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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의사소통적 이성의 뿌리삼신 할매 신화에서 읽어내는 한국인의 살림살이 이성 (4)
이기상 명예교수(한국외대 철학과) | 승인 2020.07.19 13:20

삼신 할매 신화에서 드러나고 있는 삶의 지혜와 문법을 우리는 ‘살림살이 이성’이라고 이름하여 보기로 한다. 그것은 한국인의 생활세계에서 펼쳐진, 한국인의 세계관과 인간관을 반영하고 있는 독특한 [의사]소통적 이성(1)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그 [의사]소통의 지평, 즉 [의사]소통의 장[마당]과 그 참여자, [의사]소통거리, 그 방식과 그 조건 등 [의사]소통의 기본요소와 차원이 서양의 그것과는 다름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세 세계를 잇는 소통의 이성

우선 그 [의사]소통이 벌어지고 있는 생활세계로서의 지상세계는 세 세계의 하나로서 다른 두 세계, 즉 천상세계와 지하세계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따라서 [의사]소통의 참여자 역시 지상세계에 사는 인간에만 국한되어 있지 않고 천상세계와 지하세계의 신령과 귀신에까지 확대된다. 여기에서 전제되고 있는 세계관과 인간관은 세 세계가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인간과 신령, 생명체와 사물들, 산과 바다 등이 함께 어우러져 순환적이고 연기론[인연]적인 관계의 그물을 형성하고 있는 그런 세계관이다. 여기에서 통용되는 기준이나 규율은 사유의 논리나 근거 있는 말함이나 합리적인 판단이 아니다.

‘삼신’이 생명을 주관하는 신임은 앞에서 이야기했다. 일본학자 무라야마(村山智順)는 삼신을 아기의 수태, 생산, 발육을 주관하는 신으로 해설하고 있다.(2) 아키바(秋葉隆)는 삼신의 기능과 역할을 이렇게 분류해 놓았다. 즉, 첫째 신은 살을 줌으로써 아기를 배게 해주는 신이요, 둘째 신은 뼈를 줌으로써 아기를 낳게 해주는 신이고, 셋째 신은 혼을 주어 아기를 크게 해주는 신이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 삼위의 신이 일체를 이룬다고 정리하였다.(3)

삼신 할매 신화에는 사람이 태어나고 성장하고 죽는 것은 인간의 영역을 넘어선, 초인간적인 존재인 (삼)신의 소관이라는 생각이 그 속에 깔려 있다. 인간에게 생명을 주는 존재는 신이다. 그리하여 생명력 내지는 생명원리는 신의 영역에 속하므로 감히 인간이 침탈할 수 없는 신성의 영역인 것이다. 그렇지만 인간의 몸뚱이는 아버지와 어머니로부터 받는다는 것이 무교의 일반적인 개념이다. 하지만 뼈와 살만 놓고 보면 인간의 몸은 한낱 고깃덩어리에 지나지 않는다. 여기에다 덧붙여서 살게 하는 힘 또는 살게 하는 원리가 필요해진다. 그것이 바로 ‘숨’이다. 숨이야말로 생명의 원천이요, 생명의 힘, 즉 생명력이다. 그래서 생명을 우리말로는 목에 붙어 있는 숨, ‘목숨’이라고 한다.

바리공주 무가에서는 뼈살이, 살살이, 숨살이야말로 인간을 존재하게 하는 기본 3요소로 이야기된다. 죽은 인간을 살릴 때에도 삼신이 바로 뼈살이, 살살이 그리고 숨살이를 차례로 시킴으로써 생명을 부여한다. 인간이 목숨을 다하고 죽게 되면, 맨 먼저 숨이 끊어지고 다음에 살이 썩고, 맨 마지막으로 뼈가 남는다. 그리하여 뼈에는 인간의 혼이 가장 오래도록 남아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 이유로 뼈를 소중히 하는 유해 숭배사상이 생기게 되었다.

삼신은 지고신(至高神), 세상의 주재자, 초인간적 존재로서 인간에게 삶을 나누어주고 다시 거두어가는 일을 한다. 인간에게 생(生)이란 영역은 자기 관할영역의 밖이다. 무교에서는 생명이란 초인간적 존재나 초월적인 원리로부터 유래한다고 믿어진다. 그러므로 생명이란 사라져버리지 않으며, 남에게 양도할 수도 또 내 멋대로 중단할 수도 없는 절대가치이다. 인간은 다만 생명원리의 부산물인 생명현상을 잘 사용한 후 본래 임자에게 고스란히 돌려주어야 한다.

굿문화에서 우리는 순환적 세계관을 볼 수 있다. 굿문화에서는 인간과 자연이 서로 순환 관계에 있듯이 인간과 신도 서로 순환 관계에 있다. 인간이 나고 죽는 것이 인간의 일생에 한정된다고 여기지 않는다. 인간의 세계와 신의 세계 곧 이승과 저승이 서로 순환관계에 있는 것이다. 이승의 죽음이 저승의 남이다. 이승에서 깨끗이 죽어야 저승에서 올바르게 태어난다. 죽음은 곧 이승에 오기 전에 있었던 곳이자 온 곳인 저승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을 말한다. 저승은 인간이 온 곳이자 갈 곳이다. 신들림이나 신내림과 같은 굿의 용어는 바로 신과 인간의 교감을 넘어서서 저승의 신령이 이승의 인간으로 오는 것을 말한다.

무당은 위(하늘)와 아래(땅)의 신들과 모두 소통하며, 인간이 신들과 만나 통할 수 있도록 해주는 중간자 역할을 한다. 뿐만 아니라 인간이 죽어 신이 된 조상신들하고도 소통할 수 있도록 해준다. 신과 소통하는 제의를 무당이 주관하게 되는데 이것이 ‘굿’이며, 바로 이 굿을 통해 인간의 길흉화복을 조절하려는 것이다.(4) 무당은 왜 하늘과 땅을 소통시키려 하는가? 이 땅에 무한한 생명력을 재충전 받기 위해서이다. 이를 보통 민중들은 복이라고 표현한다. 이런 복을 이 세상에 마구 뿌리는 극적인 모습이 작두위에서의 복주기다.

굿을 하는 사람들은 궁극적으로는 하늘과 땅 사이에서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하늘과 신과 만나기를 원한다. 그들이 갖는 능력(영험력)을 빌어서 산 사람들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들을 얻고자 함이다. 힘든 문제들을 해결하여 잘 살아갈 수 있는 생명력을 얻고자 함이다. 민중들의 생활 그 자체였던 굿문화는 하늘과 땅을 소통시키는 구조를 갖고 있으며, 이는 결국 하늘과 땅 사이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생명을 고양시키기 위함이다. 굿을 통한 소통을 통해 신(삼신)으로부터 복을 내려받아 생명력을 극대화시키기 위함이다.(5)

한풀이 속에서 추구하는 서로 더불어 살고-살리는 삶[공생과 상생]의 길(6)

굿의 목적은 ‘풀이’이다. 맺힌 한(恨)을 푸는 것이다. 풀이를 통해서 삶의 생명본성을 활성화하는 ‘신명풀이’이다. 그런데 그 풀이의 방법은 ‘위하는 것’이다. 여기서 위함은 섬김이다. 인간을 둘러싸고 있는 세계 곧 대상들을 두루 위함으로써 ‘대상과 나’, ‘세계와 자아’ 사이에 조성된 갈등을 원만하게 해결하고, 자연을 섬기고 위함으로써 자연과 인간 사이에 조성된 잘못된 관계를 온전하게 바로잡는다. 자연을 위하고 신령을 위한다. 그것이 인간을 위한 굿의 풀이 정신이다. 대상을 위하며 섬김으로써 모든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굿문화의 풀이 방식이다. 억울하게 죽은 조상, 한이 맺혀서 저승에도 못 가고 구천을 헤매는 조상들을 위하는 것이 굿이다. 여기서 우리는 민중중심의 서로-살고-살리는 공생[상생]적 가치관을 확인할 수 있다. 굿에서 행해지는 합장과 비손 그리고 절, 두 손을 모아 비는 일이나 손을 싹싹 비비며 기도하는 일, 엎드려 절하는 일 등은 대상을 섬기고 위하는 최대한의 행위이자 대상과 화해에 이르는 가장 적절한 전략이다.(7)

굿에서 추구하는 ‘대상을 위하고 섬김으로써 더불어-삶’이라는 이타적 공생은 곧 서로-살림[상생]이다. 대상을 섬기며 위해 주는 행위는 이타적 행위이자 대상과 화해하는 행위이다. 대상과 나 사이에 발생한 갈등을 이타적으로 풀이하는 것이 굿문화이다. 만일 이렇게 갈등을 이타적으로 풀어서 화해 상태에 이른다면 갈등이 오히려 대상과 나의 공생을 담보하고 상생까지 가능하게 만든다. 왜냐하면 한쪽만 이익을 보거나 서로 이익을 보는 공생이 아니라 나를 희생시키면서 상대를 위하는 이타적 공생은 사실상 상생이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굿문화의 체계에서는 갈등 관계에 있는 대상들이 모두 상호관계 속에서 긴밀한 연관성을 지니고 있다고 믿는다. 달리 말하면 삼라만상은 서로 공생관계에 있다는 유기체적 세계관을 지니고 있다. 굿에서는 조상도 위하고 자연물도 위한다. 조상신과 화해하고 자연과 화해함으로써 서로 유대를 강화하고 공생 관계를 이루고자 한다.

굿은 불쌍한 존재들을 위함(살림)이다. 굿에서는 소외된 대상과 불쌍한 존재들을 의도적으로 가려내서 위한다. 잡귀잡신과 병귀신들을 손님처럼 청해서 위하는 일야야말로 인간과 대상의 진정한 공생이라 할 수 있다. 생태학적 공생은 이로운 동물과 아름다운 식물을 대상으로 한정하지 않는다. 굿문화에서는 잡귀잡신을 위하듯이 하찮은 생명들도 두루 위한다. 자연물이나 자연현상은 물론 도무지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 것으로 생각되는 징그러운 동물이나 귀찮은 동물까지 신성하게 여겨서 위한다. 양식을 축내는 쥐와 징그러운 구렁이들까지 집안에서 서식하는 것을 업신(業神)으로 여겨 받아들인다.

굿에서 위하는 신은 만신이다. 굿에서 위하는 대상은 한결같이 신이다. 조상신을 비롯한 잡귀잡신을 두로 섬긴다는 공생적 신령관에 머무르지 않고 일체의 모든 것에 신성이 있다고 여기며 모든 자연대상을 믿는 범신론적 신앙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따라서 흙 한 줌, 나무 한 그루 함부로 다루지 않는다. 거기에도 영성이 있고 신이 깃들어 있다고 믿는다. 떠돌이 귀신들을 위하듯이 나무와 바위와 물을 두루 위한다. 자연신을 섬기는 굿이 풍부하다. 자연물이나 자연현상 그 자체는 자연신이나 영성의 집일 따름이다. 인간의 몸을 마음과 영혼 그리고 정신이 거처하는 ‘몸집’으로 보았듯이.

이렇듯 굿문화는 상생적이다. 굿에서 보이는 공생의 관계를 보면 잘난 존재를 ‘섬겨서’ 덕을 보고자 하는 것보다 못난 존재를 ‘위해서’ 맺힌 것을 풀고자 하는 것에 관심을 더 기울인다. 이러한 섬김의 행위가 신령을 상대로 하는 굿판에서만 벌어지는 것은 아니다. 하늘과 땅, 산과 나무, 바위와 물 등 자연물을 섬기는 굿에서도 두루 이루어진다. 자연물과 사람의 흥망성쇠가 함께 한다는 믿음이 그 아래 깔려 있다. 병귀신인 객귀와 마마손님을 위하는 굿판을 볼 때 그것은 함께 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제각기 살기 위한 것이다. 억울하게 죽은 조상신들을 모셔다가 대접해서 저승으로 온전하게 가도록 천도굿을 한다. 공생할 수 없는 관계에 있거나 공생해서는 손해를 입게 되는 관계의 주체가 도리어 상대방의 존재를 위해 줌으로써 서로 이익을 얻을 때 이러한 관계는 공생의 논리를 넘어서 상생이라 할 수 있다.

굿문화는 화해와 공생의 원칙에 의한 풀이와 섬김의 생명그물 논리에 바탕을 두고 있다. 굿문화 어디에서도 인간 중심주의적 사유체계를 찾을 수 없다. 모두 생명을 갖춘 존재로 위한다. 모든 존재가 대등한 생명이며 서로 그물처럼 엮여 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생명그물 논리에서는 아래위도 없고 계층도 없으며, 정상도 없어서 먹이사슬의 피라미드 자체가 형성되지 않는다.

상생의 세계에서는 비록 우리의 삶에 여러 모로 피해를 주고 재앙을 초래하는 적대 세력일지라도 계속해서 대립 관계로 맞서는 것이 아니라 달래고 섬겨서 맺힌 것을 풀고 화해에 이르도록 한다. 그것은 곧 모든 존재로 하여금 생존의 자유와 해방을 누리게 하며 삶의 풍요를 보장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대상을 위하는 굿의 문화이다. 그러자면 대상이 무엇이든 신성한 생명으로 인식해야 한다. 그래야 정성스레 위할 수 있다.

굿에서는 모든 대상을 위하며 자신을 낮춘다. 더 적극적으로 말하면 정성을 들여 비손하는 것이다. 할머니들은 문제가 생길 때마다 “빌어라 빌어! 비는 데는 하늘도 못 당한다”고 한다. 따라서 ‘비는 데는 무쇠도 녹는다’, ‘귀신도 빌면 듣는다’, ‘비는 장수 목 벨 수 없다’는 옛말들이 있다.(8)

미주

(미주 1) 하버마스는 생활세계적 이성을 의사소통적 합리성이라 부른다. 그리고 그 모델을 이상적인 언어상황에서 끄집어온다. 그런데 한국인의 생활세계적 이성은 언어에 의한 의사소통이 주가 아니다. 그래서 차라리 소통적 이성이라고 한다면 더 정확한 표현이 될 것이다.
(미주 2) 참조. 村山智順, 「釋奠」, 「祈雨」, 「安宅」, 朝鮮總督府, 1938, 273.  박일영, <무교의 생명사상>, 『생명과 더불어 철학하기』, 우리사상연구소 편, 철학과현실사, 2000, 166쪽에서 다시 따옴.
(미주 3) 참조 秋葉隆/赤松智城, 『朝鮮巫俗의 硏究』下, 朝鮮總督府, 1938, 103-104; 박일영, <무교의 생명사상>, 166쪽에서 다시 따옴.
(미주 4) 참조. 박흥주, <삼신세상의 구현체로서 굿>,  『한국의 생명담론과 실천운동』, 세계생명문화포럼_경기2004 자료집(증보판), 2005, 334 이하.
(미주 5) 참조. 박흥주, 앞의 글. 341.
(미주 6) 글쓴이는 여기서 굿 문화에서 공생과 상생의 자연 친화적 사상을 찾아낸 임재해의 연구를 바탕으로 해서 살림살이의 독특함을 정리해 본다. 임재해, <굿 문화에 갈무리된 자연 친화적 사상>, 『한국의 전통생태학』, 사이언스북스, 2004, 170〜215 참조.
(미주 7) 참조. 임재해, 앞의 글, 180 이하.
(미주 8) 참조. 임재해, 앞의 글, 214.

이기상 명예교수(한국외대 철학과)  saemom@cho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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