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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완성은 욕망에 대한 자기 제한에 있다인간의 한계와 가능성(창세기 2:4~9)
최형묵 목사(천안살림교회) | 승인 2020.09.23 17:00

창세기에는 두 개의 창조 이야기가 나옵니다. 우리의 뇌리 가운데,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고 그 가운데 인간을 창조하셨다는 하나의 이야기로 기억되고 있지만, 그 이야기의 전개방식과 표현이 완전히 구별되는 두 이야기가 나옵니다.

본문말씀은 그 두 번째 이야기입니다. 이른바 ‘에덴동산 이야기’로 잘 알려져 있는 창조 이야기의 한 대목입니다. 1장의 이야기가 천지창조를 거대한 스케일로 묘사하고 있다면, 2장 4절 이하의 이야기는 인간 존재를 중심으로 하고 있습니다. “주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그의 코에 생기를 생명의 기운으로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명체가 되었다. 주 하나님이 동쪽에 있는 에덴에 동산을 일구시고, 지으신 사람을 거기에 두셨다.”(7~8절) 이 말씀이 그 요체입니다.

이 말씀은 인간의 탄생 의미와 인간의 조건을 밝혀 주고 있습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면 이 말씀은 인간의 탄생을 축복의 사건으로 이해합니다. 그 인간의 조건은, 한편으로는 자연의 질료를 몸으로 하고 있으되 또 다른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생명의 기를 이어받고 있다는 것입니다. 흙으로 빚어졌으되 하나님의 생명의 기운을 입음으로써 완전한 생명체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땅과 하늘의 결합으로 인간의 생명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한계와 가능성을 함축합니다.

이와 같은 인간 이해는 고대의 다른 신화와 비교할 때 그 의의가 더욱 분명해집니다. 성서의 창조 이야기는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창세 신화에 큰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실제로 내용상으로 유사한 점이 많이 발견되며, 어떤 대목에서는 그 요소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오늘 인간의 탄생에 관한 이야기도 그렇습니다.

고대 메소포타미아 신화에 따르면, 인간의 탄생은 작은 신들의 반란에서 비롯됩니다. 큰 신들이 작은 신들을 부려 흙을 파게 하고 일을 하게 했는데, 그 노역에 지친 작은 신들이 반란을 일으킵니다. 그래서 큰 신들이 쉴 수가 없어 작은 신들의 우두머리를 잡아 죽이고 그 살과 피에 흙을 뒤섞어 사람을 만들어냈습니다. 사람들로 하여금 작은 신들을 대신하여 노역을 담당하게 한 것입니다. 이렇게 신의 살과 피로 만들어진 인간은 혼을 지니게 되었으나, 흙으로 만들어진 존재로 신이 아니기 때문에 그 생명이 유한한 것으로 이해됩니다. 바로 이 사실, 곧 마지막 결론은 오늘 성서 본문에서 말하는 인간의 조건과 아주 유사합니다.

그러나 성서 본문의 인간 탄생 이야기는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인간 탄생 이야기와 형태상의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몇 가지 결정적 차이들을 지니고 있습니다. 메소포타미아 신화에서 인간의 탄생은 일종의 저주의 결과입니다. 흙을 파며 고된 노동을 해야 하는 인간들의 숙명적인 삶에 대한 이해가 담겨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일을 하지 않는 신의 아들들(고대의 제왕들)과 일을 해야만 하는 저주받은 신의 자식들(민중들)의 이분법을 운명적으로 받아들이게 하는 효과를 지니고 있습니다. 거대한 권력과 무시무시한 자연적 재난 앞에 무력하기 짝이 없는 사람들의 탄식이 담겨 있습니다.

성서의 말씀은 다릅니다. 인간의 탄생은 저주의 결과가 아닙니다. 인간은 축복받은 존재로 그려집니다. “하나님께서 에덴의 동산에 인간을 두셨다.” 이것은 인간의 삶에 대한 축복을 의미합니다. 고대 세계에서 ‘동산’, ‘정원’은 힘 있는 제왕들의 소유일 뿐이었습니다. 그것은 배타적 권력의 상징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낙원이 인간에게 허락되었습니다. 흙으로 빚어졌으되 하나님의 생기로 생명을 누리는 인간에게 허락된 것은 낙원이었습니다. 창조성 없는 노동의 고통(소외된 노동)은 처음부터 신의 뜻에 따라 결정된 운명이 아니었습니다. 동산을 가꾸며 기쁨을 누리는 것이 인간에게 허락되었습니다. 이것이 인간 탄생에 대한 성서의 기본 시각입니다.

그러한 시각은, 이집트 대제국의 권력 아래서 종살이 경험을 뼈저리게 기억하고 있는 히브리인들의 전통, 그리고 이스라엘 안에서 국가가 탄생하는 시점에서의 뼈아픈 경험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다시는 인간이 신의 이름을 빌어 인간을 억압하는 불행한 일이 빚어져서는 안 된다’ 하는 염원이 여기에 담겨 있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우리가 특별히 주목해야 할 것은 인간의 조건입니다. 오늘 말씀은 흙으로 빚어졌으되 하나님의 생기를 지닌 생명체, 자연의 질료로 이루어졌으되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인간을 말합니다. 그것은 자연의 일부로서 그 순환의 질서를 따라야 하는 인간 존재를 뜻하지만 동시에 스스로를 자각하고 있는 존재로서의 인간을 뜻합니다.

그 한계와 가능성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한계만을 인식할 때 인간은 숙명론에 빠지고 허무주의에 빠집니다. 반면에 가능성만을 인식할 때 인간은 무모해지고 기고만장합니다. 그 오만함은 자신의 능력을 남용하여 타자의 희생을 강요합니다. 다른 존재 다른 사람에게 운명의 족쇄를 채우는 것입니다.

고대 세계에서 고된 삶을 운명적으로 받아들인 민중들과, 무엇이든 불가능한 것은 없다고 보는 신의 아들들, 곧 제왕들의 삶이 갈리는 것은 이런 이치입니다. 성서는 그런 세상과 그런 세상을 빚어내는 생각을 거부한 것입니다. ‘어떤 인간이든 똑같이 한계와 가능성을 동시에 지녔다, 이 점을 명심해야 한다.’ 이것이 본문의 중심 메시지입니다.

그러므로 한계와 동시에 가능성을 지닌 인간은, 자신에 주어진 조건과 능력을 적절히 활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 적절함, 그 균형의 지표가 바로 ‘선악과’요 ‘생명나무’입니다.

범하지 말라고 했던 것을 기어코 범하고 말았던 나무의 이름이 왜 하필 ‘선악과’였을까요? ‘선과 악을 가르는 열매’, 그것은 인간의 분별 능력을 나타냅니다. 선한 것과 악한 것, 나와 너, 우리와 다른 사람, 높은 사람과 낮은 사람 등등을 가르는 분별능력입니다. 그 선악과를 따먹음으로써 죄가 시작되었다는 것은, 분별의 능력을 발휘하면서 인간은 고통을 알기 시작했다는 것을 뜻합니다.

▲ 정교회의 인간 창조에 대한 묘사 ⓒGetty Image

이것은 매우 미묘한 문제입니다. 분별 자체가 문제라면 인간 삶 자체가 문제 아니냐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나무가 동산 한 가운데 있다는 상징적 표현에 유의해야 합니다. 동산 한 가운데 있는 선악과와 생명나무, 그것은 공유되어야 할 보편적 가치를 뜻합니다. 그것은 너나없이 공유되어야 할 어떤 것의 표징입니다. 예컨대, 마을 한 자리에 있는 정자나무는 그 자리에 있어야 마을의 정자나무로서 몫을 합니다.

그러나 그 나무가 유력한 어느 집 정원으로 자리가 옮겨진다면 그것은 이미 정자나무로서 몫을 할 수 없습니다. 동산 한 가운데 있는 선악과를 범했다는 것은, 그 분별 능력을 남용하여 자기 편의에 따라 모든 것을 판단하게 되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자기만이 진리를 배타적으로 소유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인간 사회의 현상을 말합니다. 동산, 낙원으로부터의 추방은 여기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생명나무의 상징 마찬가지입니다. 금단의 영역으로 동산 한 가운데에 제한되어 있는 생명나무, 그것 역시 모든 생명이 공유해야 할 가치를 말합니다. 그 생명나무가 동산 한 가운데 있는 한 모든 생명체는 생명의 순환원리를 공유할 수 있지만, 그것이 어느 집 정원에 독점되면 그 결과는 재앙입니다. 3장 22절은 아직 인간이 그 생명나무는 범하지 않았다고 전합니다. 그러나 오늘의 관점에서 생각하면 이미 그 생명나무마저 인간은 기어코 범하고 말았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겪고 있는 코로나19 위기는 자연 생태계의 위기, 그리고 따른 인간 삶의 위기를 단적으로 드러내주고 있습니다. 온 생명의 위기입니다. 인간 자신이 자연과 별개인 양 자연을 그저 환경으로만 여기고 조작 가능한 대상으로만 간주하며, 인간의 삶의 욕망을 무한히 펼치고 인간 삶의 영역을 무한히 펼치고자 한 데서 비롯된 위기입니다.

그 삶의 위기를 겪고 있는 오늘 현실에서 창조 이야기는 우리에게 중요한 진실을 일깨워줍니다. 자연의 일부로서 그 순환의 질서를 따라야 하는 존재인 동시에 그 안에서 스스로를 자각하며 능동적인 역할을 감당하여야 하는 존재로서 인간의 삶을 깨닫게 해 줍니다. 생태적 삶과 사회적 삶, 생태적 정의와 사회적 정의는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을 일깨워 줍니다.

지난 해 2019년 6월 서울에서 ‘2019 학교민주시민교육 국제포럼’이 열렸는데, 여기에 참여한 네덜란드 출신 교육학자 ‘비에스타’의 이야기가 인상적입니다. 오늘날 자유·평등·연대라는 가치를 중심으로 하는 민주주의를 발전시키는 데는 타협과 자기 제한(self-restraint)이 필요하다는 것을 말합니다. 민주시민을 길러내는 교육은 바로 그 요구에 부응해야 한다는 것인데, 그 주장이 흥미롭습니다.

모든 사람은 욕망을 갖고 있는데, 아동 및 청소년 시기에 자신의 욕망을 적절하게 제한할 줄 아는 방법을 터득해야 한다고 봅니다. 자기 제한은 자신을 파괴할 정도로 욕망을 억압해서도 안 되고, 자신의 욕망만을 극도로 추구하면서 세계를 파괴해서도 안 되는 원리를 뜻합니다. 그러니까 ‘자기 파괴’와 ‘세계 파괴’의 중간지대에 욕망이 머무를 수 있을 때 민주시민으로서 품성을 갖추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 자연을 파괴하거나 사람 가운데 누군가를 혐오하고 배제하지 않는 민주시민으로서 덕성을 갖출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정작 흥미로운 것은, 그 자기 제한력을 갖추는 교육 방법입니다. 그가 예로 들고 있는 것은, 정원 가꾸기나 동물 키우기, 석재나 목재를 다루는 기술 교육입니다. “식물을 키우다 보면 식물을 내 욕망대로 빨리 자라게 할 수도 없습니다. 열심히 물을 주고 정성을 들여도 때로는 식물이 죽기도 하죠. 아이들은 엄청난 좌절을 경험하죠. 그런 만남 속에서 아이들은 자신의 욕망을 직면하고 그 욕망을 판단하는 실제적 연습을 하며 자기 제한을 배웁니다.” 흥미롭지 않습니까? 민주시민 교육이 생태교육과 통한다는 것을 일깨워 주고 있습니다.(<한겨레신문>, 2019.6.24.)

오늘 본문말씀이 함축하고 있는 진실과 다르지 않은 통찰입니다. 인간은 한계를 지닌 동시에 가능성을 지닌 존재입니다. 성서의 위대한 정신은 일찍이 그 진실을 통찰하고,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는 인간 삶의 방식을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세상의 허접한 이야기들, 그것보다 더 심한 교회들의 허접한 말에 현혹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정말 말씀의 진실을 올곧게 새기고 그 뜻을 삶으로 구현하는 우리들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최형묵 목사(천안살림교회)  chm1893@cho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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