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말씀의 잔치 Sermonday
눈길이 머무는 곳에與善仁(여선인; 누가복음 19:1-10)
홍인식 목사 | 승인 2020.07.06 17:13
▲ 사회적 거리 두기와 비대면의 희생자였던 삭개오를 주목하셨던 예수님 ⓒGetty Image

운명 공동체와 개인화

코로나19 위기가 가라앉는 것 같았는데 이태원 클럽 이후로 다시 확신되는 모양새를 보이고 있습니다. 코로나19 위기가 다시 확산되는 현상의 원인에 대하여 잠깐 보려고 합니다. 보도를 통하여 모두들 잘 알고 있는 이야기이지만 다시 한 번 되새겨 보겠습니다.

이태원 감염 사건 후 방역본부는 “4월 29일부터 5월 6일까지 서울시 용산구 이태원에 소재한 클럽에 방문한 경우, 코로나19 바이러스에 감염됐거나 노출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면서 외출을 하지 말고 보건소 또는 1339에 이태원 클럽 등 방문사실을 신고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전국적으로 4월 말부터 클럽이나 주점 등 밀폐된 공간에서 불특정다수와 긴밀한 접촉을 한 경우, 발열 또는 호흡기 증상 등이 있다면 적극 진단검사를 받아 달라고 말했습니다.

이러한 방침은 한 개인이 클럽 등 유흥업소를 찾아가는 것은 개인적인 결단일지는 몰라도 감염병이 발발한 상태에서는 한 개인의 행위가 결코 개인적인 차원에 머물수 없음을 분명하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이번 코로나19 사태가 우리에게 남기고 있는 교훈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그 중에 인류는 지구촌화(globalization)로 인하여 운명 공동체로 살아가고 있음을 보여 준 것입니다. 한국에서 사용하다 바다에 버린 플라스틱 쓰레기는 태평양을 건너 멕시코 해안에서 발견됩니다. 우리나라에서 지구 반대쪽에 위치하고 있는 아르헨티나의 국가 부도 위기 현상은 한국의 증시를 뒤흔들어 놓습니다. 이처럼 한 국가 혹은 한 개인의 행위가 전 인류와 전 우주적으로 영향을 미친다는 예는 수도 없을 것입니다.

이러한 모든 현상들은 이제 인류는 어쩔 수 없이 운명 공동체로 묶여 있다는 것을 반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코로나19는 또 다른 측면에서 우리의 삶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우리 모두가 운명 공동체로 묶여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의 삶은 점차 개인화 현상이 가속화 되는 것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코로나19 이후의 많은 화두(話頭) 중에서 우리의 관심을 끄는 가장 중요한 단어가 사회적 거리(social distance)와 ‘비대면(非對面, non-contact)’이라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들의 의미는 코로나19의 강한 전염성으로 인하여 되도록 사람들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고 직접 얼굴과 얼굴을 마주 보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웃들과 격리된 삶을 살아갈 것을 권장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서로 얼굴과 얼굴을 마주보는 일은 부담이 됩니다. 서로 악수하고 얼싸안는 신체적 접촉은 위험한 일로 취급됩니다. 이렇게 코로나19는 인류의 이웃과 관계에서 살아가는 모습을 변화시켜 나갑니다.

이러한 ‘거리두기’와 ‘비대면(非對面)’은 결국 우리들 사이에서 상대하지 말아야 할 그룹을 특정하여 위험시하는 등 혐오감의 증강으로 이어질 것이 틀림없습니다. 벌써 이태원 클럽 사건이 불행하게도 성소수자에 대한 혐오감으로 번져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코로나19는 우리는 운명 공동체임을 확인하면서도 이기적인 개인화의 강화라는 모순적 상황(irony)을 만듭니다. 이러한 현실에서 우리는 인류는 어떤 방향의 삶을 채택해야 하는 가에 대한 질문을 갖게 됩니다. 여기에 대하여 기독교는 답변을 주어야 합니다. 그것이 기독교가 이 사회를 향하여 갖는 중요한 기능입니다.

만일 기독교가 단지 코로나19 위기를 잘 넘기고 다시 교회 모임이 활성화 되고 출석 교인수도 늘어나고 재정도 정상 궤도에 들어서는 것으로 만족한다면 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시고 구원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자리를 버리시고 인간의 몸, 그것도 가장 낮은 사람의 몸으로 오신 예수님의 삶을 무기력하고 무의미하게 만드는 일일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살기’는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을까요? ‘예수살기’는 코로나19이후의 세계에서 어떤 구체적인 모습으로 이루어져야 하는 것일까요?

더불어 삶과 인자함

이러한 모순적 상황을 향하여 우리 기독교는 어떤 답변을 할 수 있을까요? 그것을 오늘 본문의 예수님의 실천행위를 통하여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오늘의 본문은 ‘삭개오’라고 하는 사람과 예수님의 만남에 대한 기록입니다. 본문에 의하면 ‘삭개오’는 세관장이었고 부자였습니다. 그리고 키 작은 사람이었습니다. 이 같은 본문의 ‘삭개오’에 대한 묘사는 그의 삶이 매우 모순적인 상황에 처해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삭개오’를 묘사하고 있는 세관장, 부자 그리고 키 작음은 ‘삭개오’가 그 사회에서 따돌림을 받고 있음을 넌지시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는 부자였습니다. 일반적으로 부자 곁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그는 부자이기는 하였지만 그의 직업은 세관장입니다. 그러한 연유로 그는 유대 사람들에게 외면당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어느 누구도 ‘삭개오’와 대면하기를 싫어했습니다. 어쩌면 겉으로는 웃으며 지낼 수도 있었지만 내면 깊은 곳에서 사람들은 ‘삭개오’와 접촉하기를 꺼려했을 것입니다. ‘삭개오’는 사람들의 혐오의 대상이었습니다. 어느 누구도 그를 가까이 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사람들 속에 있었지만 늘 군중 속의 외로움을 느끼는 사람이었습니다. 사람들의 질시와 견제 그리고 혐오 속에서 늘 긴장하며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 때 그는 예수님이 여리고로 오신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보려고 나가자 그도 예수님을 보기 위해서 거리로 나섭니다.

그런데 워낙 많은 사람들이 있었기에 그는 감히 예수님 앞으로 나가지 못합니다. 작은 키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작은 키  보다는 사람들의 질시와 견제 그리고 그를 향한 혐오감을 느끼고 있었기에 그는 감히 사람들을 제치고 예수님 앞으로 나설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나무 위로 올라갑니다. 그가 예수님을 멀리서나마 볼 수 있는 길은 그것이 유일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그는 만족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상상하지 못했던 일이 발생합니다.

그것을 누가복음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그 곳에 이르러서 쳐다보시고, 그에게 말씀하셨다. ‘삭개오야, 어서 내려오너라. 오늘은 내가 네 집에서 묵어야 하겠다.’ 그러자 삭개오는 얼른 내려와서, 기뻐하면서 예수를 모셔 들였다.(5~6절)

멀러서나마 예수님의 모습이라도 보는 것으로 만족하려던 ‘삭개오’에게 상상할 수 없는 일이 발생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 많은 군중들 가운데서 그를 바라보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에게 말을 거셨습니다. 그 뿐만 아닙니다. 예수님이 삭개오에게 그의 집에 머물 수 있느냐고 하십니다.

나무 위에 올라가서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군중들과는 사회적 거리(social distance)를 두고 ‘비대면(非對面, non-contact)’으로 예수님을 바라보던 그는 급히 나무에서 내려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자신의 집으로 모셔 들입니다. 사회적 거리(social distance)와 ‘비대면(非對面, non-contact)’의 상황이 초래한 온갖 혐오감을 이기고 그는 예수님과 가까워지고 또 예수님을 대면하기에 이릅니다. 어떻게 해서 이런 극적인 상황 반전이 이루어진 것일까요?

그것은 예수님의 눈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삭개오’가 올라가 있던 나무 곁을 지나가십니다. 무엇에 끌렸는지 그 분은 위를 쳐다봅니다. 나무 위에는 한 키 작은 남자가 있었습니다. ‘삭개오’입니다.

예수님은 그를 바라보자마자 그가 얼마나 많은 혐오에 시달려서 어쩔 수 없이 군중들과 거리를 두고 있으며 사람들과 대면하지 못하고 있는가를 단번에 알아보십니다. 예수님은 세심한 마음을 가지고 있기에 사람들 얼굴에서 스쳐 지나갈 수 있는 작은 표정에서도 그의 사정을 간파하는 공감의 능력을 가지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삭개오’를 인자한 분으로 쳐다보고 말씀하십니다. “삭개오야, 어서 내려오너라. 오늘은 내가 네 집에서 묵어야 하겠다.” 이 한 마디에 삭개오는 급히 나무에서 내려와 예수님을 영접합니다. 그는 예수님을 자신의 집으로 모셔 들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가까이 합니다. 소위 사회적 거리(social distance)를 일시에 극복합니다. 멀리서 바라보는 비대면(非對面, non-contact)’의 상황이 예수님과 얼굴과 얼굴(face to face)을 마주하는 대면(對面, contact)의 상황으로 변화됩니다.

그 뿐만 아닙니다. ‘삭개오’의 삶에는 일대 변환이 이루어집니다. 그는 세관장으로서 불의한 재산을 많이 모아둔 사람입니다. 그가 예수님을 만나고 이렇게 말합니다.

“삭개오가 일어서서 주님께 말하였다. ‘주님, 보십시오.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겠습니다. 또 내가 누구에게서 강제로 빼앗은 것이 있으면, 네 배로 하여 갚아 주겠습니다.’”(8절)

상상할 수 없는 일이 발생합니다. 어디서부터 이런 일들이 발생하는 것입니까? 이같이 놀라운 일을 발생하게 만든 것은 어찌 보면 매우 단순한 행동이었습니다. ‘삭개오’를 바라보는 예수님의 눈길이었습니다.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사람‘삭개오’, 군중들로부터 혐오의 대상이었던 ‘삭개오’,  어느 누구도 가까이 하려고 하지 않았던 사람 ‘삭개오’, 이런 상황에서 오직 자신의 이기적인 삶과 부의 축적만을 위해 살아오던 사람 ‘삭개오’를 극적으로 변하게 만든 것은 예수님의 눈길었습니다.

예수님의 사람을 바라보는 인자함이 가득한 눈길입니다. 너그러움의 눈길입니다. 그 분의 너그럽고 인자한 눈길이 머무는 곳에서 기적이 일어납니다. 예수님의 눈길이 머무는 그 곳에서 구원의 사건이 발생합니다.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다.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다. 인자는 잃은 것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9~10절)

예수님은 늘 사람들을 대하실 때 인자하고 너그럽게 대하셨습니다. 이웃의 약점을 찾아보려고 하지 않으십니다. 늘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사람들을 너그럽게 대하십니다. 그러기에 그 분의 인자하고 너그러운 행위는 사람들을 감동시키고 구원합니다.

성경은 이러한 너그럽고 인자한 예수님의 마음과 삶의 실천을 무수히 전해주고 있습니다. 결국 너그러움과 인자함이 우리 인류를 구원할 것입니다.

여선인(與善仁)

도덕경은 물의 또 다른 특징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여선인(與善仁)

‘더불어, 함께하다’의 여(與) 착할 선(善)  어질 인(仁)

‘물은 더불어서 함께 할 때 너그럽고 인자하게 하는 것을 좋아한다.’라는 의미일 것입니다. 물은 돌, 흙, 바람, 나뭇가지 등등 자기와는 다른 존재들과 함께 할 때 너그러운 모습을 보입니다. 넉넉한 마음으로 함께 합니다.

그러기에 물은 그 모든 다른 존재들을 품을 수 있습니다. 너그럽고 인자한 마음과 이에 따른 실천 행위가 결국 물로 하여금 모든 것을 품게 만듭니다.  그러기에 물은 만물을 이롭게 하지만 다투지를 않습니다. 모든 것을 너그러움과 인자함으로 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삶의 태도는 종교에서만 강조되는 것은 아닙니다. 기업경영에서도 강조되고 있습니다. 한국 사회는 기업 총수들의 이른바 갑질 횡포로 인하여 많은 몸살을 앓기도 합니다. 미스터 피자 회장의 보복성 영업, 자신의 운전기사 뿐 아니라 부하직원들에게 폭언을 일삼았던 종근당 회장의 비인격적 처우, 호식이두마리치킨 회장의 부하직원 성추행, 갑질 논란의 시작에 불을 붙였던 대한항공 조부사장의 땅콩 회항 등등 오너리스크로 인한 기업 이미지 추락 등 사회적 문제가 발생하고 있습니다.

이들의 갑집 행위는 자기 아래에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 대한 무자비한 마음으로부터 비롯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기업경영자에게 도덕경에서 말하고 있는 여선인(與善仁)의 자질을 요구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돈을 벌고자 하는 기업인들에게 인자함을 요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기업인들을 향하여 이러한 요구가 있는데 오늘 기독교인들에게는 더할 나위없는 요구가 아니겠습니까?

너그럽고 인자한 눈길

예수님의 인자하고 너그러운 눈길이 머무는 곳에 삶의 변화가 일어납니다. 구원의 사건이 발생합니다. 그런데 오늘 너그럽고 인자한 눈길을 주시는 예수님을 따르고 살고자 하는 기독교인들의 눈길은 어떠합니까?

코로나19를 전후로 인류 사회는 여러 가지 면에서 달라질 것입니다. 위에서 말씀 드린 것처럼 운명 공동체이기는 하지만 우리 내부에서 개인화의 강화로 인한 혐오의 문제가 심각하게 등장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차별과 혐오는 우리 사회를 큰 혼란으로 이끌어 갈 것입니다. 코로나19로 인하여 야기되고 수면 위로 떠오른 이러한 거리두기와 혐오 문제를 극복할 수 있는 길은 어디에 있을까요?

그것은 오직 너그럽고 인자한 예수님의 눈길을 닮아가고 그 분의 따뜻한 시선을 따라 살아가는 것입니다. 거리두기와 비 대면으로 인한 사회 불안과 혼란을 이겨 낼 수 있는 것은 이웃을 너그럽고 인자한 눈길로 대하는 것입니다.

여선인(與善仁),  더불어서 함께 사는 것은 서로서로를 너그럽게 대할게 될 때 가능합니다. 이웃을 향한 너그러운 눈길을 우리 모두를 구원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최근 한국 사회에서 주류 기독교가 보여준 행위는 너그럽고 인자한 눈길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모습입니다.  우리와 다른 이웃들에 대한 혐오와 거리 두기에 가장 앞장 서는 것이 기독교인들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가질 정도입니다.  그래서는 안 됩니다. 혐오에 앞장서는 것이 기독교인들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인류가 코로나19로 인하여 발생한 ‘사회적 거리 두기’와 ‘비대면’의 상황을 이겨내고 ‘마음의 거리’를 가까이 하면서 전정한 운명 공동체로서 살아가기 위해서 기독교는 너그러움의 종교임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우리는 예수님의 구원을 이 땅위에서 힘차게 전파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너그러운 기독교인들의 너그러운 눈길이 머무는 곳 마다 삶의 변화가 일어날 것입니다.

오늘도 예수님은 너그럽고 인자한 눈길로 우리를 바라보고 계십니다. 그 분의 눈길이 머무는 곳마다 구원과 새로운 삶의 길이 열리고 있습니다. 사회적 거리두기와 비 대면이 일상화 되고 있는 현실에서 예수 살기는 ‘삭개오’를 바라보시던 그 예수님의 너그러운 눈길, 여선인(與善仁)의 눈길을 가지고 우리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서로를 너그럽고 인자한 눈으로 바라봅시다!

당신이 나에게로 왔어요
- 삭개오의 노래

정인영

텅 빈 바람에 흔들리는 그네처럼
무표정한 하루하루 되풀이되고
힘없이 늘어져 해지는 그림자
상처 감추고 슬픔을 검게 칠했지

저녁 바람에 흔들리는 여린 풀처럼
떨림의 순간 알아채는 이 없고
소리 내지 못하고 떨어진 꽃잎
차마 부를 수 없어 보기만 했지

당신이 나에게로 왔어요
아무런 말 하지 않았는데
다 알고 있다는 듯 바라보시며
내 이름 불러 주시네

당신이 나에게로 왔어요
알아주는 이 아무도 없는데
홀로 있는 나를 찾아오셔서
손잡아 주시네
어둠, 그 밖으로 나오라
슬픔, 그 속에서 나오라

낮고 소외된 내 삶에 당신 눈길 머무를 때
어두웠던 마음 찬란하게 일렁이고
쓸쓸했던 날들 물결에 흘려 보내네
당신이 나에게로 왔듯이.

홍인식 목사  webmaster@ecumenian.com

<저작권자 © 에큐메니안,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홍인식 목사의 다른기사 보기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여백
신문사소개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서울시 종로구 김상옥로 30, 402호  |  제호 : 에큐메니안
대표전화 : 070-4252-0176  |  팩스 : 0303-3442-0176  |  등록번호 : 서울 자 00392  |  등록일 : 2012.10.22
발행인 : 윤인중  |  편집인 : 이정훈  |  청소년보호책임자 : 윤인중  |  E-mail : webmaster@ecumenian.com
Copyright © 2020 에큐메니안. All rights reserved.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