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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체화된 시대, 복음의 공공성『행동하는 기독교』 (미로슬라브 볼프·라이언 매커널리린츠/김명희 옮김 [IVP])
최병학 목사(남부산용호교회) | 승인 2020.11.03 17:06

1. 밀레니엄 대학생들의 등장과 2018년 세 신학자의 한국 방문

2019년에 서기 2000년에 태어난 학생들이 대학에 입학했다. 따라서 대학은 작년부터 21세기가 시작된 것이다. 지금 대학 1,2년 학생들을 성공회대 사회학과 조효제 교수는 ‘밀레니엄 대학생’이라고 부른다. 이들은 상충되는 두 흐름의 한복판에서 사회화를 거쳤다. 하나는 이명박, 박근혜 시대의 특징이었던 경쟁과 실적주의에 근거한 가치관의 내면화이다. 모든 측면에서 ‘실력’과 ‘성적’ 순서로 보상이 주어지느냐를 면도칼처럼 따지는 것이 정당성의 기준이 되었던 시대였다.

그러한 맥락에서 ‘조국 사태’는 그들에게 검찰 개혁 이전에 공정의 문제였던 것이다. 또한 코로나-19 사태를 맞이하여 각자 도생의 시대, 곧 개체화의 극한을 달리게 되었다. 따라서 밀레니엄 세대들에게는 사회 전체에서 공정함이 제대로 발현될 수 있는 맥락이 소거된 채, 미시적이고 형식적인 공정성이 이데올로기 수준에서 맹위를 떨치게 되었다.

잊고 있었지만, 사실 밀레니엄 시대는 ‘이명박근혜 시대’의 세례를 받은 세대이다. 그것은 곧, ‘경쟁’과 ‘실적위주(성적)’의 가치관이다. 전체의 공정함보다 (자신에게 해당되는) 작은 공정성에 물들었다. 그런데 이들의 특성은 또 다른데 있다. 이들이 세월호(2014년)와 탄핵(2017년)을 거치면서 사회와 정치의 토대가 붕괴되는 것을 목격하고 체험했다는 사실이다. 이 사건들은 가치관 형성기의 청소년들에게 집단적·감정적 트라우마와 함께 권위에 대한 냉소를 자아내게 하였다. “알았어요. 꼰대씨! 이제 그만 사라지세요(Ok, Boomer! Boomer remover)”였던 것이다. 이처럼 밀레니엄 세대는 정치적 분노와 열광을 동시에 경험한 것이다. 세월호를 통해 정치가 소용없다는 것을, 동시에 탄핵을 통해 소용없는 정치가 무너지는 것을 역설적으로 보았던 세대가 바로 밀레니엄 세대라는 것이다.

사실 이 두 흐름은 모순적 형태로 나타난다. 가령 불공정에 극도로 민감한 태도로 인해 정유라 입시부정으로 촉발된 사건을 촛불혁명으로까지 상승시킨 세대가, 다른 측면에서는 우리 사회 시스템을 공짜로 악용하는 것처럼 보이는 난민 신청자들을 거부하는 세대라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 시대의 과제는 ‘형식적 공정’에 대한 집착을 ‘실질적 공정’에 대한 관심으로 확장하고, 선별적 정의가 아니라, 보편적 정의로, 개별 ‘원자적인 반차별 감수성’을 ‘인도적 성격의 반차별 의식’으로 이끌어야 할 것이다. 기독교적으로 말하자면, 개체화된 시대에 복음의 공공성이 필요한 것이다.

이러한 공공성의 요청같이 2018년은 신학의 공공성을 부르짖었던 신학자들이 한국을 방문한 한 해였다. 아시겠지만 몰트만 교수(2018년 9월)의 ‘희망의 신학’과 존 캅 교수(10월)의 ‘생태신학’은 정치와 생태문제에 있어서 공적 신학의 회복을 그 근거로 하고 있다. 따라서 “어떻게 공적 신앙을 회복할 것인가?”를 묻는, 배제를 넘어 포용을 주장하는 신학자 미로슬라브 볼프(M. Volf)의 선도적 방문(2018년 5월)과 그의 사상은 앞선 이 두 거장 신학자들의 길을 연 세례 요한의 음성이자, 밀레니엄 대학생들에게 주는 올바른 가치관이며 신학이 시대의 물음에 응답하여 영원한 진리를 어떻게 선포해야 할지를 잘 보여주는 하나의 카이로스적인 사건이었다고 볼 수 있다.

2. 배제와 포용의 신학자, 볼프

2020년도 마찬가지이지만, 지난 2018년은 한반도에 있어서 놀라운 한 해였다. 바로 제주도의 예멘 난민이었다. 이들이 한반도를 의미 있게 달구었던 것 중 하나는 혐오와 가짜뉴스의 등장 때문이다. 따라서 세계화의 그늘과 전쟁, 그 뒤편에 있는 난민의 문제를 통해 우리는 새로운 시대의 화두인 ‘환대’와 ‘포용’(그 반대 지점에 혐오와 배제가 있다)에 관해, 시대를 앞서 정리한 볼프의 성과를 기억해야 할 것이다.

볼프는 『배제와 포용』(2012)에서 환대(hospitality)와 포용(embrace)의 이미지 메타포로 포옹(hug)을 주장하며 포옹의 네 가지 단계인 ‘팔 벌리기-기다리기-팔 모으기-다시 팔 벌리기’를 통해 사상적으로는 타자의 문제에 환대와 포용의 윤리를 제시하며, 동시에 윤리적 실천의 문제로 포옹을 통한 환대와 포용의 윤리의 구체적인 방법을 제공했다.(1) 그리고 여기에 소개하는『행동하는 기독교: 어떻게 공적신앙을 실천할 것인가』에서 볼프(와 라이언 매커널리린츠)는 기독교 신앙은 개인 구원에 그치지 않고 온 세상 사람들의 삶과 역사 발전에 공공연히 영향을 끼치는 공적 세계관이라는 것을 주장한다. 그리고 여기서 공공신학이 등장한다.

3. 복음의 공공성

공공신학은 최근에 등장한 개념이다. 기독교 세계관, 칼빈주의 문화관, 칼빈주의적 세계관, 기독교인의 사회참여, 해방신학 등의 이름으로 논의되어 오던 것들을 묶어 공공신학이라고 한다. 공공신학은 하나님을 회중들과 신자의 마음만을 다스리시는 분만이 아니라, 인류 전체의 삶을 주관하는 천지의 대 주재로 부각시킨다. 정치, 사회, 경제, 문화에 대한 거대 담론을 논하며 세상에 대한 기독교인의 참여를 강조한다. 더불어 ‘신앙의 개인화’와 개인주의에 반대하면서, 세상의 적극적 변혁활동을 강조한다. 따라서 성도들의 삶이 ‘교회 내적 윤리’로 환원되는 것을 반대하며 사회참여의 당위성을 넘어 그 방법의 정당성을 진지하게 고민한다.

사실 “나는 스스로 있는 자”(출 3:14)로 그 어떤 개념으로도 한정되지 않았던 하나님이 스스로 자신을 한정한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네 하나님 여호와”(출 20:2)로 자신을 규정한다. 왜냐하면 가장 곤고하고 약한 이를 지킬 때 그 가치가 보편적이며 공적인 가치가 되는 것이다. 따라서 구약성경은 끊임없이 ‘고아, 과부, 나그네, 가난한 자’를 언급하고 있다. 하나님의 이러한 인류(와 피조물들)에 대한 당파성(편파성)이 오히려 보편성을 드러내는 한 방편이 되는 것이다.

신약성서도 마찬가지이다. 예수는 출생부터 정치적 소용돌이에 말려 있었다. 당시 헤롯이 지니고 누리고 행사했던 권력을 부정하고 바꿀 다른 왕이 등장했다는 소식에 온 예루살렘과 함께 소동했다. 마침내 예수는 십자가에 처형당하나, 그의 주검에 붙여진 푯말은 “유대인의 왕(마 27:11, 29)”이었다. 그러나 “가이사 외에는 우리에게 왕이 없나이다(요19:15).”라고 외치며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 외쳤던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종교가 세상 왕과 상관없다고 외쳤던 것이다. 이처럼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종교는 자신들 공동체의 내부적이고 내면적 생활을 규정하는 규율로만 여기고 현실 정치와 권력 체계와 상관없이 신앙의 내면화로 관여했던 것이다. 그러나 몰트만 교수도 “하늘나라만 이야기하고 이 세상 이야기에 대해서 소홀히 하는 자는 종교사기꾼”이라 언급했듯이, 유대인들은 예수를 몰라도 너무나 몰랐다.

아무튼 볼프는 삶의 질을 결정하는 공적 의사 결정과 정책 집행을 위해 그리스도인들은 기독교 신앙에 맞게 의사 표시를 하고 특히 어떤 정책에 지지하고 반대할 것인가를 분석적으로 배워야 한다고 주장한다. 특별히 소개하는 이 책 『행동하는 기독교』에서, 볼프는 17개의 공적 어젠다를 설정하고 각 영역의 담론 형성과 실천을 위해 활동하는 그리스도인들이 견지해야 할 신념을 예시하고, 또한 그리스도인들이 공적 삶에서 체현해야 할 5가지 품성(용기, 겸손, 정의, 존중, 긍휼)을 숙고한다.

이 책의 장점은 개인 구원과 교회 중심의 신앙생활에 매몰된 그리스도인들에게 사회라는 또 다른 지평을 보여준다. 광장으로부터 도피해 태극기 뒤에 숨어 개인 구원과 개인 윤리의 밀실로 잠적해 버린 게토화된 한국 교회를 공적 토론과 정책 결정이 이루어지는 아레오바고 언덕으로 이끄는 신비의 치료제라고 볼 수 있다.

지금, 주변을 둘러보라. 일본 만화 <진격의 거인> 속 거인들이 침공하고 있는데, 교회는 자꾸 안으로 도망만 간다. 젊은이들은 벽 밖과 안에서 “헬 조선”이라 말하며 분노하고 있는데, 교회는 바벨탑과 같은 건물 안에 교인들을 가두어 두고 예수 믿고 헌금하면 구원받고 천국에 들어가고, 모든 것이 다 잘된다는 만사형통의 성공과 승리의 번영신학을 외치고 있다. 이러한 천민자본주의에 물들어, 썩어가고 있는 자본주의와 함께 또한 코로나 바이러스와 함께 무너져가고 있다. 이 모든 원인은 교회가 지금까지 복음의 사적 관심에만 집중한 나머지 교회의 공적관심에 대해서는 무관심했기 때문이다.

아무튼 볼프의 주장은 기독교 신앙이 개인 구원에 그치지 않고 온 세상 사람들의 삶과 역사 발전에 공공연히 영향을 끼치는 공적 세계관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원저의 부제가 “어떻게 사려 깊게 생각하고, 지혜롭게 참여하고, 총체적으로 투표할 것인가(How to think Carefully, Engage Wisely, and Vote with Integrity)”이다.

4. 결혼과 가정

볼프의 17개 어젠다 가운데 결혼과 가정 부분을 살펴보도록 하자. 볼프는 이렇게 단원을 요약한다. “복음을 위해서는 독신이 더 가치 있게 여겨지긴 하지만, 결혼과 가정은 사회의 공익에 중요한 기여를 한다. 결혼과 가정은 언약에 대한 영속적 헌신으로 세워지며, 자녀를 키우는 데 꼭 필요하다. 국가는 자녀를 키우는 결혼 관계를 지원해야 하고, 이성 간 결혼과 동성 간 결혼을 법적으로 동등하게 대우해야 한다(행동하는 기독교, 131).” 성급하게 결론만으로 볼프를 오해하지 말자.

사실 볼프는 오늘날 여러 나라에서 논쟁이 되고 있는 동성 간 결혼의 문제에 관하여 혼돈되는 세 가지 다른 이슈를 구분한다. 첫째, 교회적 문제로, ‘교회가 동성 간의 결혼을 축복해야 하느냐?’ 그렇다면 어떤 결합의 경우에 그렇게 하느냐와 그것이 결혼의 축복과 어떤 관계에 있느냐. 둘째, 법적 문제로, ‘동성끼리의 지속적 언약 관계가 이성끼리의 언약 관계와 법적으로 동등하게 대우받아야 하느냐?’ 셋째, 도덕적 문제로, 앞의 두 문제도 아닌 것으로 ‘어떤 성과의 관계가 정당한가?’ 등이다(성서는 당연히 동성 간 성관계에 부정적이다. 그러나 볼프는 도덕적 문제가 아닌 교회적, 법적 문제를 통해 공적 신앙을 논의하려는 것이다). 여기서 논의해 볼 수 있는 것은 교회적 문제와 법적문제이다. 따라서 이 두 가지 변수를 가로세로 행렬을 만들어, 논리적으로 가능한 네 개의 입장을 제시하면 아래와 같다(135-136). 우리 사회는 ‘D’의 입장에서 ‘B’로 이제야 한걸음 내디뎠다.

▲ 동성 간 결합에 관한 교회와 국가의 입장

이러한 논리적 근거 하에 볼프는 ‘그리스도의 몸이 찢길 가능성을 최소화하여’ 자신의 판단을 이렇게 정리한다. “그리스도인들은 동성 간 결합에 대해서도 이성 간 결합과 동등한 법적 보호를 제공하고 동일한 법적 규정이 적용되도록 옹호해야 한다.”(136)

물론 볼프 스스로도 이러한 주장이 대부분의 기독교 역사에서 기본적으로 합의된 기독교 전통의 입장과 반대편에 있음을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주장하는 이유는 이렇다. “결혼이 중요한 두 가지 이유-자녀 양육을 위한 안정된 가정을 세우고 깊은 언약적 헌신의 관계를 갖게 해주는-는 동성 간의 결합에도 해당된다. 따라서 정부는 이성 간의 연합과 동일하게 동성 간의 언약적 결합도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그 결합의 장애물을 제거한 충분한 이유가 있다. 타당한 이유 없이 그들을 동등하게 지지하지 않는 것은 부당할 것이다.”(137)

물론 동성 간 섹스를 본질적으로 옳지 않다고 여길 때조차도 그리스도인들은 동성 간 결합과 이성 간 결합의 법적 평등을 지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볼프는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모든 그리스도인은, 동성 간의 결혼에 포함된 섹스를 본질적으로 옳지 않게 여긴다 하더라도, 동성 간 결합에도 법적으로 지지할 만한 진정한 유익이 있다고 단언할 수 있다. 이러한 의식 구조가 형성되면, 동성 간 섹스에 대해 도덕적으로 전통적인 평가를 하는 그리스도인들도 결혼과 가정에서 얻는 유익을 지지하며, 동성 간 결합의 법적 동등성을 신실한 공적 제자도의 일부로 옹호할 수 있다.”(137-138)

번역자 김회권은 『행동하는 기독교』를 해설하며 이렇게 정리해 주고 있다. 

“결혼과 가정은 자녀를 키우는 데 꼭 필요한 기관으로 사회 공익에 중요한 기여를 한다는 전제에 근거해, 국가는 자녀를 키우는 결혼 관계를 지원해야 하고, 이성 간 결혼과 동성 간 결혼에 법적으로 동등한 대우를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볼프는 동성애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법적 지지는 다원적 사회에서의 공익을 추구하는 차원에서의 결정일 뿐, 그리스도를 따르는 이들이 공유하는 도덕의 천명은 아님을 분명히 한다. 다만 동성애에 대한지지 또는 반대 문제로 그리스도의 몸을 찢지는 말기를 교회에 호소한다(356).”

최근 한국사회에 난민과 더불어, 성소수자(LGBTQ)가 정치적 어젠다로 등극하여, 성서의 해석을 요청하는 이때 볼프의 해결책은 국가와 교회의 해결에 있어서 차이가 남을, 또한 차별금지법에 대한 단순한 찬반을 넘어, 좀 더 깊이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볼프도 말했지만, 차별금지법에 대한지지, 혹은 반대 문제로 그리스도의 몸을 찢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더욱이 유교 문화권에 속해 있는 동아시아는 서양과 다른 문화적 토양으로 인해 좀 더 다양한 논의가 필요할 것이다.

미주

(미주 1) 최병학, 「환대와 포용의 윤리, 그리고 포옹」, 『윤리교육연구』49집, 한국윤리교육학회, 2018 참조.

최병학 목사(남부산용호교회)  hak-9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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