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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신교 몰락의 이유악은 어떤 모양이라도 버리라(데살로니가전서 5:14-22)
이성훈 목사(명일한움교회) | 승인 2020.08.23 16:40
▲ 그리스도인들은 교회라는 공간에 한정해 살아왔다. 이제 이웃의 손을 잡아야 할 때이다. ⓒGetty Image
14 또 형제들아 너희를 권면하노니 게으른 자들을 권계하며 마음이 약한 자들을 격려하고 힘이 없는 자들을 붙들어 주며 모든 사람에게 오래 참으라 15 삼가 누가 누구에게든지 악으로 악을 갚지 말게 하고 서로 대하든지 모든 사람을 대하든지 항상 선을 따르라 16 항상 기뻐하라 17 쉬지 말고 기도하라 18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19 성령을 소멸하지 말며 20 예언을 멸시하지 말고 21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고 22 악은 어떤 모양이라도 버리라

코로나 19는 지금 시대에 큰 아픔을 주고 있습니다. 그와 동시에 지금 사회 속에서 개신교가 얼마나 잘못된 길을 나아가고 있는지 보여주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한국 개신교가 잘못된 길을 가고 있다고 수없이 말해왔습니다. 개신교는 반성하고 회개해야 한다고 항상 말했습니다. 하지만 한국 개신교는 결국 빠져나올 수 없는 나락으로 떨어져 버렸습니다. 많은 사람이 말하듯 2020년 8월 15일, 한국 개신교는 사망 선고를 받았습니다.

지금이라도 우리는 왜 이런 상황에까지 이르게 되었는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는 어디에서부터 잘못된 길을 걷게 되었는지를 고민해야 합니다. 개신교의 잘못된 점에 대해 목록을 나열하자면 끝도 없을 것 같지만, 조금 더 근본적인 원인을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오늘 저희가 생각해볼 본문은 대부분의 그리스도인이 외우다시피 하는 데살로니가전서 5장의 말씀입니다. 이 유명한 말씀을 우리가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를 따져보고 그곳에서 우리의 문제를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단어의 추상화

오늘 본문의 15절에는 선과 악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22절에도 ‘악은 어떤 모양이라도 버리라’고 말합니다. 복음서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아는 우리라면, 선과 악은 다른 단어로도 바꿔 쓸 수 있습니다. ‘선행’과 ‘악행’입니다. 악한 행위에 대해 악한 행위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에게 선한 행위로 대하라는 말씀으로 바꿀 수 있습니다.

그런데 개신교는 선과 악에 ‘행위’라는 단어를 붙이길 거부합니다. 선, 악은 어떤 추상적 개념이라고만 생각하고 우리의 삶과 행동에 연결하길 거부합니다. 이는 마치 교회가 성경 본문에 나타난 ‘의’를 ‘정의’로 대체하거나 ‘화평’을 ‘평화’로 대체하길 거부해온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원문에서는 ‘의’와 ‘정의’, ‘화평’과‘ 평화’의 차이가 없습니다.

교회를 다니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무엇이 선행인지 무엇이 악행인지 구분할 수 있습니다. 선한 행동과 악한 행동은 누구나 알 수 있고, 이를 규정하는 방식은 세상이 발전되어 감에 따라 조금씩 바뀌게 됩니다.

그래서 교회는 선과 악을 끊임없이 추상 개념화합니다. 세상 사람들과 똑같은 선행과 악행을 말하지 않기 위해서, 발전하는 세상의 사상이 유입되지 않도록 ‘행위’라는 말을 자꾸만 떼어버립니다.

선과 악이 점점 추상적인 개념이 되어감에 따라 목사가 옳다고 말하는 것이 ‘선’이 되어버리고, 목사가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 ‘악’이 됩니다. 왜 개신교인들이 광화문 집회에 참석하며 지금 정부를 욕하고 있을까요? 목사가 그것을 ‘악’이라고 규정했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지금까지 이런 상황을 즐겨왔습니다. 목회자의 말에 순종해야 한다는 말은 지금 시대에 통하지도 않을 이야기이지만, 선과 악의 개념을 자신들의 손에 쥐고 있기에 무조건 자신의 말에 순종할 수밖에 없는 성도들을 만들어왔습니다.

이렇다보니 목사라는 직업을 취득한 강간범이 여성도를 향해 “빤스 내려봐라”라고 말해도 “아멘”으로 화답하는 성도마저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이단이기도 하지만 지금은 성폭행범인 만민중앙교회의 이재록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가 보기에도 악한 행동을 하면서도 이것을 ‘선’으로 둔갑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결코 행동이 없는 개념이 말하지 않습니다. 성경의 모든 말씀은 행동으로 이어져야만 하고 이는 당시 사회에서 말하는 개념과 결코 유리되어 있지 않습니다. 특히나 사도 바울은 사회에 반하는 사상을 말하지 않았습니다.

교회는 언제나 고민해야 합니다. 우리가 말하고 있는 ‘선’이 성경이 전하고 있는 ‘선’인지를 먼저 고민해야 합니다. 그 후에 우리는 이것이 세상 속에서도 ‘선’인가를 고민해야 합니다.

이는 모든 말씀에 똑같이 적용되어야 하는 규칙입니다. 성경이 금지한 돼지고기 섭취는 사회문화적 차이라면서 허용하고, 동성애는 성경에 안 된다고 써있으니까 절대 금지해야 한다는 이중잣대를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교회로 한정시킴

다음으로 생각할 점은 실천의 장소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그렇지만 성경에는 분명 실천적 지침이 나타나 있습니다. 추상 개념으로 바꾸지 못하는 행동 지침들이 나타납니다.

14절에 나타난 게으른 자들을 권계하는 일, 마음이 약한 자들을 격려하는 일, 힘없는 자들을 붙들어 주는 일, 오래 참음, 쉬지 말고 기도함, 이런 일들은 누가 어떻게 보더라도 실제적인 행위를 동반해야만 하는 일입니다.

이런 본문들을 말할 때, 성경에 나타나지 않는 장소 한정이 일어납니다. ‘교회에서’라는 말이 붙어버립니다. 대표적인 예가 ‘쉬지 말고 기도함’일 것입니다. 본문에는 어디에도 장소가 적혀있지 않습니다만, 이 본문은 언제나 ‘교회에 나와 기도하라’는 식으로 전해집니다.

마찬가지로 ‘게으른 자들을 권계하라’는 말은 교회 봉사에 힘쓰지 않거나, 전도에 힘쓰지 않는 성도들을 권면하여 열심히 신앙생활 하도록 이끌라는 의미로 받아들여집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이 말한 ‘게으름’은 신앙생활의 문제가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의 앞 장인 4장 11절에서 성도들은 ‘자기 손’으로 조용히 일하라고 말합니다. 그 이유는 12절에 나타나는데, ‘외인에 대하여 단정히 행하고 또한 아무 궁핍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라고 말합니다.

외인에 대해 단정히 행한다는 말은 교회 밖에 있는 이들에게 단정한 모습, 점잖은 모습을 보이라는 말이기도 합니다. 후반절의 ‘아무 궁핍함이 없게 한다’는 말은 원문에는 ‘붙잡을 필요가 없도록’입니다.

일본어 성경의 경우 앞의 ‘단정함’과 연결시켜 ‘이에 부족한 점이 없도록’으로 번역했는데, 영어 성경은 모두 ‘다른 이에게 의존함이 없도록’이라고 번역합니다. 우리 성경에서는 왜 ‘궁핍함’으로 번역했는지 모르겠지만, 세상에 의지하지 않도록 스스로 일하라는 말입니다.

사도 바울이 말하는 ‘게으른’ 사람은 교회 봉사에 열심을 내지 않는 사람이 아닙니다. 세상 속에서 열심히 일하지 않으면서 누군가에게 의지하며 살아가려는 사람입니다. 바울의 진정서신에 속하지는 않지만, 데살로니가후서는 이런 바울의 의미를 조금 더 명확하게 적어놓습니다.

데살로니가후서 3장 6절은 ‘게으르게 행하고 우리에게 받은 전통대로 행하지 않는 모든 형제는 떠나라’고 말합니다. 이어서 8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누구에게서든지 음식을 값없이 먹지 않고 오직 수고하고 애써 주야로 일함은 너희 아무에게도 폐를 끼치지 아니하려 함이니” 세상에서 자신의 손으로 일하고 수고하여 먹을 것을 얻으라는 말입니다.

교회가 ‘열심을 내야 하는’ 장소를 교회로 한정시켜버릴 때,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속에서 자신의 역할을 소홀히 하게 됩니다. 교회만이 삶의 전부가 되어버리고 세상에서 맡은 역할들을 외면하게 됩니다. 그렇기에 교회는 점점 사교 집단으로 변질되어 버리게 됩니다.

교회가 나갈 길

어떤 분들은 교회에 정치사상이 유입되어 잘못된 길을 가고 있다고 말하기도 하고, 어떤 분들은 잘못된 신학 교육 방식, 손쉬운 목사 자격 취득 방식을 지적하기도 합니다. 모두 맞는 이야기이지만, 저는 우리가 성경을 제멋대로 다루고 있던 점이 가장 큰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너는 얼마나 잘났기에 이런 비판을 하냐고 생각하시는 분이 계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잘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스스로도 저런 잘못을 범하진 않았는지, 예전 설교문들을 살펴보며 계속 반성하고 회개하고 있습니다.

최근 인터넷 상에서 누군가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개신교 일각에서는 전광훈이 잘못된 목사라고 계속 말하고 있는데, 자신은 그가 말하는 하나님과 일반 개신교 교회에서 말하는 하나님 사이에 다른 점을 발견하지 못했다고 말합니다.

저를 비롯하여, 우리 모두는 지금까지 가져왔던 우리의 신앙을 되돌아봐야 합니다. 우리는 무엇을 위해 신앙을 가지고 있었는가? 우리는 신앙을 어떻게 발현하며 살아왔는가? 우리는 그리스도의 향기를 세상에 전한다며 살아왔는데, 우리가 전한 향기는 좋은 향기였는가? 지독한 냄새였는가를 지금 되돌아봐야 합니다.

교회가 예배로 모이지 못하면 교회가 망한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계신다면, 제발 에스겔의 선포를 읽으시길 바랍니다. 성전이 무너진 후에 에스겔은 ‘그럼에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친히 바벨론에 오셨다’고 선포합니다.

또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한 후에 한 말을 읽으시길 바랍니다. 열왕기상 8장 27-28절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참으로 땅에 거하시리이까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주를 용납하지 못하겠거든 하물며 내가 건축한 이 성전이오리이까. 그러나 내 하나님 여호와여 주의 종의 기도와 간구를 돌아보시며 이 종이 오늘 주 앞에서 부르짖음과 비는 기도를 들으시옵소서.”

성전은 하나님을 모신 곳이 아닙니다. 그저 우리가 기도할 수 있게 하나님께서 자신의 이름을 맡기신 곳일 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참으로 믿는다면 교회라는 공간에 우리의 신앙을 한정시킬 이유가 없습니다. 오히려 교회는 항상 세상을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코로나 사태로 모두가 힘든 시기입니다. 교회만이 힘들다는 오만은 벗어버리고, 세상에 모든 어려움을 겪는 분들을 돌아봅시다. 또 코로나를 막기 위해 불철주야 고생하시는 방역당국과 의료진들을 돌아봅시다. 그들을 위해 기도합시다.

그리고 세상과 소통하는 개신교가 됩시다. 우리가 세상을 외면하고 교회에만 집중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세상으로 내쫓으셨습니다. 세상을 바라보고 항상 대화하며 발맞춰 나가고, 참된 그리스도의 향기, 그리스도의 아름다운 향기를 전할 수 있을 때에 개신교는 다시 일어서게 될 줄 믿습니다.

우리가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고자 끊임없이 노력하고, 마음속으로만 신앙을 품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행함으로 세상에 보여줄 때,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며 우리를 다시금 세워 주실 줄 믿습니다.

이성훈 목사(명일한움교회)  joey810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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