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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도 이주 조선인들의 땅을 둘러싼 갈등과 아픔점산호와 호주인 (1)
이이소 | 승인 2020.09.05 18:13

점산호(占山戶)는 1881년 청조의 동북지역 자립과 강화를 위한 이민실변이 시작되면서 나타난 대토지를 소유한 한족의 대지주를 일컫는 말로 조선간민의 수탈과 억압, 절망과 고통의 상징이었다. 호주인(戶主人)은 점산호와 조선간민 사이에서 마름으로 중개인 역할을 하는 사람에 대한 호칭이었다. 초기에는 한어를 모르거나 치발역복을 거부하는 조선인들을 대표하여 교섭하고 중개하는 등등의 일을 했으나 후기에는 조선인 마을의 향약이나 패두가 되어 동족인 조선간민을 수탈하여 지주가 되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호주인은 조선간민들의 분노와 저주, 한과 애환의 대상이 되었다.

점산호는 한국에서는 전혀 알지 못하였던 말이었으나 연변에서 출판된 책을 통하여 알게 되었다. 조선인들이 간도로 이주하여 정착을 위해 땅을 구입하거나 소작농이 되려면 통과의례로 호주인과 점산호를 만나야 했다. 제 아무리 더럽고 치사하고 무서워도 점산호는 조선 이주민이 피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연변에서 가장 먼저 접한 대지주(점산호)에 대한 글은 명동촌 이야기에서였다.

“지신진 신동골 어구에 우뚝 솟은 선바위는 아무 때 보아도 그렇다. 대지주 동한이 이곳 땅을 차지하고 있을 때만 해도 선바위를 ‘비둘기바위’라고 불렀다고 한다.”(1)

“명동촌 일대는 19세기 중엽부터 개척되기 시작하였으며, 초기 이 일대의 토지는 동한이라는 한족 지주가 소유하고 있었다.”(2)

대지주 동한은 산동 사람으로 청조가 1881년 두만강 이북의 봉금을 해제하고 이민실변을 실시하자 재빨리 화룡 지신으로 들어와서 일대의 땅을 헐값에 매입하였다. 그리고 귀화하지 않아서 토지를 구입할 수 없는 조선 소작인들의 약점을 이용하여 명동, 지신 일대의 황무지를 마구잡이로 개발하였다. 점산호로서 그의 위세가 등등하였지만 1898년 그가 죽자 그의 자녀들이 고향으로 돌아가고자 헐값으로 땅을 방매하였다.

그 때, 김약연을 비롯한 김하규, 남종구, 문병규 등은 일찍 명동에 들어와서 살고 있던 김항덕을 통해서 육도하 양쪽에 있는 땅을 구입하였는데 당시 육도하 북쪽에는 장재촌, 룡암촌(후에 명동촌으로 바뀜), 중영촌, 성교촌이 남쪽에는 풍락동, 소룡동, 대룡동, 화전동(현재는 없어짐) 등이 자리 잡고 있었다. 김약연 일행은 1908년 4월 27일에 <명동서숙>을 창립하여 근대식 교육과 함께 민족의식을 일깨우는 교육을 실시하였고 1909년 정재면의 권면을 받아들여 명동교회를 설립하였다. 

“1896년에 대유전동의 주민들은 돈을 모아 리년발에게서 18일갈이 숙지(3)와 황무지를 3,000원으로 샀다. 이는 그 후 많은 조선 이민들이 들어오는데 유리한 조건으로 되었다.”(4)

대유전동의 제일 먼저 정착한 사람은 호남에서 온 한족 리년발이었다. 그는 1890년에 남강초간국(미주 5)으로부터 대유전동일대의 황무지 소유권을 얻고 그 해부터 함경북도 경성 등지에서 온 조선인들을 소작인으로 마구 부려서 황무지를 개간하여 점산호가 되었다. 대유전동의 주민들은 1896년에야 비로소 리년발에게 자신들이 개간한 땅과 그 외에 황무지를 사서 마을의 터를 넓게 잡아 장이 서며 인근 교역의 중심지가 되는 큰 마을을 만들었다. 1907년 용정의 인구가 113호 였을 때, 1909년 대유전동의 인구는 128호가 되는 호황을 누렸다. 그들은 1906년에 세워진 서전서숙보다 한 해 빠른 1905년에 근대식 학교인 <동신학교>를 세웠으며 유수한 독립 인재를 양성하였다.

“밀산의 송지주는 왕청에 대리인을 두고 있었다. 그래서 이 마을에서는 소작료를 납부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해마다 그하고만 관계를 해온 것이다. 그런데 송지주는 얼굴짝 한 번도 내밀지 않거니와 올해는 대리인마저도 보내지 않고 갑작스레 청지기를 보내니 일이 심상치 않은 것이다.”(6)

왕청현 덕원리에 자리를 잡고 <명동학교>를 운영하며 <중광단>을 이끌었던 서일과 현천묵, 계화 등 대종교도인들이 소작하는 땅의 지주는 밀산에 사는 송곰보라는 점산호였다. 송곰보는 소작료를 두 배로 올리는 폭력과 횡포를 마다하지 않는 악덕 지주로 악랄한 토비인 진사해의 매부였다. 서일은 그런 중국인 점산호가 주는 억울함과 불의를 감내하며 무장독립 투쟁이라는 목표를 향해 한걸음씩 나아갔으나 자유시참변 이후, 토비와 결탁된 점산호의 살인방화와 약탈의 행패가 당벽진 까지 이어지자 서일은 책임감을 통감하여 식음을 전폐하고 자결하였다.

“당시 이곳에는 산동에서 온 왕복이란 점산호와 소작농 몇 호가 살고 있었는데 왕복이 거의 모든 땅을 점하고 있었기에 주변의 사람들은 이곳을 <왕가의 지방>이라고 불렀다.”(7)

1910년 한일합방 후, 점산호 왕복의 소작농으로 일하고 있는 성진에서 온 사람들이 고향 사람들을 설득하여 <왕가의 지방> 곧 서성진 명암촌으로 불러 들였다. 그들이 정착을 위해 농지를 구입하려고 했을 때, 다행스럽게도 점산호, 왕복이 부모의 유산을 계승하기 위해서 고향으로 돌아가고자 토지를 헐값으로 방매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토지소유권이 없는데다가 치발역복를 원하지 않았으므로 의논 끝에 다른 조선인 마을에서 성행하는 전민제를 모방하여 한윤극을 <호주인>으로 청해서 <명예지주>를 삼고 왕복의 토지를 사들였다.

그들은 왕복의 집을 개조하여 1912년에 <보진학교>를 세웠고 그보다 한 해 앞서 교회당을 건축하였다. 주변 사람들은 마을 이름을 <예수촌>이라고 불렀고 자신들은 “하나님의 은혜가 깃든 평지” 라는 뜻으로 “장은평”이라고 불렀다.

“장동의 원주민들이라고 할 수 있는 박공선, 강상률 등은 모두 점산호 류기의 땅을 소작 맡아 농사를 짓고 있었다. 류기는 료녕성 창도현 사람인데 이민실변 초기에 장동에 와 지방관리들과 결탁하여 황지8)를 독점하고 점산호가 되었다.”(9)

“그 시기 중국인들은 누가 먼저 마음에 드는 땅에 금을 그어 차지하고 관청에 등록하면 그 땅이 자기 소유로 되는 판이었다. 덕신사(지금의 덕신향)일대에서는 장골에 류기, 쇠골에 관지신, 우동에 오점성, 미나리골에 손보산, 남양평에 악국부, 석문자에 민진 등이 이같이 땅을 차지한 큰 <점산호>들 이었다. … 1900년 의화단 운동 시기에 연변을 침략한 짜리로씨야 군대는 점산호 류기의 저택에 불을 질렀다. 류기는 자식들에게 재산을 나누어주었고 적지 않은 땅들을 최명삼을 통하여 지호(10)에게 팔았다.”(11)

1898년에 조선인이 정착하기 시작한 장골, 장동 또는 장암동이라고 부르기도 하는 오늘날의 동명촌은 당시 점산호 류기의 땅이었다. 남공선, 강상률, 윤학선, 최명록, 강선지 등이 지호(소작인, 지팡살이군)로서 장골을 개척하였다. 1900년, 류기는 의화단사건으로 뜻밖의 피해를 입자 땅을 소작인들에게 팔았다. 장골 사람들은 그 때를 기점으로 1910년에 창동학교를, 1911년에 장암교회를 세웠으며 교육과 신앙을 통한 독립운동으로 재 너머에 있는 명동촌과 함께 유명하였다. 장암골 주민들은 3·13독립만세 시위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였으며 그로인하여 1920년 <경신대참변> 때 일본군 토벌대에 의해 30여명의 크리스천들이 교회 안에서 불타 죽은 곳으로 잘 알려져 있다.

“청조는 봉금령을 해제함과 동시에 절대대분의 황무지를 지방관리와 토호렬신들에게 매우 낮은 값으로 팔았다. 그 때 약수동에는 관씨와 려씨라는 점산호가 있었다. 산동과 료녕에서 온 이들은 약수동일대의 황폐한 산과 골짜기를 답사하였고 산마루, 산골짜기, 약수강을 계선으로 자신이 차지할 땅을 확정한 후 관부에 토지 점유세를 바치고 약수동에 온 조선이주민을 모집하여 땅을 개간하고 경작하게 하였다. 이리하여 약수동의 황지와 개간한 땅은 관씨와 려씨가 차지하여 하루아침사이에 대 지주가 되었다. 약수동의 이주민들은 피땀으로 개간한 많은 땅들을 그들에게 빼앗기고 그들의 소작농이나 고농으로 전락되어 노예와 같은 생활을 하지 않으면 안되었다.”(12)

약수동은 현재 화룡시 투도진의 용문촌 제1촌민소조 마을에 속한 마을이다. 봉금령이 해제되기 전인 1880년 전후하여 조선간민들이 들어가서 황무지와 산비탈을 개간하여 옥토로 만들었지만 이민실변의 대세에 힘입은 한족, 관씨와 려씨가 들어와서 토지점유세를 바치고 사지증서를 받아서 간민들이 이미 개발한 땅을 모조리 빼앗아 갔다. 조선 간민들이 이민실변 이전에 비록 불법으로 그 땅을 개간하였어도 토지세를 바치고 소유권을 받으면 되었으나 중국어도 할 줄 모르고 등록 절차 또한 모르기 때문에 고스란히 빼앗기고 하루아침에 소작농이나 종의 신세로 전락하였다. 이런 억울한 일들이 약수동 뿐 만 아니라 조선간민이 있는 곳마다 비일비재하게 일어났다.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망명지사든 농부이든 간에 조선인들이 간도에서 삶의 터전이 되는 땅을 사는 것은 쉽지 않았다. 한 마을 또는 한 지방 전부를 점유한 점산호들은 조선인 소작농에게 소작료를 받고 농사를 짓는 것이 가장 안전한 사업이었기 때문에 특별한 일이 없는 한 땅을 팔지 않았다. 그러기에 무례하고 거만한 점산호의 땅을 수월하게 산다는 것은 엄청난 행운이었고 그런 점산호의 소작농으로 일하는 조선인은 억울한 일과 수치와 모욕을 일상적으로 당하지 않을 수 없었다.

미주

(미주 1) 김철호, 『중국 조선족, 그 력사를 말하다』, 73쪽.
(미주 2) 김춘선·안화춘·허영길, 『최진동장군』, 38쪽. 
(미주 3) 숙지는 개간된 땅을 의미한다.
(미주 4) 연변정협문사자료위원회 편, 『연변문사자료 5집 교육사료전집』, 7쪽.
(미주 5) 남강초간국은 훈춘초간국 산하의 국으로 현재 연길 일대의 공무를 집행하였다.
(미주 6) 리광인·김송죽, 『백포 서일장군』, 212~ 215쪽.
(미주 7) 중국조선민족발자취총서, 『중국조선민족발자취총서 1 개척』, 146, 147쪽.
(미주 8) 황지는 황무지의 중국식 표현이다.
(미주 9) 중국조선민족발자취총서, 『중국조선민족발자취총서 1 개척』, 152쪽.
(미주 10) 만족과 한족들은 조선인을 지호, 또는 포산호라고 불렀고 청조 관리들은 간민이라고 불렀다. 포산호는 산을 뒤지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미주 11) 중국조선민족발자취총서, 『중국조선민족발자취총서 1 개척』, 153쪽.
(미주 12) 김동섭 저, 『약수동사화』, 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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