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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터와 칼빈의 그리스도인의 자유 이해그리스도인의 자유 ⑴
최영 소장(기독교장로회 목회와신학연구소) | 승인 2020.10.24 16:27
▲ 루터가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관해 저술한 책 ⓒGetty Image

지난 글에서는 칭의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저 칭의의 효과, 즉 믿음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는 인정을 받음으로써 누릴 수 있게 된 유익 또는 혜택, 즉 ‘그리스도인의 자유’입니다.

루터의 그리스도인의 자유 이해

루터는 1520년에 이것을 주제로 탁월한 논문을 쓴 바 있습니다. 거기서 그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얻게 된 이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다음과 같은 대명제로 시작합니다.

그리스도인이란 무엇인가, 또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하여 취하여 주신 자유란 어떤 것인가? 여기에 대하여 사도 바울이 기록한 것이 많지만 우리가 근본적으로 인식하기 위하여 나는 다음과 같은 두 결론을 세우고자 한다.
그리스도인은 지극히 자유로운 만물의 지배자이며 그 누구에게도 예속되어 있지 않다. 그리스도인은 지극히 충실한 만물의 종이며 모든 사람에게 예속되어 있다.(1)

이 명제는 언뜻 보면 모순되는 말처럼 보입니다. 만물의 지배자인데, 어떻게 그가 만물의 종이 되어 모든 사람에게 예속되어 있다는 것입니까? 그러나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의 이중적인 본성을 잘 말해주는 말입니다. 루터는 이 이중적인 표현으로 그리스도께서 만물의 지배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자유롭게 종이 되시고 하나님과 우리 인간을 위한 삶을 사셨듯이 그리스도로 인해 자유롭게 된 우리도 이웃과의 관계에서 그 어떠한 제약도 받지 않는 참된 자유인이지만 종의 위치에서 이웃을 섬기고 봉사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하고자 한 것입니다.

루터의 이 명제는 기독교의 중요한 구원론의 핵심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만물의 지배자이며 그 누구에게도 예속되어 있지 않다”는 명제의 첫 번째 부분은 칭의의 교리를 말해줍니다. 이것은 우리가 단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값없이 거저 죄 용서를 받았기 때문에, 우리를 억압하고 사로잡는 모든 것에서 해방되어서, 참된 자유인이 되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반면에 “그리스도인은 만물의 종이며 모든 사람에게 예속되어 있다”는 명제의 두 번째 부분은 성화의 교리를 뜻하는데, 이것은 값없이 주신 은혜에 감사하여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세상에서 하나님과 우리의 이웃을 사랑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칼빈의 그리스도인의 자유 이해

칼빈은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대하여 루터와 다소 다른 방향을 취하고 있지만, 그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루터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우선, 그는 이 주제에 대한 설명이 복음의 가르침을 받아들이는데 근본적인 중요성이 있다고 역설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얻는 자유에 대하여 알지 못하고서는 언제나 모든 일에서 위축되며 항상 불안과 동요를 느낄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칭의의 부산물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진지하게 경외하는 사람은 이 교리에서 오는 비길 데 없는 유익을 누릴 수 있습니다.

우선 칼빈은 이 자유에 대해 본격적으로 말하기 전에, 양극단의 오류에 빠지지 않도록 주의를 촉구합니다. 하나의 위험은 이 자유를 구실삼아 방종에 빠지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이 자유가 모든 절제와 질서와 분별을 폐기한다고 생각하며 그것을 경시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자유에 대한 인식 없이는 예수 그리스도나 복음의 진리나 영 혼의 내적 평화에 대하여 결코 바르게 이해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19장의 목적은 이 교리의 어느 한 부분이 누락되거나 가려지지 않도록 주의하는 동시에, 흔히 제기되는 저 어리석은 항의에 대처하려는 것 입니다(III.xix.1).

칼빈은 그리스도인의 자유의 주제를 세 가지 양상으로 이해합니다. 첫째는 율법으로부터의 자유입니다. 이것은 신자들이 하나님 앞에서 그들의 칭의에 대하여 확신할 때, 율법에 의한 의를 일체 잊어버리고 율법의 모든 굴레와 멍에를 벗어버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주장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칼빈이 바로 앞장에서(III.xviii) 마태복음 19장 17절 이하를 주석하며 내린 결론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거기서 율법에 의한 의를 추구하는 자들은 율법에 의해서 판 단될 것이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에 호소하는 자들은 율법이 아니 라 전혀 다른 은혜의 약속으로 판단될 것이라고 분명히 언급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이야기는 어떤 부자청년이 예수 그리스도께 나와서 영생에 대한 질문을 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구원을 위하여 무엇이 필요하냐고 묻는 그 청년에게 그리스도께서는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 들을 지키라”(마19:17)라고 답하십니다. 로마 교회의 신학자들은 이 말씀을 근거로 계명을 지킴으로써 하나님 나라를 얻을 수 있다고 은혜의 주께서 명령하셨는데, 우리에게 무엇이 더 필요한가 하는 질문을 제기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칼빈은 주께서는 단지 상대해야 할 사람이 누구인가를 아시고 그 사람에게 알맞게 대답하신 것일 뿐이라고 주석합니다.

여기서는 율법사가 주께 와서 영생을 얻는 방법을 묻는다. 그뿐 아니라 무슨 일을 해야만 영생을 얻을 수 있느냐고 묻는다. 묻는 사람의 인품과 질문 자체가 이와 같은 주의 대답을 유발시킨다. 율법의 의를 굳게 믿는 습성이 몸에 밴 율법사는 행위에 대한 확신 때문에 눈이 어두웠다. 그는 구원을 얻게 하는 의의 행위가 무엇인가 하는 것만을 알고자 한다. 그러므로 의의 완전한 거울이 있는 율법으로 그를 돌려보내시는 것은 당연한 처사이다(III.xviii.9).

칼빈은 그리스도를 따라서 행위에서 생명을 구하는 사람은 계명들을 지켜야 한다고 분명히 선언합니다. 만약 행위에서 구원을 찾는 다면, 우리에게 완전한 의를 가리키는 그 계명들을 지켜야 합니다. 그 러나 도중에서 실패하지 않으려면, 처음부터 이 방향으로 나아가서 는 결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 누구도 계명을 완전히 지킬 수 없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율법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통한 은혜의 약속만을 믿고 그에게 의지하고 도움을 구할 때, 우리는 생명의 길에 들어설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는 율법에 의한 의를 얻을 수 없으므로 다른 도움을 구해야 하는데, 그것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에 호소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구절에서 주께서는 율법사가 행위에 대한 허망한 자신감을 가지고 교만한 것을 아시고, 그가 영원한 사망의 무서운 심판을 받아야 할 죄인임을 자각 하도록, 그에게 율법을 돌아보게 하신다. 그와 같이, 다른 곳에서 주님께서는 이미 이 일을 알고 겸손하게 된 사람들에게 율법은 전혀 말씀하시지 않고 은혜의 약속으로 그들을 위로하신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마11:28-29)(III.xviii.9).

이렇게 칭의에는 율법이 끼어 들 여지가 없습니다. 칭의는 우리를 율법으로부터 자유롭게 해줍니다. 미국에 엘리스 워커라는 여류 소설가가 있습니다. 그가 『칼라 퍼플』이라는 소설을 썼는데, 이것이 유명한 영화감독 스티븐 스필버그에 의해 영화로 만들어지기도 했습니다. 소설에는 셀리와 슈기라는 두 여성이 등장하는데, 셀리가 그녀의 친구 슈기가 교회에 가지도 않고, 성가대 찬양도 않고, 교회봉사도 하지 않아도 하나님께서 자신을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에 놀랄 때, 슈기는 “셀리, 하나님이 나를 사랑한다면 내가 원하지 않는 것들을 모두 할 필요는 없어”라고 말하는 대사가 나옵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한다면, 내가 원하지 않는 것들은 할 필요가 없어.” 다니엘 L. 미글리오리는 슈기의 이 대답이 칭의론의 핵심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고 말합니다.(2) 칭의의 복음은 정말 하나님 앞에서 그러한 자유를 만끽할 수 있게 해줍니다.

▲ 영화 『칼라 퍼플』의 한 장면 ⓒGetty Image

그러나 이 사실은 신자에게 율법은 더 이상 불필요하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 아닙니다. 확연히 구별해야 하는 두 가지 문제가 있기 때 문입니다. 그것은 율법이 비록 더 이상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신자들을 고발하고 정죄하는 무서운 힘을 행사하지는 않을지라도, 신자들에게 선을 행하도록 끊임없이 가르치며 충고하며 권고하는 기능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제2권 제7장에서 개혁교회의 율법의 ‘제3용법’으로 확인한 바로 그것입니다(II.vii.12). 율법에 관하여 개혁파는 루터파와 두 가지 점에서 일치합니다. 하나는 율법의 정죄 기능이며, 다른 하나는 사회 속에서 죄를 억제하는 기능입니다. 칼빈 과 루터는 율법의 처음 두 가지 용법들에 대해서는 의견의 일치를 보 였습니다. 그러나 루터는 율법의 세 번째 용법을 가르치지 않았고, 그것은 칼빈과 개혁교회에 의해서 강조되었습니다.

미주

(미주 1) 전경연, 『루터신학의 개요』 (오산: 한신대학교 출판부, 2005), 33.
(미주 2) 다니엘 L. 미글리오리/이정배 옮김, 『조직신학입문』 (서울: 나단, 1994), 2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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