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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도 조선인들이 땅을 통해 수탈당한 역사점산호와 호주인 (2)
이이소 | 승인 2020.09.19 16:33

점산호(占山戶)

청조가 200여년 계속된 봉금령을 폐지하고 국방을 강화하기 위해서 이민실변 정책을 실시하면서 동북 각지에 한족 점산호가 나타났다. 처음 청의 이민실변 정책은 한족에게만 국한하였다. 청조는 동북지역을 개간하기 위해서 1875년 봉천성의 봉금령을 폐지하고 1881년에 연변지방의 봉금령을 해제하고 산해관 너머에 사는 한족들을 모집하였다. 그러나 산동과 하북성에서 모집된 대부분의 한족 이민들이 주로 봉천성 남부지역에 정착하였다.

당시 두만강 북안의 일대는 교통이 불편하였고 농사짓기에 적합하지 않았으므로 한족이 기피하는 곳이 되었고, 조선 정부는 경제 파탄으로 물밀듯이 빠져 나가 불법으로 월강한 조선인들을 국내로 쇄환하고자 하였다. 그런 상황에서 길림장군 명안과 독판 오대징은 조선인을 축출하면 세금을 거둘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두만강 북안이 다시 황무지가 되고 이민을 받아서 간도지역의 세비를 충당하며 국방력을 강화하려고 했던 정책이 실패로 돌아가게 된다는 사실을 고려하여 납세허가증을 발급하고 연변지구 개간에 조선인 이민을 적극적으로 이용하는 안을 청조에 건의하였다.

청조는 오대징의 건의를 받아들여 1885년 비로소 조선의 간민을 상대로 두만강 북안 동서로 700여리, 남북으로 40~50여리를 조선인전문개간구역으로 지정하였다. 그리하여 간도의 문호가 조선인들에게 활짝 열렸고 조선인들은 자유롭게 압록강과 두만강을 건너서 간도로 천입할 수 있게 되었다.

청조는 이민실변 초기에 이주한 한족에게 황무지를 아주 헐값으로 팔았다. 이들에게 발급한 토지증서가 <사지증서>였다. 사지증서를 발급받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토호열신이거나 지방관청의 관리거나 그들과 관계가 있는 자들이었다. 그들은 지방관청이 황무지를 방매할 때, 교통이 편리하고 비옥한 땅을 골라 수십만 상(垧)(1), 심지어는 수백만 상을 구입한 후에 개발하지 않고 방치해 두었다가 수 년 후에 팔아 막대한 이익을 남겼다. 황무지를 불하받아 대지주가 된 그들은 점산호(占山戶) 혹은 점산주(占山主)라고 불렸다. 이외에도 봉금 시기에 들어와서 지방관청이나 관리들과 결탁하여 수렵하거나 약재, 특산품을 판매하던 이들 또한 점산호로 탈바꿈하였다.(2)

점산호는 <사지증서>에 토지의 지경이 불분명하게 표시된 모호성을 이용하여 증서에 기록된 것보다 10배 심지어는 20배로 확장하였다. 국자가 서교의 점산호 한씨는 1890년에 이사 온 후 토지문서인 <사지증서>를 발급하는 기회를 이용하여 천여상의 토지를 강점하고 일꾼 수십 명과 소작농 70여 호를 거느린 대지주가 되었다. 1905년 훈춘 토문자의 점산호 반씨는 2,000여 상의 토지를 약탈하고 400여 명의 조선인 소작농을 고용하였다. 덕신사 우동의 점산호 오점성은 말을 타고 하루를 달려도 남의 땅을 밟지 않는다고 하였다.(3)

당시 몇 호의 점산호 또는 한 호의 점산호가 한 마을 혹은 한 지방의 모든 토지를 독점하고 있어서 마을 또는 지역의 대부분의 조선인 소작농들이 다 그들에게 예속되었다. 점산호들은 사지증서에 규정되지 않은 유휴지를 점령할 때, 조선인들이 그 일대에 개간한 비옥한 숙지도 인정사정없이 빼앗아갔다. 악랄한 점산호들은 조선인들이 피땀 흘리며 잡목으로 우거진 황무지를 2~3년 사이에 옥토로 만들어 놓으면 불쑥 나타나 땅을 강탈하고 소작료를 내라고 강제하였다. 그러면 조선인은 꼼짝없이 소작인으로 전락하거나 그 지방에서 쫓겨나 다른 곳으로 이사해서 다시 황무지 개간을 시작하여야 했다. 음흉한 점산호들은 때로 자기 소유의 황무지를 조선인들이 개간하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모른 채하고 있다가 옥토로 바뀌었을 때 빼앗는 수법으로 조선인 소작농들을 괴롭혔다.

한족 점산호들의 조선인 소작농에 대한 약탈과 착취에는 세 가지 방법이 있었다. 첫째, 소작료로 내는 지세가 있다. 지세에는 수확량에 따라 내는 활조와 풍흉에 관계없이 정해진 규정대로 내는 정조가 있었다. 활조나 정조나 3할 내지 5할을 지주에게 사용료로 내야 했다. 청조는 개간한 황무지는 3년 동안 세금을 내지 않는다고 규정하였으나 점산호들은 개간한 첫해부터 지세를 받았다.

둘째, 점산호들은 소작농에게 무보수 노동을 강조하였다. 일반적으로 4상의 토지를 소작하면 1상의 토지를 무보수로 경작해주어야 했으며 또한 해마다 지주의 일을 10일 내지 20일간 무보수로 해주어야 했다. 무보수 노동에는 땔감 마련, 집수리, 수레에 짐실이와 타작 후에 마당 쓸기 등이 있었다. 주인 대신 부역에도 나가고 혼사와 상사 그리고 명절에도 일손을 보태야 했다.

셋째, 생활이 궁핍해서 돈을 빌려야 할 때 연 이율 60% 이상의 고리 대금을 빌려 써야 했다. 특별히 가혹한 것은 “양식반환법”이었는데 봄에 비싼 기격으로 쌀 한 말을 산 것을 가을에 쌀 한 말로 갚는 것이 아니라 이자까지 합하여 쌀을 4말 5되로 갚아야 했다.(4)

이 외에도 점산호들은 소작료를 착취하기 위해서 소작농이 되는 첫 해에 종자나 쟁기 등 도구가 없어서 스스로 농사를 지을 수 없는 소작농에게 조선족 또는 한족 보증인 2~3명을 세우게 하였고, 그 후에 다음 해 가을까지 필요한 옷과 식량, 종자와 농구를 대여하여 주었으며 이듬 해 가을에 대여물 또는 대여금을 상환 받을 때 년 간 2~4할에 상당하는 이자를 받았다.

또한 점산호들은 압전이라는 제도를 이용하여 조선인소작농들을 갈취하였다. 압전은 점산호가 조선 소작농에게 돈을 받고 토지를 전당시키는 방법이었다. 점산호가 일정한 기간을 정하고 조선인소작농에게 토지 값에 해당되는 돈을 받고 토지사용권을 양도하였다가 기간이 만료되면 담보한 돈을 돌려주고 그 때부터 담보한 금액의 이자를 소작료 대신 받는 제도였다. 임대기간이 짧은 것을 ‘압’, 긴 것을 ‘전’이라고 불렀는데 계약체결 시 일반적인 시가보다 토지가격을 높게 책정하였다. 서간도 합니하에는 이 제도를 이용하여 10여년 씩 토지를 조차하여 조선인 소작농을 모아서 치부한 조선인 상인들과 지주들이 있었다.(5)

호주인 (戶主人)

청조는 1885년 두만강 북안을 조선인 전문개발구역으로 정하고 간민들에게 토지소유권을 주는 대신에 치발역복을 강요하였다. 대부분의 조선인들이 만주식 복장을 입고 부모가 물려준 머리카락을 자르는 것을 부모님에 대한 배신과 불효로 생각하였으므로 토지소유권을 받는 일에 소극적이었다. 그러나 그 중에 시대의 흐름을 읽고 있는 사람들은 스스로 <변발호복>하여 지방 관리들의 신임을 받았다. 그들은 한족 점산호와 조선소작농 사이에서 중개 역할을 하는 호주인(戶主人)이 되어 점산호를 대신하여 조선간민을 모아 황무지를 개간시키며 소작료를 받아들이며 기회가 되는 대로 부를 축적하여 점차 지주가 되었다.

또한 많은 조선인 마을에서는 치발역복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중국어에 능통하고 행정능력과 사교 수완이 있는 사람을 선출하여 마을 대표로 청나라 사람으로 귀화시켜서 치발역복하게 만들고 그의 명의로 토지를 구입하였다. 그들은 조선인 마을의 호주인(戶主人)으로 소작농을 대신하여 토지와 소작과 관련된 일체의 업무에 관여하였다. 그들의 업무는 아래와 같았다.

첫째, 마을의 조선소작인들을 대표하여 점산호와 소작권과 소작료 문제를 교섭하였다. 둘째, 가을에 소작료를 거두어서 점산호에게 수납하였다. 셋째, 관청에 지세 등 세금 납부하는 일을 도맡았다. 넷째, 토지소유권이 없어 토지를 구입할 수 없는 미귀화 입적 조선간민들의 <명의 지주>가 되어 토지를 사는 일에도 참여하였다. 그들은 수속비를 챙겨서 관청에 수입을 올려 주면서 구입한 토지의 10% 또는 해당한 금액을 수고비로 받았다. 다섯째, 호주인은 차츰 점산호로 부터 장기간 토지를 임대하여 조선인들에게 다시 소작을 주는 중간 소작주가 되었다. 그들은 처음 출발한 취지와 다르게 이중 소작으로 조선인 소작농을 갈취하여 점차 지주가 되었다.(6)

업무 진행의 편리와 유익 때문에 청의 관리들은 관청이 휴무중일 때 호주인들을 관청의 대리인으로 세웠고 점산호들은 그들을 소작농을 관리하는 중간자, 마름으로 부렸다. 이들은 청조가 4보 39사를 설치하여 조선간민들을 중국인으로 입적시킬 때 향약과 패두가 되어 관부를 등에 업고 동족인 조선소작농을 수탈하여 점차 지주의 길로 한 발짝씩 다가갔으며 자신들의 재산과 생명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서 서서히 친일의 길로 나아갔다.

화룡현의 이영춘, 영안현의 최규하, 훈춘현의 원대순, 한희삼, 약수동의 서병원 등이 그 대표적 사례이다. 물론 호주인이 다 치부하고 민족의 반역자의 길을 간 것은 아니다. 장은평의 호주인 한윤극처럼 끝까지 호주인의 역할을 잘 감당한 사람도 있다. 그는 소작농 조선인들 편에 서서 일하였으며 조선인의 정체성을 잃지 않고 조국 독립에의 희망으로 학교와 교회를 설립에 힘을 보탰다. 그는 장은평 주민들이 3.13 만세시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마을에 <간도국민회> 서부지방회 본부가 세워질 수 있도록 기초를 잘 놓았을 뿐 만 아니라 서부지방회 회장으로서 활약하였다.

점산호와 호주인이 간도 조선인의 생명과 생활을 쥐락펴락 했던 시절은 이미 저만치 가버렸다. 점산호들은 1945년 일제의 패망과 함께 역사의 심판을 받았지만 그들의 지배아래서 우리조상들이 이중삼중으로 겪었을 몸과 마음의 고난과 억울함에 가슴이 먹먹하다. 조선간민들이 민들레처럼 간도 전체에 흩어져서 수전을 개발하여 사람이 살만한 곳으로 만들었다는 사실을 재인식하면서 글을 쓰는 내내 간도 전체가 조선독립운동의 성지라는 사실을 폐부 깊숙이 느낀다.

오늘날에도 착각에 빠진 현대판 점산호와 호주인은 코로나바이러스19의 혼란과 불확실, 불안에 흔들리는 사람들을 타겟과 기회로 삼아 자신들의 치부와 권력 확장을 위해 더 빨리, 더 많이 가지고자 은밀하게 로비활동을 벌이며 자신만만해 하고 있을 것이다.

미주

(미주 1) 상(垧)은 헥타르이다. 한 상은 1만 평방미터이며 축구장 하나의 크기와 맞먹는다. 
(미주 2) 중국조선민족발자취총서 편집부, 『중국조선민족발자취총서 1 개척』 (민족출판사, 1991), 308쪽.
(미주 3) 『중국조선민족발자취총서 1 개척』, 309쪽.
(미주 4) “연변조선족사”, 집필소조 편, 『연변조서족사 상』, (연변인민출판사, 2011), 66쪽, 67쪽
(미주 5) 『중국조선민족발자취총서 1 개척』, 318, 319쪽
(미주 6) 같은 책, 312, 3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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