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말씀의 잔치 Junger Prediger
하나님 은혜의 물가에 깊이의지할 곳 있는 삶(예레미야 17:5-8)
이성훈 목사(명일한움교회) | 승인 2020.10.25 14:15
▲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 ⓒGetty Image
5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무릇 사람을 믿으며 육신으로 그의 힘을 삼고 마음이 여호와에게서 떠난 그 사람은 저주를 받을 것이라 6 그는 사막의 떨기나무 같아서 좋은 일이 오는 것을 보지 못하고 광야 간조한 곳, 건건한 땅, 사람이 살지 않는 땅에 살리라 7 그러나 무릇 여호와를 의지하며 여호와를 의뢰하는 그 사람은 복을 받을 것이라 8 그는 물 가에 심어진 나무가 그 뿌리를 강변에 뻗치고 더위가 올지라도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그 잎이 청청하며 가무는 해에도 걱정이 없고 결실이 그치지 아니함 같으리라

코로나 시대를 겪으면서 우리는 많은 어려움을 느끼고 있습니다. 자영업을 하시는 분들은 경제적인 이유로 어려움을 겪으실 것입니다. 경제 활동이라는 것은 서로가 맞물려 있어서 어딘가 한 곳이 무너지면 다른 곳에서도 어려움이 생기게 됩니다.

이런 경제적인 요인뿐만 아니라 코로나의 전염력으로 인해 사람들은 서로 거리를 둘 수밖에 없게 되었고, 대부분의 여가시간은 집 안에서 보낼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지금 우리가 사람 사이에 거리를 두는 이유는 단 한 가지입니다. 코로나에 전파되는 것을 막고, 전염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입니다.

최근 가끔씩 친한 사람들과 만날 때면 고민하는 점이 있습니다. 친한 누군가의 집에서 모임을 가질 때, 그 집안에서 마스크를 벗고 있어야 하는지 쓰고 있어야 하는지가 고민입니다. 친구를 차로 데려다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차 안에서 마스크를 벗어야 할지 써야 할지 고민스럽습니다. 개인적으로는 그 친구가 코로나에 걸렸을까봐 걱정이라기보다 혹시 제가 무증상 감염자이지는 않을까 고민합니다.

길거리를 걷다가 마스크를 쓰지 않고 다니는 사람들을 보면, 괜히 불쾌한 느낌을 받기도 합니다. 얼마 전 유머게시판에 이런 글이 올라왔습니다. 한 남성이 마트에서 계산하려고 줄을 섰는데, 어떤 아저씨께서 바로 뒤에 붙어서 줄을 서시더랍니다. 그래서 이 남성이 조금만 뒤로 가달라고 부탁을 하니까 그 아저씨께서 “내가 코로나야?” 하면서 화를 내시더랍니다. 그때 남성이 말했답니다. “제가 코로나일 수도 있죠.” 그러자 화를 내던 아저씨는 조용해지시더니 뒤로 두 걸음 떨어지시더랍니다.

코로나 시대는 사람이 서로를 믿을 수 없게 만드는 시대입니다. 또 자기 자신조차도 믿을 수 없게 만드는 시대입니다. 누가 코로나에 걸렸을지, 누가 나에게 코로나를 전염시킬지 알 수 없는 사회입니다.

게다가 지난 한 주간 지속적으로 언론에 나왔던, 독감 예방 접종 후 사망자가 발생하고 있다는 소식은 그것의 진실이 무엇이건 간에 예방주사조차도 마음 편히 맞지 못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지금은 사람들과 함께 하는 순간이나 무언가를 하는 순간마다 ‘혹시 이러다 죽는 것 아닐까?’ 하는 두려움을 갖고 살아가야 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이런 시대에 우리는 무엇을 믿을 것이며, 무엇을 의지할 수 있을지 예레미야의 말씀을 통해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원치 않은 속국, 어쩔 수 없는 선택

역사서와 예언서를 읽다보면 근본적으로 이해되지 않는 점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왕조의 역사를 살펴보면 대부분 거대 제국에 의해 침략당하고 속국이 됩니다. 남왕국 유다나 북왕국 이스라엘이 완전하게 독립국으로 있었던 기간은 그리 길지 않습니다. 이는 시리아-팔레스타인 지역의 나라들 대부분이 그렇습니다.

이집트가 자신들의 내부 문제를 해결하고 거대 제국이 될 때는 이집트의 지배를 받습니다. 아시리아라는 거대 제국이 발흥했을 때는 아시리아의 지배를 받습니다. 신흥 바벨론이라는 대제국이 생겨나면서 바벨론의 지배를 받다가 아예 멸망하기에 이릅니다. 페르시아 시대에는 포로에서 벗어나기는 했지만, 여전히 페르시아의 속국입니다. 로마 시대에는 로마의 속국입니다.

이스라엘의 왕은 항상 남쪽과 북쪽에 강대한 국가가 발생하지 않는지 신경 쓸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레미야가 활동했던 요시야부터 그달리야까지의 시기는 이런 문제가 더 복잡했던 때입니다.

북쪽의 아시리아가 무너지나 싶더니 남쪽의 이집트가 내부 문제를 해결하고 제국의 면모를 다시 갖추고 있었습니다. 요시야는 이 시기 이집트 파라오 ‘느고’에 의해서 죽고, ‘느고’는 ‘여호야김’을 왕으로 세웁니다. 이집트 속국이 된지 몇 년 되지 않아 바벨론이라는 강대국이 생겨나고 그들의 속국이 됩니다. 그런 바벨론은 이집트와 전쟁을 했다가 성과를 내지 못하고 본국에 돌아가 군사 재정비에만 3년 이상을 보냅니다.

이런 상황에서 이스라엘 왕인 ‘여호야김’이나 그의 아들인 ‘여호야긴’은 어떤 선택을 해야 했을까요? 군사력이 강한 나라가 쳐들어오면 무너질 수밖에 없는 나라의 왕으로서 당연히 강한 나라의 속국이 되길 택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 이스라엘의 왕들을 향해 예레미야는 오늘 선포합니다. “사람을 믿거나 육신을 힘으로 삼지 말라”고 말합니다. 이스라엘의 국제적 상황에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텐데도 그것을 비판합니다. 이스라엘의 멸망은 그들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외세에 의존했기 때문이라고 비판합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난 ‘사람’과 ‘육신’은 이중적 의미로 사용되었는데, 분명 ‘외부 강대국의 힘’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이는 종주국의 신을 믿는 우상숭배의 문제와도 연결되어 있고, 종주국에 바치는 조공과 왕가의 호사스러운 삶을 위해 백성들이 끊임없이 일해야 하는 문제, 안식일에도 쉬지 못하고 일해야 하는 문제와도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 왕이라고 속국이 좋아서 속국이 되는 길을 선택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저 자신들이 처한 상황에서 어쩔 수 없이 속국이 되는 길을 택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그 어쩔 수 없었다는 선택 자체를 비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만 의지하라

예레미야가 비판하고 있는 점은 이스라엘의 국력이 약해서 속국이 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아닙니다. 오늘 5절에 나타나 있듯이 ‘마음이 여호와에게서 떠났음’을 비판하고 있습니다.

예레미야는 바벨론에 포로가 되리라는 예언을 했습니다. 바벨론의 포로가 되는 길을 받아들이라고 예언합니다. 당시 어떤 이들은 예레미야가 ‘친-바벨론 세력’이라고 비판했을 것입니다. 나라를 바벨론에 팔아넘긴 매국노 취급당했을 것입니다. 이런 분위기는 예레미야 곳곳에서 발견됩니다.

하지만 당시 사람들, 특히 당시 왕들과 예레미야에게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당시 왕들이나 이집트의 세력을 등에 업고 있던 이들은 이집트가 자신들을 구원해주리라고 믿었습니다. 남왕국 유다 멸망 이후 다윗 왕족 혈통이었던 이스라엘은 느부갓네살이 세워놓은 왕 ‘그달리야’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부하를 거느리고 가서 살해합니다. 그달리야 살해 이후 이들은 바벨론이 두려워 이집트로 도피하는데, 이때 예레미야를 함께 이집트로 끌고 갑니다.

이들에게 있어서 이집트는 자신들의 힘의 원천이고 구원자입니다. 하지만 예레미야는 다릅니다. 예레미야에게 있어서 바벨론은 자신들의 구원도, 힘의 근원도 아닙니다. 그들은 그저 자신들의 잘못을 깨우치게 하기 위한 하나님의 도구였을 뿐입니다. 예레미야의 선포는 ‘바벨론에게 항복하라’는 매국적 선포가 아니라,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들이라’는 예언적 선포였습니다.

우리는 간혹 예레미야의 선포를 오해할 때가 있습니다. 하나는 앞에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하나님의 도구일 뿐인데, 그것 자체를 의존해버릴 때가 있습니다. 극보수 기독교 단체들이 성조기를 흔들며 미국을 의존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도구’를 ‘구원자’로 착각한 결과입니다. 기독교 단체라면 당연히 미국이 우리를 도와 우리가 잘 살게 되었다고 말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미국을 통해 우리를 잘 살게 하셨다고 말해야 합니다. 미국은 도움을 준 국가이기에 어려운 시절 지원해준 사실에 대한 감사와 함께 우호관계를 유지하면 그만일 뿐입니다. 그들이 우리의 구원자는 아닙니다.

또 한가지 오해하는 점이 ‘하나님만 의지하라’는 말로 인해 우리가 할 일이 오직 ‘의지하는 일’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결코 우리의 삶을 대신 살아주시지 않습니다. 삶을 살아가는 것은 우리 자신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일’은 하나님으로부터 힘을 얻고 희망을 얻고 평안을 얻으며 세상에서 열심히 살아가라는 것이지, 하나님께 만사 맡겨놓고 나는 놀면서 살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하나님만 열심히 믿으면 된다고, 삶에서 어떤 노력도 하지 않고 뒹굴거리며 산다면,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에게 어떤 좋은 것도 주시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 8절은 시편 1편의 말씀과 비슷해 보이지만 조금 차이가 있습니다. 예레미야는 우리의 삶에 ‘더위’에 의한 ‘두려움’과 ‘가무는 해’에 의한 ‘걱정’이 있음을 분명히 말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은 ‘더위’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가무는 해’를 걱정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뿌리가 하나님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만 의지하는 사람은 어떤 순간에도 흔들리지 않는 사람입니다. 지금같이 서로를 믿을 수 없고, 경제는 어지럽고, 집에만 갇혀 있기에 답답한 순간에도 흔들림 없이 평안을 유지하는 사람이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입니다. 혼란한 세상 속에서도 평안하게 살아가기에 세상에 하나님의 빛을 비추고 전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사람도 예방주사도 못 믿을 세상이 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본래 하나님만을 믿고 의지하며 살았기에 달라진 것은 전혀 없습니다. 우리는 언제 어떤 순간이라도 하나님 안에서 평안을 얻었기에 우리에게 달라진 것은 없습니다. 여러분의 뿌리가 하나님 은혜의 물가에 깊이 자리하고 있기를 바랍니다. 그 안에서 늘 평안을 얻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성훈 목사(명일한움교회)  joey8100@naver.com

<저작권자 © 에큐메니안,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성훈 목사(명일한움교회)의 다른기사 보기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여백
신문사소개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서울시 종로구 김상옥로 30, 402호  |  제호 : 에큐메니안
대표전화 : 070-4252-0176  |  팩스 : 0303-3442-0176  |  등록번호 : 서울 자 00392  |  등록일 : 2012.10.22
발행인 : 윤인중  |  편집인 : 이정훈  |  청소년보호책임자 : 윤인중  |  E-mail : webmaster@ecumenian.com
Copyright © 2020 에큐메니안. All rights reserved.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