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학술 칼럼
칼빈 칭의교리의 두 전선칭의 ⑵
최영 소장(기독교장로회 목회와신학연구소) | 승인 2020.10.03 16:41
▲ 칭의 교리는 종교개혁자들과 로마 가톨릭으로부터 떨어져 나온 프로테스탄트 교회의 생명이었다. ⓒGetty Image

지난 글에서 칼빈이 칭의를 이야기 하기 위해 칭의를 어디에 위치시켰는지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이제 칼빈의 칭의 교리를 살펴보겠습니다. 그는 우선 칭의를 다음과 같이 정의합니다.

하나님의 판단으로 의롭다고 여겨지며, 그의 의 때문에 용납을 받은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는 말을 듣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불법을 미워하시므로, 죄인이 죄인인 한은 그리고 죄인으로 인정되는 한은 하나님 앞에서 은혜를 받지 못한다. 따라서 죄가 있는 곳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진노와 징벌이 나타난다. 그런데 그가 죄인이 아니라 의로운 사람으로 간주되며, 의롭다는 여김을 받는다. 그러한 이유로, 그는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굳게 서 있다. … 만일 무죄한 사람이 고소를 당해서 공정한 재판관 앞에 불 려가게 되면, 거기서 그는 그의 무죄함에 따라 판결을 받게 될 것이며, 그는 재판관 앞에서 ‘의롭다’는 말을 듣게 된다. 이렇게, 죄인들과의 교제에서 풀려나서 하나님께서 그의 의를 증거하고 확언해 주시는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는 여김을 받는다(III.xi.2).

칼빈의 칭의 정의

의가 어떤 심판의 결과라고 말하는 것은 그것이 인간의 고유한 자질이 아니라는 것을 말해줍니다. 의롭게 된 인간은 본래 의롭지 않은 사람입니다. 여기서 인간의 법정과의 비교는 칭의가 어떤 맥락에서 이루어지는지를 보다 분명하게 해줍니다.

인간의 법정에서는 한 사람의 무죄가 발견될 때 무죄선고를 받게 됩니다. 무죄는 무죄선고를 앞섭니다. 그러나 칭의의 맥락에서는 그 반대가 사실입니다. 무죄함은 무죄선고를 뒤따릅니다.

후자의 경우에, 사람들은 그들의 무죄선고를 정당화할 수 있는 그 어떤 본래적인 자질들을 소유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들은 그 자신이 누구인가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비 때 문에,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서 무죄선고를 받습니다. 그러므로 칼빈은 칭의를 이렇게 간단히 설명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칭의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은혜로 받아주시며, 의롭다고 간주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칭의가 죄를 용서􏰀는 것과 그리스도의 의를 우리에게 전가하는 것으로 이루어진다고 말한다”(III.xi.2).

따라서 칼빈에게서 ‘의’는 어떤 공적이나 만족의 신학을 언급하지 않고 정의됩니다. 인간 안에 있는 그 어떤 것도 구원을 받게 할 만한 것은 없습니다. 그들의 행위 가운데 아무것도 그 자신의 공로로 하나님을 만족시킬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죄가 있고, 따라서 그들이 하는 모든 일은 항상 죄에 오염이 될 수밖에 없기때문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인간과 인간의 모든 행위는 칭의를 필요로 합니다. 의는 결코 획득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단지 받을 수 밖에 없는 것이며, 그리고 우리가 믿는다는 단 하나의 조건만이 요구 됩니다. 사실, 사람들 밖에 있는 의는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를 통하여 사람들이 하나님께 복종하는 행위인 믿음만이 상응할 뿐입니다.

칼빈의 칭의교리가 맞섰던 두 이론

칼빈은 칭의를 이렇게 정의하고 경쟁하는 다른 두 개의 이론들을 논박합니다. 루터파 신학자 안드레아스 오시안더(1498-1552)에 의해 주장된 첫 번째 이론은 루터파들에 의해서도 논쟁적인 것으로 생각되었던 것입니다. 오시안더는 이른바 “본질적 의”를 주장했는데, 이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와 하나가 될 때, 그리스도의 본질이 우리의 본질과 뒤섞여 혼합되는 물리적인 성격의 연합을 의미합니다(III.xi.5).

그러나 칼빈은 그 연합을 순전히 영적인 것으로 이해합니다. 우리는 성령의 신비한 능력에 의해서 그리스도와 연합할 뿐입니다. 더구나, 우리가 살펴보았던대로, 칼빈은 의를 하나님께서 한 사람을 의의 본래적인 결핍에도 불구하고 의롭다고 선언하시는 하나님의 선언의 결과라고 고려합니다. 따라서 의는 내부로부터 주입된 것이 아니라 밖에서 전가된 것입니다.

그러나 칼빈은 보다 신랄한 비판을 로마 교회의 이른바 “결합된” 칭의, 즉 믿음과 행위에 의한 칭의 사상에 가합니다. 이것은 전혀 놀라운 일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개신교의 칭의 교리가 정확히 저 사상과 반대의 입장을 표명하기 때문입니다. 당시 로마 교회의 신학자들은 의는 믿음과 행위로 이루어진다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러나 칼빈은 바울 사도의 말씀에 의지하여 믿음에 의한 의와 행위에 의한 의는 결코 양립할 수 없다고 천명합니다. “모든 것을 …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빌3:8-9). 바울 사도는 그리스도의 의를 얻고자 하는 사람은 자기의 의를 배설물처럼 여기라고 말씀합니다.

왜냐하면 행위에 의한 의를 조금이라도 내세우는 동안은 자랑할 이유도 우리에게 남아 있다는 결론이 나오기 때문입니다(III.xi.13). 그러므로 칼빈은 율법의 의와 복음의 의를 대립시키며 모든 행위를 배제하는 바울을 따라서(갈3:11-12) 단호하게 “의롭다 하는 힘을 믿음에 돌릴 때에는 영적인 행위까지도 중요시될 수 없다”고 말합니다(III.xi.14). 우리는 우리 자신의 행위를 보지 말고 하나님의 자비와 그리스도의 완전한 거룩성만을 보아야 합니다(III.xi.16). 그것은 칭의는 행위에 대한 보상이 아니라 거저 주시는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III.xi.18).

종교개혁자들의 “오직 믿음으로만”

그리고 칼빈은 “오직 믿음으로만”(sola fide) 의롭게 된다는 종교 개혁의 주장을 검토합니다. 왜냐하면 로마교회 신학자들이 성경에 “만”(sola)이라는 단어가 없으므로, 이 단어를 첨가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 단어는 루터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줄 우리가 인정하노라”(롬3:28)는 말씀을 번역할 때에 첨가한 말입니다.

칼빈은 저들의 주장이 문자적으로는 옳지만, 성경이 다른 표현으로 동일한 내용을 가르치고 있는 것을 예로 들어 논박합니다. 예컨대, 로마서 4장 2절 이하에서 바울이 거저 주시는 의가 아니면 믿음에서 오는 의라고 할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따라서 칼빈은 ‘만’이라는 단어가 바울이 말하려는 내용을 더욱 분명히 드러내주기 때문에 적법한 용어라고 주장합니다.

바울이 거저 주시는 의가 아니면 믿음에서 오는 의라고 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데 대하여 그들은 무엇이라고 대답하려는가? 거저 주는 선물과 행 위가 어떻게 서로 어울릴 수 있는가? 바울이 다른 구절에서 하나님의 의가 복음에 나타나 있다(롬1:17)고 한 말을 그들은 어떤 기만수단으로 회피할 것인가? 의가 복음에 나타나 있다면, 확실히 그 의는 불구가 된 의나 반쪽 의가 아니라, 완전하고 충만한 의일 것이다. 그러므로 율법은 거기에 들어 설 자리가 없다. 그들은 거짓될 뿐만 아니라 분명히 웃기는 구실을 만들어 서 이‘만’이란 말을 제거해야 된다고 고집한다. 모든 것을 행위에서 빼앗는 사람이 모든 것을 믿음에만 돌리는 것이 아닌가?(III.xi.19).

그러므로 “오직 믿음으로만”은 “우리는 다만 그리스도의 의의 중개에 의해서만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는 여김을 받는다”는 사실을 말하는데 매우 유용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칼빈은 이렇게 부연 설명합니다.

“이 말은 사람이 그 자신만으로는 의롭지 않으나 그리스도의 의가 전가에 의해 그에게 전달됨으로써 의롭다함을 받는다는 것과 같다”(III.xi.23).

이 믿음으로만 의롭다는 인정을 받는다는 종교개혁의 주장은 타락한 죄인이 어떻게 구원받을 수 있는지를 해결하기 위한 루터의 고통스러운 분투의 결과였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루터는 로마서 1장 17절에서 그 해결의 실마리를 찾았고, “오직 믿음만에 의한 칭의”는 로마 가톨릭에 맞서는 새로운 신앙운동의 기치가 되었습니다. 그가 새롭게 발견한 것은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이 인간에게 요구하시는 완전한 의가 아니라, 하나님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인간에게 값없이 베풀어주시는 “의”라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 완전한 의를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된 인간에게 베풀어주시고, 인간은 단지 믿음으로만 그 의를 받아 자기 것으로 누리게 되니, 이 어찌 복음이 아니겠습니까? 루터는 이때 깨달은 이 놀라운 신학 원리를 계속 발전시켰고, 이는 루터의 신학사상의 근간이 된 것은 물론, 종교개혁 신학의 모퉁이 돌이 되었습니다.

값싼 ‘싸구려’ 은혜가 아니다

그러나 우리가 칭의를 논할 때, 주의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그리스도로 인해 거저 값없이 의롭다는 인정을 받았기 때문에, 이 칭의 자체를 값싼 ‘싸구려’ 은혜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받은 칭의는, 우리 편에서의 아무런 노력이나 공로 없이 거저 은혜로 받은 것일지라도, 우리를 위한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을 통해서 얻게 된 것이기 때문에, 너무나 값비싼 대가를 지불한 것입니다. 따라서 칼빈은 거저 주시는 칭의의 복음을 확신하려면, 하나님의 심판대를 생각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의 광채 앞에서는 별들이 어두워지며(욥3:9), 그의 힘은 산들을 녹이며 그의 진노는 땅을 떨게 만든다(욥9:5-6). 그의 지혜는 지혜 있는 자들을 자기들의 간계에 빠지게 한다(욥5:13). … 그가 사람들의 행위를 심사하기 위하여 심판대에 앉으셨다고 생각해보자. 누가 그의 보좌 앞에 자신 있게 설 것인가?(III.xii.2).

하나님의 심판대를 생각할 때, 우리 자신은 빈껍데기뿐이며, 우리의 모든 행위는 쓰레기와 오물에 불과하다는 것을 반드시 깨닫게 됩니다(III.xii.4). 하나님 앞에서 “주의 종에게 심판을 행하지 마소서 주의 눈 앞에는 의로운 인생이 하나도 없나이다”(시143:2)라고 고백하며 하나님의 처분을 기다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칭의의 교리는 우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우리를 대신하여 정죄되고 심판을 받고, 그로 말미암아 우리의 죄가 용서되고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되어 의롭다는 여김을 받는다는 이 놀라운 복음의 진리를 선언합니다.

최영 소장(기독교장로회 목회와신학연구소)  webmaster@ecumenian.com

<저작권자 © 에큐메니안,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최영 소장(기독교장로회 목회와신학연구소)의 다른기사 보기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여백
신문사소개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서울시 종로구 김상옥로 30, 402호  |  제호 : 에큐메니안
대표전화 : 070-4252-0176  |  팩스 : 0303-3442-0176  |  등록번호 : 서울 자 00392  |  등록일 : 2012.10.22
발행인 : 윤인중  |  편집인 : 이정훈  |  청소년보호책임자 : 윤인중  |  E-mail : webmaster@ecumenian.com
Copyright © 2020 에큐메니안. All rights reserved.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