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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능자를 우리가 찾을 수 없나니!(욥 37:14-24; 롬 9:14-26; 마 14:22-33)창조절 넷째주일(9월27일) 한가위 감사주일
최병학 목사(남부산용호교회) | 승인 2020.09.25 16:03

1.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

오늘은 한가위감사주일입니다. 어느덧 아침저녁으로 바람이 찹니다. 지난여름 폭우와 태풍의 모습은 온데간대 없고 눈부신 파란 하늘이 아직도 코로나-19로 인해 지친 우리들을 맞이합니다. 바라기는 들판의 오곡백과가 힘겨운 여름을 잘 이겨냈으니, 풍성하고 알찬 열매를 맺기 바랍니다. 또한 그런 추수의 기쁨이 여러분들의 가정마다 가득 차 넘쳐,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은 그런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세 본문 말씀의 주제는 ‘창조주 하나님’입니다. 하늘을 창조하시고 바다와 땅의 모든 소산물과 우리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에 관한 말씀입니다. 그러나 지음 받은 피조물인 우리 인간은 이러한 창조주 하나님을 온전히 알 수 없습니다. 욥기 말씀처럼, 전능자를 우리가 찾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창조주께서 친히 이 땅에 몸을 입고 오셨습니다. 그 분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오늘 구약과 서신서 본문 말씀은 우리가 찾을 수 없는 창조주 하나님과 또 그분의 절대 주권에 항변할 수 없는 우리 인간에 관한 말씀입니다. 그리고 복음서 말씀은 하나님의 아들, 곧 예수께서 바람과 혼돈을 잠잠하게 하시어 우리의 불안을 제거해주시는 창조주 하나님이심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2. 전능자를 우리가 찾을 수 없나니

먼저 구약 말씀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무한한 지혜를 강조하는 욥의 친구 엘리후를 통해, 창조주 하나님의 모습을 엿볼 수 있습니다. 사실 구약 본문 욥기는 32장부터 이어지는 엘리후의 이야기입니다. 그의 이야기는 4차례나 계속되는데, 1차 변론(32-33장), 2차 변론(34장), 3차 변론(35장), 4차 변론(36-37장)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 엘리후와 욥

오늘 본문은 36장부터 이어지는 엘리후의 마지막 변론입니다. 변론의 핵심은 ‘하나님의 무한한 지혜’입니다. 엘리후는 자연현상계를 소재로 삼아 하나님의 지혜와 권능과 위엄을 설명하면서 욥에게 겸손히 항복하고 돌아오길 권면합니다. 이것은 고통이 ‘죄에 대한 형벌’이라는 고대 히브리 사상과는 다릅니다. 따라서 이러한 측면에서 엘리후는 다른 욥의 세 친구 엘리바스, 빌닷, 소발과는 다른 관점이 갖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특별히 엘리후 관련 본문은 다른 본문과 문체가 다릅니다. 또한 인간의 고통을 보는 관점도 다릅니다. 가령 엘리후에 의하면, 욥의 고통은 하나님과의 화해로 인도하는 ‘자비로운 징계’이며 나아가 엘리후는 초인적인 중재자가 나타나 하나님과 욥이 화해하도록 욥을 도울 것이라고 말합니다. 결국 하나님의 무한한 지혜, 곧 전능하심과 공의와 정의를 강조하는 엘리후의 모습을 통해 우리는 창조주 하나님의 일면을 엿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럼 본문에 나오는 엘리후의 이야기를 들어 볼까요? 욥의 고난에 관한 설명하는 내용입니다.

“욥이여! 이것을 듣고 가만히 서서 하나님의 오묘한 일을 깨달으라. 하나님이 이런 것들에게 명령하셔서 그 구름의 번개로 번쩍거리게 하시는 것을 그대가 아느냐? 그대는 겹겹이 쌓인 구름과 완전한 지식의 경이로움을 아느냐? 땅이 고요할 때에 남풍으로 말미암아 그대의 의복이 따뜻한 까닭을 그대가 아느냐? 그대는 그를 도와 구름장들을 두들겨 넓게 만들어 녹여 부어 만든 거울 같이 단단하게 할 수 있겠느냐?”(욥 37:14-18)

창조주 하나님의 권능을 말하는 것이죠? 그 하나님의 권능에 비해 인간은 비천하고 무능하다는 것입니다. 엘리후는 계속해서 이야기 합니다. “우리가 그에게 할 말을 그대는 우리에게 가르치라. 우리는 아둔하여 아뢰지 못하겠노라.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을 어찌 그에게 고할 수 있으랴?(욥 37:19-20a)” 인간의 부족함과 아둔함 때문에 하나님을 만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을 만나게 되면 우리는 그 권능에 삼켜질 것이고, 또한 그 밝은 빛을 볼 수 없다고 말합니다. “삼켜지기를 바랄 자가 어디 있으랴? 그런즉 바람이 불어 하늘이 말끔하게 되었을 때 그 밝은 빛을 아무도 볼 수 없느니라.”(욥 37:20b-21)

그런 다음 엘리후는 결론을 내립니다. 전능자를 찾을 수 없는 우리 인간의 한계로 인해, 우리 인간은 단지 두려운 위엄이 있는 전능자, 곧 권능이 크신 정의와 공의의 하나님을 경외할 뿐이라는 것입니다.

“북쪽에서는 황금 같은 빛이 나오고 하나님께는 두려운 위엄이 있느니라. 전능자를 우리가 찾을 수 없나니, 그는 권능이 지극히 크사 정의나 무한한 공의를 굽히지 아니하심이니라. 그러므로 사람들은 그를 경외하고 그는 스스로 지혜롭다 하는 모든 자를 무시하시느니라.”(욥 37:22-24)

여기서 “스스로 지혜롭다 여기는 모든 자를 무시하신다.”라고 합니다. 이러한 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에 관하여 사도 바울은 조금 더 우리가 알기 쉬운 비유를 소개합니다. 아마도 스스로 지혜롭다 여기는 이들인 이스라엘 민족에 관한 바울의 책망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3. ‘진노의 그릇’에서 ‘자비의 그릇’으로

먼저 로마서 본문 말씀에서, 사도 바울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과거에 하나님의 절대 주권에 의해 선택받았음을 이야기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하나님의 절대 주권에 대해서 아무도 항변할 수 없다는 사실을 언급합니다. 말씀을 볼까요?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롬 9:14-16)

하나님께서는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시는데, 그것은 인간의 선택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선택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바울이 예로 드는 것이 바로 출애굽 사건입니다. 모세를 세우신 것도, 바로를 완악하게 하신 것도 모두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입니다. 말씀이 조금 어렵기 때문에 공동번역으로 살펴볼까요?

“성서에는 하느님께서 파라오에게 ‘내가 너를 왕으로 내세운 것은 너를 시켜서 내 힘을 드러내고 내 이름이 온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하려는 것이다.’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이렇게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뜻대로 어떤 사람에게는 자비를 베푸시고 또 어떤 사람은 완고하게도 하십니다.”(롬 9:17-18)

이렇게 되면 이스라엘 백성들을 내보내지 않은 바로의 완고함도 하나님의 뜻이니, 하나님의 뜻에 따른 사람을 책망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것을 알고 바울도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그렇다면 어찌하여 하느님께서 사람을 책망하십니까? 누가 능히 하느님의 뜻을 거역할 수 있겠습니까?’하고 말할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무엇이기에 감히 하느님께 따지고 드는 것입니까? 만들어진 물건이 만든 사람한테, ‘왜 나를 이렇게 만들었소?’하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롬 9:19-20)

따라서 스스로 지혜롭다 여기는 이들에게 바울은 토기장이(옹기장이)의 비유를 들려줍니다. 역시 공동번역으로 말씀을 보겠습니다.

▲ 토기장이와 그릇

“옹기장이(토기장이)가 같은 진흙덩이를 가지고 하나는 귀하게 쓸 그릇을 만들고 하나는 천하게 쓸 그릇을 만들어낼 권리가 없겠습니까?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진노와 권능을 나타내시기를 원하시면서도 당장 부수어버려야 할 진노의 그릇을 부수지 않으시고 오랫동안 참아주셨습니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자비의 그릇에 베푸실 당신의 영광이 얼마나 풍성한지를 보여주시려는 것이었습니다. 그 자비의 그릇은 후에 영광을 주시려고 하느님께서 미리 만드신 것인데 그 자비의 그릇은 바로 우리들입니다. 하느님께서 불러주신 우리들 가운데는 유다인 뿐 아니라, 이방인도 있습니다.”(롬 9:21-24)

바울은 하나님의 권능과 동시에 오래 참으심에 관해 이야기 합니다. ‘진노의 그릇’을 부수지 않으시고 참으시는 하나님, 그리하여 ‘진노의 그릇’을 ‘자비의 그릇’으로 바꾸어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소개합니다. 그리고 그 자비는 유대인 뿐 아니라, 이방인까지 이어집니다. 바울은 이것을 호세아 선지자를 인용하며(호 2:23)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호세아서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내 백성이 아니었던 사람들을 내 백성이라 부르겠고 내 사랑을 받지 못하던 백성을 내 사랑하는 백성이라 부르리라.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다.’ 하고 말씀하신 바로 그 곳에서 그들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자녀라고 불리리라.”(롬 9:25-26)

지난 2020년 9월 25일 ‘매일 묵상집’ 『말씀과 삶』 (한국기독교장로회 총회교육원, 2020) 내용이죠? 출애굽 이후, 이스라엘 자손들이 처음으로 입을 열어 한 말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바로 불평과 비난이었습니다. 바로의 군대를 보고 겁에 질려 모세와 아론에게 따지고, 심지어 광야에서 죽느니, 차라리 애굽 사람을 섬기겠다는 말까지 합니다(출 14:10-12). 또한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도 남북이 분열되고, 경제적 불평등은 심각해지고, 종교적으로는 우상 숭배에 빠졌습니다. 그러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께서 ‘자비의 그릇’으로 바꾸어 주시는 것입니다.

4. 바람을 보고 무서워하여

따라서 오늘 복음서에는 믿음이 없어 물에 빠져가는 베드로까지 참고 구원해 주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통해,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은 끝이 없으시다는 것을 깨닫게 합니다. 사실 오늘 복음서 본문인 마태복음 14장은 역동적입니다. 전반부에는 ‘세례요한의 죽음(마 14:1-12)’이 나오고, 중반부에는 ‘오병이어의 이적(마 14:13-21)’이 나오죠? 그리고 이어지는 말씀이 바로 오늘 본문 말씀입니다.

창세기 1장에 나오는 천지창조 때의 모습으로 마태복음 14장을 비유하자면,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는(창 1:2)’ 상황이 마태복음 14장 전반부 ‘세례요한의 죽음’ 상황이고, ‘수면 위에 운행하시는 하나님의 영이 말씀으로 빛을 창조하시는(창 1:1b-2)’는 상황은 중반부에 나오는 ‘오병이어의 이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두 상황이 대결을 펼치는 것이 바로 오늘 본문 말씀입니다. 곧 흑암의 권세와 혼돈스러운 상황을 제거하시는 창조와 생명의 하나님이신 예수님의 모습을 잘 보여줍니다. 말씀을 볼까요?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강 건너편으로 배를 태워 보내시고, 오병이어의 기적을 맛본 무리들을 돌려보내신 후, 따로 기도하시려고 산에 올라가셨을 때였습니다.

“예수께서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사 자기가 무리를 보내는 동안에 배를 타고 앞서 건너편으로 가게 하시고 무리를 보내신 후에 기도하러 따로 산에 올라가시니라. 저물매 거기 혼자 계시더니, 배가 이미 육지에서 수리나 떠나서 바람이 거스르므로 물결로 말미암아 고난을 당하더라.”(마 14:22-24)

바람 때문에 제자들이 탄 배가 고난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바다 위로 걸어서 제자들에게 오십니다. “밤 사경(새벽 3-4시경)에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서 제자들에게 오시니, 제자들이 그가 바다 위로 걸어오심을 보고 놀라 유령이라 하며 무서워하여 소리 지르거늘”(마 14:25-26)

물 위를 걸어오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고 제자들이 유령이라고 무서워하며 소리를 지릅니다. 그러자 “예수께서 즉시 이르시되, 안심하라! 나니, 두려워하지 말라!(마 14:27)”고 말씀하십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음성을 들은 베드로는 믿음을 가지고 앞으로 나아갑니다. 그러나 바람을 보고 무서워하여 물에 빠지게 됩니다. 말씀을 볼까요?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만일 주님이시거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하니, 오라! 하시니,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가되,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가는지라. 소리 질러 이르되, 주여! 나를 구원 하소서 하니, 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으시며 이르시되,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하시고, 배에 함께 오르매 바람이 그치는지라.”(마 14:28-32)

▲ 로렌초 베네치아노, <베드로를 물에서 구해주는 예수>(1370)

5. 배에 함께 오르매 바람이 그치는지라

베드로가 물에 빠진 이유는 무엇입니까? 바로 불안입니다. 바람을 보고 무서워하여 물에 빠져 가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 주변에도 바람이 불죠? 코로나-19라는 ‘불안의 바람’이 붑니다. 또한 지난 2020년 9월 22일 ‘연평도 실종 공무원 피격 사망’ 사건으로 인해 ‘분노의 바람’도 붑니다. 특별히 이번 추석 연휴에 제주도나 강원도 등 여행을 계획하고 있는 이들로 인해 코로나 재 확산의 바람이, 불안과 분노를 넘어 ‘절망의 바람’으로 붑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 한국 교회가 제 역할을 하고 있지 못합니다. 소금과 빛의 역할이 아니라, 이 사회의 걱정거리가 된 것입니다. 교회와 기독교인들에 절망하는 세상의 소리가 들리는 것입니다. 실존주의 철학자 키에르케고르는 『죽음에 이르는 병』 (계명대학교출판부, 2006)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절망이 아니고서는 종교적 실존도 구원도 없으며, 인간은 여러 가지 절망을 거친 후에야 비로소 자기 자신이 원래 가지고 있었던 힘으로 돌아간다.”

키에르케고르의 말에 의하면, 모든 인간은 절망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절망의 그물망이 너무나도 촘촘해서 아무도 빠져나갈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절망의 상황에 빠진 우리 인간 실존의 현실과 더불어 죄의 현실이 되는 절망은 역설적으로 자기 자신이 되는 계기가 됩니다. 키에르케고르는 이렇게 말합니다. “절망을 통해서만 자기(self)가 될 수 있다”, “자신이 절망하고 있다는 것을 아는 것 자체가 자기로 갈 수 있는 희망이 되는 것이다.”

그렇습니다. 지금 교회의 죽음은 절망이지만, 지금 교회가 죽었다는 것을 아는 이들이 다시금 교회를 재창조할 것입니다. 물에 빠진 베드로를 예수님께서 구원해 주신 것처럼, 담대한 믿음으로 예수님과 함께 이 대한민국과 한반도라는 배를, 또한 한국 교회라는 조종실을 하나님 나라라는 목표를 향해 올곧게 인도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힘들더라도 방역에 최선을 다하고, 분노의 감정이 치솟더라도 남과 북의 평화를 위해 대화를 계속해야 하며, 자신만의 즐거움이 아니라, 이웃의 고통을 생각해서라도 조금 더 주의하여 마침내 우리 앞에 부는 바람을 극복해야 할 것입니다.

▲ 이정현, 「힘내자! 대한민국」

십시일반(十匙一飯)이라는 고사성어가 있습니다. “열 사람이 한 숟가락씩 보태면 한 사람 먹을 밥 양이 된다.”는 말입니다. 고장난명(孤掌難鳴)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외로운 손뼉은 울릴 수 없다.” 곧, 혼자서는 일을 이루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우리말에도 이런 의미의 속담이 많습니다.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 “종이도 네 귀를 들어야 바르다”, “모기도 모이면 천둥소리 난다”, “손바닥도 마주쳐야 소리 난다.” 등. 시절이 하 수상할 때, 사람들이 불안과 분노에 빠지지 않으려면 같은 처지인 이웃과 나누면 된다는 의미입니다. 나눌수록 커지는 것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세례 요한이 죽은 다음, 흑암의 권세와 혼돈스러운 상황 속에서 그 불안을 제거하십니다. 그러자 제자들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배에 있는 사람들이 예수께 절하며 이르되,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 하더라.”(마 14:33)

엘리후의 고백처럼 우리는 전능자를 찾을 수는 없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을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오신 하나님이신 예수님의 삶을 통해 우리는 창조주 하나님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예수님과 함께 ‘절망’에서 ‘희망’으로, 또한 ‘진노의 그릇’에서 ‘자비의 그릇’으로 변화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최병학 목사(남부산용호교회)  hak-9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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