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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 구원을 가능케 하는 지식성령과 믿음 (2)
최영 소장(기독교장로회 목회와신학연구소) | 승인 2020.07.18 17:13
▲ 구원에 이르게 하는 믿음의 지식은 성령께서 깨닫게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 것이다. ⓒGetty Image

『기독교강요』 제3권의 목표는 그 구원에 참여하는 세부사항을 자세히 진술하려는 것입니다. 칼빈은 참여의 수단, 즉 믿음을 다루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성령께서는 오직 믿음에 의해서만 우리를 복음의 광명으로 인도􏰁시기 때문입니다(III.i.4).

이어서 믿음의 두 가지 주된 효과, 즉 성화와 칭의를 논합니다. 세 번째, 그는 참여의 주관적인 측면인 기도를 고려하고, 네 번째 부분은 참여의 궁극적인 원인인 ‘예정’에 관한 장들을 포함합니다. 제3권은 그리스도에 참여􏰁는 것의 절정, 즉 최후의 부활에 대한 토론과 함께 마무리됩니다.

믿음에 대한 잘못된 이해들

칼빈은 믿음에 대해 말하기 전에, 먼저 믿음에 대한 몇 가지 오류를 지적하고 정리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우선, 믿음은 ‘내 생각은 이러하다’는 식의 단순한 의견이 아닙니다. 또한 ‘나는 ...라고 확신한다’는 식의 신념을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더욱이 믿음이란 복음서에 나오는 이야기에 대한 일반적인 동의도 아닙니다. 믿음은 “한 분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칼빈은 여기에 첨가해야 할 것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요17:3)입니다.

왜냐하면 아버지께서 계시하시려는 모든 것을 독생자 그리스도에게 맡기시고, 그가 하나님의 영광의 진정한 형상을 표현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히1:3). 그러므로 믿음에 대하여 생각할 때는 항상 “하나님이신 동시에 사람이신” 그리스도를 생각해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믿음은 도대체 무엇인지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되고 맙니다(III.ii.1). 칼빈은 스콜라 신학이 이 점에서 두려운 사례와 경고(1)가 된다고 말합니다.

스콜라주의자들은 그리스도에게 너울을 씌워 그를 숨겼고, ‘맹목적 신앙’이라는 허구를 만들어냈습니다. 말하자면, 그들은 우리의 감정을 겸손히 교회에 복종시키면,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믿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칼빈은 다음의 구절에서 그들의 오류를 지적합니다.

믿음이란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지(요17:3), 교회에 대한 존경이 아니다. 그들이 맹신이란 것으로 어떤 미로를 만들어냈는가를 우리는 안다. 무엇이든지-가장 무서운 오류까지도-교회라는 딱지를 붙여서 속여 넘기면, 무지한 사람들은 무분별하게 신령한 것으로 받든다. 이런 경솔한 맹신이 파멸 일보 직전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것을 변명하며, ‘이것이 교회에 대한 믿음이다’라는 조건만 붙으면, 무엇이든지 확실한 것으로 믿는다. 그래서 자기들이 가진 오류를 진리인 것처럼 암흑을 광명인 것처럼 무지를 바른 지식인 것처럼 착각한다(III.ii.3).

우리는 교회가 명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진리로 받아들일 용의가 있기 때문에, 또는 질문하고 알아내는 일을 교회에 일임했기 때문에,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를 통해서 화해가 이루어졌기 때문에(고후5:18-19),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자비로운 아버지시며, 그리스도를 의와 거룩함과 생명으로 우리에게 주셨다는 것을 알 때에, 우리는 구원을 얻게 됩니다. 이 지식에 의해서 우리는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지 우리의 감정을 단순히 교회에 위임함으로써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칼빈은 바울이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롬10:10)라고 말한 것은 우리의 의의 근거인 하나님의 선하심을 명백하게 인정하라는 요구였다고 주석합니다(III.ii.2).

믿음의 근거

칼빈에 의하면 믿음은 성령에 의해서 생겨나며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합니다. 믿음의 대상은 앞에서 말했듯이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나 칼빈은 여기서 좀 더 구체적으로 “자신의 복음으로 옷을 입으신” 그리스도라고 말합니다(III.ii.6). 이 말은 그리스도께서 복음 안에서 완전히 계시되었다는 것을 말􏰁는 비유적인 표현입니다. 믿음은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며, 이 지식은 복음에 근거합니다. 그러므로 칼빈은 믿음과 말씀의 상관성을 이렇게 말합니다.

믿음을 지탱하며 유지하는 근거는 말씀이며 말씀에서 떠난 믿음은 넘어 진다. 그러므로 말씀을 제거하면 믿음은 조금도 남지 않는다. … 믿음은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아는 지식이며, 이 지식은 그의 말씀에서 얻는다(III.ii.6).

그러나 놀랍게도 칼빈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이 다 사람의 마음에서 믿음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예컨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내린 저주나 경고의 말씀은 믿음을 세우기보다는 오히려 흔들 뿐입니다. 믿음은 하나님 안에서 생명을 구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 생명은 징벌에 대한 선언이나 계명에서 찾아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자비를 약속하는 값없이 주신 약속에서만 얻을 수 있습니다(III.ii.29).

그리고 이 믿음의 약속은 그리스도에게서 주어졌다는 것을 말해야 합니다(III.ii.32). 따라서 칼빈은 다시 한 번 강조합니다. 믿음은 신성에 대한 어떤 모호한 개념을 인식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하여 어떤 분이 되고자 하시는가”(III.ii.6), 즉 하나님께서 우리의 “자비로운 아버지”이심을 인식하는데 있습니다(III.ii.7). 여기서 믿음에 대해 정의를 내립니다.

이제 우리는 믿음에 대한 바른 정의를 할 수 있겠다. 믿음은 우리에 대 한 하나님의 선하심을 굳게 또 확실하게 아는 지식이며, 이 지식은 그리스도 안에서 값없이 주신 약속의 신실성을 근거로 삼은 것이며, 성령을 통하 여 우리의 지성에 계시되며 우리의 마음에 인친 바가 된다(III.ii.7).

그리고 칼빈은 14절부터 믿음에 대해 본격적으로 검토합니다. 믿음은 지식입니다. 그러나 이 지식은 우리가 감각을 통해서 아는 사물들에 관한 지식이나 이해 같은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혈과 육에 의한 것이 아니라 성령의 감동에 의해서 생겨난 것이라고 했습니다. 믿음이 지식이라고 할 때, 이것은 바울이 아름답게 묘사한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닫는” 힘과 같은 것입니다(엡3:18-19).

이런 종류의 지식은 인간의 모든 이해력을 넘어서기 때문에, 합리적인 논증에 의해서 가르침을 받기보다는 하나님의 진리에 의해서 더욱 더 강화되는 그러한 지식입니다. 그러므로 칼빈은 믿음의 지식은 이해보다는 확신이라고 결론을 내리고(III.ii.14), 하나님을 인자하시고 친절한 아버지이시며, 관대함으로 모든 것을 참으시는 분이라고 확고한 신념을 갖고 확신하는 사람만이 진정한 신자라고 말할 수 있다고 합니다(III.ii.16).

그러나 의심의 기미가 없는 확신이나 불안의 습격을 받지 않은 확 신은 세상에서 찾아볼 수 없습니다. 성경은 다윗과 같이 경건한 자가 부단히 자기의 불신앙과 싸우며 살아갔던 수많은 예를 보여줍니다 (시42:5,11,43:5, 시31:22, 시77:9, 7, 10, 참조). 그러나 믿음은 “종려나무 같이”(시92:12), 신자들의 마음을 지켜주어 그 모든 공격에도 불구하고 결국 승리하게 합니다. 그렇게 다윗은 언제나 그 모든 공격에 압도된 듯이 보일 때도, 자신을 비난하면서도 여전히 하나님을 향해 일어섰습니다(III.ii.17). 칼빈은 이 문제를 설명하기 위해 제2권에서 언급한 영육의 분열로 돌아갑니다(II.ii.27; II.iii.1).

경건한 사람은 속마음에 분열을 느낀다. 하나님의 선하심을 앎으로 감미로운 느낌이 일부에 스며들었으나 일부에서는 재난의 쓴 맛을 알고 슬 퍼한다. 한쪽에서는 복음의 약속을 믿고 안심하면서 다른 쪽에서는 자기의 죄를 알고 공포에 떤다. 한편으로는 생명을 소망하여 기뻐하는데, 또 한편으로는 죽음을 직시하고 전율한다. 이런 변동은 믿음이 불완전한데서 생긴다. 현세 생활에서는 불신앙의 병을 완전히 치료하고 신앙이 우리를 완전히 채우며 차지하는 행운을 볼 수 없다. 따라서 여러 가지 갈등이 생긴다. 육의 잔재 속에 안주하는 불신앙이 내심에 배태된 신앙을 공격한 다... 그렇다고 해서 믿음에서 완전히 멀어지는 것이 아니다. … 전투의 결말 은 언제나 같다. … 믿음이 결국은 승리의 개가를 부르게 된다(III.ii.18).

그러나 믿음이 이런 공격을 견디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무장하며 방위 태세를 강화해야 합니다. 믿음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무장할 때, “불신앙은 신자들의 마음속에서 지배력을 얻지 못하고 밖에서 공격을 가할 뿐”입니다. 불신앙의 무기는 치명적인 상처를 입히지 못하고 괴롭힐 뿐이며 혹은 상처를 입히더라도 그것은 쉽게 나을 수 있는 것입니다(III.ii.21). 게다가 신자는 그리스도와 연합한 사람들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바라보면 구원의 확신이 생기지만 자기 자신을 바라보면 좌절만 있을 뿐이라고 말합니다.

따라서 그들은 불신앙과 소망이 교대로 우리 마음을 지배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저들의 말은 마치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계시는 것이 아니라 멀리 떨어져 계신 것같이 생각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믿음으로 그리스도에게 접붙임이 되었고(롬11:17), 그리스도로 옷을 입었기 때문에(갈3:27), 칼빈은 그와 같이 말하는 자들에 대􏰁여 이렇게 말합니다. “자신을 돌아보면 그대들에는 확실한 멸망이 있다”(III.ii.24). 그러나 그리스도에게 접붙임이 된 자들에게는 위로와 확신의 말을 전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모든 은혜와 함께 자신을 그대들에게 나눠주셨으 므로 그의 것은 모두 그대들의 것이 되며, 그대들은 그의 일부분이 된다. 참으로 그와 하나가 되며, 그의 의는 그대들의 죄를 극복하시며 그의 구원 은 그대들이 받을 정죄를 말소하시며, 그의 높은 가치로 인해서 그대들의 무가치함이 하나님 앞에서 드러나지 않도록 중재하신다. 이것은 확실한 사실이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우리에게서 분리하거나 우리를 그리스도에 게서 분리해서는 안 된다. 그와 반대로 … 그리스도께서는 보이지 않는 교 제의 유대로 우리와 꼭 붙어 계실 뿐만 아니라 놀라운 영적 교통에 의해서 날이 갈수록 더욱 더 우리와 한 몸이 되시며, 드디어 완전한 일체가 되신다(III.ii.24).

지금까지 칼빈이 믿음에 대하여 말한 것을 정리하면, 믿음은 지식이며(III.ii.14), 이 믿음의 지식은 확실성을 내포하고 있고(III.ii.15), 그것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선하심을 확신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III.ii.16). 또한 믿음은 거저 주시는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하며(III.ii.29), 이 믿음이 근거하는 은혜의 약속은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졌다는 것을 확인했습니다(III.ii.32).

성령과 믿음

이제 칼빈은 제3권의 주제, 곧 성령과의 관련 속에서 구체적으로 믿음을 해명하고자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마음이 어둡고 악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은 그 자체로 우리 안에서 믿음을 불러일으킬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성령의 조명을 필요로 합니다. 말씀과 성령의 상관성에 대해서는 제1권 9장에서 확인한 바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이 우리를 이끌어주시지 않으면 우리가 그리스도께로 갈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성령의 조명이 없으면 하나님의 말씀을 결코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두 제자에게 그의 나라의 비밀을 밝히 설명하려고 하셨으나(눅24:27), “그들의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눅24:45) 하시기까지는 아무런 발전이 없었던 사실에서도 확인됩니다.

사도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에게서 직접 배웠던 자들이지만, 그들이 귀로 들은 바와 같은 교훈을 그들의 마음속에 새겨 넣기 위해서는 진리의 영이 그들에게 오셔야 했습니다(요16:13). 참으로 하나님의 말씀은 태양과 같이 그 말씀이 선포된 모든 사람에게 찬란히 빛을 발하지만, 눈먼 자들에게는 아무 효력을 발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이 점에서 우리는 원래 모두 눈이 먼 자들입니다. 주제 사라마구의 소설, 『눈먼 자들의 도시』에 나오는 주인공 의사의 아내가 유사한 발견을 합니다.

“나는 우리가 눈이 멀었다가 다시 보게 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나는 우리가 처음부터 눈이 멀었고, 지금도 눈이 멀었다고 생각해요. … 볼 수는 있지만 보지 않는 눈먼 사람들이라는 거죠.”(2)

따라서 성령이 내면의 교사가 되셔서 우리의 마음을 비추실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올 길을 마련하시지 않으면,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마음에 침투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III.ii.34). 찬송가 195장은 성경을 읽을 때 성령께서 우리 마음을 비추어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게 해주시라는 기원을 담고 있습니다. “성령이여 우리 성경 읽을 때 그 속에서 빛을 보게 하소서”(3절).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지성을 통해 배운 것을 마음속에 뿌리내리게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칼빈은 앞에서 믿음을 정의할 때, 성령을 통하여 복음이 우리의 지성에 계시되며 우리의 마음에 인친 바가 된다(III.ii.7)고 말한 바 있습니다”(III.ii.24). 그러나 그리스도에게 접붙임이 된 자들에게는 위로와 확신의 말을 전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모든 은혜와 함께 자신을 그대들에게 나눠주셨으 므로 그의 것은 모두 그대들의 것이 되며, 그대들은 그의 일부분이 된다. 참으로 그와 하나가 되며, 그의 의는 그대들의 죄를 극복하시며 그의 구원 은 그대들이 받을 정죄를 말소하시며, 그의 높은 가치로 인해서 그대들의 무가치함이 하나님 앞에서 드러나지 않도록 중재하신다. 이것은 확실한 사실이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우리에게서 분리하거나 우리를 그리스도에 게서 분리해서는 안 된다. 그와 반대로. … 그리스도께서는 보이지 않는 교 제의 유대로 우리와 꼭 붙어 계실 뿐만 아니라 놀라운 영적 교통에 의해서 날이 갈수록 더욱 더 우리와 한 몸이 되시며, 드디어 완전한 일체가 되신다(III.ii.24).

지금까지 칼빈이 믿음에 대하여 말한 것을 정리하면, 믿음은 지식이며(III.ii.14), 이 믿음의 지식은 확실성을 내포하고 있고(III.ii.15), 그것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선하심을 확신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III.ii.16). 또한 믿음은 거저 주시는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하며 (III.ii.29), 이 믿음이 근거하는 은혜의 약속은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졌다는 것을 확인했습니다(III.ii.32).

미주

(미주 1)  T. H. L. 파커/박희석 옮김, 『칼빈신학입문』(서울: 크리스챤 다이제스트, 2001), 115.
(미주 2) 주제 사라마구/정영목 옮김, 『눈먼 자들의 도시』(서울: 해냄, 2008), 4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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