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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함을 고발하라소돔과 고모라를 위한 대화(창 18:17-19)
이성훈 목사(명일한움교회) | 승인 2020.07.05 17:27
17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하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 18 아브라함은 강대한 나라가 되고 천하 만민은 그로 말미암아 복을 받게 될 것이 아니냐 19 내가 그로 그 자식과 권속에게 명하여 여호와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려고 그를 택하였나니 이는 나 여호와가 아브라함에게 대하여 말한 일을 이루려 함이니라

국회의 차별금지법에 대해 이야기가 다시 떠오르고 있습니다. 사회에서 차별적 행위를 막겠다는 법이지만, 보수 개신교인들의 눈에는 유독 동성애 문제만이 띄는 것 같습니다.

보수 교회의 목회자들은 연일 차별금지법을 막아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강단에서 더 이상 동성애를 죄라고 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혹은 강단에서 이렇게 말하는 일은 괜찮을지 몰라도 교단 차원에서 동성애와 관련된 처벌이 금지될 수 있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최근 감리교 경기연회에서는 퀴어축제에서 성소수자들에게 축복 기도를 했다는 이유로 한 목회자를 재판위원회에 고발 기소하였는데, 차별금지법이 발의되어 제정되면 이를 처벌할 수 없게 된다고 그전에 처벌을 진행하려는 움직임으로도 보입니다.

동성애가 좋은가 나쁜가에 대해 말씀드릴 생각은 없습니다. 동성애에 대해서는 여러분께서 스스로 판단하시기 바랍니다. 다만 저는 구약성경을 읽으면서 지금 보수 교회가 주장하는 것처럼 동성애로 인해 세상이 멸망하리라는 말씀을 찾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교회가 왜 이렇게까지 동성애에 연연해야 하는지 이유를 알지 못하겠습니다.

보수 교회에서 동성애를 반대하면서, 또 타락한 세상을 이야기하면서 항상 하는 말은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입니다. 오늘은 그에 대해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소돔과 고모라 자체보다는 그 이전에 나타난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아브라함과 하나님의 대화

오늘 이야기는 아브라함이 자신의 장막 앞을 지나던 세 사람을 집으로 모시면서 시작됩니다. 훗날 생기게 될 율법에 따르면 유대인들은 나그네를 영접해야만 합니다. 아브라함의 이야기는 나그네를 영접했을 때에 그중에 하나님께서 계실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를 전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이 세 사람을 영접한 후에야 하나님이 계심을 깨닫게 되었다는 언급이 없고, 이들을 모시는 과정에서 아브라함이 ‘은혜를 입었다’고 표현하는 점을 보았을 때, 아브라함은 이들의 모습에서 이미 하나님이 계심을 알았고, 그랬기에 집으로 모셨다고 보는 편이 좋을 듯 합니다.

본문의 흐름 속에서 이 세 사람의 나그네는 사람이었다가 갑자기 하나님이 되어 대화를 나누기도 하기 때문에 이들이 하나님의 사자였다고 말하기에도 애매하고, 하나님이 직접 아브라함을 만나셨다고 말하기에도 애매합니다. 어쩌면 하나님의 사자라는 전승과 하나님이 직접 오셨다는 전승이 혼합되면서 애매한 상태의 이야기가 되어버렸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저희는 편의상 하나님께서 직접 방문하신 것으로 말씀을 진행하겠습니다.

아브라함의 대접을 받으신 하나님께서는 사라가 아들을 낳게 될 것이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그 말씀을 들은 사라는 속으로 웃었지만, 하나님께서는 사라에게 ‘여호와에게는 능치 못한 일이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이야기는 ‘이삭’의 탄생과 그 이름의 복선이 됩니다.

그 후에 하나님과 그 동행인들은 소돔을 향해 가십니다. 소돔을 향해 출발하던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이 묻지 않았음에도 자신이 왜 소돔을 향해 가시는지 말씀하십니다. 소돔과 고모라의 죄악이 심해, 그 부르짖음이 하나님께 상달하여 이를 직접 확인하러 가시는 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을 들은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간구합니다. 혹시 그곳에 50명의 의인이 있다면 그 성을 파괴하실 것인지, 45명, 40명, 30명, 20명, 마지막으로 10명까지 내려가면서 의인이 있다면 성읍을 멸망시키지 말아달라고 간구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간구를 들어주시겠다 말씀하시고 소돔과 고모라를 향해 떠나십니다.

아브라함의 간구

이 말씀을 보수적인 교회에서 주장하는 바를 적용해서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보수 교회들은 소돔과 고모라의 죄가 동성애의 죄라고 말합니다. 분명 소돔과 고모라의 남자들은 하나님의 사자들을 겁탈하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사자도 남성형으로 나타나기에 이는 분명 동성 강간이 맞습니다. 하지만 사랑이 없기 때문에 동성애는 아닙니다. 그저 동성 강간입니다. 본래는 동성 강간의 문제이지만, 우선 동성애로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 하나님의 사자들과 아브라함은 소돔과 고모라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소돔과 고모라의 죄를 동성애라고 놓았을 때, 한 가지 문제가 발생합니다. 아브라함이 이들의 죄를 사해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아브라함이 이들이 어떤 죄를 범하고 있는지 몰랐을 가능성도 있지만, 분명 아브라함은 의인 10명만이라도 있다면 이들을 살려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합니다. 아브라함은 동성애자들을 위해 기도하고 있다는 점이 문제입니다.

더 나아가 지금 감리교의 상황과 연결시킬만한 문제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을 아브라함에게 이야기하신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이 오늘 본문의 말씀입니다. 아브라함을 통해 세상이 복을 받게 될 것이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직접 선택받은 복의 전달자입니다. 지금 교회에서 사용하는 표현인 ‘축복의 통로’ 1호로 임명받은 사람이 아브라함입니다. 교회에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가는 모든 성도가 축복의 통로가 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실제 교회에서 축복의 권한은 목사에게만 주어져 있습니다.

지금 교회에서 하나님의 복을 빌고 이 복을 전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 사람은 목사 뿐입니다. 그렇기에 지금 교회에서 아브라함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사람은 목사 밖에 없습니다. 역으로 생각해서,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복을 전달하는’ 책임과 권리는 목회자의 역할과도 같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 아브라함, 지금 시대로 생각하자면 축복권을 가진 목회자와도 같은 아브라함이 동성애자로 가득한 소돔과 고모라를 위해 하나님께 간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마땅히 멸망 당해야 하는데, 아브라함은 그들을 살려주실 수 없느냐고 하나님께 여쭙고 또 여쭙습니다. 이는 목사가 동성애자들을 축복한 일과 같은 상황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중요한 사항을 결정해야만 합니다. 아브라함을 재판국에 고발해야 하는가의 문제입니다. ‘복의 전달자’로 공식 임명된 아브라함이 함부로 동성애자들의 구원을 바랐고, 그의 이런 행위는 동성애자들에게도 복이 전달될 수 있는 경솔한 행위였기에 그를 고발해야 할지를 결정해야 합니다.

사실 아브라함은 잘못이 없습니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아브라함은 소돔과 고모라 사람들이 (보수 교회에서 말하는 바와 같이) 가정을 파괴하고 세상의 윤리를 파탄내며 하나님의 뜻을 깨뜨리는 동성애자들임을 몰랐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안타까운 행동을 저질러버린 아브라함 뒤에 숨어서 이런 일을 진행한 죄의 원흉을 찾아 고발해야 합니다. 소돔과 고모라 사람들이 악한 동성애자들임을 알면서도 가능하다면 그들이 용서받게 하려고, 구원하려고 했던 그 처벌 받아 마땅한 존재, 바로 하나님입니다. 우리는 이제 하나님을 재판국에 고발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과 아브라함의 깨달음

간혹 이렇게 보수 교회에서 하는 이야기들을 옳다고 생각하면서 앞뒤의 다른 말씀들을 생각해 볼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대부분 이런 식, 아브라함을 재판국에 넘겨야 한다거나 하나님을 심판대에 세워야 한다는 식의 이상한 결론으로 끝나게 됩니다. 때로 예수님이야말로 교회의 가장 큰 적인 적그리스도가 되어버리는 일도 생겨납니다.

이제 제정신을 차리고, 오늘 본문의 말씀을 제대로 생각해보았으면 합니다. 동성애의 문제는 여기에서 전혀 중요하지 않습니다. 앞서도 말씀드렸지만, 동성애와 동성 강간은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만약 이 둘이 같다고 여기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이성에 대한 강간 범죄가 이성애의 일종이라고 여기는 성범죄자일 뿐입니다. 소돔과 고모라에 팽배한 것은 동성애가 아니라 약자를 향한 겁탈과 수탈입니다.

본문으로 돌아와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이 묻지도 않은 이야기를 하십니다. 천하 만민이 아브라함으로 인해 복을 받게 될 것이기 때문에 아브라함에게 이 이야기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더 구체적인 이야기가 19절에 나타납니다. 아브라함과 그의 자손은 하나님의 길을 지켜 정의와 공의를 행하라고 선택하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아가면서 세상에 복을 전하라고 선택받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에게 여전히 악한 세상을 말씀하십니다. 세상에는 심판받을 수밖에 없는 악이 존재하고 있음을 말씀하십니다.

어떻게 생각해보자면 하나님께서 소돔과 고모라의 악을 말씀하신 것은 아브라함을 향한 질타일 수도 있습니다. 복된 삶을 살아가도록 모범을 보여서 세상에 복을 전해야 하는 네가 왜 이들의 죄를 외면하고 있냐는 질문일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원하신 것은 복을 전달하는 일입니다. 어쩌면 아브라함은 자신의 삶에 매여있었기에 세상의 악을 외면하고 살았는지도 모릅니다. 자기 자신은 나그네를 영접하며 선하게 살고 있었지만, 오직 자신의 세상 안에서만 선을 행하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십니다. 네 조카 롯이 살고 있는 그 지역을 보아라. 얼마나 악이 넘쳐나고 사람들이 핍박받음으로 인해 내게 부르짖는 소리가 큰데, 너는 왜 그 지역을 바라보지 않고, 그들이 복된 길을 걸어가도록 이끌지 않고 있느냐고 말씀하십니다.

그때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역할, 복을 전하는 사람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깨닫게 됩니다. 어쩌면 아브라함은 악한 사람은 당연히 심판을 받아 죽어야 한다고 여기며 살았는지도 모릅니다. 롯의 가족을 노예로 잡아갔던 그돌라오멜을 추적해 죽인 이야기를 보면, 아브라함은 ‘악인은 선인의 칼에 죽으리라’는 생각을 품고 살아왔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소돔과 고모라의 죄를 살펴보러 가신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서 아브라함은 그들을 위해 간구하기 시작합니다. 이 간구함이 복을 전달하는 사람의 역할임을 깨달았습니다. 또 더 나아가 하나님께서는 심판을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구원을 원하심을 깨달았습니다.

지난주에 살펴보았던 예레미야 29장 11절의 말씀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 이 말씀에 나타난 하나님의 마음을 아브라함은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간구합니다. 만약 그곳에 의인이 남아있다면, 그들을 살려주실 수 없을지 간구합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마치 아브라함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너무나 크시기 때문에 아브라함의 계속되는 간구, 어쩌면 하나님의 권위에 도전하는 듯한 모습임에도 하나님께서 응하셨다고 생각해왔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50명에서 10명으로 줄여가면서 의인이 있다면 그들을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아브라함의 간구를 들어주신 이유는, 하나님도 그들을 심판하고 싶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복의 전달자로 선택받은 아브라함으로 인해 그들이 변화되고 회개하여 하나님의 길을 따라 살아갈 수 있다면, 하나님께서는 최대한 그들을 심판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도록 만들고 싶으셨기 때문입니다.

복된 사람의 역할

우리는 먼저 지금 우리는 복을 전달할 사람, 복된 사람으로 택함을 받았는지 생각해야 합니다. 교회에서 축복권은 오직 목사에게만 있습니다. 목사가 없는 교회에서는 축도로 예배를 마치지도 못하고 주기도문으로 예배를 마칩니다.

축복은 하나님께 복을 비는 행위입니다. 하나님께 복을 비는 행위를 목사만 할 수 있다는 이야기는 무속신앙에 가까운 이야기이며, 목회자의 권력을 위한 교리일 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그의 자손을 복된 자들, 복의 통로로 택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렸다가 부활하심으로, 당신을 믿고 따르는 모든 이들이 복의 통로가 되도록 만드셨습니다. 더 넓은 세상에 복이 전달될 수 있도록 더 많은 이들을 택하셨습니다. 그렇기에 교회에 다니시며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며,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살아가려고 노력하시는 여러분들은 모두 아브라함과 같은 복의 통로요, 복의 전달자가 됩니다.

하나님께 복의 전달자로, 복의 근원으로 택함받은 사람은 먼저 하나님의 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언제 어디서 그 누구라도 심판이 아닌 구원을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런 이들은 세상에 하나님의 복을 전달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길을 따르며,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를 행해야 합니다. 시편 1편의 말씀과 같이 복 있는 사람의 길을 걸어가며 시냇가에 심겨 아무 근심 없이 철에 따라 열매 맺으며 살아가는 그런 복된 모습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그 모습을 통해 세상 사람들이 악한 길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길로 들어설 수 있도록 이끌어야 합니다.

복된 사람은 악인을 질타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들의 구원을 위해 간구해야 하는 사람입니다. 아브라함은 그돌라오멜을 쳐부순 때처럼 악한 소돔과 고모라를 직접 멸망시키겠다고 자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죄를 살펴보러 가시는 하나님을 붙잡고 악인보다는 의인들을 생각하시며 그들을 구원해 달라고 간구했습니다. 이는 분명 하나님의 뜻과 일치했기에 하나님께서는 그의 간구를 들어주셨습니다.

지금 세상에서 범죄자를 옹호하자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범죄자는 지금 세상에 적용된 법에 따라 처벌받아야 합니다. 다만 그리스도인인 우리는 그런 범죄자가 세상에서 사라지기를 바라야 하며, 이들이 정말 반성하며 참된 길로 들어설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마지막으로 소돔과 고모라는 결국 10명의 의인이 없어서 멸망 당하게 됩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이 의인보다 악인이 많은 세상이라고 판단된다면, 우리는 마땅히 10명의 의인이 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세상의 심판을 막을 수 있는 10명이 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그의 자손을 복된 사람으로 택하셨고, 복의 전달자로 선택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제 우리에게 그 역할을 맡기셨습니다. 복을 전달하는 사람은 누군가를 차별하며 미워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미움을 선한 감정이라고 여기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누군가를 죄인으로 규정하며 자신들과 선을 긋는 사람도 복의 전달자는 아닙니다. 이는 바리새인의 삶일 뿐입니다.

복의 전달자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아감으로 세상에 복을 전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평안을 누리기에 세상 사람들이 바라볼 수밖에 없는 사람이며, 그 평안을 전하는 사람입니다. 그런 복의 통로가 되시길 바랍니다.

여러분을 통해 여러분의 가정에, 주위 이웃에게, 직장과 사업장에 그 복이 전달되어 간다면, 이 땅은 점차 하나님 나라가 되어갈 줄 믿습니다. 또 이 땅에 구원이 이루어가게 되실 줄 믿습니다.

이성훈 목사(명일한움교회)  joey810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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