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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야 할 일’이라기보다 ‘할 수 있는 일’기도함(사도행전 9:36-42)
이성훈 목사(명일한움교회) | 승인 2020.08.02 00:50
▲ 다비다의 죽음은 다비다의 삶을 증명해 주는 것이었다. ⓒGetty Image
36 욥바에 다비다라 하는 여제자가 있으니 그 이름을 번역하면 도르가라 선행과 구제하는 일이 심히 많더니 37 그 때에 병들어 죽으매 시체를 씻어 다락에 누이니라 38 룻다가 욥바에서 가까운지라 제자들이 베드로가 거기 있음을 듣고 두 사람을 보내어 지체 말고 와 달라고 간청하여 39 베드로가 일어나 그들과 함께 가서 이르매 그들이 데리고 다락방에 올라가니 모든 과부가 베드로 곁에 서서 울며 도르가가 그들과 함께 있을 때에 지은 속옷과 겉옷을 다 내보이거늘 40 베드로가 사람을 다 내보내고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돌이켜 시체를 향하여 이르되 다비다야 일어나라 하니 그가 눈을 떠 베드로를 보고 일어나 앉는지라 41 베드로가 손을 내밀어 일으키고 성도들과 과부들을 불러 들여 그가 살아난 것을 보이니 42 온 욥바 사람이 알고 많은 사람이 주를 믿더라

성경에는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들의 이야기가 몇 차례 나타납니다. 구약성경에서는 엘리야가 살린 사르밧 과부의 아들 이야기(왕상17:17-24), 엘리사가 살린 수넴 여인의 아들 이야기가 있습니다(왕하4:20-37).

신약성경에는 우선 예수님께서 살리신 세 명의 인물이 있습니다. 회당장 야이로의 딸(마9:18-26; 막5:21-43; 눅8:40-56), 나인성 과부의 아들(눅7:11-17), 나사로(요11:17-44)입니다. 또 오늘 저희가 읽은 본문에 나타난 베드로가 살린 다비다, 사도 바울이 살린 유두고(행20:7-12)가 있습니다.

어떤 분들은 이들의 이야기가 예수님의 부활과 연결되며 부활의 증거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나사로의 부활을 의도적으로 예수님의 부활과 연결하고 있는 요한복음을 제외하고 나머지 성경 말씀은 예수님의 부활 사건과 크게 관계가 없습니다. 이들이 살아난 이야기는 치유 이적에 가깝습니다.

우리는 분명 육신의 부활을 믿고 고백합니다. 하지만 육신의 부활을 믿는다고 해서 우리가 한 번 죽어도 다시 살아날 수 있다고 믿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종말 때의 부활과 천국에서의 부활을 믿기 때문에 이 이야기들을 굳이 부활 신앙과 연결시킬 이유는 없습니다.

성경을 자세히 읽어보면, 다시 살아난 7명의 인물에게 공통점은 없습니다. 특별한 공통점이 없기 때문에 이들의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가 죽었다가 살아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한다던가, 누군가 죽었을 때 이렇게 하면 살아날 수 있다는 행동 지침을 드릴 수는 없습니다.

다만 우리는 오늘 누군가의 죽음을 맞이한 상황 속에서 성경의 인물들이 어떻게 행동했는지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여기에서 예수님은 제외하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말씀은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를 설명하려는 말씀이 아니라 우리의 신앙과 삶에 관해 생각해보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상대의 아픔을 받아들임

사도 바울과 유두고의 이야기는 조금 다르지만, 엘리야, 엘리사, 베드로의 이야기에는 공통적으로 읽어낼 수 있는 점이 있습니다. 누군가가 죽었고, 그 누군가로 인해 슬퍼하며 간구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또 그 간구함 속에서 함께 아픔을 느끼며 하나님께 기도한 이들이 있었습니다.

사르밧 과부의 아이가 죽었을 때, 여인은 엘리야에게 간구합니다. 사실 그녀의 말은 간구라기보다 호소, 원망에 가깝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자신들과 함께 있었기 때문에 자신의 죄가 드러났고, 이로 인해 아들이 죽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엘리야는 조용히 죽은 아이를 받아 들고 자신의 방으로 향했지만, 침대에 아이를 눕힌 후에는 하나님께 부르짖습니다. 어째서 자신이 거할 수 있도록 받아준 이들에게 재앙을 내리셨는지 하나님께 부르짖습니다. 아이 어머니의 마음, 그 아픔을 자신도 똑같이 받아들였기에 그는 하나님께 부르짖을 수 있었습니다.

수넴 여인은 아이가 죽은 직후 혼자 엘리사를 찾아갑니다. 그녀가 오는 모습을 보고 엘리사는 사환 게하시를 통해 그녀의 안부를 묻습니다. 게하시가 물었던 질문은 당신과 남편과 아이가 모두 평안한가였습니다. 여인은 게하시에게 모두 평안하다고 대답하였습니다.

게하시와 안부를 나누고 엘리사 앞으로 간 여인은 엘리사의 발을 붙듭니다. 그때 엘리사는 그녀의 마음이 어떤 상태인지를 깨닫습니다. 게하시가 그녀를 떨어뜨리려 하자, 그녀의 영혼이 괴로워하고 있으니 가만히 놔두라고 말합니다. 그녀의 마음을 이해하고 받아들였기에 어쩌면 무례한 행동일지도 모르는 그녀의 행동을 그냥 지켜봅니다.

오늘 읽은 본문 속에서 다비다는 선행과 구제를 열심히 한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그녀가 죽자 그 지역의 제자들은 베드로를 찾아 룻다로 갑니다. 현재 이스라엘 지도로 욥바와 룻다의 위치를 비교해서 검색해보니까 대략 20km 정도 되고, 도보로 4시간 걸린다고 합니다. 불가능할지도 모르는 기적을 위해 왕복 40km를 이동했다는 점을 통해 욥바의 제자들이 다비다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베드로가 욥바에 와서 집에 들어갔을 때, 다비다에게 도움을 받은 모든 과부가 베드로 곁에서 울며 그녀의 선행을 이야기했습니다. 그 이야기를 들은 베드로는 모든 사람을 내보내고 하나님께 기도하여 다비다를 살려냅니다.

이 이야기 속에서 베드로가 그녀들의 아픔을 어떻게 생각하고 받아들였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이전까지 베드로는 죽은 사람을 살려낸 적이 없습니다. 두 사람을 치유하기는 했지만, 죽은 사람을 살려본 적은 없습니다. 그에게도 이 상황은 상당히 도전적인 상황입니다. 하지만 베드로는 선뜻 제자들과 그녀들의 요구에 응했습니다. 그들의 아픔을 받아들였기에 가능한 일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사도 바울의 이야기는 설교 시간에 졸면 안 된다는 중요한 이야기를 전해줍니다만, 죽은 유두고를 위해 간구한 이들은 없었습니다. 그 사건 현장에 사도 바울이 함께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그의 죽음을 알고 난 후에 바로 그에게 달려갑니다. 그리고 그에게 아직 생명이 있음을 알고 그가 회복될 때까지 함께하며 음식을 먹이고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유두고가 정말 죽었던 것인지, 죽기 직전의 상황에서 제대로 대처를 해서 살게 된 것인지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우리가 사도행전 20장을 통해 알 수 있는 사실은 사도 바울이 그의 회복을 위해서 계속 곁을 지키며 도왔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해야 할 것

저는 오늘 본문에 나타난 베드로나 함께 살펴본 엘리야, 엘리사, 사도 바울이 엄청난 능력을 가진 이들이었기 때문에 이런 일을 행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기도에는 엄청난 능력이 있어서 우리가 기도하면 마법같은 일들이 벌어진다고 말씀드리고 싶지도 않습니다.

다만 이들의 모습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분명 본받아야 할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주변에는 분명 자기 자신의 아픔이나 어려움으로 인해서, 또 가까운 사람의 아픔이나 죽음으로 인해서 슬퍼하며 힘들어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이들을 위해 우리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그 아픔을 함께 나누는 것입니다. 아픔을 나눈다는 우리말은 이상해 보이기도 하고 절묘해 보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분명 누군가의 아픔을 나눠 받을 수도 없고, 내 아픔을 누군가에게 덜어 줄 수도 없습니다. 하지만 누군가 내 아픔을 공감해줄 때, 내가 누군가의 아픔을 공감해줄 때, 그 마음의 교감이 일어날 때, 아픔과 슬픔이 조금 작아짐을 느끼게 됩니다. 그렇기에 아픔을 나눈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그 사람의 아픔과 어려움을 함께 공감하고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이것이 없다면 우리가 그를 위해 간구하는 기도도, 그에게 건내는 위로도 속이 빈 울림에 그칠 것입니다.

마음을 나눴다면 다음으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기도입니다. ‘해야 할 일’이라기보다 저는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만약 코로나 사태가 벌어지지 않았다면, 제 설교 본문은 사도행전 20장의 사도 바울과 유두고 이야기가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아픔과 어려움을 가진 사람의 곁에서 힘써 도와야 한다고 말씀드렸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지금 우리가 사는 시대는 코로나로 인해 서로 거리를 둘 수밖에 없는 시대입니다. 특히나 육체적인 병으로 인해 아파하시는 분들은 면역력이 낮기 때문에 아무나 옆에서 도왔다가 자신도 모르는 새에 코로나를 옮길 수도 있습니다. 그렇기에 옆에서 돕는 일은 지금 시대에 좋은 방식은 아닙니다.

그러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습니까? 기도 밖에 없습니다. 어쩌면 코로나 사태는 우리에게 중요한 것을 일깨워주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아무리 거리가 떨어져 있더라도, 아무리 만날 수 없더라도 우리는 기도 할 수 있습니다. 성도는 언제나 기도를 통해 마음을 나누고 교감하며 서로를 위로하고 격려할 수 있습니다.

서로 기도합시다. 기도를 통해 마음을 나누며 하나가 되고, 서로에게 위안이 되는 성도가 됩시다.

그리고 제발 당부드리기는, 너무 예수님의 말씀을 충실히 지키셔서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시려고, 상대방 몰래 기도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내가 기도하고 있음을 상대방도 알아야 위로가 되고 힘이 됩니다.

기도를 나누는 일은 그리스도인의 일상이 되어야 합니다. 쉽게 기도를 부탁할 수 있어야 하고, 인사처럼 기도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그렇게 기도할 때에 그곳에 죽은 사람이 살아나는 기적과 같은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가 일어납니다.

서로서로 어려움과 아픔, 기도 제목을 나누고, 늘 서로를 위해 기도하고, 서로 마음으로 하나가 되는 여러분 되실 줄 믿습니다. 그리고 그 위에 하나님께서 늘 함께 하실 줄 믿습니다.

이성훈 목사(명일한움교회)  joey810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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