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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에 대해 책임을 가진 사람들“빛의 존재로서 이 세상이 아닌 하나님의 뜻에 맞춰 사십시오”(요한복음 18:33-37)
이상중 목사(초도제일교회) | 승인 2020.09.29 01:27
▲ Jacques Tissot (1836-1902), 「예수께서 처음으로 빌라도를 만나다(Jesus Meets Pilate for the First Time)」 ⓒGetty Image

이 시간 우리 모두에게 주님의 은혜와 평화가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한 주간 평안하셨나요? ‘아, 내가 정말 평안을 누릴 수 있을까?’라고 의심이 드는 괴로운 순간에도 평안을 누릴 수 있습니다. 평안은 이미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날마다 평안을 누리시는 저와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어떤 이웃이 되어야 할까요?”에 대한 물음으로 지난 두 주간 이야기 나누었습니다. 첫 번째는, 선하고 좋은 이웃을 포함해서 하나님을 보여줄 수 있는 이웃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두 번째는, 환경파괴와 기후위기의 시대에 생명을 살리기 위한 삶의 방향성을 보여줄 수 있는 이웃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목사님! 나 살기도 힘겹고 바쁜데, 왜 타인의 삶과 자연 환경까지 생각하며 살아야 하나요?” 질문하실 수 있습니다. 점점 나빠지는 건강을 생각하면, 병원비에 약값에 이번 달 막아야 할 카드 값을 생각하면 한숨이 절로 나오고, 자녀나 손녀·손주들을 생각하면 잠도 자기 힘든 일상을 살고 있는데 ‘도대체 왜 내가’ 타인을 돕고, 심지어 깊이 생각해 보거나 관심 가진 적이 없는 환경을 살려야 하는 삶을 살아야 할까요?

우리가 이 세상을 책임져야 하는 ‘빛’의 존재들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분명하게 마태복음 5:14에서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이 외의 다른 정체성은 없습니다. ‘빛’이 우리의 정체성입니다. 여기에 있는 우리 모두가 ‘빛’이라는 사실이 믿겨지십니까?

믿겨지지 않는다면, 저와 성도님들은 ‘빛’의 사람으로 깨어나야만 합니다. 누군가가 “당신은 누구입니까?” 라고 물었을 때 ‘저는 빚쟁이입니다. 저는 한낱 보잘 것 없는 사람입니다. 나이 들고 연약한 사람일 뿐입니다. 변변찮은 직업을 가진 사람입니다. 상처 받고 열등감 속에 살아가는 사람입니다.’라는 대답이 아니라 확신 속에서 “나는 빛입니다. 나는 이 세상을 책임져야 하는 사람입니다.”라고 대답할 수 있게 되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그리스도인은 빛으로서 그리고 이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자녀로서 이 세상에 대한 책임을 가져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창세기 1:28의 말씀입니다. “28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베푸셨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여라. 땅을 정복하여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 위에서 살아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려라” 하셨다.”

‘다스린다.’는 말은 보살핀다는 의미를 포함하는 말입니다.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하나님께서 ‘좋다!’고 표현하신대로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이 계속해서 ‘좋다!’로 남을 수 있도록 보살필 의무가 있습니다.

상가가 몇 개나 입주해야 하는 큰 건물의 주인이 있습니다. 건물주는 건물만 사면 ‘건물주’라는 명칭이 붙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건물주는 건물을 관리해야 합니다. 당연한 의무죠. 세입자들의 민원을 듣고서 해결하거나, 건물에 비가 새거나 상하지 않도록 관리해야 합니다. 이 모든 일을 자신이 직접 못한다면 반드시 건물 관리자라도 따로 두어서 건물에 대한 책임을 다해야 합니다.

“너희가 빛이다!”라는 예수님의 선언은 건물을 반드시 관리해야 하는 관리자처럼 “네가 이 세상에 대한 책임자가 되어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빛의 사람’은 세상에 대한 책임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성경은 세상에 대한 책임, 생명에 대한 책임을 가진 사람들에 대해 말합니다. 창세기 37장에서 45장까지 말씀에 등장하는 요셉이 한 예 입니다. 태어나면서부터 자신을 ‘빛’이라고 인식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자신이 빛이라는 사실을 깨닫기 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립니다. 요셉도 이런 책임을 가진 사람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데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창세기 37장에서 요셉은 자신이 꾼 꿈을 부모와 형들에게 들려줍니다. “7 우리가 밭에서 곡식 단을 묶더니 내 단은 일어서고 당신들의 단은 내 단을 둘러서서 절하더이다. 9 해와 달과 열 한 별이 내게 절하더이다.” 이 이야기를 들은 형들은 “네가 참으로 우리의 왕이 되겠느냐! 우리를 다스리겠느냐!”고 말하며 분노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꿈이 창세기 42장에서 실제로 이루어집니다. 땅에 흉년이 들어 먹을 것이 없던 야곱은 아들들에게 애굽에 가서 곡식을 사오라고 명령합니다. “5 이스라엘의 아들들이 양식 사러 간 자 중에 있으니 가나안 땅에 기근이 있음이라 6 때에 요셉이 나라의 총리로서 그 땅 모든 백성에게 곡식을 팔더니 요셉의 형들이 와서 그 앞에서 땅에 엎드려 절하매.”

아버지 야곱의 사랑을 독차지 한 요셉은 형들에게 미움을 받고, 결국 형들에 의해 미디안 사람들에게 종으로 팔려갑니다. 종이 되고, 옥에 갇히는 등의 많은 삶의 풍파를 겪습니다. 삶의 풍파는 요셉에게 내적인 큰 고통을 주었는데요. 그 고통이 얼마나 컸으면 애굽에서 총리가 된 후 첫째 아들의 이름을 ‘므낫세’라고 지었습니다. 므낫세는 잊게 하셨다는 뜻인데요. “하나님이 내게 내 모든 고난과 내 아버지의 온 집일을 잊어버리게 하셨다.”는 의미로 붙인 이름입니다.

자신을 붙들고 있던 과거에서 이제 겨우 벗어나게 되었다는 고백입니다. 또한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깨닫게 되는 과정이기도 했습니다.

자신의 모든 고통의 원흉인 형들이 자신의 앞에 나타났을 때 요셉은 창세기 45장에서 형들을 용서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4 요셉이 형들에게 이르되 내게로 가까이 오소서 그들이 가까이 가니 이르되 나는 당신들의 아우 요셉이니 당신들이 애굽에 판 자라. 5 당신들이 나를 이 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 7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니 8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요셉은 처음에는 자신에게 왜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지 알지 못했지만, 결국 자신이 ‘생명을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목적에 의해서 살게 되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상처 받았던 일들이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큰 계획 가운데 일부라는 것을 깨달은 요셉은 형들도 용서했습니다.

성경에서 요셉을 이야기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요셉은 하나의 상징입니다. 우리도 요셉과 같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걸 알려주기 위해 말씀으로 기록 되었습니다. 단순히 ‘아, 그런 사람이 있었구나.’라는 정보를 알려주기 위함이 아니라 ‘네가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한다!’, ‘네가 그런 사람이다!’는 것을 알려주시기 위해 요셉의 이야기가 성경에 기록되어진 줄 믿습니다.

요셉처럼 우리도 이 땅에 함께 살아가는 생명을 구원해야 하는 책임을 가진 ‘빛’의 존재인줄로 믿습니다.

신약 본문에도 세상에 대한 책임을 가지고 ‘빛’으로 산 사람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이후에 제자들을 향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8:18-20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예수님의 이 말씀은 교회 부흥시키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참 된 삶의 길을 몰라 방황하는 ‘죽어 있는 자들, 죽어 가는 자들’이 참 생명을 얻을 수 있도록 안내자가 되라는 말씀입니다. 생명을 살려내라는 요청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예수님의 말씀대로 온갖 고난 속에서도 자신의 분명한 목적, 생명을 살려야 하는 세상에 대한 책임을 지기 위해 끝까지 푯대를 향해 달려갔습니다.

빌립보서 3:10-14 “10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11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12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13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14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바울은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해 달렸습니다. 푯대를 향해 달려갔다는 말은 내 믿음을 시험하는 요소들로부터 믿음을 지켰다는 소극적인 의미가 아닙니다. 적극적으로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에 순종하여 예수님처럼 생명을 살리기 위한 삶을 살았다는 고백입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6장에서 자신의 소명을 말씀하셨습니다. “38 나는 내 뜻을 이루려고 하늘에서 내려 온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이루려고 왔다. 39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은 내게 맡기신 사람을 하나도 잃지 않고 마지막 날에 모두 살리는 일이다. 40 그렇다. 아들을 보고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는 것이 내 아버지의 뜻이다. 나는 마지막 날에 그들을 모두 살릴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이 부활하셔서 제자들에게 요한복음 20:21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이들은 예수님의 소명을 나의 소명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우리를 부르신 분에 따르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의 빛이셨듯이 우리도 이 세상의 빛으로서 살아가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빌라도는 예수님에게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라고 묻습니다. 예수님은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라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겨지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고 대답하십니다.

예수님은 눈에 보이지 않는 세상을 바라보셨습니다. 세상의 가치를 쫓지 않으셨고, 하나님의 뜻을 쫒으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눈에 보이는 세상과 가치만을 바라봅니다. 눈에 보이는 세상만을 바라보다보니 당연히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를 깨닫지 못합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의 답변을 듣고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재차 같은 질문을 합니다. “그러면 네가 왕이 아니냐?” 이 질문에 다시 대답하십니다.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 내가 이를 위하여 태어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언하려 함이로라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음성을 듣느니라.”

어리석게도 우리도 빌라도처럼 예수님을 이 세상의 왕인 것처럼 오해하며 삽니다. 하나님께 속하고, 하나님의 음성을 쫓아야 하지만 세상의 음성에 귀 기울이며 관심을 가집니다. 그러니 이 땅의 삶이 중요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맞춰 살았기에 요셉, 바울, 예수님은 이 세상에서 살았지만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계획대로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우리 자신이 ‘빛’임을 깨닫는다면 하나님의 뜻과 예수님의 음성에 맞춰 이 세상에 속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세상을 향한 책임을 가지고 생명을 살리고 구원하기 위한 삶으로 자연스럽게 향하게 됩니다.

‘내가 왜 타인을 사랑해야해! 내가 왜 환경을 생각해야해!’ 라고 여기는 그리스도인은 그렇기에 여전히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를 깨닫지 못 한 사람입니다. 사람을 사랑하고, 생명을 사랑하는 일은 빛의 사람이라면 자연스럽게 행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 세상이 주는 이런 저런 걱정거리들과 고통들이 우리를 엄습할 때면 본래의 나인 ‘빛’의 존재가 아닌 ‘실패하거나 열등한’ 존재로 잘 못 인식할 수 있습니다. 나를 잊어버릴 수 있습니다. 걱정과 고통, 두려움 등에 삼켜져 ‘내가 빛인가?’ 의심이 들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빛’이라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다시 우리의 자리로 언제라도 돌아올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 책임을 가진 ‘빛’의 존재로  다시 바로 서실 수 있는 저와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이상중 목사(초도제일교회)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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