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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곡 2: 전제(奠祭)로 드릴지라도, 기뻐하고!(사 4:2-6; 빌 2:12-18; 마 5:13-16)성령강림후 열둘째주일(8월23일)
최병학 목사(남부산용호교회) | 승인 2020.08.21 17:20

1. 알곡은?

지난주 말씀에 이어 오늘 세 본문 말씀도 알곡에 관한 말씀입니다. 우리는 지난주 말씀을 통하여 알곡은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대로 사는 사람’이라고 배웠습니다.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선한 일, 곧 착한 일을 하는 사람입니다. 나아가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를 맺는 이들이 바로 알곡과 같은 교회, 알곡과 같은 공동체라고 하였습니다.

특별히 이러한 알곡과 같은 교회는 출애굽기에 의하면, 거룩한 성막의 영적 의미와 같이, 법궤를 소중히 여김으로 하나님의 율법을 준수하고, 진설병과 같이 일용할 양식을 주심에 감사하는 사람, 등잔대가 상징하는 빛 되신 하나님을 찬양하고, 금향단과 같이 늘 쉬지 않고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또한 번제단과 같이 온 몸을 주를 위해 바치고, 물두멍을 통해 손발을 씻는 정결한 삶, 이것이 바로 알곡과 같은 사람, 알곡과 같은 공동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오늘 세 본문 말씀은 알곡에 관한 두 번째 말씀입니다. 구약 말씀에 의하면, 죄악이 만연한 세상에서 믿음을 사수한 자들이며 복음서 말씀인 예수님의 말씀으로는, 세상의 소금과 빛의 역할을 감당하는 사람들입니다. 또한 바울이 빌립보 교인들에게 보낸 편지로는, 바울 자신이 빌립보 교인들을 위해 전제로 드려질지라도 기뻐할 만큼 믿음이 좋은 빌립보 교인들이 바로 알곡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 이러한 알곡의 삶을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2. 시온에 남아 있는 자

먼저 구약 말씀을 볼까요? 구약 본문 이사야서는 1장부터 3장까지 타락한 남왕국 유다와 북왕국 이스라엘에 대한 엄중한 경고와 심판의 메시지를 선포합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 말씀인 4장부터는 분위기가 반전되어, 유다의 회복을 선포합니다. 특별히 예루살렘에 남아 있는 자들의 회복에 관한 말씀을 전하는데, 이러한 회복의 영광은 범죄를 깨닫고 회개하는 자들과 또한 죄악이 만연한 세상에서 믿음을 사수하는 자들, 곧 ‘남은자들’에게 임합니다. 설교 전체의 주제와 연결해서는 알곡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말씀을 볼까요?

“그 날에 여호와의 싹이 아름답고 영화로울 것이요, 그 땅의 소산은 이스라엘의 피난한 자를 위하여 영화롭고 아름다울 것이며 시온에 남아 있는 자,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는 자, 곧 예루살렘 안에 생존한 자 중 기록된 모든 사람은 거룩하다 칭함을 얻으리니, 이는 주께서 심판하는 영과 소멸하는 영으로 시온의 딸들의 더러움을 씻기시며 예루살렘의 피를 그 중에서 청결하게 하실 때가 됨이라.”(사 4:2-4)

이렇게 시온에 남은자들, 비록 절망 속에 살았지만, 그리하여 심판을 받았지만, 가라지는 떨어져 나가고, 알곡이 된 남은자들은 그 더러움을 씻고 청결하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 이후에는 하나님께서 다시 출애굽 당시와 같이,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인도해 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말씀을 볼까요?

“여호와께서 거하시는 온 시온 산과 모든 집회 위에 낮이면 구름과 연기, 밤이면 화염의 빛을 만드시고 그 모든 영광 위에 덮개를 두시며 또 초막이 있어서 낮에는 더위를 피하는 그늘을 지으며 또 풍우를 피하여 숨는 곳이 되리라.”(사 4:5-6)

그렇다면, 이제 진정한 알곡은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바로 세상의 소금과 빛 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복음서의 말씀이 바로 그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볼까요?

3. 세상의 소금과 빛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마 5:13-15)

지금 한국 개신교계가 위기입니다. 코로나 바이러스 상황에서 신천지라는 ‘거짓 세례 요한’이 등장하여 판을 깔았다면, 이제 몇몇 교회들의 교회 내 집단 감염으로, 또한 우리 사회의 평균적인 상식에 어긋나는 미신과 광신적인 신앙으로 ‘적 그리스도’의 역할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소금의 짠 맛’은 무슨 역할을 하는 것일까요?

19세기 서세동점(西勢東漸)의 시기에 조선 민중들에게 떠도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여기서 서세동점은 ‘서양이 동양을 지배 한다’라는 뜻으로, 밀려드는 외세와 열강을 이르는 말입니다. 아무튼 이때 “동학에 들어가면 괴질에 당하지 않는다!”는 말이 퍼져 나갔습니다.

당시 서양 세력은 선교사와 그리스도교 교리뿐만 아니라, 콜레라도 가지고 왔습니다. 다른 정보로는 이 콜레라는 1817년 인도에서 발생하여 아시아 대부분을 휩쓸고 지나갔다고도 합니다만 아무튼, 이 괴질로 말미암아 조선의 민중들은 100년 가까이 죽거나 고통을 받았습니다. 사실 조선 시대에는 많은 사람들이 전염병으로 사망하였습니다. 조선이 개국한 1392년부터 1891년까지 500년 동안 전염병이 발생한 햇수는 160년이나 됩니다.

수운 최제우 선생이 태어나기 17년 전인 1807년부터, 12세였던 1835년까지 약 28년간 인구가 756만 명에서 661만 명으로 대략 100만 명 정도 줄었는데, 이것은 전염병과 기근 때문인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조선 후기인 1749년에는 44만 3천명, 1750년에는 60만 명이 전염병으로 사망하였습니다. 정체도 알 수 없는 이 역병에 해월 최시형 선생(1827-1898)은 이렇게 조언을 합니다.

“침을 아무 데나 뱉지 말며, 코를 멀리 풀지 말라. 코나 침이 땅에 떨어졌거든 닦아 없애랴. 먹던 밥을 새 밥에 섞지 말고, 먹던 국을 새 국에 섞지 말라. 이리하면 연달아 감염되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해월의 탁월한 위생학적 통찰은 동학교도들을 콜레라로부터 지켜주었습니다. 오늘 대한민국에 목사들은 감염병이 도는데, 교회 건물로 교인들을 불러 모읍니다. 물론 교인들의 요청도 있겠지요. 여러 가지 어쩔 수 없는 이유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정부 당국의 권면을 신앙적 박해라고 교단장이 나서서 반박합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밖으로 나가 불법적인 대중 집회를 개최합니다. 그 명분이 정의롭고 세상 사람들이 공감하는 것이어야 하는데, 그렇지도 않습니다.

나아가 오늘날 한국의 개신교는 ‘타자 혐오’에 앞장서고 있습니다. 자신만이 옳고 정의롭고 다른 모든 사람들은 잘못되었다는 것입니다. 대화가 되지 않습니다. 미신적 광신으로 상식을 벗어나 세상 사람들로부터 지탄을 받고 있습니다. 또한 자신의 이러한 맹목적인 탐욕을 위해서는 ‘생태계 보호’는 뒷전입니다. 2000년 기독교 전통의 깊은 영성을 ‘사이비 영성’으로 대신합니다. 따라서 이제 한국의 개신교는 150년 전 동학보다 못한 수준으로 전락했습니다.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어야 하는데, 세상의 근심거리가 되었습니다. 역사의식도 없고, 상식도 없고, 하다못해 성경에 대한 깊이도 없이, 광적인 믿음과 맹목적인 신앙으로 세상의 어둠과 밟히는 소금이 되어 가고 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다시 한번 우리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마 5:16) 

4. 나를 전제로 드릴지라도 나는 기뻐하고

그러나 우리의 착한 행실을 통해 세상 사람들이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의 잘못된 행실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이름이 망령되이 일컫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진정한 알곡의 삶을 살기가 참 힘듭니다. 그런데 오늘 바울 사도는 빌립보 교인들에게 더 힘든 알곡의 삶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이렇게 권면합니다.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빌 2:12)

예수님께서 부활, 승천하셨습니다. 보혜사 성령님을 보내주시긴 했지만, 예수님께서 육신의 몸으로 우리와 함께 계신 것과는 차이가 납니다. 사실 예수님과 3년을 동행한 제자들도 마지막에는 배반하고, 또 부인하기도 했던 것처럼 진정한 알곡의 삶을 살기가 참 힘듭니다. 그런데 이제 바울 사도도 자신이 없을 때라도 빌립보 교인들에게 알곡과 같은 삶을 살라고 하는 것입니다. 빌립보서는 옥중서신이죠? 바울을 만날 수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로 복종하고 배려하고 이해하고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바울이 없을 때, 곧 예수님도 없고, 하다못해 성령의 임재도 느끼지 못할 때조차도 어떻게 하라는 것입니까? “항상 복종하고 두렵고 떨림으로 알곡의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놀라운 것은 그렇게 행하도록 하는 것이 우리의 의지나 노력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이시라고 합니다. 우리 힘으로는 할 수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해 우리 안에서 일하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빌 2:13-14)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 없이 하라고 합니다. 도대체 이것이 가능할까요? 마음속에 원망이 가득 차, 입에서 불평과 불만으로 터져 나옵니다. 서로 시비하고 싸우는 것이 오늘 우리들의 모습인데, 참으로 바울 사도의 말씀은 순종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이렇게 알곡의 삶이 힘듭니다. 게다가 바울은 구약 시대의 제물에 합당한 조건인 ‘흠이 없고 순전’하라고 빌립보 교인들에게 당부합니다. 말씀을 볼까요?

“이는 너희가 흠이 없고 순전하여,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세상에서 그들 가운데 빛들로 나타내며, 생명의 말씀을 밝혀 나의 달음질이 헛되지 아니하고, 수고도 헛되지 아니함으로 그리스도의 날에 내가 자랑할 것이 있게 하려 함이라.”(빌 2:15-16)
 
이렇게 빌립보 교인들이 알곡의 삶을 살게 되면, 바울은 자신의 달음질, 곧 복음을 위한 사역과 수고가 헛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따라서 빌립보 교인들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날에 자랑할 것이 있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바울은 이러한 빌립보 교인들의 알곡과 같은 삶에 자기 자신을 ‘전제(נסך)로 드릴지라도 가능하다고 합니다. 말씀을 볼까요?

“만일 너희 믿음의 제물과 섬김 위에 내가 나를 전제로 드릴지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 이와 같이 너희도 기뻐하고 나와 함께 기뻐하라.”(빌 2:17-18) 

구약시대에는 5가지 제사 종류가 있습니다. 번제와 소제, 화목제와 속죄제, 그리고 속건제 입니다.

▲ 구약의 5대 제사의 종류 ⓒ싸이티처

이러한 5가지 제사를 드리는 4가지 제사방법이 있습니다. 화제, 요제, 거제, 전제입니다.

▲ 구약의 4가지 제사방법 ⓒ싸이티처

오늘 본문에 나오는 전제(奠祭), 곧 ‘네세크(נסך)’는 ‘들이 붓다, 완전히 붓다’라는 뜻의 ‘나사크’에서 유래된 단어입니다. 포도주나 독주를 다른 제물에 부어서 드리는 것을 말합니다. 붓는다는 것은 제물을 지극히 거룩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혹시라도 제물을 가져오는 도중에, 혹은 제사를 드리는 중에 사심이 들어간 것을 제거하기 위해 포도주나 독주를 붓는 것입니다. 이렇게 구별된 제물이라도 우리 마음으로 인해 부정해질 수 있기 때문에, 그것을 씻어내야 한다는 의미가 바로 전제의 의미입니다.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을 위해 자기 자신은 다만 제물을 정결하게 하기 위한 전제의 역할을 할지라도 기뻐하겠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믿음의 제물과 섬김에 전제의 역할을 할지라도 기뻐한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자신은 죽어 없어지고 다른 사람이 돋보이도록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이 그렇지 않습니까? 이것이 바로 소금의 정신입니다. 소금의 맛입니다. 또한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우리의 ‘착한 행실(마 5:16)’입니다. 진정한 소금이 될 때 아름다움 빛으로 부활하는 것입니다. 알곡은 바로 이러한 삶을 지향하는 사람들이며 이러한 삶을 추구하는 공동체입니다.

5. ‘타자 혐오’, ‘자연 파괴’, ‘사이비 영성’을 대신하여!

미국의 종교사회학자 필 주커먼은 이렇게 말합니다. “앞으로의 종교는 우주의 온갖 신비를 경탄하고 경외심을 가지며 삶을 즐거워하는 종교 없는 삶, 즉 ‘경외주의(aweism)’가 될 것이다.” 같은 맥락으로 가톨릭 신학자 칼 라너도 “21세기에는 기독교가 심층적이지 않으면 아무 것도 아닐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건물과 사람 수, 성장과 부흥의 개신교가 이제 종교의 본질적인 것을 다루지 않는다면(아니, 못한다면) 바벨탑과 같이 무너질 것이라는 말입니다. 지금 코로나-19 이후 시대에 그 붕괴의 모습을 보고 있지 않습니까? 자신만 옳고 타자를 혐오하는 모습 속에 그 어떤 창조주 하나님의 신비와 사랑을 경험하고 자신의 부족을 바라보는 신앙적 겸손이 있습니까? 타자를 만남으로 경험하는 신비, 자연 만물을 접하며 느끼는 황홀, 영적 체험을 통해 맛보는 신비가 이제 개신교의 ‘타자 혐오’, ‘자연 파괴’, ‘사이비 영성’을 대신해야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바울 사도와 같이 다른 사람의 구원을 위해 나 자신이 전제와 같이 드려질지라도 기뻐하는 삶을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그런 알곡과 같은 삶, 또한 그런 교회 공동체를 만들어 나가시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최병학 목사(남부산용호교회)  hak-9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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