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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낮은 곳으로(居善地, 거선지)예수님은 기독교 고지론에 동의하지 않으신다(마가 9:35[9:1~37])
홍인식 목사(순천중앙교회) | 승인 2020.06.22 17:24
▲ 22일 오전 사랑제일교회 신도들이 서울 성북구 장위동 사랑제일교회 앞에서 법원의 명도 집행에 맞서 소리를 지르며 저항하고 있다. ⓒ연합뉴스

정상에서 만납시다 - 고지론(高地論)

한 때 기독교 내에서 고지론(高地論)이 유행했던 적이 있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정상에서 만납시다.”라는 생각이 모든 기독교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때가 있었습니다.

고지론(高地論)이란 사실 전쟁용어이기도 합니다. 전투에서 고지를 점령해야 그 전투를 이기고 영토를 장악할 수 있다는 논리이기도 합니다. 그것을 기독교에서 그리스도인들에게 적용하기 시작하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인기를 끌기 시작했습니다. 기독교 고지론(高地論)이 말하는 것은 간단합니다.

그리스도인이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해서 그리고 세상의 소금과 빛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기독교인들이 우리 사회에서 힘 있는 집단이 되고 그리고 그곳에서부터 좋은 영향력을 발휘함으로서 이 세상을 주님의 세상으로 만들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선적으로 할 일은 높은 자리, 즉 고지(高地)에 올라서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또 다른 말로 “정상에서 만납시다.”라고 요약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논리에서 기독교인들은 성공한 사람들에 주목하게 됩니다. 특히 기독교인으로서 높은 자리에 올라가 있는 사람들에게 관심을 보이게 되었고 또 그들이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복 있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하기에 이르게 됩니다. 그리고 많은 교회에서 이들을 초청하여 간증 집회를 통하여 교인들에게 고지(高地)에 올라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비근한 예로 하나님의 학습법이라는 것이 한 때 우리들의 관심을 끌기도 했습니다. 다니엘학습법, 지저스 스터디, 조이조이 학습법, 쉐마 학습법, 5차원 학습법, 플래닝 학습법, 왕의 자녀 학습법 등등이 그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학습법들이 하나님의 뜻 가운데서 신앙과 학습법을 균형 있게 잡아주는 신본주의 학습법이라는 평판도 있지만 결국에는 최종적이고 실질적인 목표는 좋은 일류대학에 가기 위한 학습법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중에서도 다니엘학습법은 정말 많은 기독교인들의 관심을 받았고 실지로 그것을 실천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데 그 이유 중의 하나가 다니엘 학습법의 개발자인 김동환이라는 사람이 서울대학교 수석 졸업이라는 이력을 갖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이러한 학습법들은 최종적으로 고지론(高地論)으로 귀착되었습니다.(미주 1)

한국 교회에 악(惡)영향을 끼친 여러 가지 생각들이 많습니다. 그 중에서도 고지론(高地論)은 출세와 성공을 꿈꾸는 젊은이들의 피를 뜨겁게 만들기에 충분했습니다. 알게 모르게 이 고지론 사상이 그리스도인의 삶의 틈새를 비집고 들어와 자리를 깊게 차지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이러한 사상을 영향을 받은 것이 소위 청부론과 대형교회 효자론이 그것입니다. 청부론은 나눔을 실천하기 위해서라도 교인들이 세상의 물질 복을 많이 받아서 부자가 되어야 한다는 기발한 논리와 대형교회가 되어야 큰일을 할 수 있고 하나님의 영광을 확실하게 드러낼 수 있는 대형교회 효자론(孝子論) 등을 마치 교리인양 주저 없이 교회에서 가르치고 있는 것이 또한 우리의 아픈 현실이기도 합니다.

그러면 예수님과 성경은 이러한 고지론(高地論), 청부론(淸富論) 그리고 대형교회 효자론(孝子論) 등에 동의하실까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오늘의 사회에서 ‘예수살기’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고지론(高地論)이라는 측면에서 살펴보려고 합니다.

낮은 자리와 높은 자리

오늘의 본문은 어느 날 예수님께서 자리에 앉으셔서 제자들에게 던지는 중요한 가르침 하나를 남겨 놓으십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그는 모든 사람의 꼴찌가 되어서 모든 사람을 섬겨야 한다.”

이 같은 예수님의 가르침은 우리들 마음에 흔쾌히 받아들일 만한 것이 아닙니다. 의구심을 갖게 만드는 가르침이 아닐 수 없습니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 싶어 하는데 꼴찌가 되라고 하시는 그것은 합리적인 말씀이 아닙니다.

영향력을 발휘하기 위해서 고지(高地)에 당연히 서야 하는데 낮은 곳에 서라고 하시는 가르침은 이해는 할 수 있을지라도 도저히 실행할 수 없는 아니 어쩌면 세상 물정 모르는 한량(閑良)들의 가르침이라고 치부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이 같은 가르침은 어떤 배경에서 나온 것입니까? 오늘의 본문은 넓게 보아서 9장 1절부터 37절까지의 맥락에서 살펴보아야 합니다. 마가복음 9장은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는 변화 산에서 황홀한 경험을 한 이후 산에서 그대로 있자고 하는 제자들과 함께 산 아래로 내려오시는 예수님을 모습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는 귀신들린 어린 아이 하나 제대로 고치지 못하는 믿음 없는 제자들의 모습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세 번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자들 사이에서 누가 더 큰 사람인가 하는 논쟁이 벌어지고 있음을 보도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은 믿음이 없어서 귀신들인 어린아이 하나 고치지 못하면서도 서로 간에 누가 크냐의 논쟁을 벌이고 있습니다. 도토리 키 재기가 아닙니까?

변화 산의 경험이 의미하는 바를 모르는 무지한 사람들, 어린아이 하나 고치지 못하는 능력과 믿음이 없는 사람들, 그런데 이러한 사라들 사이에서 권력 투쟁이 일어나고 있다는 성경의 기록을 통하여 우리 모습을 돌아보게 됩니다. 그것은 우리 모두의 적나라한 모습일 뿐입니다.

오늘의 예수님의 가르침은 바로 이러한 배경 속에서 선포 되어졌습니다.  오늘 우리들의 모습을 보시고 우리에게 주시는 가르침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의 요약은 한 마디로 “높은 곳으로 올라가서 힘을 가지고 영향력을 발휘하는 것은 예수님의 방법이 아니다.”라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그는 모든 사람의 꼴찌가 되어서 모든 사람을 섬겨야 한다.”

예수님의 가르침의 방점은 “꼴찌가 되는 것”과 “모든 사람을 섬기는 것”에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높은 자리에 올라서는 방법론으로 “꼴찌 됨과 섬김”을 가르쳐주신 것이며 결국 이 가르침도 첫째가 되라는 가르침이라고 억지 해석을 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그런 가르침에 현혹되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살기는 이처럼 낮은 곳을 향하는 그리스도인과 낮은 자리에 서는 것을 마다하지 않으면서 고지론(高地論)에 유혹받지 않는 삶의 양식으로부터 출발합니다.

낮은 곳을 향하는 물

도덕경 8장에서 다루는 물의 특성은 이러한 예수님의 가르침을 연상케 하고 있습니다. 도덕경 8장은 물의 9가지 특성 중 3번째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居善地(물은 낮은 곳으로 흐릅니다)
거할 거(居), 착할 선(善), 땅 지(地)
‘물은 땅에 거하는 것을 좋아한다.’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좀 더 깊은 의미는 ‘물은 낮은 곳으로 흘러간다.’라는 의미입니다. 노자는 도(道), 즉 진리를 설명하고자 할 때 물이라는 개념을 많이 사용합니다. 그에게 있어서 물은 이처럼“낮은 곳에 머물기”때문에 도(道)의 모습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순자(荀子)도 자신의 글 예론(禮論)에서 지자 하지극야(地者, 下之極也) “이 세상에서 가장 낮은 곳은 땅이다.”라고 말합니다. 땅은 낮은 곳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변화 산의 높은 곳에서 화려한 경험을 하십니다.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가장 높이 숭상되는 모세와 엘리야와 어깨를 나란히 하십니다. 그야말로 고지(高地)에 서 계셨습니다. ‘정상’의 위치에 오르셨습니다. 그러나 그 분은 고지(高地)에 머물 것을 요구하는 유혹(제자들의 요청)을 물리치고 저 산 밑으로 내려가십니다.

그리고 고지(高地)에 서로 먼저 서고자 하는 제자들에게 오늘의 가르침을 전해 주십니다. 고지(高地)에서 내려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꼴찌가 되어서 남을 섬기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이 모습은 노자의 물과 같습니다.

그런데 도덕경에는 예수님의 오늘의 가르침과 매우 흡사한 교훈이 나오기도 합니다. 
노자(老子) 도덕경(道德經)  제66장의 말입니다.

남의 위에 서려거든 자신을 낮추어라

江海所以能爲百谷王者, 以其善下之, 故能爲百谷王,
강해소이능위백곡왕자, 이기선하지, 고능위백곡왕
是以欲上民, 必以言下之, 欲先民, 必以身後之,
시이욕상민, 필이언하지, 욕선민, 필이신후지,
是以聖人處上而民不重, 處前而民不害,
시이성인처상이민부중, 처전이민불해,
是以天下樂推而不厭, 以其不爭, 故天下莫能與之爭.
시이천하낙추이불염, 이기부쟁, 고천하막능여지쟁.
 

강과 바다가 계곡들의 왕이 될 수 있는 것은 그것이 가장 낮은 곳에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모든 계곡의 왕이 되는 것이다.

백성 위에 있기를 바란다면 반드시 겸손한 말로 자신을 낮추고 백성의 앞에 서고자 한다면 반드시 몸을 남의 뒤에 두어야 한다.
그래서 성인은 위에 있어도 백성들이 짐스러워 하지 않고 앞에 있어도 방해된다고 여기지 않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이 그를 받들면서도 싫어하지 않는 것이다. 다투려 않기 때문에 누구도 그와 다툴 수가 없는 것이다.

대다수 사람들은 고지론(高地論)에 매혹됩니다. 고지(高地)에 서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라고 스스로를 설득합니다. 그러나 그 뒷면에는 자신이 영광을 받고자 하는 욕망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처음에는 고지론(高地論)에 매료되어 있었지만 하나님 앞에서 새롭게 낮아짐에 대해서 배운 이후 높은 자리에 서게 되었을 때 그것을 자랑으로 여기지 않고 진정한 의미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낸 사람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그 중의 대표적인 인물이 요셉입니다.

요셉은 낮은 곳에 처해 있었을 때 실망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교만하지 않았습니다. 낮은 자리가 자신의 삶의 자리임을 인정했습니다. 그래서 그곳에서도 높은 곳으로 올라가려고 발버둥치지 않고 그냥 흘러갔습니다. 하나님의 섭리를 믿고 확신하는 삶의 모습이 바로 이런 것이 아니겠습니까?

높은 곳으로만 흘러가려고 하니까 무리가 생깁니다. 긴장이 생깁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서로 높은 자리에 앉으려고 했을 때 그들 사이에서 분란이 발생했습니다. 갈등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오늘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 아닌가요? 높은 곳으로 올라가려는 것으로 인해 불필요한 갈등이 발생하고 어느 덧 우리 사이에서 평화는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이 말합니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모든 사람의 꼴찌가 되어서 모든 사람을 섬겨야 한다.”(막 9:35)

낮아짐과 섬김

예수님의 가르침은 낮은 자리 즉 꼴지 자리에 서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낮은 자리에서 다른 사람을 섬길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것이‘예수 살기’의 절정입니다.

우리가 낮은 곳에 서고자 하는 것은 높이 올라가고자 하는 욕망을 실현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낮은 곳은 높은 곳으로 향하는 도약의 발판으로 삼고자 하는 것도 아닙니다. 낮은 자리에서 다른 사람(특히 낮은 사람)들을 섬기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어린 아이를 부르십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말합니다.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이들 가운데 하나를 영접하면, 그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는 사람은, 나를 영접하는 것보다, 나를 보내신 분을 영접하는 것이다.”(37절)

예수님의 가르침은 이처럼 섬김에 있습니다. 예수살기는 낮은 곳에서 섬기는 삶을 의미합니다. 낮은 자리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섬기는 것이 예수 살기의 핵심입니다. 높은 자리로 올라가서 온갖 부귀영화를 누리는 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허락하시는 큰 복이 아닙니다. 낮은 자리에서 낮은 사람들을 섬길 수 있는 마음과 삶의 행위를 가질 수 있는 것이 하나님 안에서 누릴 수 있는 가장 큰 복입니다.

그런데 이런 일을 하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능력을 주실 때 하나님의 능력으로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기에 낮은 자리에서 가장 낮은 사람을 섬기는 능력을 발휘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선택하신 진정한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다른 사람을 이롭게 하다

도덕경은 물의 특징 중의 하나를 居善地(거선지)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위에서 말한 것처럼 거할 거(居), 착할 선(善), 땅 지(地) ‘물은 땅에 거하는 것을 좋아한다.’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나아가면 우리는 또 다른 의미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물은 땅(地, 낮은 곳)에 거(居) 하면서 땅(地 낮은 곳)을 좋게(善, 선하게) 만든다는 의미도 있음을 보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물은 낮고 더러운 곳에 처하면서 그 곳을 자신의 희생으로 깨끗하게 합니다. 물은 낮고 메마른 곳에 거하면서 자신의 희생으로 땅(낮은 곳)을 기름지게 만듭니다. 물은 자신이 처하는 곳을 이롭게(선하게) 만듭니다.

‘예수살기’는 이처럼 자신이 처한 것을 이롭게(선하게) 만들어 가는 삶입니다.

물처럼 낮은 곳으로 흘러가면 어느 덧 우리의 삶은 행복의 물결로 가득 차게 될 것입니다. 높은 곳으로 흐르려고 하지 맙시다. 남이 가기 싫어하는 낮은 곳으로 흐르는 삶의 모습을 가지게 될 때 어느 모르는 사이에 행복의 높은 산위에 올라가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살기’의 믿음은 이처럼 우리로 하여금 낮은 곳으로 흘러가게 만드는 것입니다. 신앙이 우리로 하여금 자꾸만 욕망이라고 높은 산위로만(고지로만) 향하게 만들고 있다면 그것은 진정한 신앙이 아닐 것입니다.

예수님은 물처럼 낮은 곳으로 흐르는 삶을 사셨습니다. 그 분은 높은 하나님의 자리를 버리시고 낮은 인간의 세계로 오셔서 결국 우리를 구원하시고 행복의 세계를 열어 주지 않으셨습니까.

물은 낮은 곳으로 흐릅니다. ‘예수살기’는 거선지(居善地)  낮은 곳으로 흐르는 삶 살기입니다.

동천에서(2)

정인영

강가에 서서 물을 바라 봅니다
시를 써보겠다는 욕심을 띄워 보냈는데
또다시 스멀스멀 흘러옵니다
나는 아직 시 속으로 들어가 본 적 없습니다
아직 잘 모르겠고 부끄러움을 들킬 것 같아서요
강가에 오래오래 서 있어도
물의 언어 들리지 않고
어디로 흘러가는지 모를 때도 많습니다
물의 고요를 깨트리지 않는 방법도요

물은 빈들 찾아 흘러갑니다
알아주는 이 없어도
먼 우주 건너온 이름 없는 소행성의 아련한 빛 품고 흐릅니다
빈들은 낮은 곳에 있다더군요
마른 흙더미에서 한 방울 생기 맺히고
굽힌 허리 펴지 못한 채
상처로 패인 비탈 지나 고이게 되면 알게 될까요
비로소 낮은 땅에 이르렀음을요
아침저녁 가늘고 여린 물줄기 끌어안고 차오르면
마르고 빈들 찾아 다시 떠납니다

강가에 서서 깊이깊이 바라보면
물속에 들어가지 않아도
시의 언어 지느러미 사이 헤엄치고
산드란 물 숨 쉬는 소리 들을 수 있습니다만
여전히 나는 시 한 줄 쓰지 못하고
물처럼 살아보겠다는 다짐만 마음에 흘려보냅니다

미주

(미주 1) 다니엘 학습법의 개발자 김동환은 그 후 목사가 되었고 최근 전광훈의 사랑제일 교회에서 태극기 부대의 극우적인 모습으로 나타나 사람들을 놀라게 만들었다.
(미주 2) 동천- 전라남도 순천시 서면 청소리(淸所里)의 송치봉에서 발원하여 순천 동부 지역을 관통하며 남쪽으로 흐른다.

홍인식 목사(순천중앙교회)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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