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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는 평화를, 법은 영원한 태평성대를!(사 32:1-4, 16-18; 계 11:15-19; 눅 22:24-30)성령강림후 여덟째주일(7월26일)
최병학 목사(남부산용호교회) | 승인 2020.07.23 23:29

1. 누가 크냐하는 다툼이 난지라

최근 일련의 사건들과 그에 대한 대응을 보면서 세상이 급변하고 있다는 것을 느낍니다. 이것은 정보의 소통이 기존의 신문과 TV뉴스에서 SNS상의 여러 다양한 소식들로 변화되어 폭 넓게 확장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새로운 정보를 통해, 기성세대와는 전혀 다른 가치관을 가진 이들이 등장했음을 보여줍니다.

지금까지 우리 사회를 지탱해온, 적어도 상식적인 기성세대의 핵심 화두는 ‘민주화’, ‘평화통일’ 그리고 ‘종교평화’와 ‘반일감정’ 등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젊은 세대는 ‘공정’과 ‘젠더 감수성(성인지 감수성)’, 그리고 ‘취업’과 ‘내 집 마련의 꿈’에 더 민감합니다. 그렇습니다. 세상이 변했습니다. 따라서 기성세대가 젊은 세대들에게 꼰대와 같이 “라떼는 말이야~!”라는 말은 단지 소통의 단절을 낳을 뿐입니다. 라테는 커피숍에서나 찾아야 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렇게 세상과 세대가 변했음에도 불구하고 개신교계와 교회는 변하지 않습니다. 아니, 변하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그나마 사회는 갈등하고, 고민하고, 문제를 하나하나 풀어나가려고 하는데, 교회는 귀를 막고, 눈을 감고 삽니다. 전혀 변하지를 않습니다. 아직도 2,000년 전 관습과 17세기 교리에 묶여, 바벨탑과 같은 건물형태에서 21세기 젊은 세대를 19세기의 사고방식으로 가르치려 듭니다.

물론, 이것은 우리가 반드시 수호해야 하는 복음과 진리의 영역에 관한 것이 아닙니다. 교권에 대한 권력욕과 재물욕, 나아가 타자를 혐오하고 증오하는데 앞장서는 배타성과 편협성을 말합니다. 돌이켜보면, 옛날 순수했던 시대는 그래도 순박한 신앙이라도 있었지만, 이제는 노골적으로 탐욕과 혐오를 부추깁니다. 게다가 그 선두에는 목회자들이 있습니다. ‘After 코로나’ 이후, ‘성령의 시대’가 와야 하는데, ‘혐오와 증오의 시대’를 우리 개신교가 만들어 버렸습니다.

놀랍게도 오늘 복음서의 말씀은 예수님 당시,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도 마찬가지였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본문 말씀은 예수께서 유대종교 지도자들과 제자인 가룟 유다의 음모로 잡히시기 전 말씀입니다. 유월절 최후의 만찬을 통해 섬김의 모범을 보여주셨으나, 제자들은 서로 누가 크냐하는 다툼이 일어납니다. 말씀을 볼까요? “또 그들 사이에 그 중 누가 크냐 하는 다툼이 난지라(눅 22:24).” 그러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개역개정 말씀은 25절 말씀이 조금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공동번역으로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 세상의 왕들은 강제로 백성을 다스린다. 그리고 백성들에게 권력을 휘두르는 사람들은 백성의 은인으로 행세한다. 그러나 너희는 그래서는 안 된다. 오히려 너희 중에서 제일 높은 사람은 제일 낮은 사람처럼 처신해야 하고 지배하는 사람은 섬기는 사람처럼 처신해야 한다. 식탁에 앉은 사람과 심부름하는 사람 중에 어느 편이 더 높은 사람이냐? 높은 사람은 식탁에 앉은 사람이 아니냐? 그러나 나는 심부름하는 사람으로 여기에 와 있다.”(눅 22:25-27)

예수님의 통치와 세상 왕들의 통치를 비교하는 것입니다. 세상 왕들은 강제로 백성들을 다스리지만, 예수님은 ‘섬기는 왕’으로, 또한 ‘심부름하는 왕’으로 우리에게 오셨다는 것입니다. 오늘 이 땅의 개신교가 이웃을 섬기고, 또 세상에 소금과 빛의 모범을 보여야 되는데, 이웃을 증오하고 나와 다른 타자를 혐오하는 차별의 대열에 앞장서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 믿는 그리스도인들이 어떤 세상을 꿈꾸어야 하는지가 분명해졌습니다. 구약과 요한계시록의 말씀은 바로 그러한 세상을 보여줍니다. 그것은 차별과 혐오가 없는 정의와 공의의 세상이며,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을 때는 심판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2. 사막은 법이 통하는 곳이 되고 과수원은 정의의 터전이 되리라

구약 본문 말씀은 유다의 제 12대 왕 아하스 통치 때(B.C.735~B.C.715)의 일입니다. 당시에는 중동지역 전체를 정복한 제국 앗시리아(B.C.3000년경~B.C.609)가 있었습니다. 중국 최초의 통일국가인 진나라(秦, B.C.900년경~B.C.206)보다 500년 정도 앞선 것입니다. 바야흐로 메소포타미아 지역과 팔레스틴 전체를 다스리는 거대한 제국이 탄생한 것입니다. 따라서 북이스라엘이나 남유다도 앗시리아의 위협에 놓여 있습니다.

▲ 앗시리아 제국의 영토

이러한 중대한 시기에 남유다는 북왕국 이스라엘의 아합왕과 이세벨의 딸이었던 7대 아달랴 이후, 요아스–아마샤–웃시야–요담으로 이어지는 130여년 간의 선왕들의 통치가 끝나고, 아하스라는 유다 최고의 악한 왕을 만나게 됩니다. 위기의 때에 위기를 극복하는 영웅이 아니라, 위기를 더욱 부추기는 악인이 나타난 것입니다.

아무튼 아하스가 왕위에 올랐을 때, 앗시리아 제국은 팔레스틴으로 쳐들어오기 시작합니다. 따라서 팔레스틴 국가들은 아람왕국과 북이스라엘을 중심으로 반(反)앗시리아 동맹을 맺습니다. 그러나 아하스 왕은 이 동맹에 참여하지 않습니다. 국제 정세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는 아하스는 국내 정치에 있어서도 우상숭배와 인신제사를 허용합니다. 말씀을 찾아볼까요?

“아하스가 왕위에 오를 때에 나이가 이십 세라, 예루살렘에서 십육 년 동안 다스렸으나, 그의 조상 다윗과 같지 아니하여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왕들의 길로 행하여 바알들의 우상을 부어 만들고, 또 힌놈의 아들 골짜기에서 분향하고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쫓아내신 이방 사람들의 가증한 일을 본받아 그의 자녀들을 불사르고, 또 산당과 작은 산 위와 모든 푸른 나무 아래에서 제사를 드리며 분향하니라.”(대하 28:1-4)

그 결과 하나님께서는 유다를 아람 왕의 손에 넘기십니다. 하나님을 버린 까닭입니다.

“그러므로 그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를 아람 왕의 손에 넘기시매, 그들이 쳐서 심히 많은 무리를 사로잡아 다메섹으로 갔으며 또 이스라엘 왕의 손에 넘기시매, 그가 쳐서 크게 살육하였으니, 이는 그의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버렸음이라.”(대하 28:5-6a)

따라서 이사야는 요아스 왕과 같은 세상의 왕이 아니라, 공의와 정의로 통치하실 새로운 왕을 사모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이 바로 그 의미입니다. 말씀을 볼까요? 공동번역 말씀입니다.

“왕이 정의로 나라를 다스리는 날, 고관들이 법대로 나라 일을 보는 날이 온다. 그들은 바람을 막아주고 소나기를 긋게 하여주고 메마른 곳을 적셔주고 타는 땅에 바위처럼 그늘이 되어 주리라. 민정을 살피는 눈이 어두워지지 아니하고 민원을 듣는 귀가 막히지 않으리라. 조급히 결재하지 아니하고 실정을 살피며 민의를 대변하는 혀가 더듬거리지 아니하리라.”(사 32:1-4)

우리가 추구해야 될 세상의 모습이 잘 나와 있습니다. 위정자가 정의로 나라를 다스리는 모습입니다. 만약 법이 정의롭고 올바르다면, 법대로 나라를 다스려야 합니다. 그러나 현재 우리나라 정당들을 보면, 자신들이 만든 법을 자신들이 지키지 않습니다. 기가 막힌 일입니다. 그리고 법의 잣대를 상대방에게만 엄격히 들이대고, 자기편이라고 생각되면 법대로 하지 않고 감싸줍니다. 민정을 살피는 눈이 어두워진 것입니다. 민원을 듣는 귀가 막힌 것입니다. 민의를 대변하는 혀가 더듬거리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나라는 무너집니다. 그렇다면 어떤 세상이 되어야 하나요? 이사야 말씀이 그것을 잘 보여줍니다. 마찬가지로 공동번역으로 보겠습니다.

“사막은 법이 통하는 곳이 되고, 과수원은 정의의 터전이 되리라. 정의는 평화를 가져오고 법은 영원한 태평성대를 이루리라. 나의 백성은 평화스런 보금자리에서, 고요한 분위기에서 마음 놓고 살게 되리라.”(사 32:16-18)

16절 말씀을 개역개정에서는 이렇게 번역합니다. “그 때에 정의가 광야에 거하며 공의가 아름다운 밭에 거하리니” 광야(사막)와 밭(과수원)은 유목과 농경민을 말하는 것입니다. 즉 인간이 사는 모든 곳에서 법이 통하고, 정의가 제대로 서야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정의는 평화를 가져오고, 법은 영원한 태평성대를 이룰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마지막 날에도 마찬가지입니다. 공의와 정의가 바로 서지 않으면 하나님께서는 믿는다고 하는 이들조차도 심판하신다는 말씀입니다. 바로 요한계시록의 말씀입니다.

3. 일곱째 천사가 나팔을 불매

사실 우리는 성서를 통해 ‘바른 교훈’을 얻습니다. 그러나 요한계시록의 말씀은 우리를 미혹할 때가 있습니다. 그 중에 가장 대표적인 것이 요한계시록 6장부터 16장까지 이어지는 ‘일곱인, 일곱 나팔, 일곱 대접’의 재앙입니다.(미주 1) 이 세 재앙은 서로 단절된 것이 아니라, 상호 연결되어 있습니다. 또한 일곱이란 숫자는 천지 창조의 7일과 관련된 것으로서, 7단계로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7단계로 세상을 일관되게 심판하실 것을 보여줍니다. 이것은 창조도 심판도 모두 하나님의 섭리이심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그것을 잘 말해줍니다.

“모든 것이 그분에게서 나오고 그분을 통하여 나오고 그분에게로 돌아가니, 그분에게 영광이 영원히 있습니다. 아멘.”(롬 11:36)

아무튼 요한계시록은, 구약 본문 말씀에 나왔던 유다가 앗시리아의 침략 위기에 놓여있었던 것처럼, 기원후 1세기 말경, 로마제국의 박해 위험에 놓여 있는 소아시아 일곱 교회에 보내는 편지입니다. 물론 궁극적으로는 사단과 세상의 시련에 직면한 모든 교회와 성도들에게 주어진 교훈과 위로의 편지, 메시지이기도 합니다.

먼저 사도 요한은 환상 가운데,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님을 통해 일곱 교회에 예언을 선포합니다(계 2-3장). 그리고 하늘 보좌와 그 보좌 위에 앉으신 이(계 4:2)를 통해 하늘나라의 모습을 봅니다. 이후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손에 있는 봉인된 두루마리를 통하여 일곱인, 일곱 나팔, 일곱 대접의 재앙이 순차적으로 시작됩니다.

사실 인(印)은 왕이 도장을 찍는 것입니다. 당시 로마에서 관리자나 통치자, 혹은 어떤 권한이 있는 자가 사건과 논쟁의 결론으로 인을 쳐서 결정합니다. 따라서 요한계시록은 일곱인을 통해 이제 하나님의 뜻이 결정되었음을 알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팔은 전투나 어떤 새로운 일의 시작을 알리기 위해 상대편을 의식해서 부는 것입니다. 대접은 말 그대로 물을 담아 놓는 것으로 대접을 붓는다는 말은 심판의 물이(불이라고 할까요?)이 쏟아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인과 나팔, 대접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바로 ‘구원’과 ‘전쟁’, 그리고 ‘심판’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에게 구원의 인을 치고, 나팔을 통해 하나님께서 사단의 세력과 영적인 전쟁을 선포하며, 마침내 진노의 대접은 사단과 가짜들과 외식하는 이들에게 붓는 심판을 의미합니다. 정리를 해 볼까요? 인(=구원), 나팔(=전쟁), 대접(=심판)으로 이해하시면 좋을 듯합니다.

▲ 왼쪽 위부터 반시계 방향으로 일곱인, 일곱 나팔, 일곱 대접 재앙

이 모든 재앙들이 칠년 동안 이 땅에 임하는데, 칠년의 전반부 즉 ‘전(前)삼년 반’에는 여섯 인의 재앙이 진행되고, ‘후(後)삼년 반’에는 나팔재앙과 대접재앙이 진행됩니다. 그리고 ‘전삼년 반’과 ‘후삼년 반’ 사이에는 네 천사가 사방의 모든 바람을 붙잡아 불지 못하게 하고(계 7:1), 하늘이 반시간쯤 고요한 시간(계 8:1)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 일곱째 인을 떼고 일곱 나팔재앙과 일곱 대접심판이 이어지는 것입니다. 시간적인 순서를 <표1>로 한번 그려볼까요?(미주 2)

그렇다면 일곱째 인과 일곱 나팔재앙, 그리고 일곱 대접심판의 내용과 상징은 무엇일까요?  <표2>로 정리해 보겠습니다.

자세히 보시면, 마지막 일곱 번째 인과 나팔 재앙 때, 다음 재앙의 첫 번째가 연결이 되죠? 일곱 나팔 재앙은 하늘이 ‘반시간쯤 고요한 시간(계 8:1)’ 이후에 시작되는 대환난 후반부의 시작입니다. 마지막 일곱 번째 나팔을 통해, 일곱 대접의 심판(계 16장)이 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 말씀은 일곱 대접 재앙이 일어나기 전의 내용입니다. 심판 전에 하나님 앞에 있던 이십사 장로가 하나님의 구원을 감사하는 내용입니다. 말씀을 볼까요?

“일곱째 천사가 나팔을 불매, 하늘에 큰 음성들이 나서 이르되,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의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 그가 세세토록 왕 노릇 하시리로다 하니, 하나님 앞에서 자기 보좌에 앉아 있던 이십사 장로가 엎드려 얼굴을 땅에 대고 하나님께 경배하여 이르되, 감사하옵나니 옛적에도 계셨고 지금도 계신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여 친히 큰 권능을 잡으시고 왕 노릇 하시도다.” (계 11:15-17)

4. 이십사 장로의 반대자인 에드노스

여기서 이십사 장로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받은 모든 시대, 모든 성도들의 대표를 가리킵니다. 구약에 다윗 왕이 아론 자손들을 24반열로 나누어 성전의 일을 다스리는 자와 하나님의 일을 다스리는 자로 세웠듯이, 24는 성전과 하나님의 일을 하는 이들의 대표 숫자가 되는 것입니다. 역대기 말씀을 볼까요?

“아론 자손의 계열들이 이러하니라. 아론의 아들들은 나답과 아비후와 엘르아살과 이다말이라. 나답과 아비후가 그들의 아버지보다 먼저 죽고 그들에게 아들이 없으므로 엘르아살과 이다말이 제사장의 직분을 행하였더라. 다윗이 엘르아살의 자손 사독과 이다말의 자손 아히멜렉과 더불어 그들을 나누어 각각 그 섬기는 직무를 맡겼는데 엘르아살의 자손 중에 우두머리가 이다말의 자손보다 많으므로 나눈 것이 이러하니, 엘르아살 자손의 우두머리가 열여섯 명이요, 이다말 자손은 그 조상들의 가문을 따라 여덟 명이라. 이에 제비 뽑아 피차에 차등이 없이 나누었으니, 이는 성전의 일을 다스리는 자와 하나님의 일을 다스리는 자가 엘르아살의 자손 중에도 있고, 이다말의 자손 중에도 있음이라.”(역상 24:3-5)

이것은 또한 구약의 12지파와 신약의 12사도를 더한 것으로 신구약의 모든 지도자를 가리키는 말이기도 합니다. 아무튼 중요한 것은 구원(=인)과 전쟁(=전쟁), 그리고 심판(=대접) 사이에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십사 장로들의 이러한 감사 찬양을 반대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감사하지 않죠? 전능하신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이들은 세상 왕의 권세를 의지하는 자들입니다. 세상의 권력, 부귀, 영화, 부동산, 재물을 사랑하는 자들입니다. 따라서 다음 말씀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심판할 것이며, 동시에 주의 이름을 경외하는 자들에게는 상을 주실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공동번역으로 볼까요?

“‘이방인(ἔθνος)들이 이것에 분개하였으나, 오히려 그들이 주님의 분노를 샀으며, 때는 와서 죽은 자들은 심판을 받고, 주님의 종 예언자들과 성도들과 대소를 막론하고 주님을 공경하는 자들은 상을 받고 땅을 어지럽히던 자들은 망하게 되었습니다.’하고 말하였습니다. 그러자 하늘에 있는 하느님의 성전이 열리고 성전 안에 있는 하느님의 계약의 궤가 나타났으며 번개가 치고 요란한 소리가 들리고 천둥과 지진이 일어나고 큰 우박이 쏟아졌습니다.”(계 11:18-19)
 
이렇게 일곱 대접의 재앙이 이방인들에게 시작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이방인은 ‘에드노스’입니다. ‘에도’라는 말, 곧 ‘전례대로 하다, 규례대로 하다’는 동사에서 유래되었습니다. 여기서 에토스(ἔθος), 곧 우리가 잘 아는 윤리라는 영어 ‘ethics’가 유래되었는데, 관습이나 관례를 의미합니다. 그러나 성서의 맥락에서는 ‘조상들의 전례’, 나아가 ‘모세가 우리에게 전하여 준 규례’를 뜻합니다.

조금 조심스럽지만, 최근 몇 주 동안 주어진 세 본문 말씀의 맥락에서, 만약 ‘모세가 전해준 규례와 관습’을 따르던 자들을 에드노스로 본다면, 요한계시록 11장 18절의 말씀은 유대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통치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말이 됩니다. 곧 우리말 그대로 이스라엘 백성이 아닌 ‘이방인’들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잘 믿는다하지만 실상은 그 안에 나와 다른 사람을 혐오하고 증오하는 그리스도인들을 뜻하는 말이 되기도 합니다.

오늘 구약성서에서는 그 이가 누구로 나옵니까? 바로 유다의 왕인 아하스 왕으로 나옵니다. 오늘날의 언어로 바꾸면 어떻게 될까요? 이들은 종교적으로 자신들의 규례와 전례대로 종교 생활을 하지만, 영과 진리로 주님을 공경하지 않습니다. 교회는 열심히 다니지만, 또한 교회 생활은 열심히 하지만, 참된 신앙과 그 신앙에 따른 실천이 없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이런 자들은 심판을 받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5. 정의는 평화를, 법은 영원한 태평성대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말씀을 보면, 위기의 때에 하나님은 위기를 구할 지도자로 사람을 세우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심판을 행하십니다. 지금 개신교의 위기는 코로나 바이러스가 만든 위기가 아닙니다. ‘포괄적 차별금지법’을 반대하지 못해서 생기는 위기가 아닙니다. 또한 정부가 코로나-19 확산을 방지하기 위해 교회 내 소규모 모임을 금지해서 생긴 위기도 아닙니다. 지금의 위기는 바로 이웃을 사랑하지 않고, 배려하지 않고, 타자를 혐오하는 우리 개신교인들이 만든 위기입니다. 따라서 이 위기 이후에 반드시 하나님의 심판이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심판의 그날이 오기 까지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그날이 오기 까지 우리는 예수님과 더불어 모든 시험에 함께 하여야 합니다. 정의와 공의를 위한 길에 두려워하지 말고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오늘 개신교회의 미래는 ‘네가 크냐, 내가 크냐?’하는 다툼이 아니라, 또한 나와 다른 타자를 혐오하고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을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로 어떻게 바꿔나가야 하는지에 달려있습니다.

정의는 평화를 가져다줍니다. 그리고 올바른 법은 영원한 태평성대를 만들어 줍니다. ‘After 코로나’ 시대는 ‘정의와 평화의 시대’가 되어야 하는데, ‘혐오와 증오의 시대’가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도 정의와 평화를 여는 오늘 우리들에게 이렇게 용기를 주십니다. 그 사명을 잘 감당하면, 심판의 자리가 아니라, 주님과 함께 먹고 마시는 영원한 통치의 자리를 주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나의 모든 시험 중에 항상 나와 함께 한 자들인즉, 내 아버지께서 나라를 내게 맡기신 것 같이 나도 너희에게 맡겨, 너희로 내 나라에 있어 내 상에서 먹고 마시며 또는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다스리게 하려 하노라.”(눅 22:28-30)

최병학 목사(남부산용호교회)  hak-9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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