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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빈의 사도신경 해석그리스도의 삼중직무 (2)
최영 소장(기독교장로회 목회와신학연구소) | 승인 2020.07.04 17:51
▲ 그리스도의 음부 강하 ⓒGetty Image

칼빈은 지난 글에서와 같이 그리스도의 직무의 범위를 정의한 후에, 16장에서는 그것의 현실적, 실제적인 방식, 즉 그리스도가 어떻게 우리의 구원을 성취하시는가를 고려합니다. 칼빈은 복종에 대한 일반적인 주장(그리스도는 죽음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그의 죽음을 포함하는 그의 완전한 삶에 의해 표현되는 복종으로 인해 인간을 하나님과 화해시킨다)을 거쳐 그 문제에 접근하며, 그리고 사도신경에 포함된 그리스도에 관한 조항들의 해석을 통해 보다 정확하게 그것을 논의하고 정의합니다.

칼빈의 다음의 구절은 그의 해석을 요약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구하는 것이 구속이라면 그것은 그의 수난에 있다. 무죄방면이라면 그의 정죄에 있다. 저주를 면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그의 십자가에 있다(갈3:13). 배상을 치르는 일이라면 그것은 그의 희생에 있다. 정결이라면 그것은 그의 피에 있고, 화해라면 그것은 그의 지옥강하에 있으며, 육을 죽이는 일이라면 그것은 그의 무덤에 있다. 새로운 생명이라면 그것은 그의 부활에 있고, 영생불사라면 그것도 그의 부활에 있으며, 천국을 상속받는 일이라면 그것은 그의 승천에 있다. 보호나 안전이나 모든 풍부한 축복이라면, 그것들은 그의 나라에 있고, 안심하고 심판을 기다리는 일이라면 그것은 그가 받으신 심판권에 있다(II.xvi.19).

사도신경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 이해

이제 사도신경의 조항들을 그가 어떻게 다루었는지 보다 세부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라는 조항은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한 특별한 상황을 언급합니다. 그것은 부분적으로는 정치적으로 유발된 유죄선고의 결과였지만, 그러나 또한 보다 중요하게는 그가 모든 죄인들의 자리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그리고 그 과정에서 그들의 죄가 고후 5장 21절에서 진술되는 것과 같이 죄가 없는 유일한 분에게 이전되었던 점에서 영적인 유죄선고의 결과였습니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따라서 이 유죄선고로부터 기인하는 저주는 그것을 받아 마땅하지 않았던 유일한 분에게 이전되었고, 그리고 그 과정에서 그것은 마땅히 정죄를 받아야 했던 자들에게는 축복으로 변화했습니다(II.xvi.5, 6).

“그는 죽으시고 장사되었다”는 조항은 이중의 은혜를 수반합니다. 그리스도는 우리 대신에 죽음의 권세에 자기를 넘겨주시고 우리를 죽음에서 구출하셨습니다(히2:9). 그리스도는 자기가 죽으심으로써 우리가 죽지 않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가 죽으신 것은 그 세력에 압도되신 것이 아니라 우리를 위협하며 우리의 몰락한 상태를 기뻐한 그 죽음을 굴복시키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죽으면서 죽음의 가 시를 제거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죽음 안에서 죽음을 극복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헬라 교부가 사용했던 예화를 알고 있습니다. 거대한 짐승으로 형상화된 죽음의 세력은 그리스도를 사로잡았습니다. 그러나 그와 대적하여 싸우다가 죽은 것은 죽음 그 자체였습니다. 그리스도를 삼키면서, 죽음은 그리스도에 의해서 정복되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를 죽음에서 해방시킨 것이 그의 죽음이 우리에게 가져다준 처음 열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죽기 때문에, 이 승리가 우리에게 가져다 준 것이 무엇이냐는 생각을 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칼빈은 『제네바 신앙문답서』 §63에서 이 물음에 대해 다음과 같이 답합니다. “그것은 조금도 걱정할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신자들의 죽음은 이제 그들을 보다 나은 생명으로 인도하기 위한 통로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64에서는 부연 설명합니다. “그 결과 우리는 죽음을 마치 무서운 어떤 일처럼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오히려 우리를 멸하기 위함이 아니고 구원하고자 그곳에 앞서 가신 우리의 머리요 대장이신 예수 그 리스도를 기쁜 마음으로 따라갈 뿐이다.”(1) 그리고 우리가 그의 죽 음에 참여함으로써 그의 죽음이 우리 안에 있는 옛 사람을 죽여 번성하거나 결실하지 못하게 만든 것은 그의 죽음에서 얻는 두 번째 열매입니다(II.xvi.7).

“음부에 내려가셨다”. 칼빈은 그리스도가 음부에 가셨다는 이 표현이 고대로부터 교부들을 포함하는 모든 경건한 사람들의 공통된 신념을 반영한다고 봅니다. 따라서 칼빈은 누가 언제 이 문구를 삽입했는가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신경의 모든 내용은 성경에서 유래하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조항을 신경에 포함시키는 것에 대하여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그는 다음과 같이 천명합니다. “이 조항을 제거하면, 그리스도의 죽음의 혜택은 많이 상실될 것이다”(II.xvi.8).

그리고 칼빈은 “음부”를 무덤이나 연옥의 동의어로 읽지 않고, “가장 효과적인” 해석을 선택합니다. “음부에 내려가심”은 그리스도가 받으신 영적 고통을 말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대속하시는 대가로 그의 몸을 주셨을 뿐 아니라, 그보다 더 위대하고 훌륭한 값도 주셨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정죄와 버림을 받은 사람들이 음부의 세력과 영원한 죽음에 대한 공포심 때문에 겪는 무서운 고민을 그의 영혼이 겪으셨다는 것입니다(II.xvi.10).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단지 신체상의 죽음뿐만 아니라 영적인 죽음을 겪었고, 따라서 진실로 사악한 자의 운명을 당했습니다.

음부에 내려가심은 예수 그리스도가 절망 속에, 마음의 번민 속에, 하나님께서 그를 대적하고 있다는 생각 속에 내던져졌다는 것을 말합니다. 말하자면, 음부에 내 려가심은 죽음과 무덤 속에서 외적으로 일어난 것에 대한 내적인 설 명입니다. 육신이 매장되자마자, 영혼은 음부에, 다시 말하면,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곳에, 하나님이 단지 대적자이고, 적으로 있을 수밖에 없는 장소에로 가신 것입니다. 우리를 대신하여 그리스도는 당연히 우리의 것이어야 하는 이 상황을 감당하셨습니다.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그러나 칼빈은 바울을 따라서 지금까지 말한 모든 것은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다면, 헛될 뿐이라고 말합니다(고전15:14, 참조). 그 까닭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죽음과 매장에서 나타난 것은 무력함뿐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믿음은 이 모든 것을 초월하여 그 완전한 힘을 얻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에 의해서 우리는 하나님과 화해되었으며, 우리의 구원은 완전히 실현되었습니다. 우리는 이제 악과 맞서 싸워야 하는 사람들의 상황 속에 있지 않습니다. 이 투쟁은 완료되었고, 모든 것은 성취되었습니다.

따라서 성금요일을 우울하고 불길한 어떤 것으로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단지 일어난 사실 그대로를 받아들 이면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인간이 겪어야 하는 모든 고통들을 대신 짊어지고 제거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의 모든 괴 로움을 예수 그리스도가 대신 떠맡고 제거하셨다는 것을 알아야 하고, 또 이런 믿음을 갖고 살아야 하는 자들입니다.

그러나 십자가에서 이 진리는 영광의 주가 치욕에 덮여 있고, 죽음에 삼켜지는 반대 현상에 의하여 가려졌고, 모든 이들에게 보일 수 있고 증명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때문에 예수가 십자가에 달려 죽은 후 그의 제자들은 모두 절망과 공포 속에서 흩어져 그들의 고향과 옛 직업으로 돌아갔던 것입니다. 모든 것은 허사가 된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장사된 지 사흘 만에’ 십자가에 달려 죽었던 예수가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이 부활의 사건은 제자들의 눈에 가려져 있던 십자가의 의미를 밝혀주었고, 그들을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게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부활은 그리스도의 죽음이 우리에게 가져다 주는 것의 계시와 다른 어떤 것이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2)

따라서 칼빈은 우리는 그의 죽음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게 하심으로 우리는 거듭나게 되고 산 소망을 가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벧전1:3)고 말한 것입니다. 그리고 칼빈은 구원의 내용을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 나누어, 그리스도의 죽음은 죄와 죽음을 소멸하고, 그의 부활은 의와 생명을 회복 시켜주었다고 말하면서, 그리스도의 부활 덕택으로 그의 죽음이 우리 안에서 그 권능과 효력을 드러냈다고 천명합니다(II.xvi.13). 이런 의미에서 부활은 계시와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도신경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부활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리스도께서 죽음을 이기고 삼켰으며, 악마의 쇠사슬을 끊고 그의 권세를 무너뜨렸다는 것을 만천하에 공표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부활 이후에, 죽음이란 더 이상 없고, 세력을 떨치는 죄도 이제 없습니다. 물론 죽음, 죄, 악마는 계속 존재하지만, 그러나 정복된 것들로서 존재할 뿐입니다. 그들의 상황은 이미 졌지만, 그러나 그것을 아직 인정하지 않는 장기를 두는 사람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게임의 형세를 바라보면서,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벌써 끝났는가? 왕은 아직 움직일 수 있지 않는가? 그는 계속 시도하려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결국 그는 승리의 가능성이 없다는 것을 인정할 것입니다. 이것은 정확히 죽음과 죄와 악마가 처한 상황입니다: 왕은 꼼짝 못하게 되었고, 게임은 끝났지만, 그러나 장기를 두는 사람들은 아직 그것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아직도 게임을 계속할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끝났습니다.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5:17)라고 바울 사도가 선언하는 바와 같이 옛 “시대”, 곧 죽음과 죄의 옛 시대는 지나갔습니다. 게임은 단지 계속되는 것처럼 보일 뿐입니다. 이제 우리에게 남은 일은 이 사실을 받아들이든가 아니면 모르는 채 외면하든가 하는 것입니다. 부활절의 사신을 받아들이거나 또는 인정하지 않고 거부하거나 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칼빈은 또한 그리스도의 부활을 우리가 언젠가 영광스러운 영생을 위하여 다시 살아나리라는 우리 자신의 부활의 보증으로 제시합니다(II.xvi.13).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 자신의 칭의, 성화 그리고 최후의 부활의 필수조건이며, 이 세 가지 주제들은 신자들의 삶에 관해 몰두한 『기독교강요』 제3권에서 다뤄집니다.

“하늘에 오르시어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신다”. 승천의 주제는 왕권의 주제를 환기시킵니다. 우리는 이미 그리스도의 나라는 영적이라는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우리는 그것의 범위를 발견합니다. 그리스도의 나라가 영적이라고 선언하는 것은 그가 그의 영을 신자들에게 주고 그리고 그들 자신들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거룩하게 하고 보호하는 것으로 그의 영을 통해 통치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칼빈주의적 초월주의’의 교리조차도 여기서는 다른 빛에서 나타납니다. 예컨대, 이것은 칼빈이 그리스도의 승천을 설명하는 방식입니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떠나셨으나, 떠나 심으로써 우리에게 더욱 유익하게 되도록 하셨습니다. 지상에 거하신 동안은 미천한 육신을 집으로 삼으시고 그 안에만 계셨기 때문이다”(II.xvi.14).

칼빈은 이 주장을 요한복음 16장 7절의 말씀으로 뒷받침합니다.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라”. 이 말씀은 그리스도께서 그의 제자들에게 보다 더 좋은 방식으로 다시 그들에게 오시고 언제나 함께하시겠다는 약속입니다(요14:18-19, 16:14). 이와 같이 예수의 물리적 부재는 전혀 새로운 영적 현재의 조건, 곧 그 나라의 조건으로서 나타납니다. 그는 승천하심으로 육체적으로는 우리와 함께 하지 않으시지만(행1:9), 그것은 “신자들과 함께 계시지 않으려는 것이 아니라, 더욱 직접적인 권능으로 천지를 주관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승천하심으로써 세상 끝날까지 우리와 함께 하시겠다는 약속을 성취하셨다. 그의 몸이 모든 하늘 위로 들려 가신 것과 같이, 그의 권능과 힘은 온 천지의 한계를 넘어서까지 확산되며 보급되었다(II.xvi.14).

이것은 아들의 통치에 관한 언급인 하나님 곁에 예수께서 앉아계신다는 것에 의해 더욱 강조됩니다(II.xvi.15). “하나님의 우편에”라는 표현은 어떤 장소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기능을 지칭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대리자의 기능, 군주의 대리자의 기능입니다. 이제 그리스도는 그의 수중에 하나님의 능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또는, 하나님의 능력이 그의 것이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밖에서 신적인 전능이란 없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통치하신다고 선언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을 통치하신다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우리에게 나타났습니다.

사도신경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다시오심

“거기로부터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신다”. 최후의 심판에 대한 이 언급은 칼빈에게 두 가지 중요한 사실을 주장하게 했습니다. 우선 “심판”은 그리스도를 모든 인류에게 분명히 나타나게 합니다. 그날까지, 그의 나라는 단지 믿음의 눈을 지닌 자들에게만 보이며, 그 현실이 여전히 불명료할 것입니다. 그러나 심판의 날에, 그리스도의 나라는 육의 눈을 가진 자들에게도 보일 것입니다(II.xvi.17). 심판의 주제는 또한 심판자의 인격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심판의 날에 대한 흔한 표상들과 대조적으로, 칼빈은 이 미래적 사건에 의해 제공되는 위로를 강조합니다. 심판자가 구속자이십니다.

따라서, 칼빈에 의하면, 신자들은 최후의 심판을 두려워해서는 안 되며, 신뢰와 함께 그것을 기대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 안에서 의와 자비가 일치하는 바로 그 그리스도에 의해서 심판받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구원해 주시리라고 우리가 기대해야 하는, 바로 그 우리의 구속주가 우리를 심판하는 심판대에 계시리라는 것은 평범한 보장이 아니다”(II.xvi.18). 우리를 대적하는 자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뿐입니다. 그리고 그가 바로 정확히 우리를 위한 분이십니다. 그래서 칼빈은 「제네바 신앙문답서」 §87에서 우리는 또한 우리의 변호자이시고, 우리를 그의 신실하신 보호 속으로 인도하시는 바로 그 분의 법정에 서게 될 것이기 때문에, 최후의 심판에 대해 공포를 갖고 두려워 떨 필요가 없다고 말합니다.(3) 그리스도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대표하며 서 계실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심판정에 들어설 때, 그는 다시 우리를 대신하여 말하실 것입니다.

미주

(미주 1) 칼 바르트, 『칼 바르트가 읽은 주의기도/사도신조』, 163.
(미주 2) Ibid., 174.
(미주 3) Ibid., 1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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