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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교육의 방향을 다시 물어야 할 때코로나 시대에 교회교육을 생각해 본다
안동석 목사 | 승인 2020.07.06 17:14
▲ 코로나 팬데믹으로 사회 전분야가 위기에 처해 있다. 교회학교도 마찬가지이다. 교회학교 구조와 교회학교 교육내용에 대한 재정립이 절실하다. ⓒGetty Image

교회 교육부서 여름 사역을 앞두고 애들 동원령 내리라고 몰아치는 교회들이 심심찮게 많다.

두 아이 이야기

지난 6월 우리는 매스컴을 통해 경악할만한 사건들을 접했습니다. 한 아이는 엄마 손에 의해 가방에 갇혀 숨졌고, 다른 아이는 부모의 학대를 견디다 못해 목숨을 건 탈출을 감행했습니다. 공통점은 어른이라는 이름값을 내던진 채 힘을 함부로 휘두른 자들의 행태였다는 점이었습니다.

어른의 생명과 아이의 생명이 동등하게 귀할 텐데, 조금 더 권한을 많이 가졌다고 느끼는 쪽은 언제나 다른 한편의 생명과 존엄을 동등하게 여기지 않는 모양입니다.

극단적 사례로 남을 위의 두 사건만 그러할까요? 우리 일상에서 아이들은 얼마나 동등하게 대접받고 있을지 곰곰이 생각해 볼 일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담은 인간의 존엄

성경은 연령, 지위, 성별과 상관없이 모든 사람의 존엄을 상대값이 아닌 절대값으로 바라봅니다. 이는 인본주의를 절대적으로 우선한다는 뜻이 아니라 갑을관계와 같은 역학관계에 따라 사람의 가치가 오락가락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항간에 분노조절장애를 고치는 간단한 방법이 있다고 하더군요. 분노를 쏟아낼 대상이 만일 재벌 회장이라도 과연 그럴 수 있겠냐는 단순한 물음인데, 우스갯소리이지만 뼈있는 말 같습니다. 왜냐하면 자기보다 약하다고 여기는 사람들만 골라서 분노를 쏟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죠.

사실 성경의 인간관은 이러한 역학관계의 본질을 꿰뚫습니다. 이미 하나님의 형상을 담고 있는 모든 사람은 재벌 회장 이상으로 절대적 존엄을 지니고 있으니 함부로 대하지 말라는 것이죠. 적당한 평등주의 혹은 하향 평등주의가 아니라 성경은 절대적 평등과 절대적 존엄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우리 아이들의 존재 가치는 어른들의 존재 가치와 동등합니다. 다만 언어 구사의 능숙함이나 사회적 권한에 있어 차이가 있을 따름이지요.

교육이라는 개념에 대한 오해

개화기를 지나며 이 땅에 선교사들이 들어와 끼친 공로 가운데 하나는 아이들의 교육받을 권리를 널리 환기시켰다는 겁니다. 반가의 아이들만 지식을 깨치는 게 아니라 계급과 성별에 상관없이 배움의 기쁨을 선사했습니다.

공교육의 보편화도 같은 맥락이었습니다. 누구도 소외됨 없이 교육받을 권리, 배움의 기쁨을 맛볼 기회를 모두에게 제공하자는 취지였습니다.

이처럼 위와 같은 과정 가운데 오늘날 학교 교육 현장이 틀을 갖추게 됐는데, 맥락에 대한 이해 없이 눈에 보이는 것만 보고 교육을 입에 오르내리는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참고로 이런 사람들은 보통 이렇게 말하더군요.

“너가 애니까 학교 가는 거야... 너가 어리니까 배우는 거지...”

유초등에서 중고등에 이르기까지 미성년의 아이들이 학생이라는 이름으로 모두 교육받는 대상으로 통과의례를 거치니, <나이가 어리면 무조건 교육받는 존재>라고 단정하는 겁니다.

그런데 이게 참 무섭습니다. 학창 시절을 이미 지난 <어른들은 교육을 제공하는 사람>으로, 아직 교육과정의 통과의례를 지나는 <아이들은 교육을 받아야만 하는 관리대상>으로 인식이 굳어집니다.

[어른] - 교육을 제공하는 사람
[아이] - 교육을 받아야만 하는 관리대상

교회 교육 현장은 어떨까?

문제는 교회 교육 현장도 마찬가지라는 겁니다. 학교의 학제 시스템을 그대로 따라 교회도 <유치-아동-청소년>의 교육과정을 진행하는데, <어른들은 역시나 교육을 제공하는 사람>, <아이들은 교육을 받아야만 하는 관리대상>으로 인식하는 경향이 짙습니다.

이는 아이들에 대한 교육이 더 이상 필요없다는 말씀을 드리려고 화두를 던지는 게 아닙니다. 당연히 아이들은 교육받을 권리가 있는 주체들입니다.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에 대해 배워 복음을 깨우치는 길로 인도받아야 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실천의 방법들을 배워야 합니다.

그러나 최근 코로나 상황 속 교회들의 교육 현장을 보면 참으로 개탄스럽습니다. 아이들을 관리대상으로 파악하는 관성을 그대로 가져와 판단합니다. 교회에 모여 교회 교육을 하지 못하니, 아이들 영성 관리가 부실해지고 문제가 이만저만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글쎄요... 죄송하지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코로나가 터지기 전과 후를 비교하되, 좀 더 구체적으로 이렇게 비교해 봤으면 좋겠습니다. 이른바 <아이들>과 <어른들>을 서로 비교해 보는 것이죠. 코로나가 터지고 나서 <아이들>과 <어른들> 중 누가 더 영적 관리가 부실해지고 문제점이 노출됐는가 하고 말이죠.

감히 묻습니다!

코로나 이후 <아이들>의 신앙관 때문에 교회가 비난받은 일이 있습니까? 오히려 코로나 이후 <어른들>의 신앙관 때문에 교회가 비난받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왜 아이들의 영적 관리가 부실해지는 등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고 말합니까? 어른들이 저지른 실책은 어른들 책임의 몫이지 아이들 교육 관리의 문제가 아닙니다. 교육의 기본 개념이 부족한 소양을 보완하여 채우는 것이라면, 지금 교육이 시급한 대상은 <아이들>이 아니라 <어른들>입니다.

만일 진정으로 영적 관리가 지속적으로 필요하다는 입장에서 제대로 지금의 코로나 시기를 지나왔으면 또 모르겠습니다. 단적으로 교회들이 지난 코로나 국면에서 <사순절>을 지나며 해온 교회 교육을 진단할 때, 저는 도무지 얼굴을 들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고난과 부활을 되새기는 사순절, 교회들은 철저히 자기 폐쇄적인 메시지만 남발했습니다. 교회학교도 사회에 대한 아무런 공감력 없이 그저 관성대로 사순절 절기 자료를 발송하고 미디어 금식 실천을 진행했습니다.

코로나가 아니었다면 문제가 되지 않았을 지극히 정상적인 사순절 메시지였지만 그래서는 안 될 일이었습니다. 사람들이 죽어 나가고 경제적 타격을 입은 부모들이 점차 양산되는 판국에 조금 더 심사숙고하고 사순절의 의미를 확장했어야 했습니다.

코로나 시대의 교회 교육

코로나 시대의 교회 교육은 <교회 시스템 방어>가 1차적 목표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 사랑>에서 비롯한 실천, 팬데믹으로 신음하는 <이웃에 대한 관심과 공감>이 1차적 목표가 되어야 합니다.

물론 교회 시스템이 타격받는 것에 대한 불안이 높다는 것 잘 압니다. 그러나 우리의 그리스도인 된 정체성이 핵심이지, 교회 시스템이 기독교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본질은 아닙니다. 즉, 코로나 시대의 교회 교육은 눈에 보이는 교회 시스템의 수호자가 되도록 안내할 게 아니라, 모든 걸 다 잃어도 어떠한 상황에서도 그리스도의 마음을 뺏기지 않도록 생각과 마음을 단련하는 데에 역점을 두어야 합니다.

우리 각 사람 자체가 교회이지, 눈에 보이는 교회 건물과 시스템이 교회라 한정 지으면 안 됩니다. 극단적인 가정일 테지만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만일 이 땅에 모든 교회 건물과 십자가가 사라진다 해도,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은 사람 한 명이라도 남아있다면 교회는 여전히 건재한 겁니다. 예수님 또한 사람을 부르시고 사람을 세우셨지, 건물을 짓거나 시스템을 정비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교회란 그런 겁니다.

책임감 있는 어른

세간에 <꼰대>, <라떼>와 같은 용어가 널리 쓰이면서 젊은이들의 인식이 회자되고 있습니다. 고금을 막론하고 언제나 있었던 세대 갈등이지만, 늘 간과하지 말고 생각해 봐야 하는 성찰의 지점인 것도 사실입니다.

역사를 논하다 보면 한 번쯤 듣게 되는 말이 있죠? 탁상에 앉은 어른들이 전쟁을 부추기면, 생떼 같은 젊은이들이 전장에서 피를 흘린다고... 참, 이상하죠. 어른들이 전쟁을 부추겼으면 어른들이 전장에 나갈 것이지, 왜 젊은이들이 동원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비단 전쟁만 그런 것 같지는 않아 보입니다. 결정권을 쥔 어른들의 결정을 목소리 없는 젊은이들이 힘겹게 떠받치곤 합니다. 사회만 그럴까요? 교회는 예외입니까?

교회도 마찬가지인 거 같아 가슴이 쓰립니다.

어른들이 교회에서 할 일은 동원 결정을 내리는 데에 힘을 사용하는 게 아니라, 어른다운 책임을 다하는 데에 힘을 쏟는 것입니다. 무릇 책임져야 할 요소들은 눈에 잘 띄지 않습니다. 연륜이 쌓여야 보이는 법입니다. 그래서 어른이 필요한 겁니다. 어른이 할 일, 즉 책임을 다하는 데에 힘을 쏟으면 젊은이와 아이들은 그 안에서 보호받습니다. 공동체란 이러한 기제로 움직입니다.

교회의 정체성을 깊이 생각하는 요즘입니다.

“교회는 <기업>입니까? 아니면 <공동체>입니까?”

코로나 사태가 여러 차례 국면을 넘고 있습니다. 코로나로 한 고비 넘길 때마다 여러 조직과 단체들이 평가를 받고 재정비를 합니다. 참고로 교회가 기업인가 아니면 공동체인가 하는 위의 물음에 저는 이렇게 답하고 싶습니다.

“코로나로 한 고비 넘길 때마다 <기업>은 영업손실을 얼마나 최대로 줄였는지로 평가받고, <교회>는 얼마나 사람들을 안전하게 지켰는지로 평가받습니다.”

바라건대 우리는 교회의 격을 스스로 떨어뜨리는 교회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지 않고,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에 따라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에 공감하는 교회로 책임을 다하는 교회로 굳건히 서 있으면 좋겠습니다.

부단한 성찰이 요청되는 시기입니다. 저와 여러분의 마음에 관성대로 하고자 하는 마음 대신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따르도록 권면하는 성령의 역사가 충만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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