜰 문으로 인도됩니다. 여기에서 뜰 문은 건물에 출입하는 문을 의미합니다. 우리 말에는 구분이 없지만, 히브리어에는 문을 의미하는 단어가 몇 가지 있는데, 에스겔은 건물에 출입하는 문(페타흐)과 지붕이 없이 벽에 있는 문(샤아르)을 구분하여 사용합니다. 영어의 Door와 Gate의 차이와 같습니다. 앞선 북문과 제단문은 ‘샤아르’이고, 뜰 문은 ‘페타흐’로 사용합니다.

성전 외벽 안쪽에 존재하는 건물은 성소밖에 없습니다. 결국 에스겔은 성소 옆문으로 향했고, 그곳 벽에서 하나의 구멍을 발견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에게 그 구멍을 파라고 명하십니다.

에스겔이 구멍을 파내자 그곳에는 하나의 문이 있었습니다. 그 문 안에는 온갖 짐승과 곤충과 우상이 그려져 있었고, 70명의 이스라엘 장로와 사반의 아들 야아사냐가 그곳에서 뭔가 제의적 행위를 하고 있었습니다.

다시 하나님께 이끌려 북문으로 향한 에스겔은 그곳에서 담무스를 위해 애곡하는 여인들을 봅니다. 담무스는 계절의 변화에 따라 삶과 죽음을 반복하는 바벨론의 신입니다. 봄에는 살아나서 식물을 자라게 하고, 여름이 끝날 때에 죽어서 지하세계에 내려갑니다. 여인들은 봄이 오기 전에 담무스가 잘 살아날 수 있도록 그를 위해 애곡합니다.

이제 에스겔은 성소 정문으로 향합니다. 그곳에는 성소를 등에 지고 동쪽을 향해 태양에게 예배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태양신이라기보다 태양 자체를 숭배하는 사람들입니다.

당시 남유다의 정치적 상황

여기에서 우리는 요시야에서 시드기야에 이르는, 약 50여년에 걸쳐 남유다 왕국에 벌어진 격변의 역사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요시야는 앗시리아의 위세가 꺽일 무렵, 내부적으로는 종교개혁을 일으켰고, 외부적으로는 앗시리아의 속국에서 벗어나려는 전략을 펼칩니다.

당시 앗시리아는 왕위 다툼에 따른 내전으로 신흥 바벨론 제국을 견제하지도 못할 정도의 상황이었기 때문에 속국인 남유다를 살펴볼 여력이 없었습니다. 적절한 시기를 틈탄 요시야의 독립운동은 성공적으로 끝난 것처럼 보였습니다.

하지만 요시야는 이집트의 왕 느고에 의해 죽임을 당합니다. 당시 이집트는 앗시리아와 동맹국이었기 때문에 앗시리아를 대신해 남유다를 공격했는지, 동맹국의 위기를 틈타 이스라엘을 자신들의 속국으로 삼을 심산이었는지 알 수 없지만, 이집트는 남유다를 공격하였고 요시야를 죽입니다.

이후 백성들이 여호아하스를 왕으로 세우자 이집트 왕이 3개월만에 그를 폐위시키고 여호야김을 왕으로 세운 것으로 보아, 이집트는 요시야를 죽인 후 남유다를 자신들의 속국으로 삼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남유다를 향한 이집트의 영향력은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북쪽의 바벨론이 거대 제국을 형성하였기 때문입니다. 남유다 역시도 바벨론의 속국이 됩니다.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은 여호야김 시대에 남유다를 점령하였고, 여호야긴 시대에도 남유다를 공격합니다. 마지막으로 시드기야 시대에 남유다를 폐허로 만들며 예루살렘 성전을 파괴합니다.

성경 인물의 시대를 구분해보았을 때, 다니엘은 여호야김 시대에 포로로 끌려갔고, 에스겔은 여호야긴 시대에 포로로 끌려갑니다. 예레미야는 끝까지 남유다에 남아있다가 남유다의 폐망을 보며 몇몇 유다 장군들에 의해 이집트로 끌려가게 됩니다.

에스겔은 환상과 예언 앞에 정확한 연대를 기록하고 있는데, 오늘 본문의 환상을 본 시기는 남유다가 폐허가 되기 전, 여호야긴 시대에 바벨론 포로로 끌려온지 6년이 되는 해입니다. 남유다가 바벨론의 속국이기는 하지만,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지지는 않은 시기입니다.

남유다의 상황과 우상

에스겔의 우상숭배에 대한 환상을 보는 중에 남유다의 정치적 상황을 살펴본 이유는, 에스겔이 예루살렘 성전으로 날아간 이후 보여주는 동선과 그가 본 우상의 종류 때문입니다.

처음 에스겔은 북쪽을 향했고 아세라 상을 봅니다. 아세라 상은 오래전부터 이스라엘에 존재했던 우상인데, 이는 앗시리아에서도 숭배하던 신입니다. 요시야가 종교개혁을 일으키며 바알과 아세라, 일월성신을 폐한 이유는 앗시리아와의 단절을 위해서였습니다.

예레미야 44장을 보면, 이집트로 피난간 유다 백성들이 이런 말을 합니다. 우리 선조들이 거리에서 하늘 여왕을 섬길 때에는 우리에게 먹을 것이 풍족했지만, 하늘 여왕 숭배를 폐한 후에 우리는 칼과 기근에 멸망 당했다고 말합니다.

하늘 여왕은 아세라를 뜻하는데, 열왕기하와 역대하를 보았을 때, 아세라 숭배를 폐한 왕은 요시야 밖에 없습니다. 즉 요시야 이전, 앗시리아 속국 시절에 섬기던 대표적인 신이 아세라이며, 이들은 이때에 자신들이 더 풍족하게 잘 살았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에스겔에 나타난 북쪽의 아세라는 앗시리아를 상징합니다.

이제 에스겔은 남쪽으로 내려와 감춰진 문을 발견하고 그곳에서 곤충과 짐승과 우상이 새겨진 방을 봅니다. 일부 학자들은 이에 대해 독특한 이론을 제시하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학자들은 이를 이집트 제의라고 의견을 모으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 더 자세한 이야기를 드릴 수도 있지만, 말씀이 길어지기 때문에 생략하겠습니다.

다음으로 에스겔은 다시 북쪽으로 갑니다. 그곳에서 바벨론에서도 숭배하는 담무스를 숭배하는 여인들을 봅니다. 북쪽, 남쪽, 북쪽이라는 동선을 너무 과도하게 정치적 외교적인 문제와 연결시키고 있는게 아닌가 싶으시겠지만, 당시 남유다의 종교와 외교문제는 떼어서 생각할 수가 없습니다.

또 우리는 예레미야를 통해 당시 남유다에는 이집트의 도움을 얻고자 했던 사람들, 결국 이집트로 피난을 갔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알고 있습니다. 예레미야의 경우 바벨론에게 항복해야 한다는 예언을 전했기 때문에 정치적으로 본다면, 친바벨론 성향이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에스겔은 동쪽을 바라보며 태양을 숭배하는 이들을 봅니다. 여기에서 특이한 구문은 ‘성전을 등지고’라는 표현입니다. 본래 동쪽은 하나님께서 오시는 방향입니다. 그래서 예루살렘 성소 정문은 동쪽을 향하고 있고, 성전 외벽의 동문은 하나님께서만 출입하시는 문입니다.

에스겔 10장에서 하나님의 영이 마지막으로 동문에 머무시고 결국 11장에서 동문을 떠나 동쪽 산에 머무셨다는 표현은 하나님께서 동쪽에서 오신다는 당시 유대인들의 신앙을 보여줍니다.

에스겔이 환상을 보는 순간 하나님께서는 성전에 계셨습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하나님이 계시는 성전을 바라보지 않고 이를 등진 채 동쪽에 떠오르는 태양, 하나님이 아닌 그저 피조물일 뿐인 태양을 향해 절합니다. 이는 남유다가 더이상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음을 보여줍니다.

한 성전 안에 여러 의지처

에스겔 8장에 나타난 우상숭배의 문제는 우상에 대한 단순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아닌 앗시리아, 이집트, 바벨론을 의지하려 했던 당시 유다의 모습을 은유적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우스운 점은 이러한 행위가 하나님의 이름이 놓인 하나님의 성전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들은 하나님께서 계신다고 여겨지는 장소에 모여 있습니다. 하지만 결국 이들이 의지하는 이는 하나님이 아니었습니다. 각자의 의견에 따른 외세를 의지하려고 했습니다.

우상을 숭배한다는 기본적인 인식은 하나님이 아닌 다른 어떤 신을 의지한다는 의미입니다만, 그것이 하나님의 이름이 놓인 성전 곳곳에서 동시에 이루어지고 있는 상황입니다.

지금 시대의 우리에게 이 말씀은 맞지 않아보입니다. 우리는 교회에서 우상을 숭배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조금 더 나아가서 생각해보았으면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모여있지만, 실제 마음속으로는 하나님이 아닌 다른 무엇인가를 의지하고 있지 않습니까? 어떤 사람은 자신의 능력을, 어떤 사람은 자신의 자산을 어떤 사람은 가족 형제를 하나님보다 더 의지하며 살아감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11장에서 에스겔을 통해 말씀하십니다. “내가 그들에게 한 마음을 주고 그 속에 새 영을 주며 그 몸에서 돌 같은 마음을 제거하고 살처럼 부드러운 마음을 주어 내 율례를 따르며 내 규례를 지켜 행하게 하리니 그들은 내 백성이 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특히 눈여겨 보아야 할 말씀은 이 앞에 나타난 16절 하반절입니다. “그들이 도달한 나라들에서 내가 잠깐 그들에게 성소가 되리라” 에스겔은 지금 바벨론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루살렘 성전을 떠나 동쪽으로 가셨습니다. 그리고 지금 에스겔에게 오셔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이제 이곳에서 성소가 되려 한다.

하지면 여기에는 조건이 있습니다. 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일입니다. 한 마음은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섬기는 마음입니다. 그렇기에 그들의 마음에는 새로운 영이 생겨나고 굳었던 마음이 열립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이들을 자신의 백성으로 삼으시고 당신은 이들의 신이 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당신 백성의 삶을 지키시고 그 삶에 평안을 가져다주시는 분이 되겠다고 선언하십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를 돌아봐야 합니다. 지금 우리는 교회에 모여있지만 무엇을 의지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이름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한 장소에 모인 우리는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그곳이 바로 하나님의 성소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기에 당연히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에 따라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갈 때, 우리는 오직 한 곳을 바라보게 되며, 하나의 마음을 품게 됩니다.

아마도 빌립보서는 이를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라고 표현한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모인 여러분께서 오직 한 마음 품으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시고, 오직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인도자 되시길 바랍니다. 여러분의 삶에 오직 평안과 은혜가 충만할 줄 믿습니다.

이성훈 목사(명일한움교회)  joey810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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