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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을 산다는 것은정선치(正善治, 미가서 6:6-8)
홍인식 목사 | 승인 2020.07.27 18:42
▲ 코로나바이러스 시대, 사회와 종교는 많은 변화의 요구에 직면해 있다. ⓒGetty Image

탈(脫)인간-탈(脫)성장-탈(脫)서구-탈(脫)종교

요즘 코로나 바이러스에 대해서 말하지 않는 곳이 없습니다. 모든 삶의 분야에서 코로나 바이러스는 한 마디로 대세를 이루고 있습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코로나 바이러스가 가져온 파장이 온 인류의 삶을 뒤집어 놓았기 때문입니다.

일반적으로는 우리들은 인간의 역사를 말할 때 예수님의 탄생을 기준으로 기원전과 기원후로 나누곤 하였습니다. 그 후 16세기 들어서 루터의 종교개혁은 세계를 중세세계와 근대세계로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1989년 베를린 장벽의 붕괴는 시장을 중심으로 한 포스트모던의 사회로 인류 역사를 구분하기도 합니다.

이번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는 또 다시 인류의 역사를 코로나 이전과 이후로 나누게 될 것이라는 것이 거의 모든 세계의 석학들의 의견입니다. 그러기에 당분간 코로나바이러스 사태를 무시하고 우리의 삶을 이야기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 생활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지난 주 어떤 모임에서 이정배 전 감리교 신학대학 교수의 강연을 들을 수 있는 기회를 가졌습니다. “코로나 바이러스 이전과 이후를 말한다.”라는 제목의 강연이었습니다. 그는 코로나 바이러스가 가져올 파장을 4가지 현상으로 정리하여 말합니다. 4가지 탈(脫)-4 가지 벗어남을 주장합니다.

첫째는 탈(脫)인간입니다. 인간 중심의 세계관에서 우주 중심의 세계관으로 변화되어야 함을 말합니다. 이것은 진정한 인간이 누구인가라는 질문으로 연결되어 집니다. 지금까지 서구(기독교)세계관은 인간의 만물의 영장(靈長), 즉 영묘한 힘을 가진 우두머리라는 뜻입니다.

인간은 우주 자연세계와는 구분된 존재로 생각했습니다. 코로나바이러스는 인간도 자연의 일부임을 깨닫게 해주었을 뿐만 아니라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한 재앙이 결국 “인간은 만물의 우두머리”라는 생각의 결과였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제 진정한 인간, 특히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존재로서 인간이 누구인가를 심각하게 고민해야 합니다.

두 번째는 탈(脫)성장입니다. 현대에 있어서 우리에게 우상은 성장입니다. 경제입니다. 그래서 코로나 극복에 대해서 말하는 것도 경제회복이 우선순위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교회에 있어서는 예배 인원의 회복이라고 말씀 드릴 수 있을 것입니다. 코로나 바이러스는 우리에게 ‘성장’우상에서 벗어날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세 번째는 탈(脫)서구입니다. 우리에게 지금까지 유럽과 미국이 거의 모든 가치의 척도였습니다. 유럽 혹은 미국의 기준과 맞거나 엇비슷하면 우리는 그것을 진리하고 생각하고 받아들였습니다. 우리의 일상생활에서도 그랬고 또 기독교 믿음생활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유럽이나 미국에서 발생한 사상 혹은 생각이면 거부감 없이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한국 혹은 아시아에서 발생한 사상 혹은 생각에는 이상하게 거부감이 생깁니다.

그런데 이번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는 유럽이나 미국을 기준으로 삼았던 것이 허무할 정도로 허약한 것임이 증명되었습니다. 따라서 우리의 일상생활도 그렇고 기독교 믿음 생활에서도 한국 혹은 아시아의 가치가 중요하게 여겨질 것입니다.

네 번째는 탈(脫)종교입니다. 이번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에서 종교 특히 제도종교로서 가장 큰 힘을 발휘했던 기독교는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사회로부터 의심의 눈초리를 받기만 했습니다. 아무리 변호하고 방어해도 소용없었습니다.

더욱이 현장 예배로 모이지 못하고 인터넷을 통한 온라인 예배를 경험하게 된 사람들에게는 새로운 세계가 열리게 되었습니다. 제도 종교의 종말의 서곡을 알리는 것이 이번 코로나 바이러스가 가져온 중요한 결과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제 진지하게 신앙을 갖고 산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처음부터 새롭게 생각해 보아야 할 시기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1. 사회와 분리된 채 오직 개인의 구원과 번영에만 몰두하는 기독교 
2. 영성적인 삶과 세속의 가치를 구분하지 못하고 오직 성장의 틀에만 갇혀 있는 기독교
3. 오직 유럽과 미국에만 의존하며 우리 민족의 전통과 아시아의 가치는 외면하는 한국 기독교
4. 제도로서의 기독교, 경직된 교리에 기반 한 기독교
5. 합리적 이성을 배제한 비전문적인 기독교

이에 대하여 반성하고 새로운 길을 모색해야 할 기회입니다. 이런 기회를 놓치고 새롭게 전개되는 인류의 역사를 제대로 바라보지 못한다면 기독교의 미래는 결코 밝지 않을 것입니다. 위에 열거한 여러 내용들은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를 맞이하고 있는 오늘의 한국 기독교인들이 고민해 보아야 할 중요한 사항들일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고민과 갈등은 우리들만이 하는 것은 아닙니다.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서도 이 같은 고민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이 오늘의 본문이 우리에게 전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미가는 누구인가?

미가는 이사야와 같은 시대의 사람입니다. 이사야와 마찬가지로 미가도 유대에서 활동하였습니다. 미가의 활동 시기는 주전 750~690 년경으로 보입니다.

이사야의 예언에서 당시의 수도의 정치 상황에 대한 정확한 지식을 엿 볼 수 있는 것과는 달리 미가의 예언에서는 보잘 것 없는 사람들의 어려운 상황에 대한 정확힌 지식이 드러납니다.

미가가 우선적으로 씨름한 것은 참을 수 없이 불의한 사회 상황이었습니다. 그와 아울러 미가는 가식으로 변질해 버린 예배에 대하여 준엄하게 비판합니다. 미가는 사정없이 예루살렘과 성전의 종말을 예고합니다.

주(主)가 진정 바라시는 것은?

미가를 비롯한 당시의 양심적인 사람들은 불의한 사회를 살아가면서 신앙을 갖는 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가에 깊은 회의를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회의는 ‘하나님에게 나아 갈 때 무엇을 가지고 나갈까’ 라는 내용의 질문을 나타납니다.

거꾸로 말하면 질문은 과연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요구하고 바라시는 것은 무엇일까라는 질문입니다.  다르게 말하면 하나님을 공경하고 경배하는 신앙을 갖는 다는 것은 어떤 삶을 요구하는가라는 질문입니다.

그들은 하나님 앞에 나아오고자 하는 사람(예배자)은 ‘무엇을 하나님께 바칠 수 있을 까’를 고민하고 있습니다. 이 고민은 매우 자연스러운 고민입니다. 당시의 사람들에게 신의 존재는 인간의 운명을 좌우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는 존재입니다.

그리고 신을 만족 시킬 수 있느냐 하는 것은 인간의 생사화복이 달려 있는 매우 중대한 문제입니다.  따라서 그들은 늘 신에게 무엇을 바치면 신은 만족해하고 그 보상으로 복을 줄 것인가를 고민합니다.

오늘 하나님을 믿고 예배를 드리는 우리들도 마찬가지의 고민을 가지고 있습니다. 미가 서에서 예배자는 몇 가지 바칠 내용을 상정합니다. “번제물로 바칠 일 년 된 송아지. 수천 마리의 양이나, 수만의 강줄기를 채울 올리브기름. 맏아들. 몸의 열매”(6~7절)등입니다.

이러한 모든 내용은 지금까지 그들이 해왔던 일들입니다. 그들에게는 모두 익숙한 내용들입니다. 제도적이고 교리적인 종교 안에서 믿는 사람들이 지금까지 해 왔던 일들입니다. 전혀 잘못된 것들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그들 마음속에는 무엇인가 채워지지 않는 것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그들이 바치는 제물을 받지 않는다고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절규합니다. “주님, 도대체 우리가 어떻게 해야 만족하시겠습니까?”

이에 대하여 예언자는 한 마디로 답변합니다. 이런 것들은 이방신들이 구하는 것들이라고 답변합니다. 하나님은 아무 것도 부족한 것이 없는 존재라고 말합니다. 예언자는 아직도 제물(기존의 종교예식)을 바치면 하나님이 만족하고 그들에게 복을 내려 주실 것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들에게 그렇지 않음을 강조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진정으로 바라시는 것은 무엇일까요? 우리들의 희생입니까? 코로나를 무릅쓰고 감염의 위험이 있더라도 그리고 설사 목숨을 잃더라도 순교의 각오로 나오는 것을 바라실까요? 우리들의 끝없는 헌신과 헌물일까요? 도대체 하나님은 무엇을 바라시면서 우리를 구원해 주시고 우리를 자신의 자녀로 삼으신 것일까요?

미가는 이에 대하여 매우 경쾌한 답변을 준다.

“너 사람아, 무엇이 착한 일인지를 주님께서 이미 말씀하셨다. 주님께서 너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도 이미 말씀하셨다. 오로지 공의를 실천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8절)

신앙과 바르게살기

코로나 바이러스는 우리로 하여금 진정한 종교는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만들었습니다. 진정으로 예수님을 따라 살아가는 의미가 무엇인가를 진지하게 성찰하게 만듭니다.

그런데 우리가 신앙을 생각할 때 놓치지 않아야 할 원칙이 있습니다. 신앙은 신앙 자체를 위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신앙은 나의 내면의 삶의 깊이를 도모하기 위하여 갖는 것도 아닙니다.

신앙은 하나님을 기쁘게 하기 위하여 갖는 것도 아닙니다. 신앙은 오직 우리의 삶을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면서 그 분의 뜻을 따라 살아가기 위해 갖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신앙의 진수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바르게 살아감입니다. 흔히 사람들은 예배, 헌물과 금식을 통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하곤 합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제물을 기뻐하실 거라고 생각하고 살진 짐승을 바치고, 절기마다 제사를 드리는데 열심을 다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정작 헛된 제물을 다시는 가져 오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들이 마음 다해 드리는 제사가 싫다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손에 피가 가득하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사1:11-15).

금식도 그렇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은 머리를 갈대처럼 숙이고, 굵은 베와 재를 깔고 앉아 금식을 했습니다. 그러나 금식을 하면서도 자기들의 향락을 찾고, 노동을 착취하고, 서로 다투었습니다. 한 마디로 바르게 살지 못했습니다. 그 모습을 본 이사야 예언자는 그런 금식은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는다고 비판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이 기뻐하는 금식은

부당한 결박을 풀어 주는 것
멍에의 줄을 끌러 주는 것
압제받는 사람을 놓아 주는 것, 모든 멍에를 꺾어 버리는 것
굶주린 사람에게 먹 거리를 나누어 주는 것
떠도는 불쌍한 사람을 집에 맞아들이는 것
헐벗은 사람을 보았을 때에 그에게 옷을 입혀 주는 것
골육을 피하여 숨지 않는 것’(사58:3-7)

이라고 역설합니다.

여기서도 중요한 것은 바르게 사는 일입니다. 어떻게 보면 우리가 일상적으로 종교적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일들이 오히려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것임을 보게 됩니다. 의외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은 우리 모두를 당황하게 만듭니다.

미가 선지자도 이사야처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 무엇인가를 백성들에게 말합니다. ‘하나님은 오직 공의를 실천하고, 자비를 사랑하며, 겸손히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미6:6-8)을 기뻐하신다고 말합니다.  정말 의외입니다. 공의 실천, 자비 사랑, 하나님과 겸손한 동행! 이런 것들은 교회 생활과는 큰 관련이 없는 것 같지 않습니까?

우리에게 신앙생활은 성경을 통독하고 성경 이야기에 능통하고 교회 빠지지 않고 예배 잘 드리고 십일조를 비롯한 헌금 꼬박꼬박 드리고 주일날에 하루 종일 교회에서 이런 저런 일을 하면서 지내는 것이 아니었습니까? 

그런데 미가 예언자는 이런 이야기는 전혀 하지 않고 일상생활 속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합니다. 그것이 믿는 것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사야도 그렇고 미가 예언자도 동일합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을 섬기고 그 분을 믿고 살아가는 것은 성전 안에 머물면서 제사 등의 종교적 행위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전을 뛰어 넘어 각자가 살고 있는 일상적인 삶에서 하나님의 뜻을 행하며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무엇입니까? 바르게 사는 것입니다. 그것은 공의를 실천하고 자비를 사랑하며 하나님과 겸손하게 동행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른 삶입니다.

정선치(正善治)

도덕경에서 노자는 물의 특징 중의 하나를 정선치(正善治) 라고 합니다. 바를 정(正), 착할 선(善) 다스릴 치(治)입니다. ‘물은 도(道)에 가까운데 도를 깨친 사람들은 다스릴 때 바르게 실행한다.’라는 의미입니다. 물은 성실하고 정의롭게 흐르기 때문에 도(道, 진리)에 가깝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바르게 사는 것이라고 표현해도 무리가 없을 것입니다. 도(道)를 깨우친 사람들은 결국에 바른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거꾸로 말하면 바른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도(道)를 깨우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노자는 도(道)를 깨우친 사람들이 다스리는 사회가 가장 이상적인 사회라고 말합니다. 바르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통치 할 때 진정한 평화의 세계가 이루어진다고 말합니다.

太上下知有之 (태상하지유지) 其次親而譽之  (기차친이예지)
其次畏之 (기차외지) 其次侮之 (기차모지)
信不足 焉有不信焉 (신부족 언유불신언) 揂兮 其貴言 (추혜 기귀언)
功成事遂 (공성사수) 百姓皆謂我自然 (백성개위아자연)

최고의 정치는
백성들이 통치자가 존재한다는 것만을 안다.
그 다음은 백성들이 통치자를 친애하고 존경한다.
그 다음은 백성들이 통치자를 두려워하며, 그 다음은 백성들이 통치자를 업신여긴다.            
믿음이 부족하여 불신이 생겨나는 것이다. 
조심하라, 그 말을 귀중히 여겨야 할 것이다.
공덕을 이루고 사업을 완수하더라도,
백성들이 모두 "내가 스스로 그렇게 하였다!"라고 말한다.

오늘 우리 사회는 너무 시끄럽습니다. 이러니저러니 너무 말이 많습니다. 바르게 살고 있는 정치인, 바르게 사는 경제인, 종교인이 없기에 이렇게 소란스럽습니다.

오늘 우리 사회가 이렇게 소란스러운 것은 다른 어떤 이유보다 우리 모두가 바르게 살지 못하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코로나 바이러스는 재앙이기는 하지만 우리에게 바르게 사는 것만이 인류의 살길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인간만을 중심으로 살아오고 다른 생명을 존중하지 않았던 우리의 올바르지 못한 삶을 향하여 경고합니다. 오직 물질의 성장과 축적만을 바라보며 올바르게 살지 못한 우리의 삶을 향하여 경고합니다.

개인주의 생각만을 가지고 살아오며 공동체를 생각하지 못했던 우리의 올바르지 못한 삶을 향하여 경고합니다. 믿는 다고 하면서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하지 못하고 엉뚱한 일만 계속했던 우리의 올바르지 못한 삶을 향하여 경고합니다.

코로나 바이러스는 우리에게 바르게 살라고 경고합니다.

코로나19 바이러스 이후의 믿음

탈(脫)종교의 현실 속에서 우리는 믿음의 의미를 새롭게 재구성해야 합니다. 코로나19 바이러스 이후의 삶에서 신앙을 갖고 산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결국 신앙이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뜻을 향하여 사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신앙인에게 바라시는 하나님의 뜻은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이 사랑하는 세상을 품는 것입니다. 구원하시려고 독생자까지 아낌없이 주셨던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것입니다. 신앙은 결코 세상과 분리되거나 세상을 거부하는 것으로 나타날 수 없습니다.

이 세상 안에서 공의를 실천하고 자비를 사랑하며 겸손히 하나님과 동행하는 바른 삶을 살아가는 것! 그것이 오늘 코로나19 바이러스 이후의 신앙의 모습일 것입니다. 
물처럼, 진리에 가까운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정선치(正善治) 바르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바르게 삽시다.

단순함의 깊이

정인영

난 무거운 구름 틈에서 떨어졌어
투명한 손가락을 튕겨 너를 노크했지
열린 문으로 들어간 곳에는 축축한 침대
금방 으스러지는 의자 불을 켤 수 없는 벽난로
젖은 노트 눅눅한 빵이 날마다 새로 생겨났어
제 몸 깎아내며 빛을 소멸하지만
다시 모습을 찾는 달처럼.

너는 네 안에 스스로 가둬
너의 밀도는 견고하지만 흔들리는 대나무처럼 굽이지고
벌거벗어 자유로운 바람같이 어디든 가고 어디에도 머무르지 않아

엉키지 않는 너의 머리카락과 햇살을 한 올 한 올 짜서
이불을 만들어 볼까
헤지지 않는 너의 신발을 신고 먼지 나는 땅 구석구석 걸어볼까

나는 너에게 삶을 맡겼어, 너를 침투한 순간
가득 차면 흘려보내는 결 따라 유연해지고
고독 속에서 싹 틔우는 노래 되었지

마르지 않는 너를 떠서 세상의 얼굴을 씻을 거야
고이지 않는 너를 쌓아 썩지 않는 기둥을 만들 거야

우리 눈과 손이 한 몸 되어 흘러, 아래로
누군가 결과 결 사이를 채우고
숨겨진 깊이를 가늠할 때까지
멈추지 않을 거야, 아마도.

홍인식 목사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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