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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를 쉬게 하리라(왕상 8:41-43; 엡 6:18-20; 마 11:25-30)성령강림후 아홉째주일(8월2일)
민기욱 목사(미국 트리니티 한인장로교회) | 승인 2020.08.03 18:11
▲ 예수 시대 멍에 ⓒGetty Image

주님의 평화와 은총을 기원합니다. 지난 몇 달 동안 우리는 매우 특별한 경험을 했습니다. 우리뿐만 아니라 전세계인들이 전쟁과도 같은 상황을 겪고 있고, 특별히 여기 미국은 상황이 매우 좋지 않습니다. 한국의 소식을 보니까 학교가 올 가을 학기에 대면 수업과 온라인 수업을 병행한다고 합니다. 하루에 몇 십명 정도의 코로나 확진자가 나오는 현실 속에서 취할 수 있는 최선이겠지요.

그러나, 여러분이 잘 아시다시피 이곳 미국은 초기 대응의 실패로 천문학적인 숫자의 확진자가 연일 나오고 있습니다. 보통 하루에 6-7만, 심지어 8만명을 넘는 날도 나오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지난 금요일에는 제가 봉사하고 있는 대학이 온라인 대학 승인을 위해 심사가 있었습니다. 그저 보통의 강의 외에 양념처럼 곁들여진 온라인 강의여서 학교도 그동안 크게 신경 쓰지 않았는데, 코로나 사태로 인하여 어쩔 수 없는 선택으로 온라인 강의로 체제를 바꾸어야만 했고, 이를 위해 연방정부급의 승인을 획득해야만 했습니다. 학교의 여러 분야 디렉터, 교육 담당 교수, 도서관 담당 직원 등이 심사를 위해 꽤 오랜 시간동안 준비해서 심사를 마쳤고, 이제 결과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심사관들의 질문에 대답을 하면서 여러 생각들이 스쳐 지나갔습니다. “어쩌다가 우리는 이런 시대를 살고 있나? 지금과 같은 상황이 도대체 언제까지 지속될까?” 전 세계의 경제지표는 그야말로 곤두박질치고 있습니다. 실업률이 날마다 상승하고 있습니다. 길을 걷다 우연히 마주치는 그 누구도 밝은 목소리로 인사하지 않습니다. 누구와 연락해도 결국 한결같이 한숨이요 괴로움 뿐입니다. 사업을 하시는 분들은 벌써부터 체감하셨을 테고, 직장인분들도 곧 자신의 직장이 더 이상 안전한 곳이 아님을 절감하겠지요. 이런 상황 속에서 목회자로서 제가 할 수 있는 게 뭘까요? 이런 상황 속에서 우리 크리스챤들이 할 수 있는 게 뭘까요?

제가 좋아하는 이정하의 시 중에 이런 게 있습니다.

바람 불지 않으면 세상살이가 아니다
그래, 산다는 것은
바람이 잠자기를 기다리는 게 아니라
그 부는 바람에 몸을 맡기는 것이다
바람이 약해지기를 기다리는 게 아니라
그 바람 속을 헤쳐나가는 것이다
두 눈 똑바로 뜨고 지켜볼 것,
바람이 드셀수록 왜 연은 높이 나는지

오늘의 현실은 정말 어렵습니다. 도무지 앞날을 예측할 수 없습니다. 어느 누구도 오늘의 현실을 보며 내일을 쉽게 장담할 수 없습니다. 2천년 전 이스라엘 땅에 살던 사람들의 형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로마의 식민지로 살면서 그 누가 행복했을까요? 일제 강점기에 살면서 내가 사는 삶이 행복했다면 뭔가 이상하지 않을까요? 내가 노력한 만큼 대가를 받는 것처럼 행복한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거의 모든 식민지 백성들은 세금으로 부역으로 자유를 잃고 내일에 대한 아무런 희망없이 살아가야 했습니다. 아침부터 밤 늦게까지 수고하지만 모든 것을 빼앗기고 내 손에 쥐어지는 건 아무 것도 없을 때가 많은 백성들, 이들을 바라보는 예수님의 마음은 어땠을까요? 마태복음은 담담하게 이렇게 전합니다.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니 이는 그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함이라”(마9:36)

목자 없는 양은 어디로 가야 합니까? 나를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 목자가 없는 그 양은 어디에서 꼴을 먹으며 어디에서 쉼을 얻을 수 있습니까? 삶의 의미와 목표를 상실한 사람은 그저 하루하루 시간을 보냅니다. 그냥 사는 것이지요. 그냥 부모님이 나를 낳았으니까 그냥 사는 것이지요. 그러나 삶에 치여 그저 하루하루를 살아내는 게 버거운 사람인데 그 살아갈 의미마저 상실한 채 살아간다면 얼마나 불행한 것입니까? 그들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주님은 불쌍히 여기시고, 그들에게 소망을 주십니다. 그냥 내일이면 잘 되겠지 하는 헛된 망상이 아니라 오늘을 사람답게 살아갈, 그래서 내일을 소망으로 바라볼 힘을 주시기 원하십니다. 제자들에게 명하십니다.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으니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 주소서 하라.”(마9:38)

제자들에게 사명을 주십니다.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포하고, 병든 자를 고치며, 죽은 자를 살리며, 나병환자를 깨끗하게 하며 귀신을 쫓아내라 명하십니다. 꺼져가는 작은 불꽃 같은 생명에 희망의 불꽃을 나눠주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군중은 어떻습니까? 목자 잃은 양들은 불쌍하고 측은하기도 하지만 어리석습니다. 예수님의 기적에 놀라기도 하지만 예수님께서 전하시는 복음이 들리지 않습니다. 어떤 이는 귀를 막습니다. 회개하라는 주님의 명령은 철저하게 배척당합니다. 지금까지의 불의와 악행에서 돌이켜야 비로소 구원의 길이 보임을 말씀하시지만 군중들은 내 눈 앞에 당장 뭔가 내게 이로운 게 보여야 듣는 척이라도 합니다. 세상과 타협하며 근근이 삶을 연명했는데 보이지도 않는 하늘 나라 얘기나 하고 있습니다. 우리를 괴롭히고 감시하고 빼앗아가는 저 로마를 무너뜨리고 우리를 배불리 먹여 줄건가 기대하지만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이들의 생각과 행태를 보시고 주님은 아버지 하나님께 기도하십니다.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마11:25-26)

바로 그것입니다. 말씀이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것 같지만 그 말씀과 영혼으로 만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그게 현실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이치를 깨닫는 사람은 지혜롭고 슬기로운 사람이 아닙니다. 똑똑한 사람이 아닙니다. 스스로 똑똑하다고 생각하는 이들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그 똑똑하다는 자부심을 버리지 않고는 하나님의 뜻을 온 몸과 마음으로 만날 수 없습니다. “안다”고 하는 이에게는 철저하게 하늘의 신비가 감춰집니다. 내가 “안다”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만날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오히려 하늘의 비밀을 깨닫는 자는 어린아이들입니다. 성경은 배우지 못한 자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스스로 어리석고 부족하고 약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라야 하늘의 비밀을 깨달을 수 있고, 하늘을 향해 마음을 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연약한 것일수록 생명에 가깝고, 딱딱한 것일수록 죽음에 가까운 법입니다.

나의 연약하고 빈곤함을 알아 하늘을 향해 이제 마음과 영혼을 여는 이들에게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왜 무리들은 무거운 짐을 지고 있습니까? 왜 무리들은 무거운 짐을 지며 수고하고 있습니까? 그것은 다름아닌 율법이었습니다. 현실 속에서 행복을 누릴 수 없는 이들에게 유일한 희망은 내세의 구원입니다. 이번 생은 틀렸다 하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날마다 계속되는 고통과 괴로움, 배고픔과 외로움을 이겨내려면 율법을 잘 지켜야 했습니다. 종교 지도자들의 가르침은 율법 준수로 인한 구원의 길이었습니다. 그러나, 율법은 참 혹독합니다. 무겁습니다. 나를 얽어매는 그물과도 같습니다. 그러나 어쩔 수 없습니다. 율법을 잘 지켜내야만 오늘의 괴로움을 벗어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율법의 조문 속에서 옴짝달싹 못하는 이들에게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유태인들에게 율법만 있었던 건 아닙니다. 인생의 질고가 인생의 짐들이 그들을 얽어맵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이 세상에 인생의 짐을 지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때로는 나를 짓누르는 짐을 포기하고 싶고, 달아나고 싶지만 그래도 그 짐을 지고 사는 게 인생 아닙니까? 짐을 부리고 바다나 강을 운행하는 배들은 배 밑바닥에 어김없이 바닥짐(ballast)을 싣고 갑니다. 배의 무게 중심이 위로 뜨면 작은 파도에도 전복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적당한 짐과 부담이 우리 삶에 유익합니다. 세상에 힘 있다 하는 이들은 자기 짐을 남에게 떠맡기는 일에 익숙합니다. 그들은 주님의 초대에 응하기 어렵습니다. 그들은 천국이 필요 없습니다.

하지만 보통의 사람들은 자기 짐을 지고 가야 합니다. 그 짐이 무겁기에 우리는 될 수 있으면 속히 그 짐을 벗고 싶어합니다. 짐을 벗고 싶어 안달이지만 그 짐은 쉽게 벗어지지 않습니다. 복권에 당첨되면, 내 아이들이 좋은 대학에 입학하면, 내 남편이 내 아내가 승진하면, 코로나 바이러스가 물러가면 그 짐이 가벼워질텐데 하고 기대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 짐을 벗겨주시겠다고 우리에게 약속하지 않으십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인생의 짐은 우리가 끝까지 지고 가야 하는 인생의 과제입니다. 그 짐을 벗겨주겠다고 말하는 이가 있습니까? 그 말은 달콤하겠지만 거짓일 뿐입니다.

주님은 대신 무거운 짐을 지고 비틀거리는 우리에게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고 하십니다. 주님의 멍에가 무엇입니까? 십자가입니다. 너무 가혹하게 들립니다. 짐을 벗겨주시지는 못할망정 십자가까지 지라고 하시다니요? 하지만 그 말씀안에 역설이 있습니다. 바로 그것이 주님의 방식입니다. 하늘의 방식입니다. 주님이 주시는 멍에를 우리가 메고 갈 때 우리의 짐이 가벼워진다는 아이러니. 이것은 어떤 논리가 아닙니다. 이성적으로 아무리 생각해도 해결될 수 없는 역설입니다. 오직 경험을 통해서만 알 수 있는 진실입니다. 짐을 벗어버리는 것만이 능사가 아닙니다. 잘 지고 가야 합니다. 거기에 주님의 멍에까지 지고 가야 합니다.

오랫동안 건강에 어려움을 겪던 이가 어려운 이웃들을 위한 봉사활동에 나섰다가 덤으로 병이 낫는 경우를 우리는 흔히 보게 됩니다. 세상을 온통 부정적으로 보던 사람이 남을 위한 봉사 활동에 나섰다가 자기 내면의 치유를 경험한 사례를 보게 됩니다. 여러분의 문제를 해결하고 싶으십니까? 남을 복되게 하십시오. 이웃을 복되게 하는 것보다 더 좋은 해결책이 없습니다. 형제자매를 복되게 하면서도 아무 것도 바라지 않을 때, 우리의 문제가 해결되고 우리 삶의 근간이 든든해집니다. 그게 바로 하나님 나라의 신비요 삶의 방식입니다. 성경은 끊임없이 그 이야기를 우리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눈을 뜨면 보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 시대의 무리들처럼 떠야 할 마음의 눈을 감고 삽니다. 목이 말라 생명이 죽어가고 있는데 생명의 물을 마시려 하지 않습니다. 예수를 따른다 하면서도 여전히 세상의 방식을 따르는 이중생활을 합니다.

그러나, 주님께 내 마음을 정하고 주님의 멍에를 멘 사람들, 그들을 통해 주님은 새로운 세상을 이루어 내십니다. 우리가 만나는 어려운 이웃들은 바로 하나님의 뜻을 이 세상에 실현하는 통로가 된 사람들입니다. 우리 주변의 연약한 이웃들은 우리 믿음이 날로 성장해갈 수 있는 가능성을 허락해줍니다. 모두가 살기 힘들다고 탄식하는 세상에서 다른 이들의 사는 맛을 되찾아주는 사람이 된다는 것, 이보다 멋진 도전이 없을 것입니다. 우리 교회의 모든 믿음 식구들이 이 도전에 창조적으로 응답하여 하나님 나라의 초석들이 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민기욱 목사(미국 트리니티 한인장로교회)  minics3@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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