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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사 6:1-8; 계 15:1-4; 요 8:12-20)창조절 아홉째주일(11월1일)
최병학 목사(남부산용호교회) | 승인 2020.10.30 17:06

1. 만물이 주께로 나오고, 주께로 돌아가는 신비

가을 하늘이 참으로 공활(空豁)합니다. 공활이라는 말은 ‘텅 비고 매우 넓다’라는 뜻입니다. 애국가 가사처럼 “가을 하늘 공활한데, 높고 구름 없이” 푸른 하늘이 우리의 마음을 쾌청하게 합니다. 아침저녁으로 바람은 쌀쌀하지만, 낮의 뜨거운 햇살과 함께 적당하게 우리의 몸에 긴장과 이완을 주며 기분을 상쾌하게 합니다. 창조절기를 보내고 있는 지금, 우리는 이렇게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창조 세계를 통해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깨닫고 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피조 세계의 아름다움으로, 또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당신을 나타내셨습니다.

지난주 세 본문 말씀을 통하여, 우리는 아들 뒤에 숨어계신 하나님을 살펴보았습니다. 인간과 하나님의 만남을 아들을 통하여, 곧 십자가 은총을 통하여 알 수 있다는 말씀을 루터의 종교개혁 전통에 근거하여 살펴보았습니다. 따라서 구약의 가장 위대한 신앙의 인물인 모세조차도 하나님을 볼 수 없어 등만 보았습니다. 서신서인 로마서에서 바울도 이러한 삼위일체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을 찬양하였습니다. 그것은 곧 만물이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나오고 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고 마침내 주께로 돌아가는(롬 11:36) 신비입니다.

오늘 세 본문 말씀은 좀 더 하나님께로 나아갑니다. 물론 아들 뒤에 숨어계신 하나님이시지만,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이사야를 불러 시대적 사명을 감당하게 하셨으며 또한 지금 우리들에게도 사명을 주시기 위해 친히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물론 그 사명을 거부하는 이들, 혹은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을 볼 수 없는 이들은 그 사명을 듣지 못합니다. 아니, 그들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끝까지 부정하는 것입니다. 그 결과 그들은 오늘 본문 요한계시록의 말씀과 같이 마지막 날 일곱 대접의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복음서 말씀부터 볼까요?

2. 나를 알았더라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라

오늘 말씀은 예수님께서 스스로가 ‘세상의 빛’이심을 선언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율법에 열심인 바리새인들은 믿지 않습니다. 말씀을 볼까요? “예수께서 또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요 8:12).” 세상에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따르면 어둠이 아니라, 생명의 빛을 얻을 것인데, 아들이신 예수님을 통해, 아버지이신 하나님을 알 수 없었던 바리새인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네가 너를 위하여 증언하니, 네 증언은 참되지 아니하도다(요 8:13).” 무슨 말씀인가요?

유대교의 율법에 따르면, 유대인들은 재판에서 어떤 사실을 확인 할 때, 당사자 외에도 두 세 사람 이상의 증언을 필요로 하였습니다(민 35:30; 신 17:6; 19:15). 물론 초대 교회도 이러한 유대교의 전통을 따라 어떤 사람을 교회 밖으로 추방해야할 경우, 최종적으로 두 세 사람의 증언을 들은 후, 죄에 대한 판결을 하였습니다(마 18:16; 고후 13:1; 딤전 5:19, 히 10:28). 따라서 바리새인들은 예수께서 스스로 “나는 생명의 빛이라!”고 하신 말씀에, 다른 증언자가 없으니, 그 말은 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바리새인들의 비판에 관해 예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결론이 되는 17절 말씀으로 바로 넘어가 보겠습니다. “너희 율법에도 두 사람의 증언이 참되다 기록되었으니, 내가 나를 위하여 증언하는 자가 되고, 나를 보내신 아버지도 나를 위하여 증언하시느니라(요 8:17-18).” 무슨 말씀인가요?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님 자신이 증언하시니, 예수님의 증언이 참되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이 결론을 위한 부연 설명이 14절 말씀부터 시작됩니다. 말씀을 볼까요?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나를 위하여 증언하여도 내 증언이 참되니, 나는 내가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 것을 알거니와, 너희는 내가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 것을 알지 못하느니라. 너희는 육체를 따라 판단(κρίσις)하나, 나는 아무도 판단하지 아니하노라. 만일 내가 판단하여도 내 판단이 참되니, 이는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계심이라.”(요 8:14-16)

3. 우리는 어디서 왔으며 누구이고 어디로 가는가?

이해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먼저 예수님께서 자기 스스로 자신을 증언하여도 참되시다고 말씀하시죠? 그리고 그 이유를 세 가지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첫째, 예수께서는 당신 스스로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를 아시기 때문에 그 증언이 참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도대체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는 것일까요? 아래 그림은 폴 고갱(Paul Gauguin, 1848-1903)의 <우리는 어디서 왔으며 누구이고 어디로 가는가?>(1897)입니다.

원시적인 아름다움을 찾아 타히티를 두 번째로 방문한 고갱은 각종 질병과 우울증, 그리고 개인적인 불행으로 참혹한 나날을 보내게 됩니다. 그리고 자신의 유언이 될 것이라고 예상한 이 작품을 그립니다. 여기서 고갱은 자신이 가지고 있던 예술적 주제의식과 색채 및 구상기법을 총동원합니다. 1898년 2월에 동료화가 몽프레(Monfreid)에게 쓴 편지 내용에서 고갱은 거의 4미터에 이르는(139×374.7cm) 이 거대한 작품의 의미에 관해 이렇게 말합니다.

▲ 고갱, <우리는 어디서 왔으며 누구이고 어디로 가는가?>(1897)

“위쪽에 노란색으로 칠해진 양 구석을 보면 왼쪽에는 경구가 있고 오른쪽에는 내 서명이 있는데, 그것은 가장자리가 상한 채 황금 벽 위에 칠해진 벽화와 같습니다. 자줏빛 옷을 입은 두 사람이 서로 이야기하고, 원근법과 관계없이 일부러 크게 그린 여자는 웅크리고 앉아 허공에 팔을 들어 올린 채 감히 자신들의 운명을 생각해보는 두 사람을 놀라워하며 바라보고 있지요. 가운데는 과일을 따는 여인이 있습니다. 아이 곁에는 두 마리 고양이가 있고요. 염소 한 마리. 신비롭고 속도감이 느껴지게 두 팔을 들어 올린 우상의 모습은 저 너머를 가리키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우상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여인. 그리고 자신의 예감과 전설의 끝을 체념한 채 받아들이고 있는 늙은 여인이 죽음 가까이에 있지요. 그 발치에는 도마뱀을 발로 누른 이상한 하얀 새가 헛된 말의 무용함을 보여주고 있고요. 모두 숲 아래 시냇가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멀리 바다와 이웃 섬의 산줄기들이 보입니다. 색조가 달라지기는 해도 풍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파랑과 초록이지요. 발가벗고 있는 사람들은 위에 보이는 대담한 오렌지색으로 인해 뚜렷하게 부각됩니다.”

고갱은 이 작품을 통해 자신이 생각하는 삶의 본질과 인간의 참모습을 형상화하려고 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삶과 죽음, 그리고 사랑과 믿음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 것을 아셨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예수께서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를 알지 못했습니다. 만물이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나오고 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고 마침내 예수께로 돌아가는(롬 11:36) 신비를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따라서 창조주이신 예수님의 신비를 깨닫고 우리의 인생 역시, 이 땅에 태어나 사명을 감당하고 다시 하늘 본향으로 돌아가는 것임을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4. 헌금함 앞에서 탐욕의 눈을 가지고

둘째, 예수께서는 아무도 판단하지 않으신다는 말씀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육체를 따라 판단합니다. 따라서 그들은 육으로 오신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받아들이지 않는 것입니다. “도대체 고귀한 창조주께서 어떻게 이렇게 추한 육체를 입을 수 있는가?”라는 생각입니다. 쉽게 말해, “재벌 회장이 어떻게 노숙자와 겸상 할 수 있겠는가?”라는 뜻이죠!

사실 여기 ‘판단(κρίσις)’으로 번역된 헬라어 ‘크리시스’는 원래 ‘하나님의 심판’을 의미합니다. 영어 단어 ‘위기(crisis)’가 이 단어에서 유래했습니다. 하나님의 판단은 심판이기에, 우리 인간들에게는 위기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인간을 심판하시고자 아들을 보내신 것이 아닙니다.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그들 모두를 사랑으로 품으시고 구원하시고자 함이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예수께서는 혼자 판단하시고 혼자 계시는 것이 아니라, 삼위일체 하나님으로, 자신을 보내신 하나님과 함께 계시기 때문에 자신의 증언이 참되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바리새인들이 묻습니다. “이에 그들이 묻되, 네 아버지가 어디 있느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너희는 나를 알지 못하고 내 아버지도 알지 못하는 도다. 나를 알았더라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라.”(요 8:19)

아들 뒤에 숨어계신 하나님, 아들을 통해 계시하는 하나님을 바리새인들은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십자가 은총이라는 ‘자비의 분노(ira misericordiae)’로 우리에게 나타나시는 하나님을 바리새인들은, 아들이신 예수님을 알지 못해서 아버지를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다른 말로, 자신이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인생, 남을 판단하고 심판하는 삶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지 않는다는 의미로도 읽힙니다. 우리는 얼마나 많이 다른 사람을, 육체를 따라 심판하는지요! 아무튼 마지막에 중요한 말씀이 나옵니다.

“이 말씀은 성전에서 가르치실 때에 헌금함 앞에서 하셨으나 잡는 사람이 없으니, 이는 그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음 이러라(요 8:20).” 왜 헌금함 앞에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을까요? 육체를 따라 판단하는 이들은 ‘영의 눈’이 아니라, 재물만을 바라보는 ‘탐욕의 눈’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헌금함이 아니라, 예수님을 바라보라는 의미는 아닐까요? 오늘 많은 목회자들이 교회의 크기, 교인 수, 헌금함 속에 있는 돈의 분량만 바라봅니다. 예수님께서 앞에 계셔도, 헌금함 옆에 계셔도 보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 코로나-19를 재 확산시킨 광화문 집회에서 헌금을 권유하는 모습

아무튼 예수께서 이렇게 헌금함 앞에서 말씀을 하셨으나, 바리새인들은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잡아 죽이려는 자들도 예수님을 잡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아직 예수님의 때가 이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곧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총으로 우리에게 나타나셨습니다. 헌금함 앞에서 탐욕의 눈을 가지고 예수님을 바라보지 않고, 세상의 정욕에 빠진 우리들을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나타나심은 심판이라는 것입니다. 진노입니다. 분노입니다. 그런데 지난주 말씀처럼 이러한 하나님의 분노는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형벌의 분노(ira severitas)’와 ‘자비의 분노’입니다. 2,000년 전에는 이 분노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총에서 하나가 되었으나, 이제 예수께서 다시 오실 때는, 아들이신 예수님을 믿지 않는 이들에게는 ‘형벌의 분노’로만 다가올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의 말씀이 바로 그 말씀입니다.

5. 마지막 대접 재앙과 환상의 찬양

사실 오늘 본문 말씀은 하나님의 진노를 담은 일곱 대접 재앙의 예고와 그 준비에 관한 말씀입니다. 배경을 볼까요? 먼저 요한계시록 11장에서 일곱째 천사가 나팔을 불며 일곱 대접 재앙이 시작됩니다(계 11:15). 그리고 이어지는 12-14장에서 ‘용과 여자(12장)’, ‘두 짐승(13장)’, 그리고 ‘어린 양과 그를 따르는 사람들(14장)’을 통해, 이 땅에 있는 교회가 고난을 당하는 이유에 대한 설명을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 결론으로 하나님께 속한 백성들과 세상에 속한 자들, 곧 이 땅에 거하는 자들의 상반된 마지막 운명에 관한 말씀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마지막 재앙인 일곱 대접 재앙입니다.

요한계시록의 핵심인 일곱 인과 일곱 나팔, 일곱 대접의 의미는 이렇습니다. 먼저 일곱 인은 구원을, 일곱 나팔은 전쟁을, 그리고 마지막 일곱 대접은 심판을 상징합니다. 하나님의 자녀에게 구원의 인을 치고, 나팔을 통해 하나님께서 사단의 세력과 영적인 전쟁을 선포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진노의 일곱 대접을 통해, 자신이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인생을, 남을 판단하고 심판하는 삶을, 그리고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지 않는 이들을 심판하신다는 것입니다.

아무튼 오늘 본문 말씀은 16장에서 구체적으로 소개될 일곱 대접 재앙에 대한 준비 과정과 서론에 해당됩니다. 일곱 대접 재앙이 시행될 것을 예고하고, 사단인 짐승의 핍박과 고난을 견디고 이긴 성도들이 모세와 어린 양의 노래를 부르며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을 찬양하는 환상이 소개되는 것입니다. 그 환상의 찬양을 들어볼까요?

“또 하늘에 크고 이상한 다른 이적을 보매, 일곱 천사가 일곱 재앙을 가졌으니, 곧 마지막 재앙이라. 하나님의 진노가 이것으로 마치리로다.”(계 15:1) 마지막 재앙으로 하나님의 진노가 끝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속한 백성들, 곧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이들에게는 영생의 문이 열립니다. 말씀을 볼까요?

“또 내가 보니, 불이 섞인 유리 바다 같은 것이 있고 짐승과 그의 우상과 그의 이름의 수를 이기고 벗어난 자들이 유리 바다 가에 서서 하나님의 거문고를 가지고 하나님의 종 모세의 노래, 어린 양의 노래를 불러 이르되,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시여, 하시는 일이 크고 놀라우시도다. 만국의 왕이시여! 주의 길이 의롭고 참 되시도다.”(계 15:2-3)

이러한 하나님의 심판 앞에, 구속받은 성도들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주여! 누가 주의 이름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영화롭게 하지 아니하오리이까? 오직 주만 거룩하시니이다. 주의 의로우신 일이 나타났으매, 만국이 와서 주께 경배하리이다(계 15:4).” 하나님의 분노, 곧 심판의 날이 가까웠습니다. 다시금 열심을 내고,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맞이할 준비를 해야 합니다.

지금 우리는 세계적으로 유일하게 K방역을 통해 코로나-19 이전의 일상을 점차 회복해가고 있습니다. 경제도 조금씩 나아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다시금 신앙의 열정도 회복해야 합니다. 위기의 때일수록 우리를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구약 이사야 말씀은 이렇게 위기의 때에, 이사야를 불러 사명을 주시는 말씀입니다.

6.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말씀을 볼까요? 본문 앞부분에 어떻게 되어 있나요?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사 6:1a)”라고 배경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해, 곧 이 때는 어떤 때인가요? 사실 웃시야 왕은 16세에 유대의 왕이 되어 52년간 나라를 다스렸습니다. ‘제 2의 솔로몬’이라고 불릴 정도로 유다 왕국을 다시 일으킨 왕이었습니다. 말씀을 찾아볼까요? 역대하 26장 4-5절 말씀입니다.

“웃시야가 그의 아버지 아마샤의 모든 행위대로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며 하나님의 묵시를 밝히 아는 스가랴가 사는 날에 하나님을 찾았고 그가 여호와를 찾을 동안에는 하나님이 형통하게 하셨더라.”(대하26:4-5)

물론 웃시야는 나라가 강성하여지자, 마음이 교만하여 악을 행하게 됩니다. 제사장만 할 수 있는 분향을 직접 하려다가 이마에 나병이 생긴 것입니다.(대하 26:16-19) 따라서 웃시야는 죽는 날까지 나병환자가 되어 별궁에 격리되어 살았고, 아들인 요담이 왕궁을 관리하며 백성을 다스리게 됩니다.(대하 26:21)

그러나 많은 유다 백성들은 웃시야가 치료되어 유다 나라가 다시 부흥되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웃시야 왕이 그만 별세하였습니다. 젊은 이사야에게 웃시야의 죽음은 꽤 큰 충격이었습니다. 비록 마지막 순간에 교만하여 실수를 했지만, 그나마 하나님의 말씀과 뜻대로 나라를 다시리던 왕이 죽게 되어 이제 유다 땅은 혼돈에 빠지게 될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이러한 위기의 때에 이사야가 소명을 받은 것입니다.

“내가 본즉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의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고, 스랍들이 모시고 섰는데 각기 여섯 날개가 있어 그 둘로는 자기의 얼굴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자기의 발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날며 서로 불러 이르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하더라. 이같이 화답하는 자의 소리로 말미암아 문지방의 터가 요동하며 성전에 연기가 충만한지라.”(사 6:1b-4)

본문 말씀을 자세히 보면, 소명의 단계는 ‘만남, 회개, 죄사함, 사명다짐’으로 이어집니다. 먼저 이사야가 성전에서 하나님을 만납니다. 위기의 때에 하나님을 만날 곳은 성전입니다. 비대면도 좋고, 온라인 예배도 좋지만, 본질적으로 신앙인들은 하나님의 전인 교회에서 사명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일찍이 종교개혁자 존 칼빈은 “교회는 신도의 어머니”라고 했습니다. 제 아무리 어렵고 힘들어도 교회만이 희망입니다. 아무튼 이사야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두 번째 단계인 회개를 하는 것입니다.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하였더라(사 6:5).” 그러나 이번에는 하나님께서 모세의 경우와 달리, 스랍 하나로 이사야를 정결하게 하십니다. 죄사함의 단계죠? “그 때에 그 스랍 중의 하나가 부젓가락으로 제단에서 집은 바, 핀 숯을 손에 가지고 내게로 날아와서 그것을 내 입술에 대며 이르되, 보라!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 하더라.”(사 6:6-7)

▲ 이사야의 소명 체험

이렇게 죄사함을 받은 이사야에게 하나님께서는 소명을 주십니다.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으니,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하시니(사 6:8a)” 이 물음은 비단 이사야에게만 주신 것이 아닙니다. 오늘 이 말씀을 들은 우리들에게도 주신 것입니다.

지금 우리 사회는 ‘선별적 정의’, ‘지연된 정의’가 ‘정의의 적’들과 한 패가 되어, 우리 사회를 좀먹고 있습니다. 또한 개신교회들도 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협성대학교 신학과의 이충범 교수는 가톨릭을 삼성에, 개신교를 동네 마트로 비교한 적이 있습니다. 거대한 대기업 삼성과 같이 가톨릭은 대기업이라는 것입니다. 위계질서가 잘 되어 있고 전체가 하나로서 몸통이 큽니다. 그러나 개신교회는 동네 마트처럼 다양합니다. 각자의 색깔이 다르고 아기자기하다는 뜻입니다. 하나의 모습이 아니라, 다양한 실험적 형태로 이루어진 것이 바로 개신교회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런 개신교회가 가톨릭을 닮으려고 합니다. 곧 삼성처럼 되려고 합니다. 비극적인 것은 삼성이 아니라, 짝퉁 삼성, 곧 ‘삼멩’, ‘삼숑’, ‘삼승’, ‘삼싱’이 되어 간다는 것입니다.

▲ 삼성로고와 짝퉁 삼멩

개신교는 말 그대로, 이러한 재벌 대기업 같은 중세 가톨릭에 저항하며(Protestatio) 생겼기에 ‘프로테스탄트(Protestant, 항의자)’라고 불렸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다시 육체를 따라 탐욕의 눈으로 ‘헌금함’ 앞에서 벗어날 줄 모릅니다. 자신의 인생이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야하는지를 모릅니다. 그저 남을 판단하고 심판하는 삶을 매일 반복적으로 행하고 있으며 예수님께서 옆에 계시나 알아보지 못합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지 않습니다. 이충범 교수는 또 이렇게 말합니다.

▲ 기독교 종파

“마음의 안정, 평안함을 원하면 가톨릭으로 돌아가라. 그러나 개신교인으로 남으려면 끊임없이 탈주하고, 새롭게 구조화하고 새롭게 나아가라! 사회적 통념과 도덕성을 넘어서라. 붕어빵 기계를 바꾸면 붕어빵 모양 바뀌듯이, 언제든지 새로운 규범을 창출하는 것이 개신교의 모습이다.”

그렇습니다. 중세 교회의 부패를 저항하며 새로운 기치를 들었던 개신교회가 이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다시금 새로워져야 합니다. 따라서 이사야가 하나님의 소명을 받아들이며 외쳤던 고백이 바로, 지금 저와 여러분들의 고백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 때에 내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사 6:8b)

최병학 목사(남부산용호교회)  hak-9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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