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계대전의 폐허 속에서 쌓아올린 하버마스의 이론은 오늘날 더욱 그 빛을 발하고 있다. ⓒGetty Image

하버마스에 의하면 인간의 학습과정은 기술적 지식 및 도덕적 실천적 지식의 차원들에서 행해진다. 이 두 영역에서는 모두 “커가는 통찰의 논리”가(1) 통용되매, 이 논리의 연속적인 일련의 단계들은 본질상 가능한 문제해결의 규율들을 제시할 수 있다. 전개논리의 개념을 구체적인 전개역할과 혼돈하여서는 안 된다. 학습과정의 논리적 구성틀은 학습과정의 경험적 메카니즘, 그것의 나타나는 형태들과는 명확히 구별되어야 한다. 이 구별의 독특함이 하버마스의 모델을 전통적인 진화이론들과 구분가능하게 만들고 있다.

사회·문화적 진화의 전개논리

하버마스는 사회·문화적 진화를 구조적 가능성들이 어떤 형태의 질서잡힌 연속으로 실현되고 있는 것으로 보는데, 이때의 구조적 가능성들은 오직 사실이 발생한 뒤에만 확인될 수 있으며, 따라서 어떤 자연 법칙적으로 규제되는, 번복될 수 없는 인과과정으로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 “나는 사회체계들의 진화적인 변화를 설명하는데 있어 전개논리들(의식의 구조들)과 역사적 과정들(사건들)을 동시에 연관시켜 고찰할 것을 제안한다 ···.”(2) 그 외에도 중요한 것은 이 둘의 기본적인 학습과정들이 단순히 하나의 공통된 이름을 갖고 있을 뿐이 아니라, 또한 그 둘이 하나의 종합적인 구조 안에서 결합된다는 사실인데, 그것은 곧 조직의 원칙에서이다.

하버마스는 조직의 원칙을 생산방식보다 더 고차의 추상단계에 올려놓는다. 이 원칙은 생산력의 관심에서 뿐 아니라 또한 사회통합의 관점에서도 하나의 사회형성을 가능케하고 있는 학습과정들을 결정하고 있다. 그것은 기능적으로 효능이 비슷한 다수의 생산방식들과 일치 가능하다. “나는 전개 논리적으로 재구성해낼 수 있는 학습의 단계들에 의해서 가능해지며 사회의 그때 그때이 새로운 학습수준을 제도화시키고 있는 그러한 혁신을 조직의 원칙이라 이해한다.”(3)

하버마스는 이제 사회적 조직의 원칙을, 그때그때마다의 사회통합의 지배적인 형태를 확정짓고 있는, 사회형성의 제도적 핵심을 통해 특징지으려 시도한다.(4) 그는 여러 상이한 사회적 조직의 원칙들에 의해 규정되고 있는 사회통합의 형태들을 진화적인 표식에 따라 분류한다. 이때 하버마스는 행위실행능력(Handlungskompetenz)의 질에서 성립되고 있는 그러한 표식에만 자신의 관심을 국한시킨다. 특히 무엇보다도 그때그때의 사회통합의 형태에 상응하는 도덕의식의 질에 관심을 쏟는다.(5)

우리는 더 이상 하버마스의 논증의 단계들을 뒤밟을 필요는 없다. 그것은 결국 근본에 있어 다만 하나의 탐구계획일 뿐이라고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우리에게는 그의 연구의 결과만으로도 충분하다. 커다란 진화단계가 역사적으로 전개되어온 순서를 내보여주고 있는, 하버마스의 사회적 조직 원칙들에 대한 해설을 간략하게 아래와 같이 도식으로 표현할 수 있다(다음의 도표를 볼 것).(6)

역사적 흐름에서 본 사회 진화

하버마스의 기본논증과 논제

하버마스는 네 개의 기본이 되는 논거에서부터 출발하고 있으며(미주 7) 이 넷의 연관이 그의 진화이론의 토대를 이루고 있다:

이러한 논거들에서부터 하버마스는 하나의 결론을 끄집어내는데, 이 결론은 또한 그의 진화이론의 기본논제를 간결하고 힘차게 요약하고 있다: “도덕적 실천적 의식 영역에서의 학습과정은 사회진화에 있어서 걸음걸이를 잡아주는 길잡이 역할을 한다.”(11)

따라서 하버마스의 기본논제를 우리는 다음과 같이 종합 요약할 수 있다:

그러나 하버마스가 깨닫지 못한 것

하버마스 역시 마르크스처럼 자신의 사상을 비판이라 이해한다. 그런데 마르크스가 사회를 경험적인 것에서부터 고찰했다면, 그래서 그것에 의해 규정되고 있는 것으로 보고 그 영역 안에서 보다 좋은 미래에로 몰고가는 계기들을 확정하여 그 안에서 전진 발전해 나아가는 “토대”-이것이 사회의 “상층구조”를 자기측으로 끌어당겨 규정하고 있다-를 보고 있는데 반해, 하버마스는 공공성(여론)에서 새로운 “갈등의 지대”(13)를 보고 있기 때문에, 그의 눈에는 “합법성을 마련해 놓는 것”(14)이 자본주의에 있어 가장 중요한 체계문제가 되고, 전체 사회적 발전을 위한 “실천적 물음들이” 중심주제로 대두된다. 해방에 대한 관심 역시 이제는 더이상 직접 경제에서부터 동기유발되고 있지 않다.(15) 사회를 부정하는 힘은 “토대”에서부터가 아니고 오히려 “상층구조”에서부터 자라나고 있다.

하버마스 철학함의 “강단철학적인” 기본특성의 하나로서 우리는 분명 문제를 교묘(셈세)하게 범주적으로 구별해내고 있는 그의 태도를 들 수 있다. 그는 철학적 문제들을, 폭넓은 경험적 탐구자료들을 취사 선택하여, 분리·분류·세분화를 통해 해결해보려 시도한다. (이점은 중세의 스콜라 철학의 방법과 비교가능할 것이다.)(16) 그의 『역사적 유물론의 재구성』에서도 우리는 이러한 기본특성을 찾아볼 수 있다. 여기서 하버마스는 생산력과 생산관계와의, 토대와 상층구조와의 관계에 대한 마르크스식의 해석을 “제도적 틀” “기술적 지식” “의사소통적 행위” “도구적 전략적 행위” “사회통합” “체계통합”등의 새로운 범주들의 도움을 빌어 재구성해보려 시도한다. 여기서 제기되는 물음은 과연 그러한 재구성이 문제해결에 적합한 시도인가이다. 그렇지 않은듯 한 데에 문제가 있다. “제도적 틀”과 “기술적 조직적 지식” 등등의 분리를 엄격하게 견지해 나가면-하버마스가 주장하듯이-그가 구별하고 있는 차원들의 상호보완적 구성이 가리워질 수 있고 두 차원중의 한 차원-하버마스의 경우에 있어서는 기술적 조직적 지식의 차원, 생산력의 차원-을 평가절하하게끔 만들 수도 있다.

생산력과 생산관계사이의 관련에 대한 하버마스의 해석에 우리는 또 한군데의 약한 곳을 지적해낼 수 있다. 하버마스는 재삼 반복하여 자연진화와 인류역사와의, 자연과 사회와의 관계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나 하버마스가 사용하고 있는 범주적 세분화 때문에, 그리고 그로부터 귀결되는 상호행동 및 의사소통이론적 관점의 선호 때문에, 하버마스는 인간 · 자연관계의 종합을 그의 논증에서 문제에 부합하게 체계적으로 주제화시킬 수 없었다. 그러기 때문에 하버마스는, 자연적 계기들의 관계이며 동시에 사회화이기도 한 사회적 실천의 이중성격을 잘못 인식하고 있고, 사회발전을 유기체적 진화에로 환원시키고 있다.(18)

하버마스식의 진화이론은 어떤 다른 것이라 불리울 수는 있겠지만 “사회진화의 유물론적 이론”(19)이라는 칭호는 합당치 않으며 더 더욱이 역사적 유물론이란 이름은 말할 나위도 없다.

우리는 하버마스의 “사회.문화적 진화이론”을 현대의 행위의 갈등과 방향상실의 위기에 대처하여 학문의 차원에서 궁극적 삶과 행위의 방향지침체계의 혼란을 극복해 보려는 하나의 시도로 해석할 수 있다. 사회가 산업화되어가고 전문화 세분화되어가면 갈수록 현대화의 과정과 더불어 점점 더 빨리 그리고 더 근원적으로 전수된 사회적 생활형태들과 조직체계들이 그 설득력을 잃어가고, 여태까지 우리의 전체 사회를 통합시키고 정당화시켜왔던 궁극적 방향지침, 세계상, 규범체계등이 그 규제력을 상실해서 이제 더 이상 그전처럼 사람들의 삶과 행위를 규정하지 못하게 된다. 여기서는 간략하게 일련의 규범문제를 둘러싼 학술토론이 얻은 결론만을 주목하여(20) 거기에서 하버마스의 “규범적 진화이론”이 간접적으로 얻게된 비판적 관점에 유의하고자 한다.

규범들(행위의 목표, 삶의 형태, 방향지침체계)은 이제 더 이상 존재론적 자연법적 가치윤리학적 실존론적 전제에서부터 근거제시되거나 변론될 수 없다. 그리고 헤겔과 마르크스에 의거해서 새롭게 전개시도된 역사철학적 이론과 실천의 변증법적 중개의 모색 역시 갈수록 설득력을 잃고 있다. 하버마스의 사회.문화적 진화이론도 드러나게건 안 드러나게건 원칙에 있어서는 너무나 일직선적이고 단일인과율적이고 유럽중심적으로 전개되어 나가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하버마스의 상호이해, 대화, 합의, 의사소통의 강조는 높이 평가되어야 한다. 최근에는 두드러지게 규범의 정당화와 관련하여 여러 다른 토의이론들이 거론.적용되고 있다. 이제는 규범과 같이 타당성, 상호인정, 동의등을 요청하고 있는 것은 참석자들 앞에서 토의를 통해 논증적으로 변론될 수 있어야 한다.

여기에서도 하버마스의 토의이론(Diskurstheorie)과 관련하여 몇 가지 문제점이 지적될 수 있다. 사람들이 토의를 통해 구체적 삶의 형태와 특정의 도덕적 법적 정치적 제도를 변호 내지는 토의공동체내에서의 억압없는 자유와 자율적 주체에 대한 요청은 지나친 것으로 철회되어야 한다. 실천적 토의를 진행시키려는 사람은 누구나 대화의 상대자가 그들 자신의 그때그때의 생활 및 행위공동체내에서-비록 단초적인 양상으로이더라도-이미 선하고 행복한 삶에 대해 나름대로 알고 있다는 그 사실에서부터–예를 들어 산파술적으로 해석학적으로 실용론적으로-출발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가 달성하고 제도화한 자유를 위태롭게 하지 않으면서도 필요한 구체적 개별 개혁을 주장·관철하기를 원할 때에, 우리에게 이미 앞서 주어져 있는 생활 및 행위의 방향지침체계 전체를 이론적인 이유에서도 실용적인 이유에서도 정당화의 강요아래 놓을 수는 없다. 실천적 토의에 무엇이 인간을 위해 방어할 가치가 있고, 무엇이 그들 삶의 임의로 바꿀 수 없는 필수조건인지 결정하도록 내맡겨져 있지 않고 또한 그것은 그때 그때 도달하게 될 동의에 예속될 수 없다. 적어도 동일성을 근거짓고 있는 전통의 존립요소와 도덕적 실천적 역할은 인정해야 한다.

실천적 토의에서는 지금까지 받아들여져 왔던 전통 전체를 변호하거나 비판하는 것이 문제가 되지 않는다. 거기에서 중요한 것으로 부각되는 것은 특정한 조건아래에서 문제가 되어버린 특정의 조건들에 대한 논증적 변론과 비판이다. 특정한 전통을 비판하거나 그것을 진회적으로 또는 혁명적으로 변화시키기를 원하는 사람은, 의식적으로건 무의식적으로건, 그가 인정하고 있는, 그리고 그가 견지하기를 바라는 다른 전통의 이름으로 그것을 행하고 있는 것이다. 이점에 있어 하버마스 역시 예외가 아니다. 그가 그의 최근의 저서 『의사소통 행위 이론』의 결론부분에서 “근대에 대한 이론”을 다루고 있는 것은 이러한 맥락에서이다.(21)

이기상 명예교수(한국외대 철학과)  saemom@cho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