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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곡 1: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대로 사는 사람(출 40:17-38; 빌 1:1-11; 마 18:15-20)성령강림후 열한째주일(8월16일)
최병학 목사(남부산용호교회) | 승인 2020.08.14 17:50

1. 가라지 대처법

지난주 설교 제목이 ‘가라지’였습니다.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이 바로 가라지였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오늘 성령강림후 열한째 주일부터는 이제 가라지가 아니라, 알곡에 대한 말씀이 이어집니다. 특별히 이러한 알곡에 대한 말씀이 성령강림절기 마지막까지 이어지는데, 삼위일체교회력에 따르면, 한해의 마지막은 성령강림절기입니다. 8월 마지막 주까지입니다.

그리고 새로운 교회력 절기의 시작인 창조절이 9월 첫 주부터 시작됩니다. 한해의 시작이 하나님의 천지 창조를 찬양하는 창조절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특별히 2020년 9월 첫 주부터 시작되는 창조절기는 삼위일체 교회력 첫째 해(가해)가 됩니다. 3년 주기가 끝나고 세 본문이 다시 반복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지금 셋째 해(다해) 성령강림절기 마지막 세주를 지금 보내고 있는 것입니다. ‘After 성령’의 시대인 이 마지막 시기에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고 보혜사 성령을 보내주셨음을 감사하고, 또한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그때까지 알곡과 같은 삶을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현재 코로나 바이러스와 또한 기후변화를 통한 집중 폭우 등의 피해로 힘들고 어려운 시기이지만, 이러한 위기의 때에 세상 풍조를 따라 사는 거짓 그리스도인들이 아니라, 참다운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 세 본문 말씀은 이러한 알곡의 삶에 관한 첫 번째 말씀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서 본문 말씀은 알곡에 관한 말씀으로 바로 넘어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가라지 대처법으로 시작됩니다. 말씀을 볼까요?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 만일 듣지 않거든, 한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두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확증하게 하라.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마 18:15-17)

우리는 모두 죄인이기에, 때로는 실수도 하고 죄를 범할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죄에 대한 권면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 권면을 받고 회개하고 용서를 빌면 됩니다. 그리하면 용서의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죄와 허물을 용서해 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죄의 본질적 속성은 회개를 싫어하죠? 절대 잘못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기 합리화, 자기 변론에 물불을 가리지 않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세 번의 기회를 주십니다.

15절에 보면, 이렇게 말씀하시죠? 먼저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무슨 말씀인가요? 예수님을 잘 믿는 사람도 죄를 지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와 자매인 교회 공동체 안에서도 죄를 지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때 어떻게 하라는 말씀인가요? 처음에는 1대 1로 만나서 권고하라고 합니다. 이때 그 형제가 회개하면, 이제는 더 이상 죄인인 아니라, 그대로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입니다. 제일 좋은 경우입니다. 그는 가라지로 전락할뻔 했으나 회개함으로 알곡의 길로 들어선 것입니다. 그러나 듣지 않을 때는 어떻게 하나요? 두 세 사람이 함께 찾아가 권고합니다. 그래도 듣지 않을 때는 교회에 말하라고 합니다. 재판으로 치면 3심 재판이죠? 이렇게 세 번 권고해도 안되면, 어떻게 하라고 말씀하셨나요?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고 합니다.

여기서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는 말씀은 이제 더 이상 교회 공동체의 믿음 안에 있는 이로 인정하지 말고, 믿음을 떠난 자로 여기라는 말씀입니다. 교회법상으로는 출교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요즘 교회와 교단의 법은 이렇게 하지 않습니다. 교인들 눈치를 보는 것이죠? 장로교의 치리회인 교회의 당회나 노회의 재판국, 그리고 총회 재판국에서 권면하거나 치리하면, 치리 당사자가 다른 교회나 다른 교단으로 가버리면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또 다른 교단이나 교회에 가면 환영해줍니다. 이렇게 가라지를 주고받고 하니, 한국 개신교 전체가 무너지는 것입니다.

더 기가 막힌 것은 죄를 짓고 분열을 일삼는 가라지들은 교회와 노회, 총회의 재판도 신뢰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사회 재판, 곧 세상 법정을 의지합니다. 현재 많은 교회의 분쟁이 세상 재판에서 다뤄지고 있습니다. 기가 막힐 노릇입니다. 교인들끼리 서로 소송하는 고린내 나는 고린도 교회처럼(고전 6:1-7) 한국교회는 이제 고린내가 나는 교회, 가라지들의 천국이 되었습니다.

2. 의의 열매가 가득한 이들

그러나 오늘 서신서 말씀에서 바울은 알곡과 같은 교회를 하나 소개해 줍니다 바로 빌립보 교회입니다.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에게 편지를 쓰면서, 참다운 교회가 어떤 교회인지를 오늘 우리들에게 알려줍니다. 또한 알곡의 삶이 무엇인지도 가르쳐 줍니다. 사실 빌립보서는 바울이 자신이 어려울 때 도와준 빌립보 교인들에게 보낸 감사의 편지입니다. 따라서 오늘 본문 말씀인 앞부분은 시작부터 감사가 나옵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종 바울과 디모데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빌립보에 사는 모든 성도와 또한 감독들과 집사들에게 편지하노니,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내가 너희를 생각할 때마다 나의 하나님께 감사하며 간구할 때마다 너희 무리를 위하여 기쁨으로 항상 간구함은 너희가 첫날부터 이제까지 복음을 위한 일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이라.”(빌 1:1-5)

대부분의 바울 서신이 문제가 있는 교회에, 그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바울이 권면한 것인데, 오직 빌립보서만이 그런 문제가 없이, 바울이 감사하는 내용으로만 가득 찬 서신입니다. 특히 바울이 감옥에서 쓴 옥중서신이지만, 빌립보서는 ‘기쁨의 서신’이라는 별명이 붙어있습니다. ‘기쁨’, 혹은 ‘기뻐하라’라는 말이 16번이나 나오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기쁨과 감사는, 감사와 기쁨은 하나라고 볼 수 있습니다.

나아가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와 연합함으로 참된 기쁨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연합을 이루기 위해서는, 예수님께서 자기를 십자가 위에 온전히 비우신 것처럼, 성도들도 자기 자신을 비워야 한다고 권면합니다. 이것이 알곡의 삶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말씀은 그 알곡의 삶이 무엇인지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착한 일’입니다. 새번역으로 말씀을 볼까요?

“선한 일을 여러분 가운데서 시작하신 분께서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그 일을 완성하시리라고, 나는 확신합니다. 내가 여러분 모두를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나로서는 당연한 일입니다. 내가 여러분을 내 마음에 간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모두는 내가 갇혀 있을 때나, 복음을 변호하고 입증할 때에, 내가 받은 은혜에 동참한 사람들입니다.”(빌 1:6-7)

알곡과 같은 교인, 그리고 교회는 바로 예수의 이름으로 선한 일, 곧 착한 일을 하는 것입니다. 나아가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를 맺으라고 합니다. 8절 말씀이죠?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 무리를 얼마나 사모하는지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니라. 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또 진실하여 허물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기를 원하노라.”(빌 1:8-11)

이러한 알곡과 같은 교회, 성도들에게는 하나님께서 밤에는 불과 낮에는 구름으로 함께 하십니다. 구약의 말씀이 그 말씀입니다.

“구름이 회막에 덮이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하매, 모세가 회막에 들어갈 수 없었으니 이는 구름이 회막 위에 덮이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함이었으며 구름이 성막 위에서 떠오를 때에는 이스라엘 자손이 그 모든 행진하는 길에 앞으로 나아갔고 구름이 떠오르지 않을 때에는 떠오르는 날까지 나아가지 아니하였으며 낮에는 여호와의 구름이 성막 위에 있고 밤에는 불이 그 구름 가운데에 있음을 이스라엘의 온 족속이 그 모든 행진하는 길에서 그들의 눈으로 보았더라.”(출 40:34-38)

▲ 성막 위 불과 구름, 성막 모형

3.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대로

사실 오늘 구약 말씀은 성막을 완성하고 봉헌예식을 거행한 말씀입니다. 이때 하나님의 영광이 임합니다. 절차를 보면, 먼저 성막(회막)을 세우라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었고(출 40:1-16), 그 말씀대로 모세가 출애굽한지, “둘째 해 첫째 달, 곧 그 달 초하루에 성막을 세우(출 40:17)”게 됩니다. 여기서 성막(聖幕)과 회막(會幕)은 같은 말입니다. 영어로는 텐트(tent)입니다. 하나님의 임재나 거주를 강조할 때는 ‘거룩한 성막’으로, 하나님과 인간이 ‘만나는 장소’임을 강조할 때는 회막이라고 사용합니다. 아무튼 먼저 성막의 기초 공사를 시작합니다. 말씀을 볼까요?

“모세가 성막을 세우되, 그 받침들을 놓고 그 널판들을 세우고 그 띠를 띠우고 그 기둥들을 세우고, 또 성막 위에 막을 펴고 그 위에 덮개를 덮으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되니라(출 40:18-19).”

▲ 성막의 구성과 성물들

성막 내부는 성막뜰(바깥뜰)과 성소와 지성소로 나누고 성소와 지성소는 휘장으로 나눕니다. 이렇게 기초 공사를 한 후에 성막 안에 성물들을 들여 놓습니다. 먼저 증거궤입니다. 지성소에 있는 증거궤는 ‘법궤’, ‘언약궤’라고도 하는데, 의미는 하나님의 증거가 이스라엘 가운데 있다는 뜻입니다. 곧, 궤가 있는 곳에 하나님과 하나님의 율법이 계시다는 증거입니다.

▲ 증거궤, 속죄소를 열면 만나 항아리, 아론의 싹난 지팡이, 십계명 돌판이 있다

“그는 또 증거판을 궤 속에 넣고 채를 궤에 꿰고 속죄소를 궤 위에 두고, 또 그 궤를 성막에 들여놓고 가리개 휘장을 늘어뜨려 그 증거궤를 가리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되니라.”(출 40:20-21)

그 다음은 성소 안에 진설병과 등잔대가 마주보고 놓여 있습니다. 진설병은 성소의 떡 상위에 진열하는 떡입니다. 그 의미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일용할 양식을 제공하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한 등잔대는 말 그대로 등잔을 놓는 곳, 곧 빛으로 우리를 변화시키시는 하나님의 임재를 뜻합니다.

▲ 진설병과 등잔대

“그는 또 회막 안 곧 성막 북쪽으로 휘장 밖에 상을 놓고, 또 여호와 앞 그 상 위에 떡을 진설하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되니라. 그는 또 회막 안 곧 성막 남쪽에 등잔대를 놓아 상과 마주하게 하고 또 여호와 앞에 등잔대에 불을 켜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되니라.”(출 40:22-25)

지성소와 성소 사이 휘장 앞에는 금향단을 놓아두고, 성막 문 앞 바깥뜰에는 번제단을 놓아두라고 하십니다. 금향단은 쉽게 말해 기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사장이 성소 안에서 분향할 때 모든 백성들은 그 시간에 밖에서 기도를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번제단은 희생의 제단입니다. 구약 시대에는 짐승을 태워 하나님께 드린 제단이지만, 신약 시대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단 한 번의 십자가 보혈의 희생제사로 우리의 구원을 이루셨습니다.

▲ 금향단과 번제단

“그가 또 금 향단을 회막 안 휘장 앞에 두고, 그 위에 향기로운 향을 사르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되니라. 그는 또 성막 문에 휘장을 달고, 또 회막의 성막 문 앞에 번제단을 두고 번제와 소제를 그 위에 드리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되니라.”(출 40:26-29)
 
또한 회막과 번제단 사이, 곧 바깥뜰에는 물두멍을 둡니다. 제사장이 회막에 들어갈 때 손과 발을 씻는 것입니다.

▲ 물두멍

“그는 또 물두멍을 회막과 제단 사이에 두고 거기 씻을 물을 담으니라. 모세와 아론과 그 아들들이 거기서 수족을 씻되, 그들이 회막에 들어갈 때와 제단에 가까이 갈 때에 씻었으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되니라.”(출 40:30-32)
 
그리고 마지막으로 “성막과 제단 주위 뜰에 포장을 치고, 뜰 문에 휘장을(출 40:33a)” 달게 됩니다. 이렇게 성막이 완성되고, “모세가 이같이 역사를 마치니(출 40:33b)” 여호와의 구름과 불이 이스라엘 백성들과 동행했던 것입니다. 사실 장막으로 만든 성전인 성막은 나중에 솔로몬의 성전으로 발전합니다. 이러한 성막은 하나님을 만나는 곳입니다. 회막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 가운데 임하셔서 그의 백성들을 만나 주시는 성별된 장소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영광은 성막 위에 머물러 있었고, 하나님의 영광이 앞장서 행진하실 때, 이스라엘 백성들도 그 영광을 좇아 행진하였습니다. 부족하지만 알곡과 같은 삶을 살려는 이들은 하나님께서 밤낮 동행하신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러한 형식적인 면도 있지만, 본질적으로 더 중요한 말씀이 있죠? 본문 말씀 가운데 계속해서 반복되는 단 하나의 말씀이 바로 그것입니다. 무엇입니까?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되니라”입니다. 그렇습니다. 알곡은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대로 사는 사람’입니다. 그런 교회입니다. 그런 공동체입니다. 오늘 성막에 나와 있는 영적 의미와 같이, 거룩하고(성막) 율법을 준수하고(법궤) 일용할 양식을 주심에 감사하며(진설병) 빛 되신 하나님(등잔대)을 찬양하고 늘 쉬지 않고 기도하며(금향단) 온 몸을 주를 위해 바치고(번제단), 정결한 삶(물두멍)을 살 때 우리는 비로소 알곡이 되는 것입니다.

5. 예수의 이름으로

앞서 서두에 가라지 대처법에 관한 말씀을 드렸죠? 가라지는 권면도 받지 않고 자기 고집을 꺾지 않는 사람입니다. 고린도 교회는 이런 사람들끼리 서로 세상 법정에 소송합니다. 따라서 바울 사도가 고린도 교회에 권면한 것처럼, “여러분이 서로 소송을 제기하는 것부터가 벌써 여러분의 실패를 뜻합니다. 왜 차라리 불의를 당해 주지 못합니까? 왜 차라리 속아 주지 못합니까?”(고전 6:7, 새번역)

이렇게 말씀합니다. 가라지에 대해 세 번의 권고가 아니라, 차라리 손해 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가라지와 다른 알곡의 삶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죄에 대한 무조건적인 용서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오늘 본문 말씀에서 이렇게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마 18:18)

손해를 봐서라도 서로 화해하고 용서하고 용서받으라는 말씀입니다. 먼저 손을 내밀라는 말씀입니다. 이렇게 땅에서 해결이 되면 하나님께서도 인정해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따라서 사랑은 이웃 사랑이 먼저고, 그 다음이 하나님 사랑입니다. 보이는 형제도 사랑하지 못하면서 어떻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하겠습니까? 사랑의 사도 요한은 이렇게 말하기까지 합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 하는 자니, 보는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느니라(요일 4:20).” 그렇다면 이제 진정한 알곡은 어떤 사람인가요?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들을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마 18:19-20)

알곡은 함께 힘을 합하는 사람입니다. 물론 불의에, 의리로 힘을 합치라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복음송 가사가 잘 설명해 줍니다. “예수, 가장 귀한 그 이름, 예수, 언제나 기도 들으사, 오 예수, 나의 손 잡아주시는 가장 귀한, 귀한 그 이름” 처음과 나중이 되시는 분이십니다. 왕의 왕이 되신 우리의 주님이시고, 언제나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의 손을 친히 잡아 이끄시는 생명의 주님이십니다. 그 이름으로 우리는 일어 설 수 있습니다. 가라지가 혹은 원수가 우리를 향해 와도 쓰러지지 않을 것입니다. 주께서 주신 능력으로 우리는 일어 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복음송을 가사를 생각하며 함께 불러 볼까요?

▲ 예수 가장귀한 그이름, 예수의 이름으로 악보

예수의 이름으로 모여, 늘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대로 사는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런 알곡과 같은 성도, 교회가 되어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그 날까지 주신 사명 잘 감당하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최병학 목사(남부산용호교회)  hak-9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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