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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의 구도자는 스스로 ‘권위’가 된다참 구도자는 특정 종파와 교파의 변호인이 아니다
이호재 원장(자하원) | 승인 2020.07.21 10:05

변찬린은 때로는 시선(詩僊)으로, ᄒᆞᆫᄇᆞᆰ문명사가로, 『성경의 원리』의 저자로, 새 교회의 창립자로, 종교개혁가로, ᄒᆞᆫᄇᆞᆰ경전해석학자로, 풍류학자로 후세에 기억될 정도로 다양한 역사적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지금 시점에는 오히려 ‘영원의 구도자’라는 측면에서 그의 구도심을 알아보기로 하자.

영성우주와 시공우주의 경계인으로서의 구도자

변찬린은 이북에서 부잣집 막내아들로 온갖 귀여움을 받고 자랐지만 한국 현대사의 비극의 현장에서 고정적인 직업도 없이 쇠약한 육체로 진리를 구도한다. 이것을 보고 ‘미친 짓’이라고 하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뚜렷한 학벌도 없고, 그를 이해해 주는 도반道伴도 없는 그 구도자의 길은 ‘미친 사람(狂者)’의 행보로 보였을 것이다. 경제적인 이유로 혈육과도 같이 살 수 없었던 변찬린은 학문의 세계에서 구원의 길을 보지 못하고, 종교와 신학과 철학세계에서 식자우환(識字憂患)의 실존적 고민을 토로한다.

말이 행동이 되고, 믿음이 실재가 되는 구도자에게 이 한계 상황에서 할 수 있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백척간두 진일보(百尺竿頭 進一步) 하는 방법 이외에 무엇이 있을까? 훗날 선종의 이대조가 되었던 혜가(慧可, 487-593)는 달마의 앞에서 어깨를 자르지 않았나? 석가모니는 피골이 상접한 육신으로 보리수 아래에서 생명을 건 구도를 한다. 예수의 광야시험도 이와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시지프스의 운명처럼 부조리에 반항하며, 구도의 길을 가는 변찬린은 이렇게 고백하고 있다.

▲ Maksym Haydar, 「The Agony of Sisyphus」 ⓒGetty Image
얼마나 많은 날과 밤을 진리를 찾아 비바람에 방황했고 무명無明의 심연에 곤두박질하여 고뇌의 독주를 마시며 절망과 무의미를 색임질 하였읍니까. 고독과 우수는 내 존재의 집이였고 병고와 좌절은 내 일용할 양식이였고 불안과 부조리는 내 일상의 동반자였읍니다. 누구 한 사람도 이해하는자 없이 고단히 행하는 길목마다 진한 객혈喀血의 장미꽃을 아름답게 피워 처절하도록 눈부신 화환을 엮어 저는 아버지의 제단에 바쳤습니다.
불안의 균菌이 전염시킨 공포의 병, 우수의 균菌이 감염시킨 고독의 병, 허무의 균이 오염시킨 절망의 병, 원죄의 균이 부식한 죽음의 병을 앓으면서 저는 순금빛 젊은 날을 몽땅 악마에게 빼앗겼지만 믿음의 품위와 구도자의 성실을 잃지 않기 위해 몸부림쳤습니다.
아버지께서 제 심전 안에 심어주신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 때문에 저는 오늘도 신음하면서 십자가의 흔적을 지고 길을 가고 있습니다.
- 변찬린, 『성경의 원리 下』 , 한국신학연구소, 2019, 572.

구도자로서의 종교적 신앙인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엡 6:12)한다. 우리는 노자 도덕경 14장에서 도의 벼리(道紀)는 “보아도 보이지 않고, 들어도 들리지 않으며, 만져도 만져지지 않는 이(夷)·희(希)·미(微)”의 경지와 요한 1서 1장에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가 되었다는 성구와 불교적 언어로 ‘상구보리(上求菩提)’한 불법을 ‘하화중생(下化衆生)’ 한다는 성구를 상관적 관계로 이해할 수 있다. 구도자는 이처럼 하늘의 영성우주와 세상의 시공우주의 경계인으로서 “하늘의 뜻을 땅에 이루고” 상천법지(象天法地)하려는 불퇴진의 자세를 가져야 한다.

변찬린의 한평생은 바로 시공우주의 구도자로서만이 아니라 영성(靈聖)우주의 구도자로서 담론의 주제와 행동의 양식이 적극성을 가진다. 사유와 행위가 일치하며 역사의식을 지닌 구도자로서 행보를 보인다. 즉 시공우주와 시공우주의 구도의 경계인으로서 삶을 산다.

빈 공심空心 누가 훔쳐 갈까?
찬 광심光心 누가 엿볼까?
무심無心하면 사귀邪鬼가 침노하지 못하고
무지無知하면 지마知魔가 도전하지 못한다.
천千가지 유위有爲한 뜻을 잊으니 천千가지 도깨비가 사라진다
만萬권의 책을 태우니 만萬가지 귀신이 도망간다.
건곤乾坤밖에 독보獨步하다
광장廣場으로 돌아와 백성과 혁명한다
천외천天外天을 소요하다 역사의 가운데로 돌아와 현실現實에
참여한다.
무량無量히 가비얍게 춤을 추자.
구름 오는 곳에서 왔다가
구름 가는 곳으로 증발한 날에
고요히 바다에 구름 배 닿으리.
바람 부는 곳에서 왔다가
바람 부는 곳으로 해체된 날에
고요히 산에 바람 날개 접으리.
- 변찬린, 『禪, 그 밭에서 주운 이삭들』, 35-36.

스스로 ‘권위’가 된 창조성을 가진 구도자

구도자는 일체의 장애와 일체의 관점을 배우고 버리는 과정을 되풀이하며 도의 정상으로 향한다. 그런 구도심은 불교적 언어로 “머무른 바 없는 마음을 낸다(應無所住 而生其心)”라고 하고, 성서적 언어로 ‘마음이 가난한 자는 천국이 너희 것이라 한다’ 또는 노자의 언어로 ‘위학일익, 위도일손(爲學日益 爲道日損, 배울 때는 나날이 더하고, 도를 행할 때는 나날이 덜어낸다)’고 한다. 바울은 이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빌 3:8)라고 표현한다.

모든 사심을 버리고 원초적 생명성을 간직한 구도자는 스스로 권위가 된다. 구차하게 학연과 지연과 세속의 인연으로 뭉쳐진 ‘중생(衆生)’으로서 자신의 ‘정통과 법통, 권위주의’를 자랑하지 않는다. 심지어 ‘명예와 원로’라는 거추장한 타이틀로 과거의 영욕으로 자신을 변호하거나 특정 종파와 교단과 교파와 교학의 엄호아래 자신의 생명을 구걸하거나 영광을 비추지 않는다. 영원에서 영원으로 가는 하나님의 도정(道程)에 파편화되고 닫힌 서구 신학과 교단신학과 선교신학으로 자신을 정의하지 않으며, 이를 기준으로 남을 정죄하지 않는다. 진리의 자유는 날개돋힌 구도자의 향기이며 구도자는 영원한 하나님의 진리의 반려자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창조성을 본받은 창조적 소수자인 구도자는 특정 제도와 특정 조직과 특정 인물의 추종자나 대변인의 나팔수가 될 리가 없다. 진리와 선함과 아름다움과 성스러움을 지향하는 구도자가 신학의 노예, 과학의 노예, 국가주의와 민족주의의 노예, 전쟁의 노예, 교리와 교파의 노예, 종교의 노예, 선악의 노예, 죄의 노예, 믿음의 노예, 죽음의 노예, 황금만능의 노예, 사심과 사유욕의 노예, 정치의 노예, 자본의 노예, 철학과 사상의 노예, 이데올로기의 노예, 권력의 주구, 율법의 노예, 탐진치의 노예로 살지 않는다. 살 까닭이 없다. 그렇게 산다면 식민과 사대의 노예생활을 하려는 ‘자유로부터 도피’한 허깨비의 명예를 지향하는 그야말로 사이비 향원에 불과할 뿐이다.

영원에서 영원을 지향하는 하나님의 창조하는 심성을 본받아 나날이 개벽하는 구도자는 우주 안에서 우주를 보고 우주 밖에서 우주를 볼 줄 알아야 하며, 종교 안에서 종교를 보고 종교 밖에서 종교를 볼 줄 알아야 안다. 종교와 정치와 사상의 거미줄에 걸린 독선으로 타자를 판단하고 해석하는 배타적이고 아전인수식의 마음이 아니다. 구도자는 죽어가는 것에 대해 생명을 복원하며, 낡아가는 것에 대해 새로움을 불어넣는 시대의 정신으로서 타자의 내재화된 창조적 영성을 발현시킨다. 그러기에 창조적 구도자는 영원의 한 점에 ‘가온찍기’를 하고 온 우주를 매개삼아 ‘빈탕한데 맞혀놀이’ 하는 진리와 자유의 인간이다.

이런 구도의 근본자리에서 공자는 인을 행함에는 스승에게도 양보하지 않는다(當仁不讓於師)라고 했으며, 당 말의 고승인 임제는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라(殺佛殺祖)’라는 했지만, 변찬린은 한걸음 더 나아가 “예수를 만나면 예수를 죽이고, 여래如來를 만나면 여래如來를 죽이고, 공자孔子를 만나면 공자孔子를 죽이고, 노자老子를 만나면 노자老子를 죽여야만 ‘참 인간’으로서의 거듭난다”는 역설적 표현으로 인간혁명을 선언한다.

▲ 상원사 비천상

그의 표현을 빌리면 인면수심(人面獸心)한 가짜인간(假人)이 배우(俳優)의 노릇을 하는 것이 인간 실존의 실체라는 것이다. 그는 인간의 허상을 벗어나 ‘사람다운 사람’의 가능성을 모색하였다. 그는 절대 존재와 대면하여, 성인의 그물에서 벗어나기 위해 끊임없이 구도한다. 엘리어트의 싯구 마냥 ‘우리는 짚으로 싸인 텅 빈 인간’에 불과한 존재라고 그는 한탄했던 것이다. 『선禪, 그 밭에서 주은 이삭들』의 머릿글은 영원에 동참하는 구도자로서 그의 구도의 목표를 명확히 하고 있다.

청자靑瓷빛 저무는 성인聖人의 하늘
바람 부는 저 허공에
보이지 않는 섬세한 거미줄이 있어
학鶴처럼 날아가는 자유혼自由魂을 은밀히 포로한다.
제신諸神의 그물
성인聖人의 거미줄
사상思想의 철조망鐵條網에 한번 걸리면
네 무슨 능력으로 벗어 나겠느뇨?
도연道緣따라 심전心田따라 혈맥血脈따라
예수의 그물에 걸리기도 하고
노자老子의 그물에 걸리기도 하고
석씨釋氏의 그물에 걸리기도 하고
중니仲尼의 그물에 걸리기도 하고
회회回回의 그물에 걸리기도 하고
맑스의 그물에 걸리기도 하고
틀에 굳어지고 모난 뭇 종파宗派의 성직자와 사상思想의
괴뢰傀儡들과 정치의 주구走狗들을 무수히 본다.
새 날 참 자유한 지인至人은
유클리드 기하학幾何學의 정리定理모양 날줄과 씨줄로 정교하게 짜인
종교宗敎의 그물〉〈사상思想의 거미줄〉과 〈정치의 낚시〉를 벗어나
무하유無阿有에 대붕大鵬이 비상하듯
성인聖人의 알을 까고 온 나래로 도약하여
신령한 새 땅에 소요逍遙하시리.
제신諸神과 성인聖人과 사상思想
이 치밀한 도망道網과 영망靈網과 레이다망網에 걸리지 않고
판밖에 먹줄 밖에 탈출脫出한 참 사람은
도道의 정상頂上으로 진화한 지인至人이니라.
- 변찬린, 『禪, 그 밭에서 주운 이삭들』, 13-14

구도자는 절대로 특정 조직, 특정 주의, 특정 파벌의 ‘소유’를 추구하지 않는다. 구도자로서 변찬린은 종교적 사대주의와 사유의 식민주의에 저항한다. 한국인의 종교적 심성은 외래사상의 창조적 수용과 독창적인 한국화와 보편적인 지구성을 추구하며, 우주적 차원에서 발현하는 영성(靈聖)의 마음으로 형성되어 있다. 그는 호마저도 ‘ᄒᆞᆫᄇᆞᆰ’이라고 하며 이를 증명하고자 하는 것이 그의 구도의 일생이다.

이호재 원장(자하원)  injicheo@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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