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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험으로 사는 신앙의 인생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시 139:1-6; 롬 1:16-17; 요 8:31-36)
민기욱 목사(미국 트리니티 한인장로교회) | 승인 2020.10.26 15:51
▲ 신앙은 우리를 자유롭게 하지만 우리를 묶어놓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Getty Image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이 시간 우리와 함께 하시길 축원합니다. 날씨가 때론 덥기도 하지만 이젠 제법 쌀쌀한 가을인가 봅니다. 토요일 오후엔 아이들과 함께 잠깐 산책을 했습니다. 코로나 덕분에 마스크를 하나씩 하고 길을 떠날 채비를 했습니다. 집 주위를 혼자서 산책할 때가 있지만 아이들과 함께 하는 것은 오랜만이었습니다. 일주일 내내 온라인 수업을 하고, 수업이 끝나면 온라인으로 숙제를 하고, 숙제가 끝나면 또다시 컴퓨터나 태블릿으로 영상을 보거나 게임을 하는 게 아이들의 일상인지라 가급적 컴퓨터나 텔레비전 화면으로부터 멀어지게 하고 싶었습니다.

갑자기 제 머리에 스치는 게 아이들과 게임을 해야겠구나 싶었습니다. 컴퓨터로 하는 게임 말고, 제가 즉석에서 만들어낸 게임이었습니다. 길을 걷다가 여러 갈래가 나오면 서로 가위바위보 게임을 해서 이긴 사람 맘대로 길을 선택하는 겁니다. 하지만 오던 길을 돌아가지는 않는 게 게임의 룰이었습니다.

아이들에게 게임 이름을 지으라 주문하니까 “No Way Back”이었습니다. 게임이니까 걷는 게 즐겁습니다. 결국 1시간 넘게 가을 햇살을 맞으며 길을 걸었고, 누군가가 “Help Yourself”로 내어 놓은 제법 쓸 만한 그리고 제가 꼭 구하고 싶었던 아이템을 우연히 횡재하기까지 했습니다.

사실 저는 어릴적 도시 변두리에 살았습니다. 재정적으로 넉넉하지 못했던 아버지는 간신히 마련한 돈으로 집을 지으셨는데 덕분에 도시 변두리였고, 공동묘지 옆이었습니다. 옥상이 있는 집 다섯 채가 옹기종기 모여 있고, 그 집들을 공동묘지가 둘러 있는 누가 봐도 전설의 고향에서나 볼 수 있는 그런 곳이었습니다. 낮에도 으스스한데 밤이면 얼마나 무섭겠습니까?

이곳 미국이야 공동묘지가 옆에 있는 게 그리 큰 문제가 아니지만 한국은 정서상 전혀 다르지요. 집값 떨어진다고 공동묘지나 장례식장 등이 주택이나 아파트 옆에 들어설 수 없는 게 보통입니다. 그러나 저희 집은 공동묘지 옆이라 땅값이 상대적으로 저렴했을 것이고, 그래서 재정적으로 힘들었던 저희 가족이 이사할 수 있었을 겁니다. 단칸방에 세를 들어 살던 저희 가족이 방 3칸짜리 집을 지어 이사 갔으니 7살, 6살이던 저와 제 남동생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환호성에 난리가 났지요.

그러나, 그 기쁨이 오래가지는 않았습니다. 너무나 심심한 겁니다. 오후 잠깐 텔레비전 나오는 시간이 있을 뿐, 나머지는 그야말로 “심심” 그 자체였습니다. 덕분에 저는 책을 좋아하시던 아버지 때문에 집안 가득 있던 아버지의 책을 몽땅 읽고 또 읽었습니다. 너무나 심심했기 때문입니다.

심심한 시간을 극복하는 또 하나의 방법은 크지도 않은 동네 아이들 몇 명과 밖에 나가 노는 것인데 변변한 놀이가 없어서, 결국 놀이를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게임을 만들어 노는 것이지요. 그게 반복이 되니까 “game maker”가 되는 것이지요. 요즘 아이들이 영상을 즐기거나 유행하는 온라인 게임하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신세계인 겁니다. 조잡하기 그지없지만 지구 상에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창조적 게임인 것이지요. 제가 목사가 되지 않았다면 아마 이벤트 기획자나 레크리에이션 강사의 길로 가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루터의 종교개혁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을까

오늘 종교개혁주일은 독일의 마르틴 루터가 1517년 비텐베르크 대학 교회 정문에 신학 논제 95개 조항을 붙여 놓은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물론 로마 가톨릭 교회의 부패상과 신학적 문제점을 고발하고 지적한 것, 신앙의 자유를 따라 교황에게 저항했던 것이 큰 의미가 있겠지만 그 속살을 들여다보면 프로테스탄트 교회가 가톨릭 교회로부터 떨어져 나오고 혁명과 같은 큰 변혁을 처음부터 의도했던 게 아니었습니다.

비텐베르크 대학의 구약학 교수였던 루터가 망치를 들고 신학 논제 95개 조항을 쾅쾅 두드리며 교회 문에 붙여 놓는 장면은 영화의 한 장면처럼 극적인 순간이지만 이는 의도치 않은 역사의 수레바퀴일 뿐이라는 겁니다. 물론 아이들과 산책하며 게임을 만들어 순간순간 계획하지 않은 길을 걸어갔던, 처음부터 의도했던 길이 아닌 “가위바위보”의 확률에 의해 길을 선택했던 것과 단순 비교할 수는 없지만, 우리 개신교 교회들이 기념하고 기억하는 종교개혁이라는 것이 생각보다 그렇게 혁명적 선택이 아닐 수도 있다는 말씀입니다.

아시는 분도 계시겠지만 저는 미국에 처음 와서 8-9년을 미국 루터 교회에서 봉사했었습니다. 제가 현재 사는 곳에서 차를 타고 20여 분 가면 되는 가까운 거리에 있는 교회인데 이맘 때가 되면 종교개혁주일을 기념하며 “Octofest”라는 페스티발을 엽니다. 10월에 하는 페스티발이라는 뜻이지요. 제가 봉사했던 한인 루터 교회는 미국 교회의 자매 교회로 같은 공간에서 예배를 따로 드리지만 가끔 미국 신도들과 공동으로 예배도 같이 하고, 중요한 행사도 같이 했습니다.

더군다나 Octofest는 루터의 후예임을 자부하는 루터 교회로서 매우 중요한 이벤트지요. 아이들을 위해 종교개혁이 무엇인지 가르치기 위해 1500년대 독일의 비텐베르크를 흉내내며 교회 마당에 지푸라기로 장식하고, 말과 노새를 가져오기도 합니다. 각종 놀이 도구도 준비합니다. 축제에 음식이 빠질 수 없지요. 맛있는 음식과 맥주를 쌓아놓고 파티를 즐깁니다.

미국 목사님은 맥주 캔을 들고 한인 교회 식구들에게 특히 저에게 웃으면서 맥주를 권합니다. 처음에는 저도 이런 정서가 매우 당황스러웠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 그분들의 문화를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유럽에서 이민 와서 여러 세대가 지났지만 자신들의 뿌리가 유럽에 있음을 추억하는 것이지요. 축제를 통해 고향을 기억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지나고 보면 그분들에게 루터는 도대체 어떤 사람일까 궁금했습니다. 도대체 종교개혁이라는 역사의 큰 변환점이 어떤 의미로 다가올까요? 일 년에 한 번씩 돌아오는 종교개혁주일. 지난 2017년이 종교개혁 500주년이었는데 어떤 의미로 그분들에게 그리고 여러분에게 남아 있습니까?

복음의 내용은 모두 알고 있지만

유사 이래 오늘날처럼 예수님의 말씀이 널리 신속하게 선포되었던 시대가 없었을 것입니다. 교회마다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고, 인터넷이나 라디오, TV를 통해 유명한 목사님들의 설교가 실시간으로 방송됩니다. 마음만 먹으면 집에 앉아서 입맛에 맞는 설교를 골라서 들을 수도 있습니다.

코로나로 인해 요즘에는 더욱 온라인 설교가 차고 넘칩니다. 차분한 설교, 지적인 설교, 뜨거운 설교, 날카로운 설교, 감동적인 설교, 어떤 설교든 선택이 가능합니다. 성경공부와 제자훈련, 각종 모임과 세미나를 통해 성경에 대한 지식도 한층 깊어지고 전문화되어 갑니다. 쏟아져 나오는 기독교 전문 서적들로 인해서 조금만 관심 있으면 굳이 신학을 전공하지 않아도 신학자에 버금가는 신학적인 식견을 가질 수도 있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해외 선교의 붐으로 세계 방방곡곡 오지란 오지마다 선교사가 파송되어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는 인종이 없을 정도입니다. 기독교 문화의 확장과 교회의 증가로 인해서 심지어 믿지 않는 사람들조차 복음서의 한 대목 정도는 익숙하게 들어 알고 있을 정도입니다. 그야말로 복음이 대 유행인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참 반가운 일이고 고무적인 일 같아 보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복음이 유행인 시대를 살아간다고 누구나 느끼고 있지만 마음이 그리 밝지 않습니다. 코로나 시대를 맞아 예배당에 함께 모여 예배할 수 없어서 느끼는 아쉬움도 있겠지만 보다 근원적인 아쉬움과 안타까움이 있습니다. 2015년 설문조사에 따르면 크리스챤에 대한 신뢰도가 17퍼센트, 목회자에 대한 신뢰도가 12퍼센트였다 합니다. 코로나 이후 더욱 악화됐다고 하는데 그럼 2020년 현재의 신뢰도가 과연 얼마나 되겠습니까?

오늘 요한복음 8장을 읽다보니 귀에 익숙한 구절이 있습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그렇습니다. 진리의 말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이 우리 안에 거하면 참으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게 되는데, 그렇게 되면 우리가 자유롭게 된다 하는 말씀입니다. 매우 단순하고 짧은 이야기입니다. 교회를 다니는 사람치고 이 단순한 진리를 모르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문제는 복음이 온 지구를 감싸고, 온 민족들에게 이미 전달되었는데 복음의 열매가 빈약하기 그지없다는 데 있습니다. 복음을 복음으로 전하지 못하고, 복음을 복음으로 생각하지 못하는, 그래서 복음의 깊이에로 가지 못하는 우리의 현실. 누구든지 거듭나야 한다는 단순한 진리를 모르는 사람이 없는 복음의 대유행 시대에 그렇다면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예, 우리는 매우 잘 알고 있습니다. 그건 바로 누구든지 거듭나야 함을 아는 것으로 끝날 게 아니라, 바로 “내가 진정으로 거듭나야” 하는 것이지요. 복음의 능력은 복음의 내용 자체에 있는 게 아니라 진정으로 그 복음을 내가 살아낼 때 생겨나는 게 아닙니까? 복음의 내용이 무엇인지 많이 아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한 가지라도 내가 얼마나 진실하게 실천하며 사는 게 중요하다는 사실. 우리 모두 잘 압니다. 사실 우리는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충분하고도 넘칠 만큼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굳이 목사들로부터 들어야만 알 정도로 복잡하고 어려운 내용입니까?

우리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에 대해서 잘 압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용서에 대해서 잘 압니다. 우리가 서로 예수 그리스도를 대하듯이 남을 대하지 않으면 희망이 없음을 잘 압니다. 복음의 능력은 그러나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따라 살 때에 나타납니다. 우리가 주님의 말씀따라 진실된 삶을 살 때에 드러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우리가 듣고 배우고 깨닫게 된 복음을 우리의 삶 속에서 살아낼 수 있을까요?

예, 쉽지 않습니다. 열심히 애써 보지만 번번히 실패하곤 합니다. 주님의 말씀처럼 나에게 상처 준 사람을 용서하고 싶지만, 주님의 말씀처럼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고 싶지만, 주님의 말씀처럼 이기적인 사람이 아닌 이타적인 사람으로 살고 싶지만 번번히 실패하곤 합니다. 왜 그럴까요? 왜 그렇게 우리는 계속 끊임없이 실패할까요? 여러 원인이 있고, 여러 장애물이 있기 때문인데, 그 중 하나는 거짓 때문입니다. 거짓된 욕심 때문입니다.

우리 안에는 우리를 자꾸만 거짓으로 인도하려는 은밀한 그 무엇이 있습니다. 그 은밀함은 의외로 우리 삶 속에 만연해 있습니다. 누군가를 속이고, 거짓말을 일삼고, 누군가를 해악하는 거짓은 사실 별로 두려운 게 아닙니다. 누가 봐도 악한 것이기에 우리는 열에 아홉은 피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작은 거짓입니다. 사실 눈에 잘 보이지도 않는, 그래서 당장 큰 해악을 끼치지 않기에 은밀합니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삶에 만연해 있습니다. 잘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들이 저지르는 거짓은 많은 경우 다른 사람들을 의식할 때 생깁니다. 다른 사람들이 나를 본다고 생각하기에 스스로 뭔가를 자제하고 뭔가 창피할 일들을 피합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을 의식하지 않을 때, 다른 사람들이 절대 나를 볼 수 없다고 생각할 때, 혼자 있을 때에 거짓이, 우리의 죄악이 드러납니다.

처음에는 어느 정도 부끄러움으로 다가오는데 시나브로 나도 모르게 더 이상 부끄럽지 않습니다. 스스로 나 자신의 부족함을 발견하고 느끼는 감정이 부끄러움일텐데 그 부끄러움이 사라지고 맙니다. 우리의 양심은 사라지고 이제 부끄러운 짓을 하게 됩니다. 양심을 영어로 conscience라고 하지요.

신앙의 양심을 버린 것은 아닌지

Conscience가 뭘까요? Con은 together, science은 know, 즉, ‘함께 안다’라는 뜻입니다. 나 혼자만 아는 게 아니라 함께 아는 것이지요. 남과 함께 아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바로 절대자이신 하나님과 함께 아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하나님이 함께 아는 것을 양심이라고 서양 사람들은 생각한 것입니다. 신앙 양심이 있기에, 하나님께서 나의 생각과 나의 삶을 아시기에 내가 거짓으로 살아갈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부끄러운 줄 알아야 합니다.

이를 예수님께서는 정확하게 보셨습니다. 내 안에 하나님이 계시면, 내 안에 당신의 말씀이 함께 하시면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게 된다 하셨습니다. 진리를 알게 되면 그 진리가 우리를 자유케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어떻습니까? 우리는 예수를 믿는다 하면서도 예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예수를 따른다 하면서도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습니다.

신앙 생활을 한다 하면서도 우리의 안테나는 끊임없이 부를 쌓고 성공하길 바라며, 우리의 행복이 부와 명예와 성공을 통해서 주어진다고 믿고 있습니다. 경쟁을 통해 승리하여 다른 사람들이 누리지 못하는 권리를 나 혼자 누리는 게 인생의 목적이라 착각하며 삽니다. 이게 거짓이고, 잘못된 유혹임을 알면서도 그 틀에서 벗어나질 못합니다.

또한 경쟁에서 밀려나고,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당하면 인생에서 실패한 거 같고, 낙담하곤 합니다. 그러나, 과연 하나님이 기뻐하실까요? 우리는 끊임없이 자유를 원하지만 자유를 용납하게 하는 진리를 알려고 하지 않습니다. 내 안에 주님의 말씀을 담으려 하지 않습니다. 내 인생에 주님을 모시려 하지 않습니다. 주님의 말씀에 우리가 거하면 참으로 주님의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게 되며, 그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한다는 이 공식은 참으로 단순한데 그것을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습니다.

혹여나 그렇게 되면 내 인생이 망하게 될까봐 그러질 못합니다. 안타까울 뿐입니다. 우리만 그런 게 아닙니다. 오늘 복음서 말씀을 보니 예수를 믿었다고 하는 유대인들도 그랬습니다. 그들은 결국 그들을 자유케 한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용납하지 못하고 진리이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버렸습니다.

어제 아이들과 산책을 했다고 말씀드렸지요? 산책을 하며 게임을 했다고 말씀드렸지요? 산책의 시간이 나름 길어지니까 중학생인 큰 녀석이 걱정이 되었나 봅니다. 집에서 자꾸 멀어지고 집으로 과연 돌아갈 수 있을까 염려가 된 것입니다. 아빠랑 같이 있는데 아빠를 믿을 수 없는 거지요. 이러다가 길을 잃을지도 모른다 생각합니다. 하지만 결과는 어땠을까요? 가위바위보로 이긴 사람이 길을 선택해 가는 게임은 끝까지 잘 진행됐고, 안전하게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인생은 한 치 앞도 알 수 없습니다. 매순간마다 불안하고, 걱정이 앞섭니다. 하나님을 믿는다 하면서도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믿을 수 없습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주님의 말씀에 거하게 되면, 그 말씀의 권능으로 인하여 주님의 길을 따르는 제자가 되고, 진리이신 예수님을 알게 됩니다. 길과 진리와 생명이신 예수님을 알게 됩니다. 길이신 예수님을 따르시길 바랍니다.

그러나, 먼저 주님의 말씀에 거하십시오. 주님의 말씀에 귀를 여십시오. 주님의 말씀에 마음의 문을 여십시오. 생명이신 주님의 은총에 여러분의 모든 것을 맡기시는 귀한 한주간 되시길 간절히 축원합니다.

민기욱 목사(미국 트리니티 한인장로교회)  minics3@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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