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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에 찬 지혜위로부터 난 지혜(야고보서 3:13-18)
이성훈 목사(명일한움교회) | 승인 2020.08.16 16:48
▲ 유튜브 뒷광고는 욕망에 찬 지혜가 보이는 부분이다. ⓒGetty Image
13 너희 중에 지혜와 총명이 있는 자가 누구냐 그는 선행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온유함으로 그 행함을 보일지니라 14 그러나 너희 마음 속에 독한 시기와 다툼이 있으면 자랑하지 말라 진리를 거슬러 거짓말하지 말라 15 이러한 지혜는 위로부터 내려온 것이 아니요 땅 위의 것이요 정욕의 것이요 귀신의 것이니 16 시기와 다툼이 있는 곳에는 혼란과 모든 악한 일이 있음이라 17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견과 거짓이 없나니 18 화평하게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느니라

최근 유튜버들의 뒷광고 논란이 있었습니다. 뒷광고는 영상에 업체로부터 돈을 받고 홍보하고 있음을 밝히지 않고, 마치 자신의 돈으로 산 제품, 음식 등의 후기를 남기는 척하는 영상을 의미합니다. 많은 유튜브 구독자들은 자신들이 유튜버에게 속았다며 구독을 취소하는 등 이런저런 행동을 취했고, 구독자 수가 줄어들기 시작하자 수많은 유튜버가 사과방송을 올리는 일들이 이어졌습니다. 개중에는 유튜브를 그만하겠다고 선언한 유튜버도 있었습니다.

이 상황을 지켜보면서 혼자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사람들은 순수한 걸까, 무지한 걸까. 정말 유튜버들이 순수한 마음에 광고비는 전혀 받지 않으면서 제품을 설명하고 있다고 생각한 걸까? 외국 제품이라면 그럴 수 있겠지만, 우리나라 제품을 설명하는 유명 유튜버가 과연 업체로부터 광고비를 받지 않는다고 생각한 걸까?

예전에 학부 시절, 신촌에 살면서 많은 식당이 문을 개업하고 폐업하는 모습을 봤습니다. 그중 인상적인 식당이 있었습니다. 개업하고 보름도 지나지 않았는데, 식당 외벽에 이런 현수막이 걸렸습니다. “방송 3사 맛집 프로그램에 모두 나온 가게” 케이블TV가 활성화되지 않았던 시절이라 방송 3사에 나왔다면 전부 나온겁니다.

그런데 개업하고 한 달도 안 되었는데 방송국 사람들은 이 식당을 어떻게 알고 찾아왔을까요? 솔직히 신촌을 돌아다니는 학생들 사이에서 그 식당은 전혀 알려지지 않았었고, 어떤 학생들은 그런 식당이 있는지도 몰랐는데, 방송국 사람들이 이 맛집을 어떻게 알고 찾아왔을까요? 그 식당은 제 기억에 일 년이 안 되어 문 닫았습니다.

지금 많은 사람은 TV에 나왔다고 그 식당이 맛집이라고 생각하진 않을 것입니다. 맛집이라니까 맛있는 음식을 먹으러 간다기보다는, TV에 나왔고 유행하니까 가보는 경향이 크다고 생각합니다. TV에서 하는 말을 곧이곧대로 믿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유튜버들의 말은 왜 이렇게 잘 믿고 있었을까요?

‘처음에는 사람들이 이렇게 모르면서 사나?’라고 생각했는데, 유튜버들의 사과방송에 달린 많은 댓글, 수많은 악플을 보면서 이것은 알고 모르고의 문제가 아니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히려 알고 있었지만, 문제가 제기되었으니 함께 욕할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땅의 지혜, 위의 지혜

우리는 흔히 믿음과 행위를 구분하고 야고보서는 행위에 중심을 둔다고 말합니다. 예전에도 말씀드린 적이 있지만, 믿음과 행위는 떼어낼 수 있는 관계가 아닙니다. 믿기에 행동하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시절,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 사이에 벌어진 논쟁을 ‘믿음과 행위’라고 부르며 단순 이분화시켜서는 안 됩니다. 이 중에 무엇이 더 중요하다고 말해서도 안 됩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 전파를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에 ‘믿음’을 강조했습니다. 이어지는 ‘행위’는 당연한 것으로 여기며 ‘우선 믿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복음 전파 초기였기 때문에 사도 바울이 ‘믿는 일’에 중점을 두었다는 사실은 당연할 수도 있습니다.

야고보서는 이미 믿는 사람들이 모여있는 교회를 위해 기록된 편지입니다. 그렇기에 믿음보다는 믿는 사람들의 ‘삶과 행동’에 중점을 둡니다. 초대교회도 지금 교회와 크게 다르지 않았는지, 입으로는 믿는다고 말하지만, 삶은 예수님의 모습과 전혀 닮아 있지 않은 사람들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인지 야고보서를 읽어보면 내용을 이해하기 쉽습니다. 지금 교회들의 모습과 비슷하기도 하고, 지금 우리들의 모습과 비슷하기도 합니다. 욕심에 이끌리면 안 된다는 말씀, 화내지 말라는 말씀, 성도 간에 차별하지 말라는 말씀, 말실수하지 말라는 말씀 등, 요즘 시대에도 쉽게 일어날 법한 일들을 말합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도 어려운 내용은 아닙니다. 오늘 본문은 성도 중 누군가 지혜로운 사람이 있다면, 그는 선행을 통해 자신의 지혜를 드러내라고 말하며 시작됩니다. 선한 행위를 통해 지혜는 온유한 것임을 행함으로 보이라고 말합니다.

다음은 경고의 말씀입니다. 혹시 지혜롭다고 여기는 사람 중에 마음속에 시기와 다툼이 있다면 지혜롭다 자랑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이런 지혜는 땅의 지혜이며, 욕망에 찬 지혜이며, 악한 영의 지혜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에는 시기와 다툼으로 번역되어 있는데, 말을 바꿔보면 질투와 욕망입니다. 그가 아무리 지혜롭다 할지라도 그 마음에 질투와 욕망이 있다면 그곳에는 결국 혼란과 악한 일만 벌어진다고 말합니다.

야고보서의 이 말씀이 어려운 이야기는 아닙니다. 사람이 누군가를 질투하며 그를 깎아내리기 위해 지혜를 사용하였을 때, 사람이 자신만의 욕망을 위해 지혜를 사용하였을 때, 이는 모두를 위한 지혜가 아닙니다. 또 평화와 안정을 주는 지혜도 아닙니다. 그곳에는 선함이 없습니다.

이제 야고보서는 이와 대조적인 지혜를 말합니다. 위로부터 난 지혜입니다. 성경에는 ‘성결하고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견과 거짓이 없다’고 적혀있습니다. 예전에 많이 사용되던 단어들이고 이제는 교회에서만 사용하는 단어들이라 한눈에 감이 잡히지 않습니다.

바꿔보면 이렇게 됩니다. ‘위로부터 난 지혜는 순수하고, 평화롭고, 친절하고, 온순하며, 자비와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공정하며 진실합니다.’ 이어지는 마지막 18절의 말씀도 바꿔서 적으면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은 평화를 심어 정의의 열매를 맺는다’입니다.

온갖 좋은 말이 다 붙어 있는 듯한 17절의 긴 목록은 18절에서 단 하나의 구문으로 표현됩니다. ‘평화를 심는다.’ 위로부터 난 지혜는 ‘평화’라는 한 마디로 바뀔 수 있습니다. 17절에 나타난 목록은 14절의 ‘시기와 다툼’과 대조되는 성품으로 볼 수 있는데, 이런 마음을 가진 사람은 지혜를 사용할 때, 평화를 심고 정의를 거둡니다. 그래서 그는 평화를 이룹니다.

앞선 땅의 지혜를 가진 사람이 지혜를 사용하는 목적이 자신의 이익, 누군가의 몰락을 원해서였다면, 위로부터의 지혜를 가진 사람은 평화를 위해 지혜를 사용합니다. 또 그 평화를 이루기 위해 자신이 먼저 평화를 도구 삼아 지혜를 사용합니다.

우리는 어떤 지혜를 사용하는가?

지금 시대의 사람들은 대부분 지혜롭습니다.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고, 그 지식을 상당히 잘 활용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렇기에 지금 우리는 지식이 있느냐 없느냐, 지혜로운가 지혜롭지 않은가를 따지기보다 어떤 지혜를 사용하고 있는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이를 구분할 수 있는 지침이 되는 말씀이 오늘 야고보서의 말씀입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이 마음속에 질투와 욕망을 품고 있는지, 순수하고 평화롭고 친절하고 온순한 마음을 품고 있는지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가 어떤 방식으로 지혜를 사용하고 있으며, 그가 사용한 지혜가 어떤 결과를 이끌고 있는지는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를 통해 그의 마음에 있는 생각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앞서 유튜버 뒷광고에 대해 말씀드렸지만, 그곳에 찾아다니며 악플을 달고 있는 사람들의 방식은 누가 보더라도 선해 보이지 않습니다. 이들이 어떤 목적을 가지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대부분은 자기만족을 위해 이런 악플을 달고 있을 것입니다. 저는 그들이 악플을 달고 있는 공간 속엔 결코 평화나 정의가 이루어지지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최근 집회를 추진하고 있는 일부 개신교 교회들의 모습을 생각해 보았으면 합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이들의 목적을 모르겠습니다. 무엇을 위해서 하나님의 이름을 내걸고 광장에 나와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본인들은 깨닫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성경에서 믿는 자들이 어떤 정책을 위해 무리를 지어 소리친 일이 있는가? 생각해 본다면 찾기 쉽지 않습니다. 제 성경 지식이 부족하여 저는 이런 상황을 딱 한 군데에서밖에 찾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쳤던 유대인 군중들입니다. 절대 지금 정부를 예수님에 비유하는게 아닙니다. 광장에서 외치는 이들을 유대인 군중들에 비유하는 것입니다.

이들은 어떤 방식으로 자신들의 지혜를 활용하고 있는가? 이들이 촛불 집회를 표방하며 집회를 하고 있기에 그 수단을 판단하기는 어렵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집회 속 욕설과 비방이 난무하고, 그들이 경찰을 향해 폭력을 휘두르는 모습을 본다면, 평화의 방식으로 보이지는 않습니다.

또 생각해 볼 점은 코로나 사태 이후 우리 교회들의 모습입니다. 어떤 교회들은 이런 말을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지키시기 때문에 코로나에 걸리지 않습니다.’ 물론 그 아래에는 마스크를 쓰고 있고, 소독한다는 이야기도 적혀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지키신다는 믿음은 뭐라 할 수 없습니다만, 차라리 ‘우리는 방역수칙을 철저히 지키며 예배드립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도우십니다.’라고 말했다면 어떨까요?

앞의 표현은 신앙인들 사이에서는 이해가 되고 받아들일 수 있는 표현일지 모르지만, 신앙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코로나 확산이라는 불안을 심어주는 표현입니다. 왜 교회가 사람들에게 불안을 안겨주는 표현을 사용해야 합니까? 이는 목회자의 자기만족이거나 성도님들의 취향에 맞춘 방식일 것입니다.

이들은 결코 평화를 심고 있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이들이 무언가를 심는 곳에는 정의가 자라지 않고 혼란과 악함만이 넘쳐납니다. 이들은 땅의 지혜, 정욕의 지혜, 악령의 지혜를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의 교회는 분명 반성해야 합니다. 스스로 하나님의 지혜라고 말하며 땅의 지혜를 사용하고 있음을 반성해야 합니다. 더 반성해야 할 점은 우리의 이런 모습이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히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교회 자체도 그렇지만 우리 자신도 스스로를 되돌아봐야 합니다. 우리는 어떤 마음을 가지고 세상 속에서 지혜를 사용하고 있는지, 우리는 정말 하나님으로부터 난 지혜를 바르게 활용하여 세상에서 지혜롭게 살아가고 있는지, 우리는 평화를 심고 정의를 거두며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인지 생각해 보았으면 합니다.

세상은 질투와 욕망으로 지혜를 휘두르지만, 그 속에서 우리가 평화를 심어나갈 때, 우리는 분명 정의의 열매를 거둘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또 우리는 이 땅에 평화를 이루어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지혜가 여러분에게 내려지길 바랍니다. 이를 세상에서 선하게 사용하시는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이성훈 목사(명일한움교회)  joey810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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