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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공동체가 가져야 할 첫 번째 원칙원수에서 화목으로(골로새서 1:21-23)
이성훈 목사(명일한움교회) | 승인 2020.07.26 15:49
▲ 그리스도의 십자가 위에 세워진 교회는 사랑과 정의의 원칙이 첫 번째가 되어야 한다. ⓒGetty Image
21 전에 악한 행실로 멀리 떠나 마음으로 원수가 되었던 너희를 22 이제는 그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화목하게 하사 너희를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그 앞에 세우고자 하셨으니 23 만일 너희가 믿음에 거하고 터 위에 굳게 서서 너희 들은 바 복음의 소망에서 흔들리지 아니하면 그리하리라 이 복음은 천하 만민에게 전파된 바요 나 바울은 이 복음의 일꾼이 되었노라

오늘은 골로새서의 말씀으로 교회 공동체에 대해서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교회의 공동체는 무엇을 지향해야 하는지를 함께 나눠보려고 합니다.

골로새서는 사도 바울이 직접 기록한 진정 서신에 속하지 않습니다. 대부분의 학자는 로마서, 고린도전서, 후서, 갈라디아서, 빌립보서, 데살로니가전서, 빌레몬서, 이렇게 7권의 편지만이 사도 바울이 직접 기록한 서신이라고 말합니다. 사도 바울이 기록했다고 말하고 있는 13권의 편지 중 나머지 6권은 사도 바울의 이름을 빌린 위서라고 말합니다.

과격한 이론을 제시하는 분들은 6권의 위서가 사도 바울의 사상을 왜곡시켰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이는 마치 사도 바울이 예수님의 참된 복음을 교회적으로 왜곡시켰다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하지만 저는 꼭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교회라는 집단이 생겨나면서 예수님의 말씀이 사도 바울을 통해 의미가 확장되었고, 이는 교회의 시대에 그 뒤를 잇는 이들에 의해서 의미가 변해갔을 뿐이라고 봅니다.

어떻게 본다면 의미가 변하기는 했으니까 왜곡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저는 예수님 이후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을 해석하는 흐름으로 읽고 싶습니다. 만약 그 의미의 변화가 일어나는 흐름 속에서 어떤 특정 집단의 이익을 위한 변화가 있었다면, 우리는 그 점을 분명히 인식하고 지양할 필요는 있겠지만, 그렇다고 흐름 자체가 무의미하다고 보고 싶지는 않습니다.

십자가의 의미

전에도 몇 번 말씀드렸고 최근에도 말씀드린 적이 있었는데, 예수님의 십자가는 사람들이 지금까지 행해 온 죄를 세상에 드러내는 행위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각자의 십자가를 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십자가는 어떤 사상이라기보다 행동 원칙에 가깝습니다. 이를 구약성경의 말씀, 특히 율법과 연결시켜 사상적으로 정립한 사람이 사도 바울입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의 삶이 율법의 문자를 철저하게 지켜야 한다는 바리새인과 달랐다는 점과 그럼에도 예수님께서 율법을 파괴하고 있지 않다는 점을 통해 십자가의 의미를 정리한 듯합니다.

문자주의적 율법 준수는 사람들을 죄인과 악인, 구원받을 수 있는 존재와 절대 구원받지 못할 존재로 나누고 있었으며, 이것이 오히려 하나님의 뜻에서 어긋나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화목제에 비유합니다. 사람들 사이의 막힌 담을 허물고 화해가 시작된 사건이라고 해석합니다. 이 사건이 있었기에 이방인들도 구원의 대상이 될 수 있었고, 그는 이방인들을 향해 나아갔습니다.

본래 화목제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화목을 위한 제사가 아닙니다. 사람들 간의 화목을 위한 제사입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하는 대상은 이방인이었습니다. 구원의 기회조차 없던 이들에게 구원의 길이 열렸다는 점에서 사도 바울은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다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이런 의미는 로마서 5장과 고린도후서 5장에서 잘 나타납니다. 어쩌면 사도 바울이 이방인 선교를 시작하면서 십자가의 의미를 점차 하나님과의 관계에만 집중시켰는지도 모릅니다. 구원의 기회조차 없던 죄인에게 주어진 은혜이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의 편지들을 계속 읽다보면, 십자가는 하나님과의 관계로 한정되어 가고, 사람 사이의 관계에 관해서는 성도들이 지켜야 할 규정을 따로 만드는 듯한 모습도 보입니다.

오늘 골로새서의 말씀에서도 이러한 모습, 십자가 사상이 교회 안에서 어떻게 변해갔는지를 볼 수 있습니다. 골로새서에 나타난 십자가의 의미는 어쩌면 우리가 지금까지 교회에서 들어왔던, 가장 익숙한 내용입니다.

20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화평을 이루셨고,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하게 됨을 기뻐하신다고 말합니다. 이후에 이어지는 말씀들도 모두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악한 행실로 하나님과 마음으로 원수가 되었던 우리가 이제 거룩한 존재가 되었다는 말씀으로 이어집니다.

여기에는 더 이상 사람 사이의 화목을 위한 십자가는 언급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골로새서가 성도들 사이의 관계를 언급하지 않는다는 것은 아닙니다. 골로새서 3장은 사람의 관계 속에서 일어나는 악행과 차별을 금지하고 있습니다. 다만 이는 십자가 자체와는 분리된 그리스도인의 행동 강령으로 발전해나가고 있고, 십자가의 의미는 하나님과의 관계에만 집중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러한 의미의 변화가 지금 교회에서 말하는 십자가를 통해 우리의 죄를 모두 씻었다는 속죄제의 의미로까지 나아갔다고 봅니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십자가 사건은 사람과 사람의 관계에 중심이 있었습니다.

말씀의 의미를 바꿔 읽기

저는 지금 시대에 십자가의 의미를 다시금 사람과 사람의 관계로 읽어갈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그런 맥락에서 본문을 재해석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방인에게 차별 없는 구원이 내려진다는 사상은 사도 바울의 시대나 초대교회 시대에 있어서 상당히 급진적이고 과격할 정도의 사상입니다. 그렇기에 이들은 이를 더욱 강조해서 말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지금 시대에 있어서 그리스도교의 중심은 유대인이 아닙니다. 우리를 포함하여 과거 이방인이라 불렸던 이들이 그리스도교의 중심입니다. 이제 이방인이 구원받을 수 있게 되었음을 기뻐하며 감사하는 신앙을 넘어서야 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그렇기에 사도 바울이나 초대교회가 말했던 하나님과의 화목이라는 본문의 말씀을 사람들 간의 화목으로 바꿔서 읽을 필요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읽어나가는 말씀은 예수님께서 삶으로 보여주셨던 모습과 같은 선상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려운 작업은 아닙니다. 그저 하나님을 사람으로 바꿔 생각하기만 하면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으로 인해, 사람은 사람과 화목하게 되었고, 전에는 악한 행동으로 인해 서로 마음으로 적이 되었던 우리가 이제는 화목을 이루어 거룩한 자들이 되었습니다.

저는 이것이 교회 공동체가 가져야 할 첫 번째 원칙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악한 행동에서 벗어나야 함은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입니다. 다음으로 마음으로 서로 적이 되지 말아야 합니다. 마음으로 미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거기에 화목이 있습니다.

교회 공동체는 서로가 미워함이 없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지금도 어떤 교회들은 내부적인 문제로 인해 서로 다투고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다툼이 일어난 순간, 서로를 향한 미움이 일어난 순간, 그곳은 교회가 아닙니다. 그곳에는 화목이 없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도 없습니다.

물론 교회는 친목 단체가 아니기 때문에 교회에서 성도님들 간에 여러 가지로 서로 성향이 안 맞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서로를 미워해서는 안 됩니다. 나와 정치 성향이 다르다고 해서, 나와 사회의 흐름을 판단하는 바가 다르다고 해서, 나와 가치관이 다르다고 해서 그 사람을 미워해서는 안 됩니다. 교회 공동체는 오직 서로를 향한 미움을 버리고 화목을 추구하는 집단이어야 합니다.

악행을 버리고 화목으로

어쩌면 오늘 전해드린 말씀은 성도님들이라면 너무나 당연하게 생각하실지도 모르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당연하다고 생각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때로 서로를 미워할 때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항상 이런 마음이 들지 않도록 경계하며 서로를 생각하며 서로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당부 사항으로 전하고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최근 교회들의 모습을 보면, 성경 말씀의 일부분만 과도하게 집착하는 듯 합니다. 오늘 말씀은 화목해야 한다는 말씀이었는데, 그 전에 단서가 있습니다. 악한 행실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그런데 화목에만 집중해서 그런 것인지, 목사가 범죄를 저질러도 이에 대해 책임져야 한다는 이야기보다 무턱대고 용서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우리 목사님이 성범죄를 저질렀다고 해도 우리는 괜찮으니까 면직시키면 안 된다고 말하는 교회들도 있습니다. 서로 화목해야 안다는 말씀에만 집중해서 그런 것인지, 악행을 버려야 한다는 말씀을 잊은 듯합니다.

악한 행위를 범한 사람과 참으로 화목하는 길은 그가 자신의 잘못을 책임지고 다시는 그런 일을 범하지 않도록 이끄는 일입니다. 무턱대고 용서하는게 화목이 아닙니다. 책임지지 않고 회개하지 않은 악행은 악이 그대로 남아있기 때문에, 이곳에서 이루어지는 화목은 악인들의 화목일 뿐입니다.

우리는 악한 행실로부터 벗어나 화목을 이루어야 합니다. 마음 속에서 서로를 적으로 생각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항상 서로를 걱정하고 염려하며 위로하고 격려하는 존재들이어야 합니다. 기쁨은 진정으로 함께 즐거워할 수 있는 존재들이어야 합니다. 그 모임이 바로 예수님께서 이루고자 하셨던 공동체입니다.

서로 사랑하는 데까지 나아간다면 더욱 좋겠지만, 그에 앞서서 서로를 향한 미움이 전혀 없는 공동체, 항상 화목함으로 가득한 공동체를 이루어갔으면 합니다. 우리가 교회에 붙여놓은 십자가는 우리 화목의 증표입니다. 그 마음을 이어가며 세상에도 화목을 전하는 우리 교회가 되길 원합니다.

이성훈 목사(명일한움교회)  joey810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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