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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의 통곡 이후(시 16:1-11; 갈 5:22-24; 마 26:69-75)성령강림후 일곱째주일(7월19일)
민기욱 목사(미국 트리니티 한인장로교회) | 승인 2020.07.20 18:24
▲ El Greco (1541-1614), 「St. Peter’s Tears(성 베드로의 눈물)」 ⓒGetty Image

주님의 크신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여러분은 혹시 후회되는 일이 있습니까? COVID 19 팬데믹으로 인하여 온라인으로 물건을 구매하는 일이 급속도로 늘어나고 있는 요즘 부쩍 온라인으로 물건을 사는 일이 많아지고 있는데, 직접 상점에 가서 물건을 꼼꼼히 볼 수 없으니 광고에 속기도 하고, 다른 사람들의 품평에 혹하기도 합니다. 때론 자신의 그때그때 달라지는 기분에 따라 택배를 받기도 전에 후회하기도 합니다.

그래도 요즘은 반품이 쉽고 편해서 소비자들의 후회에 대한 비용을 생산자가 대신 치르기도 합니다. 소비자 입장에선 참 편리한 세상입니다. 그러나, 물건을 반품하는 그런 경우 말고, 사람과의 관계나 어떤 일들을 할 때 발생하는 실수나 오해, 오류 등은 참 돌이키기가 어렵습니다. 뒤늦게 사태를 파악하고 돌이키려 하지만 이미 때늦은 후회를 해도 소용없을 때가 많습니다.

사람과의 관계가 그렇습니다. 서로의 오해로 인하여 간극이 벌어지기도 하고, 행여 이간질을 통해 이득을 취하는 이가 있기라도 하면 원래의 관계로 돌아오기란 아득하기만 합니다. 우리 인간사에 너무 흔한 일이다보니 영화나 드라마로 극화시키는 일이 다반사입니다. 그런 내용의 스토리를 전지적 작가 시점으로 바라보는 우리들은 두 주인공의 오해에 대해 안타깝기 그지없습니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 이간질하는 이를 바라보며 한없이 저주하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어떻습니까? 여러분이 그 스토리의 주인공이 되신 적은 없었습니까? 물론 영화 속 주인공처럼 한없이 이상적이고, 도덕적이고 흠없는 존재는 아니지만 내가 의도하고 실수한 것보다 훨씬 큰 반응이거나 이미 시간이 흘러 돌이키기에는, 주워담기에는 늦었고, 그럴 바에는 아예 잊고 살거나, 시간이 지나면 잊혀지겠지 하는 생각까지 이른 적은 없느냐 하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작은 거짓말로 사건을 덮으려고 했다가 점점 일이 커지고 꼬여 수습 불가능에 이른 적은 없느냐 하는 것입니다. 뒤늦게라도 오해를 풀고 잘못을 시인하고 용서하여 관계가 좋아지는 경우도 있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가 더 많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압니다. 부모와 자식의 관계에서, 남녀 사이의 관계에서, 동업자 관계에서 이런 일들이 비일비재합니다.

오늘 복음서 본문인 마태복음 26장 후반부를 보니까 베드로가 울고 있습니다. 우는 정도가 아니라 심히 통곡하고 있었다 기록되어 있습니다. 베드로는 도대체 왜 울었을까요? 본문을 읽어보면 그 까닭이 예수의 말씀이 기억나서였습니다. 무슨 말씀이 기억나서였습니까? 닭 울기 전에 스승인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할거다 하는 내용이었습니다. 그 예수님의 말씀이 기억나서 통곡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한 번 부인하고 나서도, 두 번 부인하고 나서도 기억나지 않다가 세 번 부인하고 나서 닭이 우는 소리를 들으니까 “아, 내가 세 번씩이나 스승인 예수를 모른다고 했구나”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최면에 걸렸던 사람이 최면술사의 각성하는 소리를 듣고 최면이 풀리는 것처럼 그렇게 베드로는 깨어났던 것입니다. 과학실험의 임계점처럼 그 온도가 되어서야 비로소 격렬한 화학반응이 일어나는 것처럼 그렇게 베드로가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세 번이나 예수를 모른다고 철저히 부인했던 베드로가 닭이 우는 소리를 듣고 큰 깨달음, 큰 각을 경험한 후 그 깨달음을 주체할 수 없어 땅을 치며 통곡했다는 것입니다.

세 번이나 예수를 모른다고 하는 과정 속에서 자기 자신이 지금 어떤 의미의 행동을 했었는지 몰랐던 베드로. 우선 급한 대로 예수를 부인하여 자기 목숨부터 건지고 보자 했던 것이지, 예수님과의 인연은 이제 없던 셈 치자는 것이 전혀 아니었는데. 그러나 예수를 부인하는 과정 속에서 예수님과의 인연을 세 번에 걸쳐 철저하게 끊어내는 것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 때, 닭이 웁니다. 그 소리를 들은 베드로는 밖으로 나가 심히 통곡하고 맙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주목할 부분이 있습니다. 예수를 부인한다는 것, 예수를 모른다고 하는 것, 이게 무슨 의미인가 하는 것입니다. 물론 그 상황 속에서 베드로는 자기 목숨을 건질 요량으로 예수를 모른다고 부인했습니다. 예수를 안다고 하는 순간 베드로는 예수를 따라 죽을 게 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유대의회와 로마법의 이름으로 죽을 예수. 로마의 평화를 깨뜨린다는 죄목으로 하나님을 모독한다는 죄목으로 조작된 재판과정으로 죽을 수밖에 없었던 예수, 그 예수와 한 패거리요, 그 제자요 그의 편이라 할 때 베드로의 목숨은 뻔합니다. 베드로는 자기의 목숨을 건지기 위해서라도 예수를 모른다 부인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예수를 모르는 베드로, 예수를 부인하는 베드로는 이미 베드로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가 예수를 부인하는 한 그는 우리와 아무런 상관이 없어진다는 것입니다. 즉, 그가 예수와 상관 있어야 우리와도 상관 있다는 말입니다. 베드로의 존재의의는 예수와의 관계 속에서 비로소 완성됩니다. 그가 예수를 모른다고, 그가 예수를 부인한다고 함은 단순히 한 인간을 모르는 데 그치는 게 아니고 그의 존재 가치 자체를 저버린 셈이 된다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포도나무 비유로 말씀하시는 것처럼 포도나무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있어야 비로소 그 가지의 존재 가치가 생기고 열매를 맺듯이, 반대로 그 가지가 포도나무에서 떨어져버리면 말라 죽어버리고 더 이상 포도나무 가지라고 말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즉 베드로가 베드로이기를 포기해버린 상황이 지금 벌어지고 있다 하는 것입니다. 닭이 우는 소리에 비로소 이 사태를 뒤늦게 깨달은 베드로를 우리는 바라보고 있습니다.

예수와 무슨 상관이 있는 게 아니냐 검문을 당하자 자기도 모르게 예수만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존재의의마저 부인해 버리는 상황에 빠졌다 하는 것입니다. 이제 그는 어디로 가야 합니까? “너는 이제 시몬이 아니라 베드로, 무슨 일이 생겨도 흔들림없이 굳건하게 땅에 박혀 있는 반석이다”라고 주님께서 이름지어 주셨던 것을 내동댕이친 자가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가 통곡하며 흘린 눈물은 자기 자신을 위한 눈물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자신을 위해 스스로 흘릴 눈물조차 메말라 버린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나의 존재 가치는 무엇으로 확보되는지, 내가 누구인지, 내가 누구에게 붙어 있어야 참 생명을 얻을 수 있는지 기억조차 못하는 어리석은 하루살이처럼 그렇게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수고하고 있다 하는 것입니다.

자, 이 시점에서 생각해 볼 문제가 또 있습니다. 오늘 마태복음 26장을 통해 목격하고 있는 베드로의 예수 부인 이야기는 마태복음뿐만 아니라 마가, 누가, 요한복음 모두가 기록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예수님께서 떠나신 후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운동의 선봉에 선 베드로에게 있어서 오늘의 이야기는 심각한 장애물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권위에 치명적인 손상을 입힐 이야기입니다.

그 중요한 순간에 스승을 배신한 베드로. 다른 제자들은 몰라도 자신만큼은 절대 배신하지 않을 거라 맹세했던 베드로. 그러나 그 상황이 닥치자 베드로는 처참하게 무너지고 맙니다. 복음서는 매정하게도 이를 매우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눈에 잘 띄지 않게, 그리고 도주하기 쉽게 대제사장 가야바의 집 바깥 뜰에 앉아있다가 여종에게 발각됩니다. 여종은 “너도 갈릴리 사람 예수와 함께 있었다” 말합니다. 베드로는 곧바로 부인합니다. 마태복음은 이를 “모든 사람 앞에서 부인했다” 표현합니다. 또 다른 여종이 수상하게 여기며 사람들에게 베드로가 나사렛 예수와 함께 있었다 말합니다. 베드로는 더 강하게 부인해야만 했습니다.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베드로는 맹세하며 부인해야만 했습니다. 살기 위해선 그래야만 했습니다. 그게 사는 길이라 판단한 것입니다.

조금 후 곁에 섰던 사람들이 나아와 베드로에게 말합니다. 베드로의 말씨로 보아, 그의 사투리 억양으로 보아 예수와 한 도당이다라고 판단합니다. 다른 건 몰라도 갈릴리 말씨를 쓰는 걸 보니 예수를 아는 게 분명하고, 예수와 한 패거리임이 분명하다 하는 것이지요. 자 이제 도망갈 구석이 없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목숨을 건져야만 했습니다.

오늘 마태복음은 베드로가 저주하며 맹세했다 기록합니다. 그래야 사람들이 믿어줄거고 그래야 목숨을 건질 수 있다 베드로는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 저주와 그 맹세가 베드로 자신에게 어떤 의미인지 모르는 채 말입니다. 성경은 차마 그 저주를 기록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 저주로 인하여 베드로는 철저하게 무너집니다. 바로 그 순간 닭이 울었다, 성경은 기록합니다.

문제는 베드로의 부인 사건, 베드로의 배신 사건이 베드로의 입장에서는 숨기고 싶은 과거였을터이고,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운동을 계승하는 입장에서 세상에 드러낼 필요가 없는 사건일 수 있습니다. 복음서가 기록될 당시 베드로의 사도적 권위를 위해서, 하나님 나라 운동의 미래를 위해서도 굳이 세상에 알려질 필요가 없지 않았을까요? 심지어, 제 개인적인 사견으로는 이 사건은 베드로만 간직했던, 그래서 그가 말하지 않았다면 아무도 몰랐을 그런 이야기였습니다.

베드로는 스승인 예수를 따라 죽을 수 있는 위협을 무릅쓰고 대제사장 가야바의 집까지 따라갔으니 최선을 다한 게 아닙니까? 다른 제자들은 다 도망갔으나 베드로는 끝까지 따라갔고, 스승 예수를 지키려 애쓰다가 몰매를 맞고 간신히 목숨을 건져 이제 다시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운동을 계승했다 기록했다면 오히려 베드로의 권위가 섰을 텐데요.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매정하게 천하의 베드로도 별 수 없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대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질문은 왜 그렇게 성경은 기록하고 있나 하는 것으로 향해야 합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베드로는 예수의 제자일 때라야 그의 가치가 드러납니다. 그가 예수를 모른다 부인했을 때 그는 이미 베드로일 수 없습니다. 그저 고기 잡는 어부요, 로마의 식민지 생활에 불만을 품은 한 촌부에 불과할 뿐입니다. 그러나 그가 예수를 만나 그의 제자가 되었을 때, 그는 새사람이 되었습니다. 내가 누구인지, 나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베드로는 깨달았습니다. 그러나 어떻습니까? 스승인 예수와 함께 죽음의 문턱을 넘으려 할 때 그는 예수를 부인했습니다. 그가 예수를 부인함으로, 예수를 모른다 함으로 자기의 목숨을 건지려 했습니다.

이는 우리 모든 인간의 모습을 고스란히 드러냅니다. 우리는 우리의 의지와 각오로 우리의 목숨을, 우리의 생명을 건지지 못합니다. 예수를 따르되 죽음의 문턱에 이르러 우리의 의지와 각오와 용기가 시험당할 때 우리는 우리 인간의 한계에 직면합니다. 예수를 부인함으로 그 한계를 스스로 넘지 못함을 깨닫고 심히 통곡합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일은 베드로의 의지와 각오와 용기로 가능한 게 아닙니다. 그 한계를 넘는 일은 그의 몫이 아닙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몫이요 하나님의 몫이었습니다.

베드로가 그 죽음의 문턱을 넘지 못하고 예수를 부인했다 하여 초대교회는 그를 추궁하고 망신주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베드로의 베드로되게 함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요 하나님의 능력이요 은혜임을 교회와 베드로는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 날 이후 베드로는 이제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새사람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교회의 전통과 신앙 생활을 통하여 현실 속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내려 하지만 번번히 실패하곤 합니다. 잘 살아보려 하지만 번번히 우리의 욕심으로 인하여, 약한 믿음으로 인하여, 때론 우리의 알량한 명예와 지위를 지키기 위하여 하나님의 자녀를 살아내지 못합니다. 목사님들의 가르침대로 살다가는 현실 속에서 불리하고 곤경에 빠질 거 같기에 후퇴하곤 합니다. 교회의 가르침대로 살다가는 어리석은 사람처럼 보일 거 같고, 손해볼 거 같기에 포기하곤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라 생각은 하지만 여전히 세상이 가르쳐주는 처세술로 살고 맘몬의 편에 서곤 합니다. 그러다 앞이 막히고 벽에 부딪히면 다급하게 하나님을 찾곤 합니다. 죽음의 문턱에 이르러서야 내가 하나님을 등졌구나 후회합니다.

그러나, 더 이상 이런 쳇바퀴도는 삶을 살아서는 안됩니다. 베드로의 눈물로 족합니다. 새벽닭 울 때 그가 통곡하며 깨달았던 것처럼 우리 또한 깨달아야 합니다. 예수를 따르는 게 무엇인지, 예수님이 비유로 가르쳐 주신 하나님 나라의 비밀이 무엇인지 베드로는 잘 알았기에 그는 절규하며 초대교회에 전했고, 교회는 오늘의 복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온 생애가 무너져 내릴 수치요 추락이지만 교회의 교회됨은 부활 예수에게 꼭 붙어 주님이 주시는 참 사랑과 참 은혜를 받을 때에 가능케 됨을 잘 알기에 그는 눈물을 흘리며 오늘의 복음을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성경은 이 사건으로 인하여 베드로의 삶에 종지부를 찍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부활의 예수님께서 그에게 나타나 밥상을 차려 주셨고, 사랑하는 당신의 양들을 먹이라 말씀하셨다 전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베드로에게 다시 생명의 영을 부어 주셨습니다. 다시 그가 일어설 수 있도록 능력을 더해 주셨습니다.

우리는 너무나 자주 고난에 부딪힙니다. 시험에 빠집니다. 믿음의 능력을 의심하고 세상이 추구하는 가치와 방식에 매력을 느낍니다. 신앙 생활을 하면서도 세상이 주는 달콤함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것은 생명의 영과 만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부활 사건은 하나님 나라의 은총을 우리에게 주시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때로 우리가 드러내기에 수치스러운 일을 저질렀다 해도, 때로 우리가 더 이상 신앙의 길로 복귀하지 못할 일이 있다고 여겨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외면치 않으십니다. 두 팔 벌려 우리가 다시 돌아오기를 기다리십니다. 눈을 뜨십시오. 영혼의 눈을 뜨고 임마누엘로 우리와 동행하시는 주님의 손을 붙잡으십시오. 악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주님께 용기를 구하십시오. 그 어떤 때라도 예수께서 계신 그 안에서 함께 거하며, 날마다 우리에게 주시는 새로운 영을 받아 주님이 주시는 기쁨과 평화가 넘치는 여러분 모두가 되시길 간절히 축원합니다.

민기욱 목사(미국 트리니티 한인장로교회)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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