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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된 자, 나중 될 자(사 65:17-25; 계 21:1-7; 눅13:22-30)성령강림후 일곱째주일(7월19일)
최병학 목사(남부산용호교회) | 승인 2020.07.17 17:29

1.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될 자도 있느니라!

지난주 말씀을 통해 우리는 박넝쿨 하나도 그렇게 아꼈던 선지자 요나가, 천하보다 더 귀한 생명을 무시한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오늘 우리 일부 개신교 목사들과 교인들이 나와 다르다고 다른 사람을 차별하고 혐오하는 것과 같은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구원은 이제 상식적인 세상 사람들, 곧 이방인들에게로 넘어갔음을 배웠습니다. 오늘 복음서 말씀도 동일한 맥락에서, 말씀이 이어집니다. 복음서 말씀을 볼까요? “예수께서 각 성 각 마을로 다니사, 가르치시며 예루살렘으로 여행(눅 13:22)”하실 때였습니다.

“어떤 사람이 여짜오되, 주여! 구원을 받는 자가 적으니이까?”(눅 13:23a)라고 묻습니다. 그러자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눅 13:23b-24)고 대답하십니다. 그리고 예를 들어 말씀하시죠?

“집 주인이 일어나 문을 한 번 닫은 후에 너희가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며, 주여! 열어 주소서 하면, 그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너희가 어디에서 온 자인지 알지 못하노라 하리니, 그 때에 너희가 말하되, 우리는 주 앞에서 먹고 마셨으며 주는 또한 우리를 길거리에서 가르치셨나이다 하나, 그가 너희에게 말하여 이르되, 나는 너희가 어디에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 행악하는 모든 자들아! 나를 떠나가라 하리라.”(눅 13:25-27)

예수님과 함께 더불어 먹고 마셨는데, 또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았는데, 집 주인이 일어나 문을 닫은 후에는 들어 갈 수 없다는 말입니다. 게다가 “열어주소서!” 외치면, 오히려 “행악하는 자”라고 말하며 내쫓습니다. 놀라운 말씀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도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모든 선지자는 하나님 나라에 있고, 오직 너희는 밖에 쫓겨난 것을 볼 때에,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 사람들이 동서남북으로부터 와서 하나님의 나라 잔치에 참여하리니, 보라!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도 있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될 자도 있느니라 하시더라.”(눅 13:28-30)

이 말씀에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이들은 누구입니까?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모든 선지자들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자손이라는 이들은 밖에 쫓겨나서 슬피 울며 이를 갈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놀라운 말씀이죠? 그 대신 누가 하나님 나라의 잔치에 들어갑니까? 바로 동서남북으로부터 오는 이방인들입니다. 이들은 선민 이스라엘이 아닙니다. 먼저 된 자인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니라, 나중 된 자인 이방인들입니다.

오늘날의 언어로 바꾸어 볼까요? 하나님의 천국 잔치에, 믿는 그리스도인들은 밖에 쫓겨나서 슬피 울며 이를 갈 것이고,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이 천국 잔치에 초청을 받아, 구원의 감격을 누릴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개신교의 모습을 보면 이 말씀이 틀리지 않음을 느낍니다. 두렵고 떨리는 말씀입니다. 게다가 구약과 요한계시록의 말씀은 그 일을 위해 하나님께서 새 일을 행하신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지금은 회개할 때입니다. 주께서 오실 날이 가까이 다가왔습니다. 도적같이 임하실 것입니다. 믿는 우리가 참회하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고 삶의 방향을 바꾸어야 합니다. 그때 새 하늘과 새 땅이 우리 앞에 열릴 것입니다.

2. 해함도 없겠고 상함도 없으리라!

구약의 말씀을 볼까요? 먼저 구약의 말씀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시는 하나님을 소개합니다. “보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나니, 이전 것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생각나지 아니할 것이라(사 65:17).” 또한 하나님께서 창조하시는 이 새로운 세상은 우는 소리, 부르짖는 소리가 없습니다. 자기 수명대로 행복한 삶을 누리는 세상입니다. 말씀을 볼까요?

“너희는 내가 창조하는 것으로 말미암아 영원히 기뻐하며 즐거워할지니라. 보라! 내가 예루살렘을 즐거운 성으로 창조하며 그 백성을 기쁨으로 삼고, 내가 예루살렘을 즐거워하며 나의 백성을 기뻐하리니, 우는 소리와 부르짖는 소리가 그 가운데에서 다시는 들리지 아니할 것이며 거기는 날 수가 많지 못하여 죽는 어린이와 수한이 차지 못한 노인이 다시는 없을 것이라. 곧 백세에 죽는 자를 젊은이라 하겠고, 백세가 못되어 죽는 자는 저주 받은 자이리라.”(사 65:18-20)

말씀에 보니, 백세에 죽는 자를 젊은이라고 합니다. 놀라운 말씀이죠? 새 하늘 새 땅의 삶은 어린아이가 어릴 때 죽지 않고, 노인이 자기 삶을 즐겁게 다 살고 평안히 죽음을 맞이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대부분의 죽음의 순간들을 살펴볼까요? 하버드 의대 정신의학과 교수인 아서 클라인먼의 책, 『케어: 의사에서 보호자로, 치매 간병 10년의 기록』 (시공사: 2020)가 그 순간을 잘 보여줍니다. 이 책은 저자인 아서가 알츠하이머에 걸린 아내, 조앤을 10년간 헌신적으로 간병한 이야기입니다.

▲ 책 표지와 아서 클라인먼과 그의 아내 조앤의 생전 모습

3. 디지털 뉴딜 시대의 케어란?

아서의 아내인 조앤은 ‘천자문’을 영어로 번역한 명민한 중국학자입니다. 그런데 50대 후반에 조발성(early-onset) 알츠하이머, 곧 ‘젊은 치매’ 진단을 받게 됩니다. 아서는 자기 자신 스스로 잘 훈련받은 정신의학과 교수라 아내를 잘 돌볼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의료 지식과 인적 네트워크, 경제력을 갖춘 의사인 아서 조차도 의료진으로부터 느끼는 소외, 끝이 보이지 않는 검사와 대기, 매일같이 찾아오는 불안과 무력감을 피해 갈 수 없었습니다. 오늘 나이든 부모님을 병원에 모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느끼는 무력감입니다. 아무튼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서는 마지막까지 아내를 존엄한 인간으로 돌보고자 했습니다. 그리고 누군가를 끝까지 지키는 일이 얼마나 힘들고 숭고한 일인지를 깨닫습니다. 이 책에서 아내 조앤의 마지막을 소개하는 부분입니다. 인용해 볼까요? 아서는 담담히 서술합니다.

“조앤이 불편해할 때는 모르핀 한 방울을 더 넣어 달라 요청하고 상태가 악화될 때는 호스피스 의사에게 약용량을 조금 늘려 달라 했다. 마지막 고통이 빨리 끝나기를 바라면서도 죽음의 순간에 고통 받지 않기를 바랐다. 모르핀은 고통을 완화시키는 것 같았다. 마지막 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조앤은 평화로워 보였다. 호흡이 느려졌지만 숨을 쉬는 게 그렇게 힘들어 보이진 않았다. 그 마지막 밤 몇 시간이라도 눈을 붙이기 위해 우리는 집으로 갔다. 밤에 근무하던 간호사가 약속대로 연락했을 때, 우리 모두 조앤의 침대 곁으로 서둘러 갔으나, 조앤은 이미 숨을 거둔 뒤였다. 지난 며칠 동안 작별 인사를 계속했었다. 우리는 안심했다. 고통의 시간은 끝난 것이다.”

조앤은 요양원에서 9개월을 보냈고, 그곳에서 눈을 감았습니다. 아서가 조앤을 요양원에 맡기고 홀로 집으로 돌아온 날, 그는 자신을 자책하며 오열합니다. 의학적으로는 필요한 결정이었지만 죄책감에서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모친을 요양병원에 맡겼던 저도 마찬가지였지만, 오늘 이 땅의 많은 자녀들이 겪는 감정입니다. 사실 아서가 병원에서 마주친 현실은 반복되는 각종 검사와 끝없는 대기, 병명과 진단에만 초점을 맞춘 진료, 의료진으로부터 느끼는 소외, 실질적 지원의 부재였습니다. 오늘 이 땅의 요양병원과 요양원에서 느끼는 것과 똑같은 것입니다.

의사와 보호자, 두 입장을 아우른 메디컬 인문학의 진수인 이 책에서 아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돌봄을 주는 사람과 받는 사람의 수만큼이나 다른 경험이 있다.” 케어는 ‘존엄하게 늙고 아플 수 있는 내일을 위해’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이자. ‘개인에게 돌봄을 떠맡기는 사회’는 잘못된 사회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돌봄보다 수익을 우선시하는 의료 현장 때문에 돌봄을 가족이 책임지는 사회는 잘못된 사회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는 시기만 다를 뿐, 늙음과 아픔을 피할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아서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타인의 아픔을 돌보는 일은, 곧 당신 자신을 돌보는 일이 되기도 한다.”

해함도 없겠고 상함도 없는 새 하늘 새 땅은 이러한 돌봄의 가치와 의미를 깨달을 때 가능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돌봄이 개인의 일뿐만이 아니라(독박 돌봄), 사회가 책임져야 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를 위해 돌보는 이와 돌봄을 받는 이, 서로 상호 존중이 필요합니다(물론, 양자 모두 쉽지는 않겠죠). 따라서 아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돌봄을 주고받는 일은 관심, 애정, 실질적 도움, 감정적 지지, 도덕적 유대를 주고받는 일이다. 돌봄은 가족, 지역, 사회를 끈끈하게 연결하며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고 우리가 누구인지를 알려주는 또 하나의 서사를 제공한다.”

지난 2020년 7월 15일 정부가 디지털 뉴딜을 공표했습니다. 코로나-19가 전 세계를 덮쳐 물리적 거리두기(사회적 거리두기), 재택근무, 온라인 개학 등의 과정을 거치면서 디지털의 중요성이 부각되었습니다. 따라서 우리 삶의 모든 영역에서 디지털 전환은 가속화될 것입니다. 이러한 위기에 ‘새롭게 대응하는 것(new deal)’이 디지털 뉴딜입니다. 가장 핵심 사업은 인공지능(AI) 데이터 세트 구축입니다. 교육부터 시작해 바이오·헬스케어·농림수산·교통·문화·AI 기술선도·사회 현안 해결 관련 등에 디지털 데이터 구축을 통해 새로운 삶과 일자리를 창조하겠다는 것입니다. 코로나-19 이후에 4차 산업혁명이 더 빨리 우리에게 다가온 것입니다.

이렇게 이미 다가온 4차 산업혁명 시대는 이제 인공지능뿐만 아니라, 로봇이 인간의 일을 대체할 것입니다. 그러나 돌봄 노동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돌봄 노동은 인간 상호간의 관계가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복지 예산을 돌봄에 투여해야 합니다. 돌봄 노동자들을 교육하고, 그들을 의료진과 같은 대우를 해야 합니다. 요양병원에 그저 누워서 죽을 날만 기다리는 노년은, 지금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나의 일이 아닌 것은 아닙니다. 따라서 디지털 뉴딜 시대와, 4차 산업혁명 시대에 가장 먼저 할 일은 바로 돌봄 노동을 제대로 만들어 나가는 일일 것입니다.

4. 역지식지(易地食之)

부동산 문제로 나라가 시끄럽지만, 새 하늘 새 땅에는 부동산 문제, 곧 집 때문에 시끄럽지 않는 세상입니다. 자신들이 건축한 집에 타인이 살지 않기 때문입니다. 또한 자신들이 심은 과실을 자신들이 먹습니다. 이것은 음식을 빼앗기지 않고, 집과 땅이 침략당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이사야가 전하는 말씀을 볼까요?

“그들이 가옥을 건축하고 그 안에 살겠고, 포도나무를 심고 열매를 먹을 것이며 그들이 건축한 데에 타인이 살지 아니할 것이며 그들이 심은 것을 타인이 먹지 아니하리니, 이는 내 백성의 수한이 나무의 수한과 같겠고, 내가 택한 자가 그 손으로 일한 것을 길이 누릴 것이며 그들의 수고가 헛되지 않겠고, 그들이 생산한 것이 재난을 당하지 아니하리니, 그들은 여호와의 복된 자의 자손이요, 그들의 후손도 그들과 같을 것임이라.”(사 65:21-23)

놀라운 것은 그 새 하늘 새 땅은 사자가, 소가 먹는 음식을 먹는다고 합니다.

“그들이 부르기 전에 내가 응답하겠고, 그들이 말을 마치기 전에 내가 들을 것이며 이리와 어린 양이 함께 먹을 것이며 사자가 소처럼 짚을 먹을 것이며 뱀은 흙을 양식으로 삼을 것이니, 나의 성산에서는 해함도 없겠고 상함도 없으리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니라.”(사 65:24-25)

역지식지(易地食之)입니다. 이것은 나의 체질을 바꾸어 다른 사람처럼 되겠다는 말입니다. 육식동물인 사자가, 자신의 먹이가 되는, 초식동물의 먹이를 먹는다는 말이 바로 그런 뜻입니다. 타자는 내가 차별하고 혐오해야할 대상이 아니라, 내가 그처럼 변해야 할 하나님의 형상이 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역지사지(易地思之), 다른 사람의 감정에 이입하는 역지감지(易地感之)를 넘어, 다른 사람이 먹는 음식을 먹는 이러한 역지식지야 말로 하나님의 거룩한 성산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를 위해 하나님께서는 처음 땅과 바다를 심판하십니다. 요한계시록의 말씀이 그것을 잘 보여줍니다.

5. 만물을 새롭게 하리라!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계 2:1) 사실 요한계시록은 미래의 이야기가 아니라, 현재의 이야기입니다. 지금 고통스러운 현실 속에서 참고 견디면 새로운 세상이 올 것이라는 믿음의 말씀입니다. 이 불의한 세상을 어떻게 새롭게 할 것인가 하는 질문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입니다. 바로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바꾸어 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에서는 현재의 로마제국은 무너지고, 또 그들의 핍박에서 벗어나,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있지 않는 새로운 세상이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준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이르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니,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계 2:2-4)

그리고 이를 위해 만물을 새롭게 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보좌에 앉으신 이가 이르시되,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하시고, 또 이르시되,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되니, 기록하라 하시고, 또 내게 말씀하시되, 이루었도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라. 내가 생명수 샘물을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리니, 이기는 자는 이것들을 상속으로 받으리라. 나는 그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계 2:5-7)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주님께서 만물을 새롭게 하실 때, 또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실 때, 그 하나님 나라 잔치 자리의 문 밖으로 쫓겨나지 맙시다. 밖에 쫓겨나서 슬피 울며 이를 갈지 맙시다. 먼저 믿는 우리들은 나중 될 자들입니다. 비록 믿음의 자녀라고 하지만, 선민이라고 하지만, 정말 신앙생활 제대로 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심판은 우리를 향할 것입니다.

또한 주님께서 다시 오실 날이 가까이 다가왔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도적같이 임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참회하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제대로 분별하고 지금까지 잘못된 삶을 살아왔다면 삶의 방향을 전환해야 합니다. 그때 새 하늘과 새 땅이 우리 앞에 열릴 것이고, 또한 하나님께서 만물을 새롭게 하실 때, 그 복된 창조의 역사에 함께 동참할 것입니다. 그런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최병학 목사(남부산용호교회)  hak-9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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