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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옳으냐”분노를 넘어 사랑으로(요나 3:10-4:11)
이상중 목사(초도제일교회) | 승인 2020.07.21 10:03
▲ 니느웨가 멸망하기를 기다리고 있는 요나 ⓒGetty Image

이 시간 우리 모두에게 주님의 은혜와 평화가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한 주간 평안하셨나요? 평안은 늘 우리와 함께 있습니다. 우리가 평안을 누릴 수 없다면, 그 이유는 사실 스스로가 평안을 누리기를 원치 않았기 때문입니다.

평안 누리기 원치 않았다는 점을 어떻게 발견할 수 있을까요? 내가 통제할 수 없는 나의 밖의 상황들을 통제함으로 평안하기를 원하고, 어떤 문제가 해결됨으로서 평안 얻기를 끊임없이 갈구하는 모습을 봄으로써 사실은 불완전한 평안을 원했음을 확인 할 수 있습니다. 불완전한 평안을 구하지 마시고 이미 우리에게 주어진 완전한 평안을 선택하고 누리시는 저와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얼마 전 서울 시장이 자살을 했습니다. 몇 년간 함께 일했던 여성이 서울 시장으로부터 성추행을 당했다고 경찰에 피소를 했는데요. 피소 사실을 알게 된 다음날 시신으로 발견되었기에 많은 이들이 이 피소 때문에 자살했을 것이라 추측하고 있습니다.

죽음에 대한 좋지 않은 소식을 이 시간에 이야기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서울에서는 시장의 죽음을 애도하고자 서울시장장례로 5일장을 진행했습니다. 그런데 이를 두고 많은 사람들이 둘로 극명하게 나뉘었습니다.

한 쪽에서는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조문을 가지 않겠다! 시장 장은 말도 안 된다. 조문 하지 말아야 한다!” 시장이기는 하였으나 성추행범에게 조문할 필요는 없다는 이유입니다. 그리고 조문을 할 경우 성추행을 당 한 피해자에게 큰 상처를 줄 수 있다는 이유도 있었습니다.

또 다른 한 쪽에서는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조문을 하지 않겠다고 말하거나 장례 중에 성추행 등에 대해 말하는 것은 옳지 않다!” 과실이 있을지라도 시장의 살아온 삶과 공로를 인정해야 한다는 이유입니다.

그런데 이 두 대립되는 집단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조롱과 분노’로 서로에게 칼을 겨누고 있다는 점입니다. 소수의 사람들만이 이 ‘조롱과 분노’라는 공통점에서 벗어나 있습니다. 설득과 이해를 위해 많은 이야기가 쏟아져 나왔지만 반대편에 있는 그 누구도 입장을 바꾸지 않았습니다.

이유가 무엇일까요? 마음의 동기가 조롱과 분노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100% 옳은 말과 정의라 할지라도, 정의가 분노(조롱)와 손잡고 걸으면 그 어떤 사람도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이번 사건만 놓고 보더라도 오히려 반대의 감정만 키우는 현상을 보게 됩니다.

때로 분노가 동기가 되어 사회 시스템이 변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사람은 변하지 않습니다. 이 점을 저와 성도님들이 꼭 기억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역사 속에서 여러 사람들이 법과 국민의 심판에 의해 권력의 자리에서 물러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이 변하던가요? 누군가가 처벌을 받으면 처벌 받은 사람이 변하던가요?

얼마 전 뉴스를 보니 15년 형을 받고 나온 사람이 출소하자마자 몇 개월 만에 똑같은 범죄를 저질러서 다시 감옥으로 들어갔다고 했습니다. 분노로 죄에 대한 형벌을 가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분노로 복수를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런 분노로는 사람이 변하지 않습니다. 범죄자나 불의한 사람이 변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사랑 밖에 없습니다.

어떤 분이 이런 이야기를 하더라구요. “몇 십 년을 옳음에 대해 이야기 했고, 이 과정에서 누군가는 심판을 받았고 또 심판 받는 것을 보았지만 변한 것은 하나도 없는 것 같다.” 맞습니다. 변화될 리가 없습니다. 그 마음에 분노가 있고, 조롱이 동기가 된 일들이 좋은 결과를 가져올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성도 간에 분파로 나뉘어서 사랑으로 하나 되지 않고 있던 고린도교회에 편지 하면서 결론 부분에 이렇게 적어 놓았습니다. 고린도전서 16:14의 말씀입니다. “너희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라.” 고린도전서 13:3절에서도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고 말했습니다. 덧붙인다면 사랑이 비어 있는 선은 타인에게도 유익이 되지 않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온전한 삶의 길로 가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닮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분노가 아니라 사랑으로 주어진 삶을 살라고 말합니다. 비판할 수 있습니다. 화도 낼 수 있습니다. 분노도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동기는 반드시 ‘사랑’이어야 합니다.

오늘 요나서 본문에서, 요나를 대하는 하나님의 태도에서 이 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첫 구절입니다. “10 하나님이 그들이 행한 것 곧 그 악한 길에서 돌이켜 떠난 것을 보시고 하나님이 뜻을 돌이키사 그들에게 내리리라고 말씀하신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니라.”

하나님께서 요나를 부르셨습니다. 그리곤 니느웨 성에 가서 사람들에게 회개에 대해 선포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요나는 니느웨 성에 너무나도 가기 싫었습니다. 자신들의 원수인 앗시리아 제국에 속해있는 성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조국을 침략했던 앗시리아인들이 회개함으로 멸망으로부터 멀어지는 모습을 요나는 보고 싶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우여곡절 끝에 요나는 니느웨 성으로 가서, 백성들에게 회개를 선포했습니다. 그러자 놀랍게도 니느웨에 사는 모든 사람들이 자신들의 죄를 회개하기 시작했고, 하나님은 니느웨 백성들을 긍휼히 여기셔서 심판하지 않으셨습니다.

이런 결과를 보고 요나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분노를 표출합니다. “1 요나가 매우 싫어하고 성내며 2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내가 고국에 있을 때에 이러하겠다고 말씀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므로 내가 빨리 다시스로 도망하였사오니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내가 알았음이니이다.”

요나는 하나님의 용서를 너무나 못마땅하게 생각합니다. 자신이 생각할 때에 니느웨 백성들은 죽어 마땅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마음에 분노가 차기 시작했고 결국 하나님께 이렇게 말합니다. “3 여호와여 원하건대 이제 내 생명을 거두어 가소서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음이니이다 하니.”

얼마나 분했으면, 얼마나 화가 났으면 사는 것보다 죽는 게 더 낫다고 표현할까요? 성도님들도 이런 경험이 있으신가요? 실제로 이런 ‘분노 때문에’ 자기 스스로를 가해하거나, 목숨을 끊는 경우도 종종 뉴스로 보게 됩니다. ‘분노’라는 감정에 휩쓸려 버리면 우리도 어떤 실수를 하게 될지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화를 내고 있는 요나를 보고 이렇게 질문하셨습니다. “4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가 성내는 것이 옳으냐 하시니라.” 이 이후에 진행되는 요나와 하나님의 대화를 보시면 하나님은 요나의 화난 감정에 화로서 응답하고 있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구약성경을 보면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심판하셔서 쓸어버리시는 장면들이 나오는데요. 이런 하나님이시라면 오늘 본문과는 다르게 요나에게 반응하실 수 있지 않으셨을까요? “네가 화를 낸다고? 이런 건방진 녀석이 있나?” 하면서 더 큰 화로 요나를 누를 수도 있으셨습니다.

보통 우리는 상대방이 분노를 드러내면 우리 마음에도 똑같이 분노의 감정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상대방이 분노를 드러내면 자신도 분노를 내서 다투는 상황을 경험하곤 합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렸지만, 세상이 변하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대응합니다. 사실 그대로 반응만 해도 성숙한 일이지만, 예수님은 우리에게 한쪽 뺨을 때리거든 다른 쪽 뺨도 내어주라고 말씀하실 정도로 더 성숙된 모습으로 반응하라고 알려주셨습니다.

분노를 위한 분노, 그리고 분노에는 분노로 응답하기에 아무리 옳은 말일지라도 상대방도 나도 이해하려고 하지 않게 됩니다. 변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요나의 분노에 반응하지 않으셨습니다. 다른 방식으로 요나가 알아들을 수 있도록 말씀하시고 행동하셨습니다. 요나는 니느웨를 바로 떠나지 않고 지켜보기 시작합니다. “5 요나가 성읍에서 나가서 그 성읍 동쪽에 앉아 거기서 자기를 위하여 초막을 짓고 그 성읍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를 보려고 그 그늘 아래에 앉았더라.”

요나가 니느웨를 떠나지 않고 그늘에 앉은 것과 이후에 일어나는 모든 일이 하나님의 계획아래 있음을 오늘 본문은 이야기 합니다. “6 하나님 여호와께서 박넝쿨을 예비하사 요나를 가리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머리를 위하여 그늘이 지게 하며 그의 괴로움을 면하게 하려 하심이었더라 요나가 박넝쿨로 말미암아 크게 기뻐하였더니.”

요나는 앞으로 자신에게 다가 올 일을 모른 채 기뻐합니다. 이 박넝쿨은 요나를 깨닫게 하기 위한 하나님의 도구였습니다. 하나님이 요나에게 자신의 마음을 알도록 하기 위한 도구였습니다.

“7 하나님이 벌레를 예비하사 이튿날 새벽에 그 박넝쿨을 갉아먹게 하시매 시드니라 8 해가 뜰 때에 하나님이 뜨거운 동풍을 예비하셨고 해는 요나의 머리에 쪼이매 요나가 혼미하여 스스로 죽기를 구하여 이르되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으니이다 하니라.”

니느웨 성 일도 요나를 고통스럽게 했는데, 자연 환경마저도 뜻대로 되지 않고 요나를 고통스럽게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요나는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며 죽는 것이 낫겠다고.

이런 상황을 일부러 만들어 놓으신 하나님은 요나에게 질문하십니다. “9 하나님이 요나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 박넝쿨로 말미암아 성내는 것이 어찌 옳으냐 하시니 그가 대답하되 내가 성내어 죽기까지 할지라도 옳으니이다 하니라.”

하나님은 앞에서 하셨던 질문을 다시 하십니다. “네가 성내는 것이 옳으냐?” 그러자 요나는 앞에서와 마찬가지의 똑같은 반응으로 하나님께 대답합니다. “내가 성내어 죽기까지 할지라도 내가 옳다!” 분노에 완전히 잡아 먹혀버린 요나가 아무 말이나 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게 없습니다.

‘분노(화)’는 우리에게 너무나 해롭습니다. 어떤 도움도 되지 않습니다. 스스로의 감정과 삶을 갉아먹고 타인의 감정과 삶도 마찬가지로 갉아먹게 됩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자주 또한 쉽게 분노와 화를 표출하고 삽니다.

“10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가 수고도 아니하였고 재배도 아니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말라 버린 이 박넝쿨을 아꼈거든 11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자가 십이만여 명이요 가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

니느웨 백성들을 향해 성내는 것이 옳지 않은 이유는 그 백성들을 내가 아끼고, 또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좀 이해가 안 되는 장면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이 그 사람들을 사랑하신다고 해서 나도 사랑해야 하는지 질문 해 볼 수 있습니다.

성경은 어떻게 말할까요? 사랑하라고 말합니다. 내가 사랑하니 너도 사랑하라고 말씀하시는 본문입니다. 예수님은 원수도 사랑하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이 말씀 이후에 요나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적혀 있지 않아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이런 태도를 통해 요나가 하나님의 뜻을 알아 변화했을 것이라 저는 확신합니다. 그리고 너를 사랑하기에 ‘나를 향한 너의 분노도 참았고, 너를 살려두었고, 용서했다.’는 것마저도 요나가 깨닫지 않았을까 생각해 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고 죄가 가득한 도시, 좌우 분변도 하지 못하는 십이만명의 사람들과 가축들이 모여 사는 니느웨 성을 하나님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분노하셨다면 언제라도 니느웨 백성들을 쓸어버리실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분노로는 누구도 변화시키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이 사랑의 마음이 있었기에 요나도 변하였고, 니느웨 백성들도 회개의 역사를 통해 변하게 된 줄로 믿습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권면한 말씀을 성도님들께 다시 말씀드립니다.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십시오.” 그러면 우리 자신도 또한 우리와 함께 하는 이들도 반드시 그 사랑으로 물들어 변화될 줄로 믿습니다.

분노 앞에 “네가 성내는 것이 옳으냐?”라는 말씀을 상기합시다. 이 문장을 떠올린다면 우리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선택을 통해 분노를 넘어 사랑으로 타인과 우리 자신을 대할 수 있게 될 줄로 믿습니다. 분노가 아닌 사랑으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온전한 삶에 한 발 더 다가서게 되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이상중 목사(초도제일교회)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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