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떼의 정치적 잠재력공생의 정치신학: 캐서린 켈러의 ‘(성공)보다 나은 실패’(a failing better)를 위한 정치신학 (4)
박일준 객원교수(감리교신학대학) | 승인 2020.08.10 04:00
▲ 안나 씽(Anna Lowenhaupt Tsing) ⓒGetty Image
본고는 「한국기독교신학논총」, 116집(2020): 327-358에 게재된 논문을 저자의 허락을 받아 본지에 연재하는 것임을 일러둔다. - 편집자 주

현대 자본주의 국가가 무시한 사람들

불확정성(the indeterminate)은 새로운 질서가 창출될 기회다. ‘서민 이하의 존재’(the undercommons)는 정책적 통계에 잡히는 존재가 아니다. 늘 ‘서민 이상의 존재’(the overcommons)에 초점을 둔 정치는 선거권을 행사하는 존재들에게만 관심이 있다.

바로 여기에 우리 ‘대의민주주의’ 체제의 실패가 놓여있다. 그 불확정성이 불안정성 혹은 불확정성(precarity)으로 변환되고, 이 불안정성은 늘 “운 없는 인생들의 운명”(fate of the less fortunate)(1)이 되어가는 시대, 우리 정치의 불안정성은 바로 그 정치가 활용하는 통계적 숫자 아래에 놓인 존재들을 망각하는데 있다. 안나 씽(Anna L. Tsing)은 이 불안정성의 운명이 이제 “지구의 운명”이 되었다고 선언한다.(2)

정치가 올바로 작동하려면, 서민(the commons)의 위아래가 서로 연결된 존재, 서로 얽혀있는 존재라는 것을 인식함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불확정성’ 즉 ‘서민 이하의 존재’ 혹은 통계에서 빠져나간 존재들에게 정치의 기회가 놓여있는 것이다. 삶과 생명은 인간과 인간이외 존재 사이의 “자기-조직화”(self-organization)로부터 창발하는데, 이것은 바로 “아상블라주(assemblage)의 활동, 즉 세포와 유기체, 재즈밴드, 혁명 등과 같이—상호작용하는 차이의 앙상블들이 빗어내는 생산활동”이다.(3)

이런 의미에서 ‘정치적인 것’(the political)은 바로 “결정적인 차이를 가로지르는 집단체적 아상블라주”(collective assemblage across critical difference)(4)이다. ‘결정적 차이’(critical difference)란 “차이가 창발적 공중을 위해 작용하는 위기, 자기-조직화의 새로운 행위들을 요구하는 분기(divergence)”(5)를 의미한다. 예를 들어 기후변화와 지구온난화는 바로 그 ‘결정적 차이’의 한 예이다.

그 위기들을 통해 공중(the public)은 기존 정치와 경제 및 사유 패러다임의 한계를 분명하게 보게 되고, 혼돈을 겪지만, 그 위기를 극복해 나아갈 대안과 새로운 패러다임을 모색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기-조직화는 언제나 “혼돈의 가장자리”(at the edge of chaos)(6)에서 일어난다. 신학적으로 이 ‘창생 집단체’의 과정은 “어떤 모든 것을 결정하는 주권적 창조 이야기에 들어맞지 않는 어떤 것”이 도래하는 과정이라는 점에서 “언제나 이미 정치적”이다.(7)

하지만 “신자유주의”는 “지구의 자기-조직화하는 다수적—지질학적, 생물학적, 기후적—생태계들”을 자기의 세계 조직에 적합하지 않은 “외부효과들”로 치부해 버렸다.(8) 다수가 집단적으로 얽혀 창출하는 미세한 진동들을 수치와 통계로 변환하는 것이 가능치 않았기 때문이다. 기후변화의 위기 시대에 ‘창생 집단체’(the genesis collective)는 정치적 대안으로서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

다중, 네트워크, 그리고 떼의 의미들

베라르디는 집단체(the collective)를 다중과 네트워크 그리고 떼(swarm)로 구별한다. 이 중 베라르디에게 정치적 가능성을 갖는 단위는 “떼”이다. 다중이란 “공통의 지향성을 공유하지 않고 공통된 행동 패턴을 보이지 않는 의식적·감성적 존재들의 복수성”(9)을 말한다. 네트워크는 “(유기체적 혹은 인공적) 존재들의 복수성이자 상호접속과 상호연동을 가능케 해주는 절차 덕분에 공통의 행동을 수행할 수 있는 인간과 기계의 복수성”(10)을 말하는데, 네트워크는 자신의 내장된 프로그램으로 접속자들을 늘 일정한 방향으로 유도하는 성격을 갖는다. 이점에서 접속자들의 행동은 네트워크의 프로그램에 종속되어 있다.

떼(swarm)는 “자신의 신경 체계 속에 새겨져 있는 규칙들을 따라 행동하는 (혹은 따르는 것처럼 보이는) 살아있는 존재들의 복수성”(11)을 말한다. 사회가 복잡해지고 정교해지며 가속화될수록 사람들은 “떼처럼 행동하는 경향”이 늘어나, “의미의 공통적인 자동적 속성에 의존하고 서로 일치하는 행동을 공유하는 경향”을 보인다.(12) 바로 이런 상황에서 ‘떼’(swarm)는 “공통의 의미가 생산되고 서로 일치하는 행동이 형성되는 장소”이면서 또한 “권력[의 장소]”(13)가 된다.

‘떼’와 ‘네트워크’를 구별하기는 쉽지 않지만, 기호자본주의 체제 하에서 우리가 떼의 흐름을 거절하기란 거의 “불가능”(14)해지고 있으며 그래서 점점 떼로 살아가는 경향을 보인다. 이 떼는 네트워크와는 전혀 다른 흥미로운 특성을 갖고 있는데, 말하자면, “의도가 없는 지향성을, 행위자 없는 행동을 특징으로 갖는 이질적인 전체”로서, 떼에는 “중앙의 명령도, 전체 떼를 조사하거나 감시하거나 통제할 수 있는 단위 혹은 대리인도 없다.”(15) 그럼에도 불구하고 떼는 “일정한 방향으로 행동하고, 그 움직임에는 동기가 있으며, 그 패턴에는 목적이 있다.”(16)

네트워크는 자신의 프로그램으로 접속자들을 종속시키는 반면, 떼가 보여주는 의도성이나 목적성 혹은 동기들은 중앙 프로그램의 통제가 아니라, 떼를 구성하는 개체들의 자발적이지만 예측불가능한 ‘전체로서의 특성’이다. 이를 베라르디는 “떼의 역설”(17)이라고 부른다. 한편으로 떼는 그 행위패턴을 통해 중앙의 의도적인 통제가 없지만 어떤 힘의 지향을 보여준다. 다른 한편으로 떼는 “질서정연하고 역동적으로 조직화됐지만” 자신의 유지 이외에 그 어떤 목적이나 목표를 갖고 있지 않은 집합성을 보인다.

우리의 두뇌를 네트워크에 접속하여, 우리의 뇌신경을 네트워크와 연결하는 기호자본주의 시대에 ‘떼’를 창출하는 ‘만남’ 혹은 ‘결집’은 두 가지 형태를 갖는다: 접속(connection)과 결속(conjunction). 접속은 네트워크적 환경에서 떼가 구성되는 방식으로서, “아무런 결속없이, 아무런 의식적·정서적 집합성 없이 접속하는 신체”들을 가리키는 반면, 결속은 몸들이 신체적으로 모여 결집하는 것을 가리키는 것으로서, 이 결속의 차원에서 소속은 아무런 의미가 없지만 이 집합체는 “의미를 창조하며, 이렇게 공유된 의미가 집합체를 지배하는 절차가” 된다.(18)

접속의 차원에서 ‘떼’는 네트워크에 종속된 행동패턴을 보이지만, 결속의 차원에서 떼는 의미를 창조하여 공유된 행동을 창출하는 힘을 보여준다. 다시 말해서, 접속의 체계에는 지식이 존재하지 않으며, 그저 “의미론적 인식만이” 있을 뿐이지만, 집합적 결속에서 지식은 “기존의 것을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것을 창조”한다.(19)

결속의 한 예로서 우리는 사랑을 예로 들 수 있는데, 사랑은 “사랑하는 연인들을 바꾸”며, 이처럼 “무의미한 기호들의 결속은 이전에 결코 존재하지 않았던 의미를” 창출한다.(20) 사랑은 두 신체 간의 물리적 만남이 배제된 접속관계로만은 가능하지 않다. 그리고 이것이 결속과 접속관계의 결정적인 차이이다. 결속의 관계에서 인간의 몸은 단지 두뇌와 네트워크와의 접속을 가능케 해주는 단순한 인터페이스 수준을 넘어서서, 몸의 만남을 통한 새로운 의미창출의 기능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베라르디는 떼의 창발성을 주장한다.

▲ 프랑코 ‘비포’ 베라르디(Franco ‘Bifo’ Berardi) ⓒGetty Image

그런데 우리 시대 디지털 네트워크는 코드의 표준화를 통해 서로 다른 요소들을 호환가능케 함으로써, 이질적인 것들을 “의식적 유기체들 사이의 교환”을 통해 ‘떼’에서 네트워크로 전환시키면서 “결속에서 접속”으로 관계를 전환시키고 있다. 유기체가 전자장치들과 신경가소성을 통해 상호작용하면서 ‘커플링’(coupling) 하게 만드는 장치들이 확산되고 있기 때문이다. 달리 표현하자면, “인지적 기계들과 언어적 기계들 사이의 접속이 갈수록 증가”하면서 “유기체의 두뇌들과 신체들 사이의 결속이 감소”하고 있다.(21)

그러면서 몸의 결속적 만남이 창출하는 의미가 무의미한 코드의 교환으로 변환되고, 그러면서 현대 포스트휴먼 시대는 의미의 결여를 경험하고 있다. 무의미한 접속적 만남들의 증가가 삶을 허무주의의 늪으로 유인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베라르디는 묻기를, “인류의 유연한 두뇌는 이 미로에서 빠져나오는 길을 찾을 수 있을까? 우리는 세계와 정신이 새롭게 결속할 수 있는 가능성을 만들어낼 수 있을까?”(22) 이 물음들이 “미래를 위한 실질적인 질문”(23)이라고 그는 말한다.

이 가능성은 결코 “정치적 의지나 합리적인 정치적 계획에 의존”하여 창출되지 않으며, “오로지 우리의 감수성과 신경-진화를 동기화할 수 있는 우리 자신의 능력에만 의존”하여 가능할 것이다.(24) 이는 곧 “연대의 문제”(25)이지만, 정작 문제는 이제 더 이상 연대가 가능하지 않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연대는 “노동자들 사이, 사람들 사이의 영토적·물리적 관계에 기반을 두고” 있는데, 이 영토적·물리적 기반이 기호자본주의의 디지털 네트워크 시스템으로 인해 무너졌기 때문이다.(26)

신학의 에너지가 변혁의 에너지로

신체성을 동반한 결속(conjunction)의 관계가 기호자본주의의 매트릭스를 구성하는 디지털 네트워크에 기반한 접속의 관계로 전환되는 추세 속에서 우리는 떼의 정치적 잠재력을 어떻게 회복할 수 있을 것인가? 여기서 존재란 “에너지와 변혁”이고, 신학은 “에너지”이며, 에너지는 “물질화한다”(matter)는 사실을 기억하자.(27) 이는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성육신 교리의 핵심이다.

만일 이 신학의 에너지가 변혁의 에너지가 되어 “얽힌 차이들의 마디들 속에 물질적으로 실현된다면”(materialize), 신학의 에너지는 메시아적 시간의 응축을 초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en christou) 모든 것들”을 조망하면서 말이다.(28) 모든 만물들의 서로간의 접힘(folding)과 얽힘(entanglement)은 이미 그리고 언제나 ‘그리스도 안에’ 있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성육신하신 하나님의 체현(embodiment)을 실현해 나갈 수 있다. 정치적인 것의 귀환이 왜 신학적 운동이 되는지를 여기서 보게 된다.

오늘날 우리들의 정치적 문제는 “인간적 예외주의와 기계론적 환원주의에 즉각 저항하는, 사물들의 물질화를 향한 투쟁”(29)이다. 여기서 ‘물질화’(mattering)는 물질로 구체화된다는 의미와 또한 문제화된다 혹은 중요해진다는 의미를 모두 함의한다. 인간의 몸은 정신의 실현이 아니라 몸을 통해 물질세계와 소통하며, 그래서 몸이 속한 지구가 문제가 될 때 우리의 몸뿐만 아니라 몸에 기반하여 작동하는 정신도 문제가 된다.

민주주의의 붕괴와 기호자본주의의 출현 그리고 자본주의적 성장의 붕괴는 우리로 하여금 이 문제들이 결코 경제나 정치의 어느 특정 영역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그리고 인간 삶의 지평 안에 한정된 문제들이 아니라, 행성에 존재하는 모든 존재들의 생존에 치명적으로 중요한 문제가 된다는 것을 알려준다. 그렇기에 이러한 문제들에 관심하는 우리들의 운동은 더 이상 ‘생태환경운동’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지구(를 위한) 정치 신학’(political theology of earth)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미주

(미주 1) Anna Lowenhaupt Tsing, The Mushroom at the End of the World: On the Possibility of Life in Capitalist Ruins (Princeton: Princeton University Press, 2015), 2.
(미주 2) Ibid., 3.
(미주 3) Catherine Keller, Political Theology of the Earth: Our Planetary Emergency and the Struggle for a New Public, (New York: Columbia University Press, 2018, 33.
(미주 4) Ibid., 33.
(미주 5) Ibid., 33.
(미주 6) Ibid., 34.
(미주 7) Ibid., 34.
(미주 8) Ibid., 35.
(미주 9) 프랑코 ‘비포’ 베라르디 (Franco ‘Bifo’ Berardi) / 정유리 역, 『프레카리아트를 위한 랩소디: 기호자본주의의 불안정성과 정신노동의 정신병리』(Precarios Rhapsody: Semiocapitalism and the Pathologies of the Post-Alpha Generation) (서울: 도서출판 난장, 2013), 211.
(미주 10) 앞의 책, 211.
(미주 11) 앞의 책, 212.
(미주 12) 앞의 책, 212.
(미주 13) 앞의 책, 212.
(미주 14) 앞의 책, 213.
(미주 15) 앞의 책, 215.
(미주 16) 앞의 책, 215.
(미주 17) 앞의 책, 215.
(미주 18) 앞의 책, 217.
(미주 19) 앞의 책, 217.
(미주 20) 앞의 책, 217.
(미주 21) 앞의 책, 233.
(미주 22) 앞의 책, 234.
(미주 23) 앞의 책, 234.
(미주 24) 앞의 책, 234.
(미주 25) 앞의 책, 241.
(미주 26) 앞의 책, 241.
(미주 27) Keller, Political Theology of the Earth (2018), 67.
(미주 28) Ibid., 67.
(미주 29) Ibid., 78.

박일준 객원교수(감리교신학대학)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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