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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문(呪文): 주기도문과 성서로 본 시천주주문의 원리와 그 발현성
이호재 원장(자하원) | 승인 2020.07.07 17:41

‘성서와 역의 대화’에 이어 이번 회에서는 1977년에 변찬린이 발표한 「주문고-성서적 입장에서 본 시천주와 태을주」 라는 글을 통해 종교학적인 측면에서 주문의 효용성과 음악성, 성서적 지평에서 시천주와 태일주를 상호 비교한 내용을 중심으로 살펴보기로 한다.(1)

주문이 작동하는 원리와 음악적 감응성

대부분의 종교에는 주문을 가지고 있다. 주문이라면 혹자는 무속적인 종교, 혹은 ‘무언가 결핍된 종교’에만 있는 것이라는 오해를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의 주기도문, 불교의 다라니, 유교의 영가(詠歌), 힌두교의 만뜨라(mantra), 도교에는 송·원대의 780여 개의 주문을 모은 『태상삼동신주(太上三洞神呪)』 등도 주문의 일종이다. 한국의 신종교에도 시천주와 태을주 등은 대표적인 주문이다.

그럼 종교에는 왜 주문이 필요하며 어떤 종교적 원리로 작동이 되는 것일까? 주문은 발화자(신자)와 수신자(초월적 혹은 내재적 신)가 분리되어 있다. 발화자가 주문이라는 종교적 기제를 통해 강한 수신자의 영성의 힘을 발화자가 공명하는 종교적 테크닉이다. 다시 말하면 보이지 않는 본체계 영성의 힘을 빌어 현상계에서 발현하고자 하는 종교적 인간의 욕망이다.

주문은 하늘 차원은 단층이 아니고 다층적으로 다양한 영들이 존재하고 있다는 종교적 전제에서 출발한다. 그리스도교는 3층천, 유대교는 7층천, 불교는 33천, 도교는 36천 등이 있다고 종교텍스트는 말한다. 다층적인 하늘에는 다양한 신들이 존재하고 있다. 대중방송에서 다양한 채널의 전파를 발신하듯 다층의 하늘에서도 다양한 신과 영들이 영파(靈波)를 발사하는데서 주문이 작동하는 원리를 찾을 수 있다. 즉 만트라를 독송하는데 하나님의 영이 임재할 수 없고, 동학의 시천주를 암송하는데 교리화된 그리스도교의 하나님이 임재할 수 없다. 다시 말하면 종교적 인간의 주문은 발화자의 종교적 개성에 합당한 영적 채널에 공명하는 초월적(혹은 내재적) 존재와 신인합발(神人合發)하는 종교체험을 유도하는 종교적 상징이다. 변찬린은 이렇게 말한다.

종교의 차원 즉 영계(靈界)나 천계(天界)에도 무수한 전파나 심파(心波)들이 오고 가고 있다. 기독교적인 계시파, 불교적인 진언파(眞言波), 유교적인 영가파(詠歌波), 그 밖에 수많은 저급 영들이 남발하는 무파(巫波)들과 영신(靈信)들이 발신하는 영파(靈波)들이 심령계에 도전하고 있다.
우리는 그 타고난 <도(道)의 인연>을 따라 각기 그 종교적 신앙을 달리 하는데 혼자서 공중의 무수한 영파와 전파와 심파(心波)를 다 포착할 수 없다. 여기에서 주문의 필요성이 대두된다. 주문이란 다이얼과 채널과 같이 자기가 믿는 종교의 영들을 강신케 하는 종교학상의 한 방법론이다.(2)

이처럼 주문은 보이지 않는 세계와 보이는 세계를 연결시키는 영적 채널로서 특정한 음율과 반복에 의해 보이지 않는 다층적인 하늘에 존재하는 신(적)존재를 보이는 현실세계에 역현(力顯)하게 하는 종교적 기제이다. 따라서 주문은 제작자(창교자 등)의 독창적인 종교체험의 요체를 간명하게 표시하고, 종교공동체의 정체성과 영속성을 유지하기 위한 종교적 부호이다.

조화로운 하늘나라는 찬송과 찬양 등 신율(神律)로 어우러진 음악세계이다(사 6:3, 요계 4:8, 9:5-6. 등등). 불교의 『대아미타경』에서도 다양한 하늘의 음율의 차등성을 언급한다. 또한 정역을 지은 김일부의 ‘음 아 어 이 우’의 영가, 최제우가 지은 21자의 시천주, 강일순이 지은 23자의 태을주도 농악에 바탕을 둔 한민족의 종교적 심성에 바탕을 농악 음계임을 변찬린은 학문적 가설을 제시한다. 이처럼 대부분의 주문은 음악성과 율동성을 가진다. 그렇기에 주문은 논리적인 중언부언이라는 형식이 아니라 간결하며 반복되는 리듬을 가진 음율로 독송됨으로써 후대에 전승되는데 유리한 입장을 가지게 된다.

주기도문과 시천주는 동일한 구조와 형식의 주문

일반적으로 주문은 신(적)존재를 부르는 청신(請神)과정, 신과 더불어 인간의 교통하는 오신(娛神)과정, 신을 돌려 보내는 송신(送神)과정의 형식을 가지고 있다. 우리가 살펴보려는 두 주문도 동일한 구조로 형성된다.

성서의 이야기는 조화로운 창조의 세계, 아담과 하와의 타락으로 부조화한 세상의 전개,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조화로운 세상이 회복된다는 기본 구조를 가지고 있다. 한태동은 구약의 십계명과 신약의 주기도문은 바로 이런 부조화한 하늘과 땅과 인간의 상호관계를 조화로운 내주관계로 회복하라는 것으로 이해한다.(3) 이를 위해서는 주기도문이 말하듯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져야 한다”.

한편 동학은 개벽선언과 지상선경을 의미체계로 하여 한민족 중심으로 개벽세계를 열어제친다는 공통적인 주장을 하고 있으며 그 핵심에 ‘시천주’ 주문이 있다. 모세가 이스라엘의 야훼신을 만났듯이 최제우는 한국의 하ᄂᆞᆯ님을 체험하였다. 최제우와 하ᄂᆞᆯ님의 만남에서 탄생한 동학의 요체인 시천주와 시천주를 암송하는 ‘하는님’은 한국 종교역사뿐만 아니라 세계 종교역사의 한 획을 긋는 대사건이다.(4) 특히 동학의 하ᄂᆞᆯ님과 유대교의 야훼신이 과연 동일한 존재-신관의 동일성과 유사상, 차별성과 변별성에 대해서는 동학측과 신학계의 열띤 ‘종교담론’이 형성되어야 한다.(5)

시천주는 1860년 최제우가 하ᄂᆞᆯ님 체험을 한 후 일년 여의 반성적 성찰을 거쳐 만든 동학(후에 천도교)의 강령주이며,(6) 증산교에서도 사용하는 공용주문이다. 시천주는 한 번 접촉한 것은 후에 공간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더라도 서로 작용한다는 접촉률에 근거한 감염주술(coutagion majic)의 형태를 가진다. 시천주는 『동경대전』의 「논학문」에 최제우가 해석과 주를 남겨놓았다. 21자의 시천주는 이렇다. 

'지기금지, 원위대강, 시천주조화정, 영세불망만사지’
(至氣今至, 願爲大降, 侍天主造化定, 永世不忘萬事知) 
지극한 기여 지금 이 자리에 크게 내리기를 원합니다. 
한울님을 모시면 모든 것이 제자리에서 조화로와지고, 
영원히 잊지 않으면 모든 일이 구현될 것입니다.(필자역)

주기도문(마태복음 6:9-13)은 당시 유대인의 가식적인 기도 행태를 비판하며 예수가 제자들에게 특별히 가르쳐준 기도문이다. 변찬린은 “예수는 사심이 없는 기도의 규범으로 <주기도문>을 가르쳐 주었다. 이 기도문이야 말로 참 기도의 규범이며 기도하는 방법을 알게 하는 안내서인 것이다. 주기도문을 깨달아 날개돋친 기도를 하자”(7)고 제안하고 있다.

두 주문은 지기, 천주, 하늘에 계신 아버지라는 초월적 힘이 인간세계에 강림하여야 새 하늘과 새 땅의 개벽세계는 구현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시천주에서는 지기(至氣), 주기도문에서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임재하여야 한다는 청신과정, 시천주의 ‘금지원위대강 시천주조화정, 영세불망’이며 주기도문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라는 강령 및 청원과정, 그리고 시천주의 ‘만사지’와 주기도문의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이라는 송신과정으로 구성되어 있다. 김동호는 이를 다음과 같이 두 주문의 구조와 형식을 비교하고 있다.(8)

▲ 김동호의 연구논문 304페이지 재인용

조화정하지 않은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는 천지비(天地否)의 괘상이며, 다시 개벽을 통해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진 진”상태가 역에서는 지천태(地天泰)의 괘상이다. 다시 개벽한 지상선경과 새 하늘과 새 땅의 후천세계를 역과 성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천지비(天地否)는 양 곧 남자가 음 곧 여자의 상위에 처한 괘인데 이는 선천도수를 나타내고 있다. 하지만 지천태(地天泰)는 음 곧 여자가 양 곧 남자의 상위에 처한 괘인데 이는 후천도수를 나타내고 있다.(중략) 그럼 왜 역경은 지천태는 길괘로 보고 천지비는 흉괘로 보는가? 역(易)은 역야(逆也)이다. 이것이 주역의 비의이다. 지천태는 음이 상위에 있지만 음의 본성과 덕은 함장가정(含章可貞), 즉 한없이 겸손한 성격이 있으므로 상위에 있으나 항상 하향(下向)하는 자세에 있고 양은 하위에 있으나 항상 상향(上向)하는 자세에 있으므로 지천태괘야말로 장차 천균(天均)의 조화를 이루는 괘상이므로 대길(大吉)한 괘로 생각하고 이것을 후천도수로 생각하는 것이다. 후천은 남녀가 평등조화를 이루는 천균(天均)의 시대이다. 선천의 낡은 천지에서는 남존여비의 도운(道運)으로 여성들은 학대받았으므로 천지는 비괘(否卦)인 것이다. 이것을 성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요한 계시록 21장 1절).
* 보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나니 이전 것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생각나지 아니할 것이라(이사야 65장 17절).

이 두 성구에서 보는 바 새 하늘과 새 땅은 후천개벽의 선경(仙境) 곧 지천태를 의미하며 처음 하늘과 처음 땅 즉 낡은 천지는 선천상극의 천지비를 말하는 것이다.(9)

시천주와 주기도문의 형식이 하늘의 조화세계가 땅에서 구현하게 해 달라는 동일구조를 가진다면 과연 시천주는 성서의 지평에서 어떻게 말해지고 있는지 알아 보자.

성서로 본 시천주

1974년 김경재는 「성령과 지기의 비교연구」라는 글에서 한국인은 “무한히 세계를 초월해 있으면서도 세계와 인간 안에 내재한 범재신론적인 하나님 관을 가졌던 것이다. 세계와 인간속에 내재하여 생성 창조하는 신 그가 바로 기였던 것이다”라고 선교신학의 관점에서 지기와 성령의 공통점과 상이점에 국한하여 말하고 있다.(10) 그러나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한국인의 신관이 범재론적 신관인지는 재고해 보아야 한다.

변찬린은 1977년에 「주문고(呪文攷)-성서적 입장에서 본 시천주와 태을주」에서 시천주뿐만 아니라 태을주를 대상으로 성서텍스트와 대화시키고 있다. 지기는 성령에 상응하고 원위대강은 오순절 성령강림에 호응한다. 시천주는 인간의 몸이 성령이 모시는 하나님의 성전으로 표현되며 “인간은 하나님의 영을 받음으로 진리를 알 수 있고 그 뜻과 섭리와 조화를 바르게 알 수 있다. 이 상태가 곧 조화정인 것이다”라고 해석한다. 물론 변찬린이 성령을 ‘지기’라고 할 때의 ‘성령’은 『성경의 원리(상)』의 7장 ‘성령론’을 참고하여야 한다. 지기에는 공동체 형성  등의 의미를 내포하며, 더 나아가 존재론적 탈바꿈을 한 ‘신선’과 ‘신령한 몸’에 대해서도 두 종교가 대화할 수 있는 해석학적 실마리를 제공하고 있다. 이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시천주의 성서적 이해>

변찬린은 축 시대에 다른 종교문화권에서 발생한 세계 종교텍스트가 제도종교의 종교적 언어로 고착됨으로 간텍스트적인 해석을 통해 현대인에게 대화적 언어를 제공한다. 이는 상징와 비유, 역사와 문학의 상상력으로 형성된 종교텍스트의 파토스 언어가 서구의 논리와 합리, 분석과 종합의 철학적인 로고스 언어로 해석된 전통을 탈피하여 종교간, 경전간, 문화간 대화를 깨달음의 풍류적 언어로 재해석해 내어 생명성을 회복하는데 기인한다. 이런 심정을 변찬린은 이렇게 노래한다.

새 ᄇᆞᆰ이여

다종교시대(多宗敎時代) 하나님은 만신(萬神)과 만령(萬灵)들에게
잠시 〈하늘 언론(言論)〉의 자유를 허락하셨다.
제멋대로 떠버리는 영(灵)들과 야합공모(野合共謀)한 사이비 각자(觉者)들이
서투른 하늘 방언(方言)을 짖거리며 은혜를 받았다고 선전하고 있다.
해원(解寃)의 시대(時代)
만신(萬神)들아 네 멋대로 해 보렴
만령(萬灵)들아 네 멋대로 해 보렴
난장판을 이룬 각(觉)의 마당에는 온갖 유언비어(流言蜚語)가 떠돌며
온갖 영적 공약(灵的空約)을 남발하고 있다.
생명을 잃고 천하를 얻은 자들이 하늘에서 오는 참 소식을 번역할 줄 몰라
이데올로기의 은어를 지껄이고 있다
이 종말론적 언론자유(言論自由)의 소음(騷音)과 신학(神學)의 공해(公害)속에서
조용히 고요를 개명(開明)한 자 만이 참으로 각자이다.
새 ᄇᆞᆰ이여
묵여뢰(默如雷) 하라.
묵여뢰(默如雷) 하라.(11)

한국역사에 관심을 가진 사람은 동학의 신관과 시천주에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토착적 근대의 재발견이라는 한국 신종교의 효시인 동학은 ① 야훼신관과 하ᄂᆞᆯ님의 정체성, ② 시천주의 종교적 효능, ③ 다시 개벽과 지상선경의 현대적 의미, ④ 동학농민혁명의 종교문화사적 평가 등 많은 숙제를 남겨놓고 있다. 이런 동학에 대해 유영모는 거의 언급하지 않고, 함석헌은 부정적인 평가를 한 이유를 밝히는 것도 흥미로운 연구과제이다.

우리는 한국의 선맥(僊脈, 仙脈)과 한국 종교문화에 대한 충분한 선이해가 없이 교조화된 서구신학으로 한국 종교문화의 맥락을 재단하고 신종교의 경전텍스트를 교리화된 서구신학의 전통으로 환원주의적 비교연구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성찰해 보아야 한다.

미주

(미주 1) 변찬린, 「呪文攷-성서적 입장에서 본 시천주와 태을주」 , 『증산사상연구』3, 1977, 253.
(미주 2) 앞 논문, 253.
(미주 3) 한태동, 『성서로 본 신학』 (서울: 연세대학교 출판부, 2005), 1-29; 같은 저자, 『사유의 흐름』 (서울: 연세대학교 출판부, 2003), 3-6, 111-114.
(미주 4) 윤노빈, 「동학의 세계사상적 의미」, 『신생철학』 (서울: 학민사, 2003), 333-363.
(미주 5) 동학의 신관과 그리스도교의 신관이 초월성과 내재성을 갖춘 범재신론이라는 주장은 재검토되어야 한다는 문제제기를 한다. 이호재,  「한국의 신명(神明)사상과 신명공동체-잃어버린 하늘신앙의 ᄒᆞᆫᄇᆞᆰ신명을 찾아서」, 『민족종교의 기본사상』, 326-354.
(미주 6) 김용휘, 「동학의 수도(修道)와 주문(呪文) 수련의 의미」, 『선도문화』14, 2013, 219-250. 특히 동학연구자는 이돈화, 윤노빈, 윤석산, 김용휘와 임태홍, 조성환의 연구성과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미주 7) 변찬린, 『성경의 원리(下)』 (서울: 한국신학연구소, 2019), 241.
(미주 8) 저자는 시천주와 주기도문이 유사한 구조형식을 가지고 초월적 타자에 대한 절대적 의존성을 가지고 현재적인 내재성을 지향하며 조화의 하늘의 세계가 땅에 구현되는 주문의 형식이라고 논증하고 있다. 김동호, 「동학의 21자 주문과 기독교 주기도문의 상징성과 소통성 고찰」, 『원불교사상과 종교문화』48, 2011, 273-313.
(미주 9) 변찬린,  「呪文攷-성서적 입장에서 본 시천주와 태을주」 , 위 논문, 259-260.
(미주 10) 김경재, 「성령과 지기의 비교연구」, 『신학연구』15, 1974, 119-148.
(미주 11) 변찬린, 『禪 그 밭에서 주운 이삭들』, 158.

이호재 원장(자하원)  injicheo@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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