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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리랑카, 평화가 허용되지 않는 전쟁터쥬드 랄 페르난도 교수와의 NCCK 인터뷰
신승민 목사 | 승인 2020.07.06 17:14
쥬드 페르난도 교수는 스리랑카 싱할라족으로 아일랜드 더블린의 트리니티 칼리지 교수이다. 타밀족과의 전쟁반대와 스리랑카에서의 계속되는 인권침해, 타밀의 자기결정권 지지 등으로 인해 지난 15년간 아일랜드에서 망명생활을 하고 있다. 그는 아일랜드 더블린(2010년)과 독일 브레멘(2013년)에서 열린 스리랑카 인민재판의 조정자이며, 『제국과 군국화에 대한 저항』(2020년)이라는 제목의 책의 편집장이다.

▲ 2004년 스리랑카에서 아일랜드로 출국하기 전에 스리랑카에서 발생한 국가적 분쟁에 대한 평화적인 해결을 위해 20년 이상 일하셨습니다. 2009년 대규모 인명 희생으로 끝난 타밀과의 전쟁에 반대하셨잖아요. 스리랑카의 싱할라와 타밀의 갈등은 정확히 무엇인가요?

스리랑카는 공식적으로는 모든 주민(싱할라족과 타밀족)을 대표한다고 주장하지만, 사실은 타밀을 차별하는 싱할라의 국가입니다. 사실 1833년까지 싱할라와 타밀 지역을 하나의 단일 정치구조로 병합하여 섬 전체를 위한 하나의 국가로 건설한 것이 대영제국입니다. 식민지시대 이전에는 이 두 지역이 서로 독립적이었습니다.

물론 역사, 정체성, 주권이 서로 겹치는 것도 있었지만 인종이 분리된 한 국가는 아니었습니다. 영국이 스리랑카에서 한 일은 메이지 제국이 류큐 열도를 일본 본토에 편입시킨 것과 비슷합니다. 제국들은 전략적인 이유로 이렇게 두 독립적인 민족들을 강제 합병했습니다.

한반도의 경우 제국주의 열강들은 한 민족을 두 쪽으로 나누어 버렸습니다. 아일랜드 남부가 독립을 쟁취하는 동안 (영국이 북아일랜드를 통치했던) 아일랜드에서도 비슷한 분열이 이루어졌습니다. 이 모든 경우에서 우리는 제국 열강에 의해 강요된 두 유형의 분열구조를 발견하는데, 하나는 강제적 합병에 의한 유형(스리랑카와 일본/오키나와)과 또 하나는 강제적인 분할에 의한 유형(한국과 아일랜드)입니다.

대영제국 스리랑카에서는 타밀을 싱할라 지배하에 두도록 강요하는 단일 정치구조가 구축되었고 싱할라가 타밀보다 우월하다는 인종차별이 조장되었습니다. 수적으로 다수였던 싱할라들은 섬 전체가 그들 소유라고 믿게 되었고 타밀은 인도에서 온 침략자라고 여겼습니다. 영국인들이 식민통치를 하고 있었지만, 타밀족은 침략자로 묘사되었습니다.

사실, 영국은 스리랑카를 인도로부터 분리하고 스리랑카를 인도를 통제하는 전략적 거점으로 사용하기를 원했습니다. 스리랑카의 타밀은 영국통치에 반대하는 인도의 독립주의자들에 더 가까웠지만, 싱할라들은 영국의 지배를 인정하면서 단지 자신들의 내적 통치권을 인정해 달라는 입장이었기에 싱할라보다는 타밀이 제국에 더 위협적인 존재로 보였습니다. 싱할라 지도자들은 인도처럼 완전한 독립을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스리랑카는 타밀을 구조적으로 인종적으로 억압하는 싱할라 국가입니다. 미국의 지원을 받는 남한 정권이 북한에 대한 반공적 민족주의 이념을 발전시키는 것과 같이 영국이 만들어 낸 스리랑카 국가나 싱할라 국가는 반-타밀 민족주의 이념을 발전시키고 타밀족에 대한 일련의 차별적 조치를 단행했습니다. 이것이 갈등의 배경입니다.

▲ 그럼 1948년 스리랑카가 독립하기 전에 갈등이 있었다는 말씀이네요, 타밀족의 반응은 어땠나요?

갈등의 원인인 억압적인 국가와 강제적 병합을 위한 토대는 영국 식민지 시대에 시작되었습니다. 식민지 시대에는 잠재적이었던 갈등이 독립 이후 노골화 되었습니다. 한국이 일본으로부터 독립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은 여전히 미국에 의존했고, 한국전쟁 이후 한반도의 분단구조가 고착화 되었습니다.

▲ 쥬드 랄 페르난도 교수

독립 스리랑카는 반-타밀 인종적, 정치적 입장을 더욱 강화했습니다. 사실, 독립 훨씬 전에 영국 식민지정부는 고대 불교사당을 개조했지만 힌두교나 이슬람교의 예배당은 개조하지 않았습니다. 사실, 이러한 고대 불교사당은 엄격하게 싱할라는 아니었습니다.

불교는 타밀을 포함한 많은 언어를 가진 다원주의 전통이었지만, 영국 식민지정부가 이 사당들을 개조한 후, 이 사당들은 엄격하게 싱할라 불교사당이 되어 버렸습니다. 이것은 타밀족의 고대 문화유산을 박탈하고 타밀과 싱할라 사이에 문화적, 종교적 분열을 만들어 냈습니다. 1948년 독립 직전 싱할라 민족주의 지도자들과 함께 영국 식민지정부는 타밀 지역에 싱할라 정착촌을 건설을 준비했고, 독립 직후 최초의 스리랑카 정부에 의해 건설됩니다.

이로 인해 타밀은 토지를 빼앗겼습니다. 중앙 언덕의 차농장에서 일하고 있던 타밀은 시민권을 박탈당했으며 수천 명의 사람들이 그들이 가진 모든 것을 잃었고, 타밀 의원 수도 줄어들었습니다. 후에, 싱할라는 국가의 유일한 공식언어가 되어 지방의 수천 명의 타밀들이 공공부문 고용을 박탈당했습니다. 이후 70년대 초반, 싱할라 학생들에게 타밀 학생들보다 더 많은 대학입학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타밀의 권리가 박탈당하는 모든 과정에서 그들은 마하트마 간디의 방법을 따라 1950년대에서 1970년대 사이에 비폭력 시위를 벌였지만, 이러한 시위들은 스리랑카 정부의 지원을 받는 싱할라 인종주의 단체들로부터 잔인하게 공격을 받았습니다. 이들 외에도 싱할라 인종주의 폭력조직들이 면책특권과 함께 국가보안군의 지원을 받아 주도한 대규모 반-타밀 공격이 있었습니다. 이 단체들은 1981년, 북부의 타밀 시 자프나에서 가장 부유한 도서관 중 한 곳을 9만권이 넘는 책과 함께 불을 질렀습니다. 1983년 7월, 일주일 만에 3000명 이상의 타밀이 살해되었고, 50만 명의 타밀이 그들에 대한 광범위한 공격으로 난민이 되었습니다.

이 기간 동안 타밀의 전통적 고향인 북부와 동부는 스리랑카 정부군에 의해 장악되어 표현과 이주의 자유, 그리고 다른 많은 시민적 권리를 박탈당하였습니다. 많은 수의 타밀들이 체포되어 고문을 당했고 때때로 투옥되었습니다. 억압과 탄압을 넘어 타밀족을 멸족하는 과정이었습니다. 이 기간 동안 타밀은 언어권, 고용권, 토지권, 교육권과 같은 동등한 권리와 스리랑카 중앙정부로부터의 권력이양을 요청했지만 완전한 분리독립을 요구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시위가 잔인하게 진압되고 많은 사람들이 살해되자, 타밀 저항세력은 1970년대 후반과 1980년대 초반부터 비폭력적 투쟁에서 무장 투쟁으로 전환했습니다. ‘타밀 엘람 해방 호랑이(LTTE)’가 이들을 이끌었고, 스리랑카 북쪽과 동쪽의 완전한 독립을 요구했습니다. 스리랑카 정부는 이에 전쟁을 선포했고 미국, 영국, 이스라엘이 스리랑카 정부를 지지하였습니다. 1983년에서 2002년 사이에 적어도 6만 명의 타밀 민간인이 목숨을 잃었고, 2000명의 싱할라와 무슬림 민간인들 또한 LTTE의 대항적 폭력으로 인해 살해되었습니다. 수천 명의 스리랑카 군인과 LTTE 대원들이 사망했고, 150만 명 이상의 사람들이 난민으로 추방되었습니다.

▲ 2002년 스리랑카 정부와 LTTE 사이에 평화 프로세스가 있었는데, 왜 평화회담이 실패해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희생당한 또 다른 전쟁으로 귀결되었을까요? 그러한 대학살 후에 오늘날 스리랑카의 평화를 위한 도전은 무엇입니까?

1983년부터 2002년까지 20년 동안 스리랑카에서 벌어진 전쟁 기간 동안 타밀 지도부는 스리랑카의 북부와 동부에 지역 주민과 디아스포라들의 힘으로 ‘타밀 엘람’이라는 그들만의 주를 건설했습니다. 타밀 엘람은 세속주의 국가였고, 싱할라 불교 스리랑카처럼 종교적인 국가는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프랑스나 구소련처럼 반종교적이지도 않았습니다. 종교적으로 다원주의이고 모든 종교의 휴머니스트 버전을 존중했으며, 근본주의적 종교는 반대했습니다. 다른 나라와 마찬가지로 군사, 정치, 시민 정부를 가지고 있었지만 부패와 부정행위는 없었습니다. 양성평등과 같은 매우 진보적인 사회개혁을 이루었습니다.

타밀 엘람은 강해졌고 세계 주요 강대국들의 지원을 받았고 스리랑카에 속한 주들은 약해지고 있었습니다. 스리랑카는 LTTE에게 많은 지역을 빼앗겼고 많은 군인들을 잃었으며, 경제도 점점 약해졌습니다. 싱할라 사람들은 전쟁에 지쳐가고 있었습니다. 2000년과 2001년 LTTE는 정치적 협상을 요구하며 일방적인 휴전을 선언했지만, 스리랑카는 전쟁을 계속했고 많은 군인들을 잃었습니다. 2002년까지 양 측의 군사적 힘의 균형때문에 휴전과 평화회담이 가능했습니다.

네, 2002년 평화프로세스는 2007~2009년의 대규모 살상 없이 평화적인 해결을 이끌어낼 수 있었을 것입니다. 사실, 그것은 20년 동안 일어났던 모든 죽음과 이동을 막아 냈습니다. 영국이 스리랑카를 식민지화 한 후 근대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정치적 순간이었습니다. 휴전이 발효된 것은 세계 어느 강대국의 어떤 외압 때문이 아니라 단순히 양 측의 내부 합의 때문이었습니다.

남한과 북한이 어떠한 외부의 영향 없이 평화 프로세스에 돌입하기로 결정하거나 어떠한 외부세력도 남북의 평화협상을 통제하는 것을 허용치 않는 것을 상상해 봅시다. 이것이 바로 2002년에 일어난 일입니다. 2002년은 스리랑카 단일민족주의 정치구조가 가장 취약한 시점에 있었고 싱할라 인종주의 민족주의 이념이 힘이 약화되었을 때였습니다.

도쿄, 방콕, 제네바, 베를린, 오슬로에서는 전쟁으로 피해를 입은 사람들의 인도주의적 문제가 논의되었고, 권력을 나누는 방법에 대해 협상하기 위해 6차례의 회담이 양측 간에 있었습니다. 이는 북부와 동부의 LTTE와 남부의 스리랑카라는 두 정부 하에서 주권을 공유하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이 기간 동안 저는 평화과정에 대한 지역들의 지원을 이끌어 내기 위해 많은 시민사회 단체들과 함께 일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100번 이상을, 때로는 싱할라 그룹과 함께 북부와 동부를 여행했고, 타밀그룹들이 남으로 올 수 있도록 많은 모임을 조직하기도 했습니다.

왜 이 평화 프로세스가 실패했을까요? 정전협정이 체결되자마자 미국은 경악했습니다. 태평양사령부 고위 해군장교 26명을 타밀 지역 (여전히 스리랑카 주 관할)에 위치한 트린코말리 항에 파견해 향후 전쟁 실행방안을 연구했습니다. 스리랑카에 신무기를, 스리랑카 보안군에 새로운 훈련법을 추천했습니다. 미국은 또한 평화회담을 워싱톤에서 열어 LTTE를 평화 프로세스의 중요한 회의에서 배제시켰습니다.

LTTE는 미국에서 금지된 단체였습니다. 시민사회 단체들의 많은 호소에도 불구하고 이 모임을 개최할 중립적인 장소는 고려되지 않았습니다. 미국과 영국의 압력에 따라, 처음부터 평화과정을 지지했던 EU는 2006년에 LTTE를 금지했습니다. 미국은 2007년 스리랑카와 방위협정을 체결했고, 2007년 오키나와에서 미군 1000명이 스리랑카로 파견돼 스리랑카 병사들을 훈련시켰습니다. 스리랑카와 LTTE는 전쟁으로 피해를 입은 지역을 비무장화하고 복구하기 위한 공동위원회를 구성하기로 합의했습니다.

미국과 영국은 이런 평화적인 정치협상을 지지하기보다는 LTTE가 무기를 내려놓도록 요구했고, 반면에 스리랑카가 외교, 경제, 군사적으로 무장하는 것을 조장했습니다. 평화 프로세스가 파괴되었습니다. 이슬람교도들을 포함한 싱할라와 타밀 사이의 평화 회담은 그 지역 주체들이 아니라 외적인 힘에 의해 파괴되었습니다.

▲ 외부 세력이 왜 그랬나요? 스리랑카의 정의와 평화를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강대국들은 인도양에서 그들의 세력을 증가시키는 데 있어서 타밀로부터 스리랑카 단일국가를 보호하고 중국을 포위하고 남아시아에서 중국의 영향력을 막기를 원했습니다. 인도 역시 미국과 영국이 스리랑카가 타밀과 전쟁을 치를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것을 지지했습니다. 2003년 도쿄에서 열린 평화협상에서 LTTE는 인도양이 어떤 힘도 전쟁을 위해 사용할 수 없는 평화수역이 되기를 원한다고 말했습니다. 제주도와 오키나와 섬을 평화수역으로 선포하는 격입니다. 인도양의 평화를 위한 타밀의 국가적 목표는 스리랑카의 단일국가 구조가 강해지기를 원하는 미국의 아시아회귀 전략을 거스르는 것이었습니다.

인도양에서 미국의 의제에 가장 큰 걸림돌은 타밀과 그들의 정의와 평화를 위한 투쟁이었습니다. 2007년부터 2009년까지 적어도 7만명의 타밀이 학살되었고 50만 명 이상의 사람들이 추방되었습니다. 타밀주 전체가 최대 화력에 의해 파괴되었습니다. 전쟁 중 스리랑카 국가보안법은 타밀 지역에 대한 인도주의적 원조를 허용하지 않았습니다. 싱할라 남부의 평화 프로세스 동안 매우 약했던 타밀에 대한 인종차별은 외부 강대국들에 의해 스리랑카에 주어지는 지지 때문에 전쟁기간 동안 절정에 달했습니다. 동북아시아에서 이런 대재앙은 엄두도 못 내지만 남아시아에서는 이미 타밀에게 이런 대재앙이 일어났습니다.

오늘 스리랑카에서 우리가 가진 것은 군사적 승리, 승자의 평화입니다. 다시 스리랑카 섬은 남아시아에서 가장 군사화된 나라가 되었고 이슬람교도들을 포함한 타밀은 싱할라 단일 국가 하에서 심한 탄압을 받고 있습니다. 타밀과 이슬람교도들을 향한 국제적인 연대는 우리가 팔레스타인, 오키나와인, 그리고 전 세계에 억압받는 많은 사람들을 향해 연대를 확장하는 것처럼 절실합니다. 그 연대 안에서 타밀이 국가로서의 자기결정권이 인정되어야 하고, 희생된 사람들을 기억할 수 있는 권리가 유지되어야 합니다.

지금 이러한 기억은 스리랑카에 의해 억압되고 있습니다. 정의와 자유를 위해 투쟁하는 사람들과의 연대함으로 스리랑카에서 평화를 위협하는 도전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자유를 위한 타밀의 투쟁은 남아시아의 평화와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고립된 투쟁으로 비쳐서는 안 됩니다. 한국과 오키나와의 평화운동이 동아시아에 매우 중요한 만큼 타밀의 정의를 위한 투쟁은 남아시아의 평화에 큰 의미가 있습니다. 사실 이 두 지역은 우리가 아시아와 세계의 평화를 생각할 때 서로 연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신승민 목사  kncc@kncc.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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